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난공불락 요동성 (10)
원을 그리듯 요동성을 둘러싸고 땅 밑으로 길을 낸 지도는 모두 이십여 개였다.
숨어 있던 군사들이 동시에 솟아오르기 위해, 마지막 지점에서 대기하여 길을 열고자 했으나, 의도와 다르게 위로 땅을 파기도 전에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길이 열렸다! 빛이 들어온다!”
굴을 파던 군사가 당황해 외치자, 이는 곧 돌격 신호가 되었다.
“길이 열렸다! 돌진하라! 요동성을 점령하라!”
어두운 지도 속 후미에서 대기하던 장수의 명이 떨어지고, 모두가 어둠을 벗어나 빛을 향해 뛰어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이십여 개에 달하는 모든 지도가 동일하였다.
“길이 열린 이상 머뭇거릴 수 없다! 뛰어나가 단숨에 고구려 놈들을 제압하라!”
돌격대장 맥철장(麥鐵杖)이 명을 내리니, 북문 방향에서 파고 들어간 지도 속 수나라 군사들이 빛을 향해 내달렸다.
뒤에서 밀고 돌격을 재촉하니, 선두의 군사들은 의지와 상관없이 빛을 향해 떠밀려 발을 옮겼다.
“빛? 왜지? 지금은 밤인데?”
지도 밖으로 달려나오던 수나라 군사가 의아해 중얼거리던 그 순간, 그의 눈에 환하게 타오르는 불덩이가 들어왔다.
“온통 불이다! 불이야!”
기겁하여 뒤로 돌아 외쳤으나, 후미에서부터 달려나오기 시작한 수나라 군사들의 돌진을 막을 수 없었다.
“안 돼! 밀지 마! 불이야!”
죽을힘을 다해 지도 안으로 돌아가려 외쳤으나, 선두의 수나라 군사들은 뒤이어 나오는 군사들의 밀어붙이는 힘에 불길 속으로 밀려나기만 했다.
“으아악!”
온몸에 불이 붙어 끔찍한 비명을 지르던 수나라 군사는 끝도 없이 펼쳐진 불길에 절망하였다.
“땅… 위가 아니었어. 여긴… 불바다야…….”
그리고, 이미 전의를 상실한 수나라 군사의 머리를 매정한 창날이 뚫고 들었다.
“끅!”
정수리부터 목구멍까지 창날이 들어왔다가 쑥 빠져나가자, 수나라 군사의 뇌수가 솟아올랐다.
연이어 수나라 군사들의 비명이 울리고, 고구려 군의 외침이 이어졌다.
“창으로 찍어라!”
“살을 날려라!”
“한 놈도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수나라의 지도는, 위로 땅을 파 올라가기도 전에 고구려 군이 미리 마련한 해자에 길이 열린 것이다.
고구려 군의 해자는 요동성의 외성과 내성 사이에 땅을 깊게 파고 냈으며, 수나라 군의 총공세에 맞서 해자에 건초와 장작더미를 쌓아 두었다.
그리고, 수나라 군의 지도가 해자와 가까워짐을 느끼자 미리 건초에 불을 지펴 화공을 준비하였다.
마침내 해자로 지도가 열리고, 환한 빛에 이끌려 불나방처럼 어두운 지도 속에 머물던 수나라 군사들이 쏟아져 나오니, 고구려 군은 해자에 기름을 붓고 이들을 맞이했다.
“불이야!”
“밀지 마! 불이야!”
선두의 군사들이 아무리 외쳐도 후미부터 달려나오기 시작한 거대한 돌진을 멈추기란 불가능하였다.
요동성 서문 방향 지도의 돌격대장 전사웅(錢士雄)은 더욱 가열차게 돌격을 명하며 자신도 군사들과 함께 빛을 향해 달려나갔다.
“대승의 선봉이 되어라! 빛을 향해 달려라! 돌격하라!”
용맹히 외치며 마침내 지도 밖으로 뛰어 나온 전사웅은 너무도 강렬한 빛에 아찔하여 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이어서 밀려오는 뜨거운 화기와 고구려 군의 창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나마, 요동성 남문 방향 지도 돌격대장 맹차(孟叉)는 상황이 나았다.
그가 이끈 돌격대는 고구려 군의 화공을 받지 않았다.
요동의 외성과 내성 사이에 낸 해자는 너무도 길었고, 이 모든 곳을 불로 막기란 불가했던 것이다.
“서둘러 나가라! 공격하라!”
맹차의 명을 따라 지도 밖으로 뛰어 나온 수나라 군사들은 불벼락을 받지 않았으나, 자신들의 머리보다 높은 흙벽에 놀라 발을 멈추었다.
이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 수나라 군사들의 머리 위에서 소리쳤다.
“이놈들이 나왔구나! 활을 쏴라!”
수나라 군이 땅 속에서 나오기만 기디리고 있던 팽무일이었다.
“다 죽여! 올라오면 우리가 죽는다! 찔러! 찌르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며 쉴 새 없이 창으로 찌르던 팽무일이 그만 발을 헛디뎌 해자 안으로 떨어졌다.
“제자!”
개소문이 한 치에 망설임도 없이 팽무일을 부르며 해자 안으로 뛰어들고는 달려드는 수나라 군사들을 가차 없이 베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올라가! 너무 높잖아. 이런 제길 왜 이리 깊게 판 거야!”
해자 위로 기어오르기 위해 팽무일이 흙벽에 매달려 경공을 펼쳤으나, 수나라 군사들과 뒤엉켜 몸을 솟구칠 수 없었다.
“제자! 위험해! 당장 몸을 돌려!”
개소문이 도망치려는 팽무일의 어깨를 잡아 몸을 돌리며 다른 손으로는 연신 검을 휘둘렀다.
지도에서 쏟아져 나온 수나라 군사들은 오직 개소문과 팽무일을 노려 달려들었고, 그 기세는 사납고 군사들의 수는 끝이 없었다.
맹렬히 달려든 수나라 군사들의 창이 팽무일의 등을 꿰뚫고 말 것이 분명했다.
“파천신검!”
개소문이 지도의 시커먼 구멍을 향해 소리치며 양손의 검을 휘둘러 파천신검을 펼치니, 바람마저 막아낼 파천신검의 웅대한 기가 수나라 군사들을 덮쳤다.
“으아악!”
공격 초식이 전무한 파천신검이었으나, 개소문이 혼신의 힘을 다해 펼쳐낸 방어 초식은 지도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수나라 군사들을 밀어붙이며 경악하게 만들기 충분하였다.
“제자! 파천신검을 펼쳐라!”
개소문이 아직도 겁에 질린 팽무일에게 엄히 명하고는 등에 멘 다섯 자루의 검을 빠르게 날렸다.
비도술을 펼쳐 날린 검들이 정확히 수나라 군사들을 쓰러뜨리자, 팽무일도 급히 정신을 차려 파천신검을 펼쳤다.
“제기랄! 파천신검이다! 그런데 공격은 어떻게 하냐 사부야?”
“공격은 내가 한다!”
팽무일의 물음에 개소문이 답하며 해자에 널린 검과 도, 창과 극 등을 닥치는 대로 주워 날렸다.
검을 쥐면 검을 날리고, 도끼를 쥐면 도끼를 날리며 개소문이 비도술을 펼치니, 마치 온달이 계찰산에서 북주와 돌궐 군을 무찌르던 모습과 무척이나 닮았다.
“무쌍비도술이다!”
해자 위 고구려 군 중 누군가 외쳤다.
이에, 또 다른 누군가가 계찰산 전투를 떠올려 소리쳤다.
“검신이다! 검신 온달이다!”
“온달이 왔다!”
고구려 군이 개소문의 모습에서 불패장군 검신 온달을 떠올리니, 모두의 사기가 끓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불패장군 온달이 왔다!”
머리 위에서 울리는 함성에 개소문도 마치 자신이 검신 온달이 된 듯한 착각이 들며, 적봉진에서 보았던 온달의 비도술을 떠올려 쉬지 않고 검과 도를 날렸다.
“그렇다! 내가 온달이다! 그게 바로 나다!”
개소문이 피가 끓어 올라 소리치니, 개소문의 앞을 지키며 파천신검을 펼치던 팽무일이 황당해 개소문을 바라보았다.
“사부야, 정신차려! 뜬금없이 네가 왜 온달이야?”
그러나 개소문의 귀엔 팽무일의 말 따위는 들어오지 않았다.
“오너라! 내가 바로 온달이다!”
“정신차려! 사부 너 온달 아니라고!”
팽무일이 외치든 말든, 온몸을 땀으로 적신 개소문이 무쌍비도술을 펼치며 지도의 커다랗고 시커먼 구멍을 향해 전진하였다.
이미 개소문의 발끝엔 수나라 군사들의 시신이 쌓이고 쌓여 어지러웠다.
“이 어린놈이!”
지도 밖으로 나온 맹차가 개소문을 향해 벼락치듯 호통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미 무쌍비도술이 신기에 달한 개소문의 근처에도 다가오지 못한 채, 목에 검이 박혀 쓰러지고 말았다.
* * *
요동성을 둘러싼 수의 공세는 매우 거셌다.
사다리를 멘 군사들이 끝없이 성벽을 향해 달려들었고, 밧줄 끝에 갈고리를 멘 군사들도 성벽을 넘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들의 사다리는 성벽보다 짧았고, 밧줄을 걸고 올라오기도 전에 화살비에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정란과 운제가 성벽을 넘을 확실한 공성 병기였으나,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불에 탔고, 비루 역시 화염에 휩싸여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동차가 성벽을 파괴하기 위해 달라붙었으나, 돌로 성벽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었기에, 성벽은 결코 파괴되지도 무너지지도 않았다.
발석거와 포차의 공격 또한 요동성의 성벽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성문 파괴용 공성 병기인 충차는 돌아 들어가는 고구려 특유의 성문 구조로 인해 성벽 위에서 퍼붓는 기름과 불에 허무하게 타들어 갔다.
밤새 요동성 일대는 화염으로 대낮처럼 밝아 사각이란 없었다.
이에 어둠을 의지한 수의 공격은 불가하였고, 날이 밝을 때까지 죽음을 맞이한 수나라 군사의 수는 십만이 넘었다.
동이 터오자, 황제 양광은 자신의 계책이 실패하였음을 인정하며 퇴각을 명하였다.
“군을 물려라.”
짧게 명을 내린 황제 양광이 막사 안으로 들어가니, 수나라 군이 퇴각을 진행하였다.
지도를 통한 요동성 공략에 나섰던 장수들은 모두 전사하였고, 대다수의 공성 병기가 불에 타 새로 만들어야 했다.
* * *
“요동성을 고립시켜야겠소.”
장수들을 모아 놓고, 황제 양광이 새로운 계책을 내놓았다.
“지금부터 요동성 공략은 어영군을 지휘하여 내가 맡겠소. 그대들 십이군은 요동성과 연결된 인근 성들을 모두 함락하시오.”
좌장군 우문술이 요동성의 서쪽을, 우장군 우중문이 요동성의 동쪽을 공략하여 요동성과 인접한 성들을 모두 함락시키는 전술이었다.
“요동성을 함락시키는 것만 길이 아니오. 요동벌 이십여 성을 모두 함락시킨다면 제아무리 요동성이라도 더는 힘을 쓰지 못할 것이오.”
황제 양광의 명에 우문술과 우중문이 십이군을 나누어 요동성의 동과 서로 진격하였다.
* * *
해자에 뛰어들어 용맹을 펼친 개소문의 무용은 강이식에게도 전해졌다.
“무쌍비도술이라…….”
나지막이 중얼거린 강이식이 술과 고기를 대령시켜 황우와 함께 개소문 일행을 치하하였다.
“애썼다. 이곳은 비록 전장이나, 잠시 쉬도록 해라.”
엄하면서도 부드럽게 말하는 강이식의 모습에 개소문이 크게 감명받아 허리 굽혀 예를 표했다.
“감읍하나이다. 믿어주시는 것이옵니까?”
“애초에 간자로 여기지 않았다. 너의 벗들과 들거라.”
모두에게 술을 따라주고는 강이식이 떠나니, 팽무일이 냉큼 술을 들이켜며 말하였다.
“숱하게 고구려에 왔지만, 이처럼 고구려의 대장군이 술을 따라주는 호사는 처음이로세. 하하하. 과연 나의 공이 크긴 하구나! 하하하.”
입이 귀에 걸려 웃는 팽무일을 보며 야수와 쇼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당진평은 묵묵히 개소문과 공손향의 잔에 술을 따랐다.
당진평이 따라준 술을 가볍게 들이켜며 공손향이 물었다.
“당 장주는 어찌하여 공자를 따르기로 마음먹은 것이옵니까?”
당진평이 술을 입에 털어놓듯 들이켜며 답하였다.
“공녀님과 같소. 배신에 지쳐 믿고 모실 만한 이를 찾은 것뿐이오.”
이에, 고기를 찢어 입에 욱여넣던 팽무일이 거들었다.
“아무렴, 우리 사부가 배신은 모르지. 믿고 따를 만한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배신은 안 할 사부야. 머리가 나빠. 그렇고 말고.”
아마도 지난밤, 자신을 구하기 위해 해자로 뛰어든 것이 내심 고마웠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우리 사부는 총명하지 않아. 많은 단점 중 그게 가장 큰 단점이야. 하는 행동이 모두 대책이 없고 마음도 약해. 결단력이 부족하단 말이야.”
팽무일이 황제 양광을 사로잡고도 놓아준 일을 슬그머니 비난하자, 당진평과 공손향이 빙그레 웃었다.
“왜 웃어?”
팽무일이 기분 나빠 물으니, 당진평이 바로 답하였다.
“나는 공자가 황제를 놓아줄 것이라 예상했소. 아마도 공녀님도 예상했을 것이오.”
“뭐? 진짜야? 이것들 역시 미쳤군. 진짜 미친 거야?”
팽무일의 물음에 공손향이 웃으며 답하였다.
“이제 공자께선 황제에게 빚이 없으시니, 마음껏 기량을 펼치셔도 좋습니다.”
언제든 기회가 온다면 황제의 목을 취하란 뜻을 담고 있으니, 개소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개소문은 자신이 황제에게 빚이 있어, 결코 황제를 해하지 못하리라 여긴 공손향과 당진평의 총명함에 내심 탄복하였다.
또한 이를 알고도 믿고 따라준 공손향과 당진평이 고맙고 듬직하였다.
“그대들과 적으로 만났으나, 이제 우리는 벗이며 동지요. 앞으로 모든 일을 그대들과 논의하여 진행토록 하겠소.”
개소문이 솔직 담백하게 말하니, 술을 들이켜던 야수가 처음으로 빙그레 웃었다.
“나, 난. 너와. 적… 으로. 만난. 일 없다. 그러나… 벗은. 좋다.”
“뭐래? 이 버벅이가? 술이나 쳐 잡숴.”
기껏 야수가 속내를 밝혔으나, 팽무일의 지청구에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