235화 살수대첩 (6)
수의 별동대 삼십만은 각기 백 일치의 식량을 배급받았다.
또한 갑옷과 무기, 의자와 침구, 불을 지필 장작과 조리 기구 및 심지어 막사를 세울 자재까지 지급받아 전장에서 스스로 모든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황제 양광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로, 보급을 받지 못할 별동대가 곤경에 처하지 않도록 한 배려였다.
그러나 그 배려가 너무도 지나쳐 각자에게 배당된 짐의 크기에 군사들은 모두 기가 질려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걸 짊어지고 행군을 하라고?”
“버릴까?”
“그러게, 직공하여 평양성만 점령하면 끝이라던데… 굳이 이걸 모두 짊어지고 갈 필요가 있나. 버리세.”
이렇듯 군사들이 행군도 하기 전에 짐을 버릴 궁리부터 하니, 눈치 빠른 우중문이 장수들에게 명하였다.
“짐이 버려져 있으면, 그 주위 열두 명의 목을 베도록 하라.”
누가 짐을 버렸는지 찾기 어려울 뿐더러, 애써 찾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공동 책임을 물어 참수히니, 군사들은 감히 짐을 길에 버리지 못하였다.
다만, 꾀가 있는 자는 밤이 깊으면 몰래 땅을 파고 짐의 일부를 묻어 무게를 줄였다.
한편, 본진에서 출병하여 압록수로 향하던 우중문에게 황제 양광의 서신이 당도하니, 우중문이 엎드려 예를 올린 후 서신을 공손히 받았다.
[혹여, 고구려 왕과 문덕이 찾아오거든, 반드시 잡아두어 돌아가지 못하게 하라. 만일 여의치 않다면, 즉시 목을 베라.]
황제가 보낸 서신을 읽은 우중문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문덕이라…….”
황제 양광은 지난겨울 전쟁의 모든 전술이 을지문덕에게서 나왔다고 여기고 있었기에, 을지문덕을 죽임은 곧 이 전쟁의 승리를 의미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우중문은 고구려의 태왕이나 을지문덕이 자신들의 진중으로 찾아오리라 생각되지 않았다.
“문덕이라면… 고구려의 재상 을지문덕일 터인데… 그자가 어찌 온단 말인가? 허나, 폐하의 명이니, 따를 수밖에… 온다면 반드시 잡아두거나 목을 베리라.”
마음을 굳힌 우중문은 즉시 압록수로 행군을 명하는 한편, 혹여 고구려의 급습을 우려하여, 늙은 말과 나귀들로 후미를 꾸렸다.
늙은 말과 나귀의 울음소리와 발굽 소리가 울려, 꽤 규모가 있어 보였다.
“실상 늙은 말과 나귀 뿐이나, 그 소리만큼은 본진처럼 여겨지는구나. 하하하.”
꽤 마음에 든 듯 우중문이 껄껄 웃었다.
아니나 다를까?
밤이 깊자, 오골성(烏骨城)을 지키던 대모달 흑비걸이 어둠을 틈타 기병 오천을 이끌고 나왔다.
“말의 울음이 크구나. 저기에 우중문이 있으리라.”
우중문이 낙랑도(樂浪道)군을 맡아 수차례 오골성을 공격했었기에, 흑비걸은 우중문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우중문 네가 감히 오골성을 공격하였겠다. 오늘 내가 너를 사로잡아 헛된 망상을 품고 요동에 들어오면 어찌 되는지 황제에게 보여주겠노라.”
승리를 확신하며, 대모달 흑비걸이 창을 높이 치켜 들었다.
이에, 고구려 기병 오천 기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내달리니, 우중문의 진영 속 늙은 말과 나귀들이 놀라 더욱 크게 울었다.
“빠르게 급습하고 우중문의 군막을 찾아라!”
필경 우중문의 막사가 이곳에 있으리라 여긴 흑비걸이 가장 앞서 달려 진중으로 들어섰으나, 보이는 것은 온통 늙은 말과 나귀들뿐이었다.
“아뿔싸! 속았구나! 군을 물려라! 퇴각하라!”
흑비걸이 놀라 외쳤으니, 이미 때는 늦었다.
멀리서 횃불이 밝혀지더니, 수의 보군들이 함성을 지르며 내달려오고 어두운 밤하늘 위로 불화살이 유성처럼 궤적을 그렸다.
늙은 말과 나귀들이 놀라 울며 날뛰고, 우중문의 반격에 당황한 고구려 기병 오천 기가 전의를 상실하였다.
“문을 닫아 걸고 나오지 않더니, 어찌 이 야심한 밤에 나오신게요? 하하하.”
우중문이 흑비걸을 비웃으며 조롱하니, 흑비걸이 이를 갈며 명하였다.
“죽기를 각오하고 길을 뚫어라! 반드시 살아서 오골성으로 귀환하거라!”
날아드는 화살에 어깨가 꿰뚫렸으나, 흑비걸은 성난 범처럼 창을 휘두르며 앞장서 길을 뚫었다.
“한 명이라도 더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 포기하지 마라!”
악착같이 달려드는 수나라 군사들을 창으로 찌르고 후려치며 길을 뚫은 흑비걸이 다시 말을 몰아 후미를 지키며 퇴각을 도왔다.
이에, 어둠을 뚫고 날아든 화살이 흑비걸의 허벅지와 배에 박혔으나, 비명도 지르지 않고 수나라 군사들을 찌르고 후려치며 자신의 군사가 모두 도주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우중문이 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과연 용맹한 장수로다. 저런 장수가 오골성을 지키고 있었으니, 내가 쉽게 함락시키지 못한 게지.”
흑비걸을 칭찬하면서도 향후 적이 되어 다시 만날 것을 우려해 크게 명하였다.
“화살을 아끼지 말고 날려 죽여라!”
이에 궁수들이 앞으로 나와 일제히 흑비걸을 겨냥해 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흑비걸도 그리 만만한 장수는 아니었다.
앞에서 달려들던 수나라 군사의 목을 쥐어 번쩍 들어 올리고는 인간 방패 삼아 화살을 모두 막아내었다.
“우 장군이 오골성을 지난다기에 인사 나왔으나, 이다지도 박대하니 이만 돌아가리다! 우 장군 부디 우리 꼭 다시 봅시다!”
흑비걸이 용맹히 외치고 말을 돌려 날듯이 도주하니, 우중문이 뒤쫓으려는 군사들을 제지하였다.
“우리가 적을 속였듯이 적도 우리를 속일 수 있다. 쫓지 마라. 유인책일 수도 있다.”
이처럼 우중문은 신중한 인물로 대승을 쫓지 않고 필패를 피하는 인물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별동대의 첫 승을 보고 받은 황제 양광이 기뻐 크게 웃었다.
“하하하! 과연 우중문이로다. 별동대의 첫 승이자, 우리가 요동에 들어선 이래 첫 승이로다. 역시 우중문은 신중하고 지혜로운 장수로 결코 실수가 없으니, 믿고 의지할 만한 장수로다.”
이처럼 황제 양광이 우중문을 극찬하니, 이 소식은 곧 우문술을 포함한 별동대의 모든 장수들에게 전해졌다.
‘신중하여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장수, 우중문.’
우문술과 우중문을 포함한 별동대의 아홉 장수들은 황제 양광의 이 극찬을 머릿속에 각인하여, 이때부터 우중문의 뜻을 함부로 꺾기 어려워했다.
* * *
압록수의 강폭은 넓었고, 물이 불어나 쉽게 건너기 어려웠다.
압록수 앞에 당도한 수의 삼십만 별동대는 진을 펼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부교를 건설하여 건너야 합니다.”
설세웅이 의견을 내었으나, 우중문이 고개를 저었다.
“언제 부교를 건설한단 말이오. 아니 될 소리.”
이에 우문술이 우중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허면 장군은 저 깊은 압록수를 건널 방책이라도 있소?”
“강폭이 좁은 곳은 물살이 급해 물속도 깊을 것이나, 강폭이 넓은 곳은 오히려 물살이 급하지 않아 물길도 낮을 것이외다. 하여, 군사들에게 걸어 건널 수 있는 곳을 찾게 한 후 도하하면 됩니다.”
이에 설세웅이 손을 내저으며 반대하였다.
“아니 되오! 어찌 무거운 짐을 지고 강을 건넌단 말이오. 조금 늦더라도 부교를 건설해야 하오.”
“이보시오 설 장군. 우리가 부교를 건설하는 동안 고구려 군이 급습하거나, 부교를 통해 도하하는 동안 화공을 펼치면 어찌하오? 차라리 적이 강 건너에 보이지 않는 지금 도하를 해야 하오. 속히 물길을 찾아 도하할 곳을 찾도록 합시다.”
우중문도 주장을 굽히지 않으니, 설세웅과 한참 설전이 오갔다.
좌장군 우문술은 이번 출정에서 우중문이 황제의 신임을 얻었기에, 은연중 눈치를 보았다.
“설 장군, 우장군의 말이 일리가 있으니, 우리 일치단결하여 따르도록 합시다.”
좌장군 우문술이 우장군 우중문을 두둔하니, 설세웅도 더는 주장을 펴지 못하고 따라야 했다.
날랜 군사들을 추려 압록수의 물길을 살피니, 말을 타고 건널 곳과 사람이 걸어 건널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서쪽 지류는 강폭이 넓으나 깊지 않아, 강 중심도 목까지 밖에 물이 차지 않습니다.”
이에, 우중문이 크게 만족하였다.
“거 보시오! 걸어서 건널 곳이 있지 않소! 하하하.”
그러나 설세웅은 기도 차지 않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목까지 물이 올라오는데 짐을 진 군사들이 어찌 건넌단 말이오? 적이 급습하면 어찌하겠소?”
“설 장군, 적의 급습은 없소. 내가 정예 기병을 이끌고 먼저 건너 그대의 도하를 도울 것이니, 아무 염려 마시오.”
우중문이 이처럼 장담하니, 설세웅도 더는 이견을 내지 못하였다.
이때, 막사 밖에서 군사가 뛰어 들어와 아뢰었다.
“고구려 군이 강 건너에 나타났습니다!”
“뭐, 뭐라? 그 수가 몇이더냐?”
우문술이 놀라 물으니, 군사가 바로 답하였다.
“그 수는 사만 가량이옵고, 적의 수장은 막리지 을지문덕이옵니다.”
“문덕?”
우중문이 황제 양광의 서신을 떠올리며 물으니, 군사가 답하였다.
“그렇사옵니다. 상장군 주용과 함께 군을 이끌고 있다 하옵니다.”
우중문이 잠시 생각에 잠기니, 우문술이 살며시 눈치를 살피며 말하였다.
“일단 도하는 잠시 미루도록 합시다.”
우중문도 신중한 인물이기에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하였다.
* * *
압록수를 사이에 두고 수나라 별동대 삼십만과 마주보고 진을 펼친 을지문덕은 해가 저물어가자, 작은 나룻배를 준비시켰다.
“상장군, 잠시 다녀오겠소이다.”
“정녕 홀로 가시나이까?”
상장군 주용의 물음에 을지문덕이 고개를 저었다.
“혼자라니요. 배를 젓는 군사가 한 명 있지 않습니까. 심려치 마십시오.”
을지문덕이 너무도 태연히 말하니, 상장군 주용도 더는 만류하지 못하였다.
나룻배가 마련되자, 을지문덕은 노를 저을 군사 한 명만 대동한 채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나룻배가 움직이니, 수나라 군사들은 강가를 횃불로 밝히며 주시하였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나룻배를 향해 상서우승 유사룡이 나서 외쳤다.
“그대는 누구인데, 어찌 홀로 강을 건너오는가?”
이에, 을지문덕이 껄껄 웃으며 답하였다.
“보시고도 모르시오? 혼자가 아니고, 둘이외다.”
“뭐, 뭐라? 그래 좋다! 어찌 둘이 강을 건너오는 것이냐?”
상서우승 유사룡이 다시 물으니, 을지문덕이 태연스럽게 답하였다.
“어찌 건너기는요. 배를 타고 건너지요.”
“이… 이자가 정녕! 그래, 도대체 무슨 일로 건너는 게냐?”
상서우승 유사룡이 노기를 꾹 누르고 다시 물으니, 을지문덕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유롭게 답하였다.
“전장에서 설마 유람이겠소? 다 일이 있어서 강을 건너는 게지요.”
어느새 바로 앞까지 나룻배가 다가오니, 유사룡이 손을 들어 크게 외쳤다.
“멈춰라! 그래, 일이 있다는 너는 누구냐?”
이에, 을지문덕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당당히 답하였다.
“을지문덕이라 하오.”
결코 우렁차지도 높지도 않았으나, 유사룡은 너무도 당당하고 여유로운 을지문덕의 기세에 기가 꺾였다.
“을… 을지문덕? 귀공이… 고구려의 막리지 을지문덕이시오?”
금세 목소리가 부드러워진 유사룡에게 을지문덕이 여유로운 미소로 답하였다.
“나를 맞이하는 그대는 어디의 누구시오?”
“상서우승 유사룡이라 합니다.”
유사룡이 공손히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리니, 을지문덕이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유 공이시었구려. 그래 저녁은 드셨소?”
마치 친근한 벗이라도 대하듯 물으니, 유사룡이 당황하였다.
“시, 식전이옵니다. 귀공께서 갑자기 강을 건너오시니… 황망하여… 오면 온다고 기별이라도 하시지… 준비가 없어 귀인 대접이 소홀할까 두렵습니다.”
“별말씀을. 배를 대고 내려도 되오?”
을지문덕이 너무도 당당히 물으니, 유사룡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답하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무엇하느냐! 배를 대도록 돕거라!”
을지문덕이 나룻배에서 내리니, 유사룡이 급히 다가가 살며시 물었다.
“헌데, 어떤 군무로 오셨나이까?”
“항복하러 왔지요.”
“하, 항복이요? 정녕 항복이시오?”
유사룡이 믿지 못하여 다시 물으니, 을지문덕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 그럼 설마 홀로 삼십만 대군을 대적하러 강을 건넜겠소이까? 항복이 맞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