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난공불락 요동성 (9)
날이 밝자, 무너져 내린 관풍행전이 햇살을 받아 무척이나 흉물스러웠다.
밤새 소동이 있었음에도 수나라 진영은 조용하였고, 요동성은 매우 분주하였다.
요동성 성주 고승은 개소문 일행을 고신 중에 있었고, 강이식은 수나라 군의 공격을 대비하여 성곽 방비에 주력하라 명하였다.
쇠사슬에 두 팔이 묶여 매달린 개소문 일행은 잠시 고신이 중단되자,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고승이 자리를 비우자 팽무일이 개소문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망할! 황제 놈만 잡아 왔어도 대접이 싹 달라지는 것인데, 빌어먹을 사부는 어찌 황제를 놓아준 게요?”
팽무일의 물음에 개소문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이에 팽무일이 더욱 화가 치밀어 욕을 내뱉으려 하니, 공손향이 입을 열었다.
“나는 황제를 놓아준 공자가 좋소.”
“뭐? 이 실성한 년이!”
팽무일이 욕설을 내뱉어도 공손향은 개의치 않고 미소 지었다.
“우리가 이렇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고구려 군사들이 우리를 매질해도 나는 공자가 좋소.”
“뭐? 매가 그리웠냐? 그럼 말을 하지. 내가 패줬을 텐데.”
팽무일이 비아냥거리니, 공손향이 호호 웃었다.
피로 물든 얼굴로 웃으니, 무척 기괴해 보였다.
이에 팽무일이 섬뜩한지 몸서리를 치니, 당진평이 히죽 웃으며 말하였다.
“한자리할 줄 알았지.”
“뭐?”
팽무일이 되물으니, 당진평이 말을 이었다.
“태자의 뜻을 따라 황후를 시해하면 한자리하리라 믿었었지. 헌데, 황제가 되니, 오히려 나를 죽이려 하더군.”
“그게 뭐가 어떻다고!”
팽무일이 버럭 소리 지르니, 당진평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하였다.
“공자는 그대들을 찾고자 천하를 떠돌았고, 애써 잡은 황제마저도 의를 지켜 살려주었지. 공자의 행동은 필경 잘못되었고 의심과 오해를 불러올 것이나, 나는 의를 지키는 공자가 좋소. 믿고 따를 만한 주군이라 생각하오.”
“이것도 실성했나? 믿고 따르긴 개뿔! 우린 이제 이렇게 죽는 거라고! 부귀영화를 누릴 기회였는데… 망한 거라고!”
팽무일이 악을 쓰며 외치니, 보다 못한 야수가 입을 열었다.
“시. 끄러.”
“뭐, 이 버벅이가! 말이나 똑바로 해!”
이에, 공손향이 차분히 말하였다.
“황제를 잡아다 바친다고 하여, 전쟁이 끝나리란 법도 없습니다. 황제의 목이 떨어지면, 백만대군이 물러날 것이라 생각하시나요? 잡았던 황제를 놓아준 것은 아쉬우나, 공자의 결정이니 미련은 없습니다.”
“아주 단체로 쳐돌았군. 제길, 요동성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었는데. 황제를 놓아주고 여긴 왜 들어온 거야? 어휴… 미치겠네.”
투덜거리면서도 팽무일은 더 이상 개소문을 노려보진 않았다.
팽무일마저 입을 다무니 잠시 침묵이 흐르고, 정막을 개소문이 깼다.
“나는 그가 군대를 돌려 멈추길 갈망하고 있소. 허나, 이는 나의 바람일 뿐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오. 나를 살린 황제를 해할 수 없었소. 모두가 나의 나약함 때문이오. 그대들에겐 미안하오.”
“됐어! 미안하면 다야? 이제 우린 다 죽는다고. 사이 좋게 죽기나 하자고.”
팽무일이 거칠게 말하였으나, 조금 전과 달리 언성은 높이지 않았다.
이에, 당진평이 개소문을 향해 고개 돌려 말하였다.
“천하는 하나요. 천하인도 하나요. 수와 고구려가 나라를 달리하나, 우리는 천하인으로 하나가 될 수 있소. 우리가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면, 나는 공자와 하나되어 천하를 도모할 것이오.”
“개소리.”
팽무일이 비아냥거리자, 개소문이 엄히 말하였다.
“제자는 진심이 담긴 말에 욕은 하지 마라.”
“나, 원… 별.”
팽무일이 입을 삐죽 내밀었으나, 개소문은 전혀 개의치 않고 당진평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천하가 하나란 것은 중원인의 관점일 뿐, 우리 고구려는 결코 고구려 이외의 곳과 하나 될 생각이 없다오.”
“냉정하네.”
팽무일이 비아냥거리니, 개소문이 그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그래, 냉정하지. 허나, 우리 고구려는 우리와 다른 이들을 받아들임에 망설임이 없다네. 세상 그 누구도 고구려인이 되고자 한다면, 언제든 받아들여 함께할 수 있다네.”
“그거, 사부 생각이오? 아니면, 고구려 태왕을 포함한 모든 고구려인들의 공통된 생각이오?”
팽무일의 물음에 개소문이 답하려 할 때, 강이식이 고승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옥 안으로 들어오며 말하였다.
“네놈들이, 백만대군 속에서 수의 황제를 사로잡았다가 놔준 놈들이로구나. 참 재주도 좋다.”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정도로 강이식의 표정은 담담했다.
이에 고승이 개소문 일행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수의 간자는 아닌 듯한데, 잡았던 황제를 어찌하여 놓아준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실성한 놈들이 장난질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 정체가 뭐랍니까?”
강이식의 물음에 고승이 어깨를 으쓱하였다.
“아직 답이 없습니다.”
이에, 강이식이 개소문 일행을 살피다가, 그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당진평에게 다가가 물었다.
“너는 고구려인이 맞느냐?”
이에, 당진평이 망설이지 않고 답하였다.
“천하인이라 생각하였으나, 지금부터는 고구려인으로 생각하고 살 것이오.”
당당하면서도 주저함이 없으니, 강이식은 실성한 사람 보듯 당진평을 빤히 바라보다가 연약해 보이는 공손향에게 다가가 물었다.
“오랜만에 공녀를 뵙는구려. 수의 황제와 사이가 틀어지신 게요? 아니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오?”
“나는 이제 수나라 백성이 아니오.”
“그럼, 여전히 북주를 섬기는 게요?”
“아니오.”
“허허… 공녀께서 섬길 만한 나라가 또 생긴 모양이신가 보구려. 어디요?”
이에 공손향이 머뭇거림 없이 답하였다.
“고구려요. 나는 이제부터 고구려인이오.”
“뭐? 뭐요? 고구려인? 당신이 입으로 정한다고 그게 막 되는 것은 아닌데… 이것 참… 허허.”
강이식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허허 웃으며 야수 앞으로 발을 옮겼다.
“너와 나는 참으로 악연이 깊다. 그렇지?”
야수가 답이 없으니, 강이식이 쇼락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자는 온달 아우를 돕던 장수인데. 허허, 이것 참…….”
보면 볼수록 이상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묘한 조합이었다.
끝으로 가장 어려 보이는 개소문 앞에 선 강이식이 물었다.
“넌, 이름이 무엇이냐?”
“개소문이다. 연개소문.”
그동안 신분을 밝히지 않던 개소문이 조금도 두려움 없이 답하니, 고승이 놀라 입을 떡하니 벌렸고 강이식도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하였다.
한참을 멍하니 개소문만 바라보던 강이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녕, 네가 개소문이더냐?”
“그렇다. 나는 막리지의 장자, 연개소문이다.”
막리지 연태조의 죽음을 개소문이 아직 모르는 눈치였기에, 강이식이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래… 네가 갓쉰동이었구나. 연개소문… 그래… 너였구나.”
* * *
개소문의 정체를 파악한 강이식과 고승은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상의하였다.
“대장군, 막리지의 장자라면… 태왕 폐하께서 막리지 승계를 명하신 바 있는데… 어찌하면 좋습니까?”
고승의 물음에 강이식도 난처한 듯 잠시 눈만 껌벅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일단, 개소문이 황제를 사로잡았다가 풀어 준 일을 함구하도록 군사들 입단속을 시키는 게 좋겠습니다.”
고승도 강이식의 말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그게 좋겠지요? 소문 돌아서 해만 될 터이니…….”
“아직 어려 전쟁을 장난으로 여긴 모양입니다. 황제를 잡았다가 놓아주다니, 기도 안 찰 일입니다. 허허… 어찌 되었든 수의 간자는 아닌 것이 분명하니, 풀어주도록 합시다.”
고승도 강이식의 말에 동의하였으나, 황제 양광을 풀어준 개소문의 행동이 괘씸하여 한소리 하였다.
“간자는 아니니 풀어주는 것도 좋고, 이 일을 비밀로 부침도 좋으나, 저 어리고 어려 멍청한 자식에게 세상 물정 좀 가르쳐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에, 강이식도 이견이 없는지 바로 황우를 불렀다.
“황우 네게 맡길 한심한 인생들이 있다. 해자 파는 일에 투입하고, 수나라 군이 밀려들면, 가장 앞세워 내보내거라.”
황우가 강이식의 명을 받아 개소문 일행을 옥에서 꺼내 해자 공사에 투입하였다.
* * *
황제 양광은 결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으나, 내뱉은 말은 번복하면 그만이다. 이미 고구려의 대장군 강이식도 나를 기만하여 거짓으로 투항을 약조하였으니, 이제 서로가 비긴 셈이다.”
혼잣말하며 스스로에게 변명을 한 황제 양광은 수나라 진영 중심에 막사를 세우고 삼엄히 경계하라 명하였다.
그리고 관풍행전 내, 환관과 궁녀를 모두 산 채로 생매장하고는 잡일 보는 일꾼과 군사들마저 모두 목을 베었다.
“당진평의 수하들이 이 속에 숨어 있었던 거야. 모두 죽여야 한다.”
의심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의심하여 죽이니, 오후가 되기 전까지 이천여 명의 목숨이 끊어졌다.
이에 겨우 한숨 돌린 황제 양광이 장수들을 모두 자신의 막사로 불러 명하였다.
“밤을 새워 삼 일 내로 지도를 완공하시오. 땅밑에 길이 나면 전군을 동원하여 총공세를 펼칠 터이니, 그대들은 삼 일 뒤 요동성 성벽 위에 깃발을 올리도록 하시오!”
독기 오른 황제의 명에 따라 장수들이 지도 공사를 독려하니, 땅 밑에 길을 내는 속도가 매우 빨리 진행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틀째 되는 밤에 요동성 성벽 아래까지 지도가 닿으니, 황제 양광이 기뻐하였다.
“좋소! 아주 좋소! 더욱 속도를 내어 성안까지 길을 내도록 하시오! 내일 밤, 저 오만방자한 고구려의 기를 꺾도록 합시다.”
이에 언제든 땅 위로 길이 열리는 순간 빠르게 위로 오르기 위해 수나라 군사 십만여 명이 각기 지도 아래로 스며들듯 진입하여 대기하였다.
요동성 성벽 아래까지 뚫린 지도는 고구려 군에게 들키지 않도록 소리를 죽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에 요동성에선 조금도 반응이 없으니, 황제 양광이 매우 기뻐하였다.
“필경, 눈치채지 못한 게야. 이제 와 눈치 챈들 나의 지도를 막기란 불가하다. 요동성 안으로 수십 개의 지도가 열러 사방에서 나의 군사들이 솟아오르면 고작 오만 군사가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더불어, 대군이 요동성을 에워싸고 일시에 총공세를 펼칠 채비를 마치니, 드디어 삼 일째 밤이 찾아왔다.
환하게 횃불을 밝힌 수나라 대군이 일시에 요동성을 향해 총공세를 펼치며, 지도 공사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였다.
전장의 거인 정란이 굉음을 내며 다가왔고, 충차와 동차도 성벽에 바짝 붙었으며, 운제와 비루도 다시 등장하였다.
이에 맞서 고구려 군도 여장에 의지해 화살을 날리고 포차와 발석거로 응전하였다.
또다시 요동성 주위가 화염에 휩싸이며 수나라 군사들의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물러서지 마라! 이제 곧 함락될 것이다!”
이 한 번의 공세로 요동성을 함락시키고자 황제 양광이 진 앞에 말을 타고 나와 독려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어두운 땅밑에서 지도 공사를 하던 수나라 군사들에게 빛이 쏟아져 들어오며 땅 위로 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지도가 열렸다!”
“와아아!”
우렁찬 함성과 함께 지도 속에 숨어 있던 수나라 군사들이 빛을 향해 일시에 뛰어나오기 시작하였다.
요동성 안으로 이어진 스무 개의 땅밑 길이 열리자, 대기하던 군사들도 지도 안으로 진입하였고 황제 양광은 기뻐 웃음을 멈추지 못하였다.
“멈추지 마라! 모두 진입하라!”
“요동성을 함락하라! 성벽 위에 깃발을 올려라!”
장수들이 칼을 빼어 들고 끝없이 지도 안으로 진입하는 군사들을 독려하였고, 성을 둘러싼 공세도 더욱 기세가 올랐다.
백만 대군의 함성이 요동벌을 뒤흔들었고, 지도 속에서도 돌격을 알리는 함성이 끝없이 이어졌다.
“갓쉰동, 이번엔 내가 너를 붙잡아 놓아주겠노라. 하하하.”
요동성 함락을 앞둔 황제 양광의 마음이 들떠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