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난공불락 요동성 (7)
황우의 지휘 아래 요동성 백성들은 외성과 내성 사이의 해자를 파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백만 대군을 이끈 수의 황제 양광이 지도를 만드는 것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기에, 공사 속도가 더뎠다.
“제길! 그렇게 굼떠서 어떻게 놈들의 땅굴을 막냐고!”
공별의 재촉에 황우가 느릿느릿한 말투로 답하였다.
“어디로 굴이 뚫릴지 모르니, 내성 앞을 모두 파서 해자를 만들어야 하는 거야. 당연히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고.”
“아니, 그렇게 당연해서는 우리가 몽땅 죽는다고! 속도 좀 내라고!”
“사람 수는 정해져 있고, 한 사람이 하루 팔 땅은 한계가 있는데 어찌 더 속도를 내나.”
“그렇게 여유로울 때가 아니라고! 제길! 이러다가 다 죽어! 차라리 항복하는 게 낫지… 에이!”
공별이 괜히 성질을 부리니,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강이식이 혀를 찼다.
“허허, 이 사람 공별. 아무리 막막하다고 하여 어찌 그런 소리를 하는가? 사기를 떨어뜨려서는 아니 되네.”
이에, 공별이 뭔가를 깨달은 듯 기뻐 소리쳤다.
“아! 맞아! 그거야! 그거!”
“뭐가 그거인가?”
난데없이 기뻐 외치는 공별에게 강이식이 의아해 물었다.
이에 공별이 대뜸 답하였다.
“항복이옵니다. 투항!”
“뭐? 뭐라?”
강이식이 기도 안 차 되물으니, 공별이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아 말하였다.
“항복하면 되옵니다. 항복하면 된다고요! 하하하.”
강이식과 황우는 실성한 듯 소리치는 공별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한참을 웃은 공별이 살며시 다가와 소리 죽여 말하였다.
“황제에게 투항하겠다고 말하여 시간을 끄는 겁니다. 그사이 우리는 해자를 완성하는 거고요.”
이에, 강이식이 허허 웃었다.
“허허, 이 사람… 나는 그것도 모르고… 울컥하여 자네 목을 분지를 뻔하였네.”
* * *
다음 날, 요동성에 삼족오 기가 내려가고 투항을 알리는 백기가 올라갔다.
이에 황제 양광이 크게 당황하여 관풍행전에 장수들을 불러들였다.
“강이식은 결코 투항할 장수가 아니옵니다.”
우문술이 먼저 입을 여니, 우중문이 이에 이견을 달았다.
“아니옵니다. 적은 고작 오만에 불과하고 우리는 백만이 넘는 대군이옵니다. 강이식이 제아무리 외골수라고 하여도, 요동성 내의 민심과 수하 장수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기에, 투항은 당연지사이옵니다.”
우중문의 말이 꽤나 그럴싸한지 황제 양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의 대군을 막기란 불가한 일이지. 투항을 선택함이 현명한 판단인 게야. 강이식 같은 장수는 곁에 두어 나쁠 것 없다.”
강이식의 무력을 익히 잘 아는 황제 양광이었기에, 그의 투항을 내심 반겼다.
“사람을 보내어 언제 성문을 열 것인지 묻거라!”
보통은 투항하는 쪽에서 사람을 보내어 의사를 밝히는 것이 먼저였으나, 황제 양광은 너무도 기뻐 기다릴 수 없었다.
“소장이 다녀오겠나이다.”
이에 설세웅이 나서니, 황제 양광이 흡족해 크게 웃었다.
“그래! 강이식의 머리에 한 방 먹인 그대라면 믿을 수 있지. 하하하.”
이때, 우문술의 아들 우문사급이 앞으로 나서며 청하였다.
“설세웅 장군께서는 강이식을 대적하여 그의 투구를 부러뜨렸기에, 강이식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사옵나이다. 저들이 투항을 고려한다면, 이를 잘 다독여 일이 되게 해야 하오니, 설세웅 장군보다 소장이 다녀오겠나이다.”
황제 양광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문사급의 말이 지당하였다.
“그래, 네가 다녀오거라!”
황제 양광의 명이 떨어지자, 우문사급이 백색의 피풍의를 휘날리며 요동성으로 말을 몰아나갔다.
“고구려의 대장군 강이식을 뵈러 왔소이다!”
요동성 앞에 말을 세운 우문사급이 외치니, 공별이 성벽 위에 모습을 드러내어 답하였다.
“대장군을 대신하여 내게 말하시오!”
이에 우문사급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불쾌한 듯 소리쳤다.
“그대는 직책이 어찌 되는가?”
“투항을 결심한 이상, 고구려의 직책이 무슨 의미가 있소?”
공별의 말에 우문사급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였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허면, 그대들은 정녕 투항을 결심한 것인가?”
“투항을 결심하지 않았다면, 뭐하러 사기 떨어지게 백기를 내걸겠소?”
오히려 공별이 되물으니, 우문사급이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허면, 언제 성문을 열 것인가?”
“그대들이 우리를 해하지 않는다고 약조를 해야 성문을 열지 않겠소?”
“투항한 자들을 어찌 해하겠는가? 당장이라도 성문을 여시게!”
우문사급이 좋은 말로 말하니, 공별이 허허 웃었다.
“말이야 그럴싸하지만, 약조를 받아오셔야겠소이다. 일단 대군을 십 리 밖으로 물리시면 성문을 열겠소이다.”
“진을 십 리나 물리는 것은 무리다.”
“고작 뒤로 물러나는 것도 못 하면서, 어찌 우리를 해하지 않는다 약조하는 것이오?”
이에 우문사급이 잠시 고심하더니, 소리쳐 말하였다.
“황제 폐하께 아뢰어, 진을 일천 보 밖으로 물리겠다. 그럼 투항하겠느냐?”
“아니지… 일천 보는 너무 적소. 그걸로 우리를 해하지 않는다고 어찌 믿겠소?”
우문사급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투항하겠다고 말하고도 투항하지 않으면 그땐 어찌할 것이냐?”
“그땐, 다 죽이면 되지 않소? 백십삼만 대군이 뭐가 두렵다고 못 믿는 게요? 투항하겠다는 약조는 이 백기가 증거 아니오?”
공별이 백기를 들어 마구 휘두르니, 우문사급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황제 폐하께 아뢰어, 진을 이천 보 밖으로 물리겠다. 약조가 되겠느냐?”
“일단 진부터 물리면 약조로 받아들이겠소이다!”
공별의 대답에 우문사급이 만족해 크게 기뻐하며 관풍행전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진을 이천보 밖으로 물리면, 해치지 않겠다는 약조로 받아들여 성문을 열겠다 하옵니다.”
이에 우중문이 기도 안차다는 듯 우문사급을 꾸짖었다.
“너는 어찌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는가! 투항하겠다면, 성문을 먼저 여는 것이 순서가 아닌가!”
이에, 우문술이 아들을 비호하였다.
“우리가 해칠까 두려워 약조해달라는 것 아니오! 위험을 무릅쓰고 단기로 요동성을 다녀온 장수에게 어찌 이리 함부로 말하는 것이오? 그렇게 못마땅하면 장군이 손수 다녀오시면 되지 않소!”
“뭐라?”
우문술과 우중문이 서로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이니, 황제 양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에, 우문술과 우중문이 정신 차려 급히 입을 다물었다.
“보시오!”
황제 양광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였다.
“요동성 성문이 열리지 않으면, 다시 지도로 함락하면 그만이오. 허니! 진을 이천 보 밖으로 물려, 저들이 우리를 믿고 성문을 열도록 합시다.”
황제 양광의 명이 떨어지니, 수나라 진영이 바빠졌다.
백십삼만의 대군이 진을 유지한 채 이천 보 밖으로 물러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먼저, 요동성의 포위를 풀고, 진을 갖춘 채 각 대와 단 단위로 물러나야 했다.
대군이 낙양을 떠날 때도 진을 갖춰 출병하니, 열흘이나 걸렸었다.
여기에 더해 황제 양광이 고구려 군에게 얕보이지 않도록 질서정연하게 진을 유지한 채 물러나라 명하니, 고작 이천 보 밖으로 진을 물리는 데 나흘이나 걸렸다.
진을 다시 갖추는 사이, 땅 밑에 길을 내는 지도 공사가 중단되었고, 요동성의 해자 공사는 밤을 새워 진행되었다.
정확히 이천 보 밖으로 물러남을 파악한 우문사급이 다시 요동성 앞으로 말을 몰아 나왔다.
“이천 보 밖으로 물러났다. 어서 성문을 열거라!”
우문사급의 호령에 이번에는 고구려의 대장군 강이식이 직접 성벽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너냐?”
강이식이 대뜸 물으니, 우문사급이 매우 당황하였다.
“그렇다. 나다!”
“그래, 너구나. 네놈이 반란을 일으킨 나의 부장과 꿍꿍이를 꾸몄구나. 그래, 너였어.”
강이식의 눈썹이 꿈틀거리고, 얼굴이 노기로 가득해 무척이나 살벌하였다.
‘아니, 저 호랑이 수염을 한 놈이 도대체 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인가?’
오금이 저리면서도 우문사급이 급히 머릿속을 정리하는 사이, 강이식이 다시 말하였다.
“가라.”
“뭐, 뭐라?”
“가라고.”
“아니, 이놈들이! 투항하겠다고 약조를 하고 어찌 어기려는 것이냐?”
우문사급의 물음에 강이식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 이놈 봐라. 아주 맹랑한 놈이로고. 어린놈의 자식이 겁 없이 어디서 감히!”
이에 우문사급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거짓 투항한 것이냐? 간교하도다!”
“거짓 투항이라니, 터무니없는 소리.”
“허면?”
“내가 설세웅에게 맞아 누워 있는 사이 나의 부장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놈이 네놈과 짜고 투항을 꾸민 것 아니더냐? 어디서 수작질이냐!”
강이식이 오히려 우문사급을 탓하니, 기가 막힌 우문사급이 아직도 성벽 위에 펄럭이는 백기들을 가리켰다.
“저 백기들은 무엇이냐?”
“이거? 반란을 진압하느라 바빠서 아직 안 뽑았네. 뽑으면 되지.”
대수롭지 않게 답한 강이식이 소리쳐 명하였다.
“당장 백기들을 뽑고 삼족오 기로 갈아라!”
“감히 황제 폐하를 능멸하느냐? 투항하지 않는다면 네놈들을 모두 도륙내겠노라!”
“이놈아, 내가 지금 황제랑 이야기하고 있는 거냐? 네놈이 황제야? 이놈이 역적이로세. 내가 너를 능멸하였지, 언제 황제를 능멸하였느냐? 이놈이 아주 황제를 갈아치울 놈이로고. 어디 자신 있으면 함락시켜 보던가.”
“뭐, 뭐라?”
말문이 막힌 우문사급이 이를 갈며 돌아와 황제 양광에게 아뢰었다.
“요동성에서 반란이 일어나, 그들이 투항을 진행하였으나… 강이식이 그들을 진압하고 저항하려 하나이다.”
이에 우중문이 크게 노해 버럭 소리쳤다.
“이 망할 놈의 자식이! 고구려의 잔꾀에 속아 시간만 허비하였구나!”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목을 칠 기세였기에, 우문술도 아들을 구명하기 위해 나섰다.
“황제 폐하께선 실수가 없는 법! 어디 감히 그대가 황제 폐하께서 내린 명을 허투로 여겨 책망하는가!”
진을 물리는 결정은 황제 양광이 내렸기에, 우문술이 이처럼 말하니 우중문의 안색이 창백히 변하였다.
“뭐, 뭐라… 내가 어찌 감히…….”
이에, 침묵을 유지하던 황제 양광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만… 그만 하시오.”
모두가 머리 숙여 정숙을 유지하니, 황제 양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반란이 일어나, 투항하려 했고… 이를 강이식이 진압하여 다시 항전하겠다고 하니, 우리는 진을 원래대로 옮겨 요동성을 공략하면 되는 것이오.”
황제 양광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이처럼 말하니, 그 누구도 감히 이견을 달지 못하였다.
“모두 들으시오. 내일 날이 밝으면 진을 다시 옮기도록 하고, 중단되었던 지도 공사도 재개하도록 하시오. 오늘은 피곤하니, 다들 물러나시오.”
황제 양광의 명에 모두가 관풍행전에서 물러났다.
* * *
어느덧 날이 저물어갔고, 관풍행전이 석양에 붉게 물들었다.
“내일 다시 진이 이동한다던데.”
수나라 군사 복장을 한 팽무일이 관풍행전을 올려다보며 말하였다.
이에, 개소문도 관풍행전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내일 다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역시, 오늘 황제의 목을 베어야 한다는 공손향의 제안이 옳았군. 영리한 여인이야.”
개소문도 수나라 군사 복색을 하고 있었고, 그 뒤에 서 있는 당진평과 야수 역시 수나라 군사 복색을 하였다.
이들은 공손향의 계책으로 수나라 진영에 몰래 잠입하여 황제 양광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당진평이 미리 심어둔 수하들을 통해 잠입은 수월하였고, 관풍행전 진입도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공손향이 계책을 내면, 개소문이 명을 내리고, 당진평이 방도를 마련하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쇼락은 수나라 진영에서 멀리 떨어져 공손향을 지키며, 언제든 개소문 일행의 도주를 도울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해가 떨어지면, 미리 심어 놓은 나의 수하들이 관풍행전에 불을 낼 것이오. 그때 주위가 소란해지면 우리가 진입하여 황제의 목을 베는 것이오.”
당진평이 나지막이 속삭이자, 개소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울어가는 해를 바라보았다.
“곧이로군. 황제가 없어지면, 우리 고구려 백성들뿐만 아니라, 수나라 백성들의 삶도 나아지겠지.”
점차 해는 기울어 지평선 끝으로 내려앉았고, 사위도 어둠의 장막이 내려앉고 있었다.
어느새 마지막 붉은빛이 지평선 끝으로 사라지자, 개소문이 눈빛이 붉게 타올랐다.
“불이야!”
마침내 관풍행전 안에서 화기가 솟구치며, 불길을 피해 뛰어나오는 사람들의 외침이 일었다.
그리고, 삼엄했던 경계가 허물어진 관풍행전으로 개소문 일행이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