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난공불락 요동성 (8)
나무로 지어진 관풍행전의 화염은 마치 봉화와도 같아 멀리서도 볼 수 있었다.
“황제 폐하를 모셔라!”
“불길을 잡아라!”
관풍행전의 불길을 잡기 위해 수나라 군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개소문과 당진평, 야수, 팽무일은 수나라 군사들과 섞여 관풍행전 안으로 들어서고는 곧장 황제의 처소가 있는 이층으로 방향을 잡았다.
불길이 시작된 이층에선 아직 내려온 이들이 없었다.
“저 계단!”
관풍행전의 곳곳을 잘 아는 개소문이 소리쳤다.
연기와 화염으로 가득한 계단은 한 치 앞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개소문 일행은 망설임 없이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때, 황제를 구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온 근위장 장형과 우익위장군 설세웅이 소리쳐 명하였다.
“고구려의 간자가 불을 냈을지 모른다. 서둘러 폐하를 모셔라!”
“머뭇거리는 놈들은 목을 벨 것이다!”
불길 속으로 뛰어들기를 망설이던 군사들이 장형과 설세웅의 명에 계단으로 달려들자, 개소문 일행과 엉키기 시작하였다.
“이 빌어먹을 것들이 황제를 구하러 가네.”
팽무일이 자신을 앞질러 오르는 군사의 목덜미를 잡아 계단 아래로 패대기치고는 인상을 구겼다.
계단 아래로 나뒹군 수나라 군사가 팽무일을 가리켜 소리쳤다.
“수상한 놈이다!”
이에, 주위 군사들이 팽무일을 의심해 칼을 뽑아 드니, 야수가 두 자루 박도를 휘둘러 이들의 목을 베었다.
“이… 놈들이. 황제를… 구. 하기… 전에. 속히. 황제를. 찾아라!”
야수가 연신 달려드는 수나라 군사들의 목을 베며 말하니, 개소문과 당진평은 머뭇거리지 않고 계단을 뛰어올랐다.
“나도 가자고!”
팽무일도 따라 오르려 하니, 야수가 그의 앞을 박도로 막으며 말하였다.
“내려… 올. 때까지… 나와 함께. 지키자… 이. 곳을.”
“이런 제길… 좋아! 일단 버티며, 황제를 잡아오기만 기다려 보자고!”
팽무일도 몸을 돌려 파천신검 초식을 펼쳐 계단을 막으니, 수나라 군사들의 시신이 불타는 계단에 쌓여 갔다.
이에 장형이 거리를 두고 소리쳐 명하였다.
“군사들을 더 불러 오너라! 서둘러라!”
장형과 달리 설세웅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계단으로 달려와 야수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깡!
야수의 박도와 설세웅의 검이 부딪쳐 불꽃을 일으켰다.
“죽. 는다!”
야수가 짧게 외치며 박도를 내리치니, 설세웅이 급히 검을 들어 머리를 지켰다.
깡!
야수의 힘에 검이 밀리고, 설세웅이 계단 아래로 굴렀다.
그러나 설세웅은 이내 곧 몸을 일으켜 다시 계단을 뛰어올랐다.
“설 장군! 몸을 숙이시오!”
멀리서 장형의 외침이 들리자, 설세웅이 급히 몸을 숙였다.
휙! 휙! 휙!
설세웅의 머리를 화살 십여 대가 스쳐 날았다.
“파천신검!”
팽무일이 날아든 화살을 파천신검의 초식을 펼쳐 모두 떨어뜨리고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수나라 군사를 발로 걷어차 날려 버렸다.
팽무일은 그간 파천신검의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에 방어만큼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이 순간에도 야수가 쉼 없이 박도를 휘둘러 수나라 군사들의 머리를 쪼개고 베기를 반복하니, 그의 발밑에는 시신들이 쌓여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계속 밀어붙여라! 고작 두 놈이다!”
장형이 독려하고, 정신을 가다듬은 설세웅이 시신을 밟으며 야수에게 달려들었다.
“또. 너, 너로구나.”
집요히 달려드는 설세웅에게 야수가 옅은 미소를 짓고는 맹렬히 박도를 휘둘렀다.
* * *
이층에 오른 개소문과 당진평은 연기와 불길로 시야가 가려져 발을 멈추었다.
“황제의 처소가 어디요?”
당진평의 물음에 사위를 구분하기 위해 개소문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온통 연기와 화기로 구분이 어려웠다.
이때, 불길 속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계단은 이쪽이옵니다!”
황제 양광을 모시는 호위시랑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불길을 뚫고, 환관과 호위들이 황제 양광을 불길에서 보호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앞서 길을 열던 호위시랑이 계단 앞에 우뚝 선 개소문과 당진평을 발견하고는 바삐 명을 내렸다.
“무엇하느냐! 폐하가 내려가실 수 있도록 길을 열어라!”
이에, 개소문이 대답도 없이 달려들어 호위시랑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호위시랑이 쓰러지니, 뒤따라오던 호위들이 놀라 황제 양광의 앞을 지키며 검을 빼어 들었다.
그러나, 이들을 향해 당진평이 몸을 날려 손날을 휘둘렀다.
거침없이 내리치는 손날에 호위들의 목이 꺾이고, 머리가 으스러졌다.
검도 뽑지 않은 당진평의 기괴한 무예에 황제 양광이 놀라 뒤로 물러서니, 어느새 달려온 개소문이 손을 뻗어 황제의 목을 쥐었다.
“황제, 그대가 물러나면 우리가 위험해지오.”
“갓, 갓쉰동!”
황제 양광이 놀라 부르짖으며 버둥거렸다.
그러나 단단히 목을 잡혀 조금도 몸을 뺄 수 없었다.
“살수다! 폐하를 구하라!”
황제를 구하기 위해 호위들과 환관들이 달려들었으나, 당진평의 쌍수에 시신만 늘릴 뿐이었다.
“잡았으니, 일단 내려갑시다!”
황제 양광을 차갑게 바라보며 당진평이 개소문에게 말하였다.
이에, 개소문이 황제 양광의 목을 놓아주며 말하였다.
“황제, 저항해도 소용없소. 따르시오.”
스스로 따라오라 말하고 개소문이 몸을 돌리니, 당진평이 히죽 웃으며 황제 양광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보통 영민한 황제가 아니신데, 만만히 보면 안 되지요.”
당진평에게 목덜미를 잡힌 황제 양광이 질질 끌려오자, 개소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당진평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말하였다.
“서두릅시다. 아래에서 기다리는 이들이 지쳐가고 있소.”
이에 개소문도 고개를 끄덕여 답하고는 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 * *
끝없이 밀려드는 군사들을 파천신검을 펼쳐 막으며 팽무일이 부르짖었다.
“도대체 언제 내려오는 거야!”
그의 옷에 불이 붙고, 열기에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숨조차 고르기 힘들 정도로 연기가 자욱했으며, 머리 위로 불꽃이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야수는 달려드는 수나라 군사들을 베고 또 베었고, 살세웅은 계단 아래로 나뒹굴기를 반복하면서도 악착같이 야수에게 달라붙어 길을 열고자 했다.
궁수들의 화살이 쉴 새 없이 날아왔으나, 설세웅은 이미 피하기를 포기해 그의 등에는 세 대의 화살이 박혀 있었다.
“계속 밀어붙여 길을 열어라! 폐하를 모셔야 한다!”
설세웅이 목이 터져라 외치니, 계단 아래에 모여든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뛰어올랐다.
“끝도 없구나!”
팽무일이 비 오듯 땀을 흘리며 파천신검으로 단단히 방어를 펼쳐 막았다.
그리고, 야수가 박도를 휘둘러 베고 또 베기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체력은 한계가 있고, 불길이 발끝과 머리를 어지럽히니 점차 힘이 풀려갔다.
악착같이 달려들기를 반복하던 설세웅의 검이 마침내 야수의 어깨를 찔렀다.
“컥!”
짧게 신음을 토한 야수가 이를 악물고 왼손의 박도를 휘둘러 설세웅의 이마를 노렸다.
이에 설세웅이 급히 한발 물러서니, 팽무일이 냅다 달려들어 발길질을 날렸다.
팽무일의 발길질에 가슴팍을 채인 설세웅이 계단 아래로 날아갔고, 그 사이로 수나라 군사의 창들이 팽무일의 몸을 찔러왔다.
“제길!”
팽무일이 단단히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며 호흡을 가다듬어 검을 휘둘러 창들을 베었다.
바삐 펼친 파천신검의 방어 초식이었으나, 그 위력은 상당하여 한 치의 틈도 없이 몸을 지킬 수 있었다.
“활을 쏴라!”
멀리 떨어져 장형이 궁수들에게 명하니, 팽팽히 시위를 당긴 활들이 화살을 뿜어낼 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계단 위 연기 속에서 황제 양광의 목소리가 울렸다.
“멈추어라!”
팽팽히 긴장하였던 시위가 풀리고, 궁수들이 연기 속으로 시선을 옮겼다.
수나라 군사 복색을 한 개소문이 연기를 뚫고 계단을 내려와 팽무일과 야수의 뒤에 섰고, 황제 양광의 목덜미를 쥔 당진평이 뒤따라 내려왔다.
“폐, 폐하!”
설세웅이 놀라 황망히 소리치니, 황제 양광이 힘없이 웃으며 말하였다.
“우습게 되었구나.”
“폐하!”
“길을 열라!”
당진평에게 목덜미를 잡힌 황제 양광이 제법 위엄 있게 명하였다.
볼품 사나운 몰골이었으나, 황제의 명은 지엄하였다.
앞을 막은 군사들이 슬글슬금 뒤로 물러나 길을 열었다.
이에, 개소문 일행은 황제 양광을 가운데 두고 천천히 이동하여 관풍행전 밖으로 나왔다.
백십삼만 대군이 펼친 진 앞에 자리한 관풍행전 밖으로 나온 개소문 일행은 하늘의 별보다 많은 수나라 군사들의 포위망에 숨이 턱 막혔다.
“이건… 파천신검 할아버지를 펼쳐도 안 돼.”
팽무일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니, 당진평이 빙그레 웃었다.
“황제, 말을 대령하라 명하시옵소서.”
당진평이 나지막이 속삭이니, 황제 양광이 소리 높여 명하였다.
“말을 대령하라!”
이에 군사들이 말을 끌고 왔고, 그사이 불길에 휩싸인 관풍행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콰과광!
재와 불꽃이 휘날렸으나, 개소문 일행을 에워싼 포위망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말에 오릅시다.”
당진평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니, 개소문과 야수, 팽무일이 몸을 날려 말 위에 올랐다.
이어서 당진평이 황제 양광의 목덜미를 쥔 채 말 위에 오르니, 황제 양광이 다시 명하였다.
“길을 열라!”
망설이는 장수들과 군사들에게 당진평이 크게 소리쳤다.
“네놈들이 정녕, 황제의 목이 부러지는 꼴을 보고 싶은 것이로구나!”
이에 바다가 갈라지듯 대군이 갈라져 길을 내어주니, 개소문 일행은 망설임 없이 요동성을 향해 말을 몰았다.
“쫓아오지 말거라! 황제의 목을 꺾을 것이다!”
당진평의 외침에 궁수들이 주춤하였고, 추격하려던 장수들이 멈춰 섰다.
* * *
요동성과 수나라 진영은 고작 이천 보였다.
말을 달려 지척이었으나, 이천 보의 거리는 다양한 변수를 내포하고 있었다.
“갓쉰동!”
요동성이 점점 가까워지자, 당진평에게 목을 잡힌 황제 양광이 필사적으로 개소문을 불렀다.
이에 개소문이 답하지 않으니, 당진평이 히죽 웃었다.
“황제, 곧 요동성이라오. 성안에 들어가 편히 담소를 나눕시다.”
요동성에서도 관풍행전의 불길을 지켜보았는지, 성벽 위에 횃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갓쉰동!”
황제 양광이 또다시 개소문을 불렀다.
그러나 개소문은 등도 돌리지 않은 채 말을 몰아 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쇼락이 공손향과 함께 말을 몰아 오더니, 어느새 개소문 일행과 합류하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곧 요동성입니다.”
공손향이 웃으며 말하였다.
그녀의 말처럼 이제 곧 요동성 앞에 당도하게 될 터라, 황제 양광이 마침내 목놓아 울며 개소문을 불렀다.
“갓, 갓쉰동… 그대는 나를 살렸고, 나 역시… 그대를 살렸다. 나는 아비와 같은 스승 양소를 내치고 그대를 지켰음에도, 그대는 어찌 그대를 해하라 정보를 건넨 당진평과 함께 나를 죽이려 하는가?”
이에, 개소문이 말을 멈추고 천천히 몸을 돌려 황제 양광을 바라보았다.
“갓쉰동, 살려주시게. 그대는 이미 나를 살렸으니, 한 번 더 살릴 수 있지 않은가? 돌아가겠네. 대군을 돌리겠네. 전쟁은 이제 없고, 천하는 평화로울 것이네.”
울먹이는 황제 양광을 개소문이 말없이 바라보니, 팽무일이 급히 소리쳤다.
“사부 믿지 마!”
멀리 수나라 진영에서 군사들이 몰려오고 있었고, 요동성의 성문도 열리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개소문이 결심을 굳혔는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돌아가 성군이 되시오.”
“사부!”
팽무일이 놀라 소리쳤으나, 이미 예상했다는 듯 당진평은 말없이 황제의 목덜미를 놓아주었다.
“나의 의원이 처방을 내렸소. 황제, 가시오!”
당진평에게서 풀려난 황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나라 진영을 향해 내달리니, 팽무일이 칼을 뽑아 들고 뒤를 쫓았다.
이에, 야수가 박도를 뽑아 들고 말을 몰아 팽무일의 앞을 막아서며 단호히 말하였다.
“마, 마지막. 의. 의를 지켜… 서로… 목숨을. 주고받았다. 따. 르자.”
그사이 황제 양광은 죽을힘을 다해 달렸고, 어느새 쫓아온 수나라 군사들과 가까워져 있었다.
“제길! 제길! 망할!”
팽무일이 욕설을 내뱉으며 개소문을 노려보니, 공손향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대군이 쫓아 옵니다. 서두르시지요.”
마치 개소문이 황제 양광을 죽이지 못하리라 예상한 듯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