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234화 (234/328)

234화 살수대첩 (5)

전령들이 오가며 내호아와 황제 양광이 전략을 가다듬으니, 평양성은 존망지추(存亡之秋)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좌우 장군은 서로 협력하여 평양성 함락을 이루고 고구려 왕을 요동성 앞으로 끌고와 내게 무릎 꿇리시오!”

황제의 지엄한 명에 좌장군 우문술과 우장군 우중문이 동시에 엎드려 명을 받았다.

이어서 황제 양광이 우문화급에게 새로 명을 내렸다.

“너는 좌우 장군이 압록수를 넘기 전, 반드시 비사성을 함락시켜라! 실수는 용납하지 않는다.”

이에, 우문화급이 머리를 조아려 명을 받으니, 육로를 통한 평양성 진격이 시작되었다.

좌익위대장군 우문술과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이 대군을 함께 지휘해 선두에 섰다.

그리고 이 삼십만 별동대를 좌효위대장군 형원항, 우익위대장군 설세웅, 둔위장군 신세웅, 우어위장군 장근, 우무후장군 조효재, 탁군태수 검교좌무위장군 최홍승, 검교우어위호분낭장 위문승 등이 지휘하며 따랐다.

이들 삼십만의 별동대는 백만 대군 속에서 신체 능력과 무예가 출중한 군사로 추린 최정예였으며, 일차 목적지는 압록수의 서쪽이었다.

한편 내호아는 강회에서 부총관 주법상과 군을 합치니, 도합 십이만의 정병이었다.

이때, 평양성 내의 군사는 모두 사만 명으로 삼십만 별동대와 내호아의 십이만 정병을 맞아 싸우기엔 군세가 무척 부족한 형편이었다.

이에, 평양성이 공포에 휩싸였고, 태왕을 모시고 회의를 진행하던 대전이 매우 소란스러웠다.

“막리지! 그대는 황제 앞에 무릎 꿇고 강화를 요청하겠다고 말하여 그 지위에 오른 것을 상기하시오! 당장, 압록수를 건너 요동으로 달려가 황제에게 강화를 요청하시오!”

사선종유가 막리지 을지문덕을 압박하니, 보다 못한 태왕이 미간을 좁히며 말하였다.

“항복을 하고자 한다면, 저들이 평양성 앞에 당도했을 때 해도 늦지는 않소. 아니 그렇소, 장인?”

태왕의 물음에 사선종유가 입을 다무니, 북장원이 나서 말하였다.

“폐하, 본래 우리 대 고구려는 중원의 황제와 그 격을 맞췄습니다. 그리하였기에, 모두가 태왕 폐하를 우러러 모셨나이다. 하여, 강화는 막리지가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려 청하는 것이 옳사옵나이다. 황제가 있는 곳까지 거리가 상당하고, 길이 험하니, 속히 막리지 을지문덕을 요동으로 보내시옵소서.”

북장원의 말은 은근하였으나, 한시라도 빨리 을지문덕을 요동으로 보내 강화를 맺으란 압박이었다.

이에, 태왕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노기를 삭히니, 을지문덕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와 태왕에게 예를 올리고는 몸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하나 같이 겁에 질려 강화를 원하는 눈빛이었다.

이때, 태자 고건무가 상장군 대건상과 함께 대전으로 들어오고, 조의두대형 동금호와 종리소형 동정찬이 뒤따라 들어왔다.

무겁게 입을 열려던 을지문덕이 태자 고건무에게 머리 숙여 예를 올리고, 태왕도 건무를 반겨 말하였다.

“어서 오라, 태자.”

이에 북장원이 심기가 불편한 듯 나서 말하였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태자 전하가 아니옵고 태제 전하이옵나이다.”

북장원의 말 속에 담긴 뜻은 언제든 왕후에게서 후사가 생길 시, 건무를 폐하고 국본을 다시 세워 태자를 책봉하리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태왕은 장인 북장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굳세고 강한 어조로 말하였다.

“장인, 건무는 내게 아들과도 같은 아우이기에, 태제가 아닌 태자라 불러도 되오. 게다가 책봉식까지 치르었으니, 태제… 태자 등의 불필요한 논쟁은 하지 맙시다.”

더는 북장원도 감히 이견을 내지 못하니, 을지문덕이 다시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가 강화를 원하시고, 소인 또한 강화를 맺기 위해 막리지의 중책을 맡게 되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여!”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키고 막리지 을지문덕의 다음 말만 기다렸다.

잠시 뜸을 들인 을지문덕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평양성 내 사만 군사를 이끌고 즉시 압록수를 건너 요동으로 가겠나이다.”

“뭐라! 뭐라 하였소?”

북장원이 놀라 소리치니, 을지문덕이 천연덕스럽게 답하였다.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황제에게 강화를 요청하기 위해 가는 것이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로 을지문덕을 노려보며 북장원이 물었다.

“강화를 맺으러 가는데, 어찌 사만 군사를 이끌고 간단 말이오?”

“요동까지 가는 길이 험하고, 수의 좌우 장군은 공을 탐하는 인물들이기에, 소인이 황제 앞에 무릎 꿇고 강화를 맺을 시, 평양성을 함락하여 공을 세울 기회가 사라지는 것을 우려해 소인의 목을 벨 수도 있습니다. 하여!”

을지문덕이 일부러 말을 끊으니, 참을성 없는 사선종유가 바로 물었다.

“그래서 군대로 길을 뚫고가 황제께 강화를 요청하겠단 말이오?”

“바로 그것이옵니다.”

“음…….”

사선종유의 눈빛이 흔들리자, 을지문덕이 이를 놓치지 않고 말하였다.

“황제 양광이 백십삼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에 들어온 이래로, 좌장군 우문술과 우장군 우중문 등을 비롯한 수의 장수들은 변변한 공을 세운 일이 없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력으로 평양성을 함락시켜 큰 공을 세우는 것이오니, 필경 소인의 앞을 막을 것입니다.”

“수의 좌우 장군이 이끄는 삼십만 별동대를 뚫고 황제에게 갈 수 있으시겠소?”

사선종유의 눈빛과 표정이 꽤 누그러졌으며 묻는 말투도 사뭇 부드러웠다.

이에, 을지문덕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막중한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황제 앞까지 갈 것이옵니다.”

을지문덕이 이토록 자신하여 강화를 맺겠다 말하니, 북장원도 목소리가 누그러져 부드럽게 물었다.

“막리지, 정녕 가능하시겠소? 혹여 길을 막는 별동대를 무리하게 공격하여 저들이 패하기라도 할 경우, 수의 좌우 장군이 무척이나 노할 터인데…….”

“하하하, 국장 어른. 고작 소인의 사만 군사가 수의 삼십만 별동대를 이길 수 있으리라 여겨, 저들이 패해 노할 거라 생각하시옵니까?”

을지문덕의 물음에 북장원이 뻘쭘해 답하지 못하니, 태왕이 허허 웃었다.

“허허허, 이기면 좋지. 이겼을 땐 당연히 저들이 노하겠지만, 이미 이긴 걸 뭘 어쩌겠소? 별 걸 다 걱정하시는구려. 하하하.”

북장원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나니, 명림신이 살며시 앞으로 나와 태왕에게 아뢰었다.

“소신 명림신 태왕 폐하께 아뢰나이다.”

“말하라.”

“현재, 우리 평양성 내에는 오부 귀족의 사병까지 합하여, 군사의 수는 사만이 전부이옵나이다.”

“하여?”

“막리지께서 사만 군사를 이끌고 나가신다면, 누가 남아 이 평양성을 지키나이까?”

이에, 태왕이 명림신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강화를 맺기 싫은 게요?”

“폐, 폐하…….”

“어차피 강화를 맺을 것인데, 지키긴 뭘 지킨단 말이오?”

“허나, 막리지께서 황제 앞에 당도하기 전에 내호아의 수군이 평양성에 당도하면 어찌하오리까?”

“어찌하긴, 내가 항복을 해야지.”

태왕이 너무도 당연스럽게 답하니, 명림신도 더는 이견을 내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이에, 태왕이 신하들을 굽어보며 엄히 말하였다.

“그대들은 들으시오!”

“하명하시옵소서.”

“그대들은, 내가 수의 수군총관 내호아에게 치욕을 당하며 강화를 구걸하지 않도록, 막리지 을지문덕에게 힘을 실어 주기 바라오. 또한 막리지는 평양성 내의 모든 군사를 이끌고 반드시 길을 열어 황제와 강화를 맺도록 하시오!”

황제의 명이 떨어지니, 모든 대소 신료들이 머리 숙여 명을 받았고, 을지문덕은 오부 귀족들의 사병까지 포함하여 평양성 내의 군사 사만을 모두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 * *

막리지 을지문덕의 출정을 하루 앞두고, 태자 고건무가 홀로 찾아왔다.

“내일 출정이시군요.”

태자 건무가 물으니, 을지문덕이 빙그레 웃으며 답하였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태왕 폐하와 막리지는 참으로 대단하오.”

“무엇이 말이옵니까?”

“절대로 자신들의 사병을 내어주지 않는 오부 귀족들이 앞다퉈 군사들을 내어주니 어찌 대단하지 않소?”

이에 을지문덕이 허허 웃으며 답하였다.

“그래 봐야 고작 사만이옵니다.”

“아니지요. 듣자 하니, 오부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지에 남겨둔 사병들까지 막리지를 도우라 명하였다고 하니, 요동에서 압록수 이남까지 그 수가 상당할 것이오.”

“하하하, 제가 가는 길이… 혹여라도 수의 좌우 장군에게 막힐까 무척이나 두려워하더이다.”

“막리지는 언제나 여유로워 참 보기가 좋소. 헌데, 막리지?”

“하문하시옵소서.”

“이 평양성은 어찌 되는 게요?”

건무의 물음에 을지문덕이 웃음을 거두고 입을 다물었다.

이에, 건무가 을지문덕의 손을 잡고 다시 물었다.

“막리지, 내게 솔직히 말해 주시오. 이 평양성은 어찌 지키면 되는 게요?”

“전하…….”

“말하시오 막리지.”

속 시원히 답하지 않는 을지문덕의 손을 굳게 쥐며 건무가 재촉하니, 을지문덕도 더는 속 태울 수 없는지 입을 열었다.

“모두가 이 평양성 내의 군사가 없다고 여길 때, 태자 전하께서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 군사를 끌고 나타날 것이옵나이다. 믿으소서.”

“이 평양성 내의 군사가 없다고 여길 때?”

이 물음에 을지문덕은 답을 내지 않고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이에, 건무도 더는 묻지 않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모두라… 모두가 그리 여겨야 하는 게로군. 모두가…….”

* * *

다음 날, 을지문덕이 오부 귀족의 사병까지 포함하여 사만의 군사를 이끌고 떠나니, 평양성 내는 고작 오백의 군사만 남게 되었다.

오백의 군사로는 성벽 방어는커녕, 치안 유지도 힘든 실정이었기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말 몽땅 이끌고 가는군요.”

상장군 대건상이 성을 나서는 을지문덕을 바라보며 말하니, 종리소형 동정찬이 말하였다.

“막리지의 앞을 수의 삼십만 별동대가 막을 터이니, 사만도 부족할 겁니다.”

“그러나, 성 내의 치안 유지도 어려운 실정인데… 후… 그렇다고 군을 물리라 할 수도 없고… 큰일입니다…….”

상장군 대건상이 이처럼 불안히 여기며 말하였으나, 이미 군사들은 성 밖으로 나간 뒤였으니, 이제 와서 다른 수도 없었다.

오부 귀족이 평양성에 안주한 이래로, 가장 세가 약해진 시기였으니, 북장원을 따르는 대건상으로선 무척이나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말이 상장군이었지, 실상 그가 이끌 군사는 말을 돌보는 군사 둘이 전부였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상장군 대건상을 힐끔 쳐다보며 종리소형 동정찬이 물었다.

“헌데, 상장군. 이 전쟁… 지금, 우리가 이기고 있는 것 아니오?”

생각도 못한 물음에 대건상이 놀라 오히려 되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생각해보았는데 말이오. 수의 백만 대군이 요동 이십여 성을 하나도 함락시키지 못하였을 뿐더러, 황제를 요동의 묶어 두고 있지 않소? 하여, 현재까지는 우리가 이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해서 말이오.”

“듣고보니, 그렇긴 하나. 이 평양성이 떨어지면, 더는 전쟁을 지속할 수는 없으니… 이기고 있다고 여길 때가 아니오.”

“…….”

“적의 삼십만 별동대가 밀려오고 있으며, 바다 건너 십이만의 수군이 들이닥칠 터인데, 어찌 터무니 없는 한가한 판단을 하는 게요? 쓸데 없는 생각은 머릿속에 담지도 마시오!”

대건상이 장황히도 동정찬을 꾸짖고는 성벽에서 내려가니, 홀로 남은 동정찬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사만 군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닌데… 아무래도 이기고 있는 것 같은데… 희한하네…….”

그러나 동정찬도 이내 곧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니네. 역시나 그렇군. 지금까지 이기고 있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어. 수의 삼십만 별동대를 물리치고, 십이만의 수군을 막아낸 뒤에나 이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구나.”

결국, 지금까지의 방어와 승리는 전세에 영향을 줄만큼 크지 않은 작은 승리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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