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232화 (232/328)

232화 살수대첩 (3)

안시성 공략에 실패한 우문화급의 진영에서 구슬픈 노래가 울렸다.

왕박이 지은 무향요동낭사가로, 요동에 끌려가서 헛되이 죽지 말란 노래였으니, 우문화급이 불같이 격노하였다.

“저따위 노래를 누가 부르느냐? 당장 노래를 그치게 하고, 노래를 부른 군사들의 목을 베도록 하라!”

우문화급의 명을 받은 장수들이 진영 곳곳을 뛰어다니며, 군사들의 목을 베니, 한밤중에 노래를 부르다 목이 베인 군사들의 수가 백여 명에 달하였다.

이에 죽지 않은 군사들의 불만이 쌓여 갔다.

“노래조차 못 부르게 하다니…….”

“노래 따위에 장군이 뒈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어찌 노래를 부른다고 하여 목을 벨 수 있단 말인가?”

장수들의 칼이 무서워 감히 소리 높여 불만을 토로할 수는 없으나, 각자 울분을 삼키며 소리 낮춰 말하였다.

이처럼 수나라 장수들과 군사들이 서로 반목하는 사이, 온동을 찾아 평강이 안시성의 외성에 올랐다.

“동아, 조금 전… 저들이 부르던 노래가 무엇이더냐?”

평강의 물음에 무향요동낭사가를 기억하는 온동이 바로 답하였다.

“일전에 개소문 형님과 탁현에 갔을 때, 그곳 강가에서 왕박이란 자가 부르던 노래로, 무향요동낭사가라 합니다.”

“그래? 무향요동낭사가라… 노랫말을 모두 기억할 수 있느냐?”

기억력이라면 세상 그 누구보다 뛰어난 온동이었기에, 당연히 무향요동낭사가를 모두 외우고 있었다.

온동이 조용히 무향요동낭사가를 들려주니, 평강이 빙그레 웃었다.

“너의 기억력이 이처럼 뛰어나니, 반드시 고구려의 큰 복이 될 것이다.”

평강의 칭찬에 온동은 너무도 기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이에, 평강은 온동의 눈을 가린 검은 천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눈이 조금 어두우면 어떠리, 너의 머리는 여전하거늘. 너의 무예는 이미 신기에 달하여, 눈이 보이지도 않으면서도 홀로 성벽 위를 내달려 저들의 밧줄을 모두 끊었으니… 이 안시성에서 너보다 용감하고 뛰어난 장수는 없을 것이다.”

“소, 송구하옵니다.”

온동이 너무도 과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라 말하니,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 곁에서 듣다가 허허 웃으며 말하였다.

“불패장군 온달님께서 들으시면 무척 서운해하실 말씀이오나, 실상… 그러하니, 결코 공주님께 반박은 못 하실 것입니다. 허허허.”

“성주, 그렇지요?”

평강도 살포시 웃으며 온동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뭔가 떠올랐는지 수나라 진영을 내려다보며 말하였다.

“성주, 목청 좋고 노래 잘하는 군사들을 모아 주십시오.”

이에 양만춘이 의아해 고개를 갸웃하였으나, 두말없이 목청 좋은 군사들을 소집하였다.

잠시 뒤 평강의 앞에 군사 백여 명이 모여 눈치를 보았다.

이에 평강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지금부터 내가 불러주는 노랫말을 기억하였다가 날이 밝을 때까지 소리 좋게 부르도록 하시오.”

아닌 밤중에 노래를 부르라 명하니, 모두가 의아해했으나 평강은 개의치 않고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요동으로 가지 말라.(莫向遼東去 막향요동거.)

고구려 병사는 범과 승냥이 같으니라.(夷兵似虎豺 이병사호시)

긴 칼이 내 몸을 부수고(長劒碎我身 장검쇄아신)

날카로운 화살촉이 내 뺨을 뚫으리라.(利鏃穿我顋 이족천아시)

목숨 한순간에 져버리면(性命只須臾 성명지수유이)

절개 있는 협객인들 누가 슬퍼해주리.(節俠誰悲哀 절협수비애)

공을 이루어 대장되고 큰 상을 받는다 해도(成功大將受上賞 성공대장수상상)

홀로 죽어 왜 잡초 더미에 묻히겠는가.(我獨何爲死蒿萊. 아독하위사호래나)]

평강의 이 노래는 무향요동낭사가의 음에 노랫말만 바꾼 것으로 영특한 온동은 한번 듣고 바로 외웠다.

“최대한 크고 구슬프게 불러야 합니다.”

평강의 당부에 군사들이 노래를 부르려 했으나, 노랫말이 낯설어 외워지지 않아 부르지 못하였다.

이에, 온동이 노랫말을 기억하여 무향요동낭사가의 음을 따서 부르니, 군사들이 뒤따라 불렀다.

몇 번을 따라 부른 군사들은 왠지 기분이 좋아 점점 목청 높여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에 수나라 진영까지 노래가 울려 퍼지니, 우문화급이 격노해 칼을 차고 막사 밖으로 뛰어나왔다.

“누구냐! 누가 부르는 것이냐? 목을 베고, 입을 찢겠노라!”

그러나 마음처럼, 목을 베어 노래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듣기 싫어도 들어야 했고, 그렇다 하여 노래 때문에 진을 멀리 물릴 수도 없었다.

분을 참지 못하고 공연히 안시성을 향해 욕설을 내뱉어 보았지만, 오히려 수나라 군사들의 사기만 더 떨어뜨릴 뿐이었다.

그리하여, 날이 밝을 때까지 수나라 군사들은 평강이 개사한 무향요동낭사가를 강제로 들으며 저절로 외우게 되었다.

* * *

온달은 밤이 깊을 때까지 양현감의 동생 양적선, 양현장, 양현종의 보급부대를 차례로 격파하고는 마침내 양현감이 이끈 보급부대 앞까지 당도하였다.

이미 서쪽부터 화기가 치솟으며 점차 다가오는 것을 바라본 양현감은 고구려 군의 급습에 대비하여 진을 펼쳐 놓고 있었다.

“어라? 저놈들의 진이 묘합니다.”

막바우가 양현감이 펼친 진을 가리키며 말하니, 온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레로 방책을 세웠군. 쉽지 않겠어.”

온달의 말처럼 양현감은 보급물자를 실은 수레로 방벽을 세웠고, 수레를 끌던 소와 말은 모두 진영 가운데로 옮겨 지키고 있었다.

“카사르의 부족이 저렇게 수레로 방책을 세우고 싸우지요. 쉽게 방책을 넘기 어려울 듯합니다. 개마무사의 돌진은 삼가는 게 좋겠습니다.”

경우도 양현감의 진을 바라보며 말하니, 온달의 마음이 무거웠다.

“급습도 여기까지인가? 이대로 군을 물려야 하나?”

그렇다고, 양현감의 진을 돌아 다른 보급부대를 급습하기도 어려웠다.

“장군, 수나라의 보급부대 스무 개를 몽땅 불태우지는 못하였으나, 그래도 세 개는 태웠으니, 적도 꽤 타격을 입었을 것입니다. 이만 군을 물리시지요. 군사들을 아끼어 안시성에 돌아가야 다음 전투도 할 수 있습니다.”

저돌적인 막바우마저 이렇듯 말하니, 온달도 군을 물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경우가 뭔가 떠올랐는지 껄껄 웃었다.

“하하하. 우린 바보였네.”

“뭐가? 우리가 왜 바보야? 온달 장군님이 어리숙하긴 해도 아주 바보까지는 아니던데… 왜?”

막바우가 눈치도 없이 말하니, 온달이 막바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제야 막바우가 말실수를 깨닫고 허허 웃었다.

“말이 그렇다는 게지오. 말이요. 하하하. 장군님은 영민하시옵지요. 하하하.”

이에, 온달이 괜찮다며 막바우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나도 아주 잘 아네. 괜찮네. 헌데, 경우 자네는 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가? 바보?”

아마도 바보란 단어가 무척이나 마음을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아니옵니다.”

“허면?”

“장군, 우리가 적을 격퇴하기 위해 온 것입니까? 아니면, 적의 보급을 불태우기 위해 온 것입니까? 우리의 목적이 무엇인지요?”

이에 온달이 머뭇거리다가 답하였다.

“적을 급습하여 물리치고, 보급을 불태우는 것이 목적이었지.”

“아닙니다.”

경우가 단호히 잘라 말하니, 온달이 당황하여 물었다.

“아니라? 허면?”

“적의 보급을 불태우는 것이 목적이옵니다. 적은 물리치지 않아도 되옵니다.”

경우의 말에 온달과 막바우가 멍하니 시선을 양현감의 진영으로 돌리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뒤, 뭔가 깨달은 막바우가 먼저 껄껄 웃으니, 그제야 온달도 머리를 긁적이며 허허 웃었다.

“경우의 말이 옳다.”

온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경우가 활을 들어 올리며, 궁기병들에게 명하였다.

“불을 붙여라! 멀리 쏠 것도 없다. 방벽으로 세운 저 수레만 태운다!”

이에 일만의 궁기병들이 화살에 불을 붙이고는 말을 달리며 양현감의 진을 향해 기사를 펼쳤다.

밤하늘에 불화살이 날고, 이에 맞서 방패를 든 수나라 군사들이 단단히 방비하였다.

허나, 화살들은 하나 같이 방벽으로 진 앞에 세운 수레에 꽂혔다.

수레 위에 가득 실린 보급 물자들이 활활 타오르고, 수나라 군사들이 당황해 불길을 끄기 위해 달려들었다.

“불길을 잡지 마라! 적의 돌진에 대비하여 창을 세우고 방패를 단단히 들어라!”

양현감은 방벽으로 세운 수레의 불길을 잡느라 진영이 흩트려지는 것을 우려하였다.

‘저 불길이 잡히는 순간을 노려 고구려 군이 무시무시한 철기병을 앞세워 돌격해 올 것이다. 결코 진을 흩트려선 안 된다.’

이렇듯 예상하여 더욱 단단히 방비를 명하니, 수레들은 속절없이 활활 타올랐다.

그리고, 날이 밝아올 무렵이 되어서야 방벽으로 세운 수레들이 모두 타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곧 고구려 군이 돌격해 올 것이다! 극을 세우고, 방패로 앞을 막아라!”

양현감이 소리 높여 명하였으나, 그 어느 곳에서도 고구려 군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목적을 달성한 온달이 군을 물려 안시성으로 귀환한 것이다.

그제야 양현감은 안심하여, 수레를 끌던 소와 말을 몰아 황제 양광이 있는 본진으로 향했다.

* * *

보급물자를 실은 수레가 없으니, 양현감은 행군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요동성 앞으로 향하던 중, 둘째 동생 양적선을 비롯하여 양현장, 양현종 등의 동생들이 서쪽에서 말을 달려와 합류하였다.

모두가 온달의 급습에 보급물자를 잃었을뿐더러, 수레를 끌던 소와 말마저 잃은 상태였다.

이에, 양현감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장탄식을 하였다.

“보급물자는 다시 돌아가 가져오면 되지만, 수레를 끌 소와 말을 잃은 것은 너무도 타격이 크구나. 이를 어찌하면 좋을고.”

양현감의 말처럼 대륙을 샅샅이 훑어 군량미를 확보한다고 하여도, 수레를 끌 우마가 없으면 요동까지 보급물자를 나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형님, 소와 말을 걱정할 때가 아니옵니다. 이대로 황제 폐하께 가면 우리의 목이 떨어집니다.”

동생 양적선이 이렇듯 말하였으나, 충심 깊은 양현감은 고개를 저었다.

“목이 떨어져도 가야 한다. 가서 아뢰고, 부족한 보급은 다시 나르겠다고 아뢰야 한다.”

* * *

해가 저물 무렵이 되어 황제 양광의 본진에 당도할 수 있었다.

우중문의 우군에게 보급을 전달한 다섯째 동생 양만행과 여섯째 동생 양인행이 먼저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로다. 너희는 무사히 보급물자를 전하였구나.”

양현감이 동생들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황제 양광을 알현하기 위해 발을 옮겼다.

* * *

“뭐라? 소와 말만 끌고 왔다고?”

어영군에게 전할 보급을 양현감이 담당하였으나, 그가 가져온 것은 소와 말뿐이었고, 그나마도 수레를 끌기 위해 다시 끌고 가야 했다.

“너는 어찌하여 소와 말은 진영 가운데 두고 지켰으면서도, 보급물자를 실은 수레는 방벽으로 세웠느냐? 네가 나를 굶기려 작정한 것이더냐?”

황제 양광이 진노해 물으니, 무릎 꿇은 양현감이 머리를 조아려 답하였다.

“부족한 보급을 다시 나르기 위해선 군사보다, 군량미보다… 말과 소가 더 중하였사옵니다.”

“뭐라? 그렇다면… 보급을 다시 가져올 때까지 내가 굶어도 좋다는 말이더냐? 소와 말은 두고 가라. 고기로 배를 채워야겠노라.”

“폐하, 보급을 잃어 군에 타격을 준 것은 소신의 죄이오나, 소와 말을 모두 잃으면, 향후 보급은 나를 수가 없사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머리가 잘릴 각오를 한 양현감이 뜻을 굽히지 않으니, 황제 양광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너는 무척 고집이 센 장수였지. 지난겨울 전쟁에서 너의 고집스러운 행동이 나를 지켰었지. 오냐! 내 너를 다시 믿어 보겠노라. 너는 즉시 돌아가 부족한 군량미를 가져오도록 하라!”

이에, 양현감이 감격하여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며 절을 올렸다.

양현감이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양적선이 달려와 물었다.

“형님, 이것도 쥐어짜서 가져온 것인데, 어찌 바로 다시 부족한 군량미를 채워 올 수 있습니까?”

“우리가 못 채우면 백만 대군이 요동에서 굶어야 한다.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마라.”

양현감이 단호히 말하고 앞장서니, 다섯 동생이 입을 다물고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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