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난공불락 요동성 (6)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우는 막바우와 경우를 온동과 온달이 달래 안시성으로 돌아갔다.
어느새 연락을 받았는지, 평강이 외성 앞으로 나와 있었다.
“동아! 온동아!”
실성한 여인처럼 온동을 부르며 달려오던 평강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더니 벌떡 일어나 다시 내달렸다.
신발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달려오는 평강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고, 공주! 발 조심하시오! 발!”
온달이 걱정되어 외쳤으나, 평강은 귓등으로도 담아 듣지 않고 더욱 빨리 달려올 뿐이었다.
“어허… 저런! 어?”
혀를 차던 온달의 시선이 평강의 뒤로 향했다.
평강의 뒤로 여자아이가 자신보다 더 작은 다른 여자아이의 손을 꼭 쥐고 달려오는데, 평강이 돌부리에 또 걸려 휘청이자 그녀의 손을 잡아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다.
“온동아, 영이가 공주를 잘 찾았나 보구나.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허허.”
온달이 온동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니, 앞이 보이지 않는 온동은 소리에 집중해 평강이 달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아!”
숨도 쉬지 않고 달려온 평강이 온동을 와락 껴안고는 하염없이 울었다.
평강은 온동의 소식이 끊긴 뒤, 너무도 영특한 온동이 고구려의 해악이 될 수 있으리라 섣불리 예단하였던 자신을 원망했었다.
조금이라도 더 정을 주지 못한 자신이 미웠고, 어린 온동이 겪을 고초에 하루도 마음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다.
“미안하다. 미안해. 온동아… 동아 너무도 미안하구나.”
온동을 껴안고 연신 미안하다고 말하는 평강을 온달은 그저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온동은 이제야 돌아왔다는 생각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공주마마, 돌아왔구먼유. 늦어서 송구혀유.”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남녘 사투리가 저절로 온동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니야. 늦지 않았어. 이제라도 돌아와 다행이야. 정말… 정말… 다행이야.”
평강이 온동을 껴안고 울먹이는 사이, 막바우가 독고영에게 다가가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이제야 우리 가족이 모두 모였다고! 그렇죠, 장군님?”
막바우의 물음에 온달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 우리가 모두 모였군. 이제야 우리가 하나 되었고, 다시는 헤어지지 않기로 합시다!”
막바우에게 들어 올려진 독고영이 팽운의 손을 놓지 않기 위해 몸을 기울이니, 경우가 다가와 팽운을 번쩍 들어 독고영과 높이를 맞춰 주었다.
이때, 팽운이 자신보다 더 큰 검을 등에 메고 있음이 경우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 검은?”
팽무성에게 돌려주기 위해 온동이 해진, 독고선, 독고영과 함께 탁현으로 지니고 갔던, 바로 그 금강대도였다.
“내 검이에요. 내 검. 금강대도!”
팽운이 조그만 입을 오물거리며 잘도 답하였다.
“그래, 네 검이로구나. 그래… 네가 팽 장주의 여식이로구나.”
경우의 말에 팽운이 작은 머리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팽운이에요. 저는 일곱 살이고, 영이 언니는 열셋이에요! 동이 오빠는 열다섯이고요!”
묻지도 않는 말까지 또박또박 잘도 말하는 팽운이 귀여워 막바우가 허허 웃으니, 팽운도 작은 입을 크게 벌리고 활짝 웃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반겨주니 무척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 * *
다 함께 안시성으로 돌아와 평강이 그간의 일들을 물으니 온동과 독고영이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하였다.
수의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출병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온동은 망설임 없이 고구려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였다.
이에, 독고영과 팽운이 따라나서니 남궁민을 비롯한 남궁천, 남궁웅 삼 형제가 놀라 만류하였다.
“어찌 아이들이 전란에 휩싸인 고구려로 돌아가려 하느냐? 어서라.”
“전란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란다. 이 오태산에 남아 있다가, 전쟁이 끝나면 돌아가거라.”
“그래, 온동 너는 앞도 못 보니, 고구려에 돌아간들 짐만 될 뿐이다.”
그러나, 전장을 지킬 온달 일행이 걱정된 온동은 죽어도 함께 죽기를 갈망하였다.
“영이와 운이는 여기 남으렴. 나는 가야겠다.”
이에, 독고영이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 이제,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저도 온달님과 공주님을 뵙고 싶고, 경우님과 막바우님이 그리워요. 저도 가겠어요.”
결국, 온동은 독고영의 고집을 꺾지 못하였고, 남궁 씨 삼 형제는 온동의 고집을 꺾지 못하였다.
그리고 온동과 독고영은 팽운의 고집을 꺾지 못하여 전란 중인 고구려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라면, 온달 일행에게 자신을 데려다줄 것이라 여긴 온동이 안시성으로 방향을 정했다.
다행스럽게도 수의 황제 양광이 백만 대군으로 요동성을 포위한 덕에 안시성으로 향하는 길은 상대적으로 수의 군사가 적었다.
그간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평강은 온동과 경우가 안쓰러워 눈물짓고는 팽운을 끌어안아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우리는 성이 다르지만, 이제부터 일가란다.”
다정스럽게 말하는 평강에게 팽운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이면, 제 엄마예요?”
팽운의 물음에 평강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엄마고 말고. 내가 엄마란다.”
“너무… 예뻐요.”
팽운의 기억 속에 이토록 아름답고 다정한 여인은 평강이 처음이었다.
부모를 잃은 젖먹이를 남궁 씨 형제가 오태산 석굴에서 키웠기에, 팽운에겐 석굴 밖 세상은 너무도 신기하고 아름다웠다.
“정말 이 세상은 넓고 크고 예뻐요. 엄마는 너무 예뻐요.”
* * *
온동이 오태산 석굴을 떠날 무렵, 개소문은 서호의 약방 앞에서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다.
이때, 당진평이 약방 문을 열고 나오더니, 말을 건네왔다.
“갓쉰동 나리… 아니 공자, 나는 그대가 고구려 막리지의 장자라 알고 있소. 그 사실을 양소에게 전해주었지. 그리고 양소가 황제에게 이야기했을 것이고 말이야.”
개소문이 당진평에게 공허한 시선을 보내었다.
“공자, 이 약방이란 것이 말이요. 의원이 처방하면, 그 처방대로 약을 내어주는 곳이라오. 양소는 의원이고 나는 약방 주인인 셈이었지. 황제는 그대를 내치지 않고, 처방을 내리는 의원을 죽였다오. 그리고는 약방마저 허물려고 했다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개소문이 귀찮은 듯 물으니, 당진평이 빙그레 웃었다.
“나는 처방 같은 건 할 줄 모르오. 허나, 약은 잘 내지. 원래 우리 당 씨 일족이 독을 비롯한 약에 통달하였다오.”
“나는 약이 필요 없소.”
“말이 그렇다는 거요.”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이오?”
개소문이 재촉하니, 당진평이 히죽 웃었다.
“그대는 기회를 잃고, 나는 의원을 잃었다오. 그대가 나의 의원이 되어 준다면, 내가 그대에게 기회를 마련해 주겠소.”
당진평이 황제 양광을 제거할 기회를 마련해주겠다고 말하니, 개소문의 눈이 순간 빛을 내었다.
이에, 당진평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이제 좀 생기가 도는 모양이구려. 솔깃하였소?”
“그렇소. 솔깃하오. 허나, 나는 양소처럼 계책을 세워 그대에게 처방전을 내릴 재주가 부족하오.”
개소문이 솔직하게 말하니, 당진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이긴 하구려. 허면, 책사를 한 명 구하면 되지 않소? 양소를 곁에 두어 내게 처방전을 내렸던 황제 양광처럼 말이오.”
이후, 개소문과 당진평은 함께 오태산으로 향하였다.
황제 양광도 찾지 못한 석굴을 당진평은 곳곳에 심어둔 수하들을 통해 정보를 취합하여 마침내 열흘 만에 찾아내었다.
* * *
낯선 이들의 방문을 미리 파악한 남궁 씨 삼 형제가 석굴 앞으로 나와 개소문과 당진평을 공격하려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팽무일이 개소문을 알아보았다.
“사부! 언제 이렇게 성장하였소?”
남궁천의 도움으로 부러진 다리를 고친 팽무일이 기뻐 달려 나왔고, 쇼락과 야수, 공손향도 뒤를 따랐다.
“어라? 이자는? 그런데 이자는 우리를 가두었던 놈인데, 어찌 함께 있는 게요? 황제가 사부 심복으로 내어준 거요?”
팽무일이 당진평을 가리키며 물으니, 개소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짧게 답하였다.
“이젠 나의 수족이다.”
“오호! 그거 잘 되었군. 역시 사부야! 하하하.”
팽무일이 기뻐 웃으니, 공손향이 당진평을 천천히 살폈다.
실성하였던 공손향은 정신이 돌아왔는지, 무척이나 눈이 맑고, 차분하였다.
“그런데… 다들, 다리가… 낫은 게요?”
모두가 두 다리로 서 있으니, 개소문이 내심 기뻐 물었다.
이에 팽무일이 두 다리에 힘을 주며 펄쩍 뛰어올랐다.
“간신히 고쳤다오. 이렇게 달릴 수 있게 된 지 며칠 안 되었지만, 아무튼 이제는 달리고 뛰어오를 수 있다오. 하하하.”
눈이 보이지 않는 남궁천의 의술이 이토록 뛰어남에 개소문이 탄복하니, 당진평이 히죽 웃으며 말하였다.
“공자, 저들 남궁 씨는 사람을 살리고, 나는 사람을 죽이는 약을 팔지. 이게 세상의 조화라오.”
남궁천은 살인을 서슴지 않는 악살로 유명하였으나, 그가 죽인 이들은 모두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흉악한 자들이었다.
“형님, 당진평입니다.”
남궁웅이 앞을 보지 못하는 남궁천에게 나지막이 말하였다.
이에, 남궁천과 남궁민이 언제든 검을 뽑을 준비를 하였다.
“아니야. 싸우러 온 게 아니고. 보다시피, 사람을 데리러 온 거라고. 아! 안 보이지?”
당진평이 놀리듯 말하였으나, 남궁천은 검을 쥔 손에 단단히 힘만 줄 뿐 반응이 없었다.
“어라? 장님의 지팡이가 안 보이네. 어디 갔나?”
당진평의 물음에 남궁천이 내뱉듯 말하였다.
“꺼져라!”
이때, 남궁웅이 남궁천에게 바짝 다가가 속삭였다.
“놈은 향로가 없습니다. 세상의 만악을 제거할 기회입니다.”
남궁 씨 형제들과 당진평은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아는 듯하였으나, 친분보다 적의를 지닌 듯하였다.
“싸우러 온 것이 아니고, 사람을 찾으러 온 거라고. 보다시피, 이 사람들 말이야.”
또다시 당진평이 말하니, 남궁천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이에, 남궁민이 앞으로 나서며 차갑게 말하였다.
“왕박이 부탁하여 받아주고, 치료해주었더니… 당진평과 관련 있는 자들이었군. 살모사 새끼들이었어. 당장 이곳을 떠나도록 하시오!”
남궁민이 내쫓다시피 명하였으나, 야수는 결코 불쾌한 기색 없이 남궁 씨 형제들에게 엎드려 절을 올렸다.
이에, 쇼락도 따라 절을 올리니, 팽무일이 피식 웃었다.
“내 반드시 그대들에게 은혜를 갚으리다. 고마웠소. 하하하.”
과연 안면이 두꺼운 팽무일다웠다.
이에, 공손향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남궁 씨 형제들에게 공손히 예를 올려 감사를 표하였다.
“반드시 돌아와 은혜를 갚겠나이다.”
그러나 남궁민은 여전히 차가웠다.
“아니, 두 번 다시 오지 마시오. 우리도 이곳에 머물지 않을 것이오.”
남궁웅도 동생 남궁민의 말을 거들었다.
“천하의 대악인 당진평에게 석굴 위치를 들켰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이곳에 남아 기다리라고? 그깟 은혜 타령하며 남아서 기다리라니, 가소롭구나.”
남궁 씨 형제는 당진평과 함께 온 것만으로 개소문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해와 질시에 익숙한 개소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남든지 떠나든지 그건 그대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이것은 내 벗들을 치료한 값이오.”
개소문이 품에서 황금을 꺼내 남궁민에게 던지니, 그 소리에 앞이 보이지 않는 남궁천이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며 검을 뽑아 황금을 베었다.
“한 발이라도 다가오거나, 손을 내밀면 그 무엇이든 베겠다. 당장 떠나라!”
이에 개소문도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듯 팽무일 일행을 데리고 산을 내려갔다.
이들이 떠나자, 석굴 안에 숨어 있던 송현이 살며시 나와 남궁민에게 물었다.
“저자… 그자 맞지요?”
“그렇소. 당진평이란 천하의 대악인이었소.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향로를 지니고 오지 않았구려. 이곳도 이제 안전하지 않은 듯하니, 떠나야겠소.”
남궁민의 말에 송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짐을 꾸리기 위해 급히 석굴로 뛰어 들어갔다.
이 무렵, 백십삼만 대군을 이끈 황제 양광은 요하를 지척에 두고 있었다.
한편, 개소문을 따라 산을 내려가며, 팽무일이 물었다.
“그런데 사부.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는 거요?”
“고구려. 황제 양광의 목을 베러.”
개소문이 너무도 담담히 답하니, 팽무일이 기가 막혀 허허 웃었다.
“허허, 죽으러 가자고, 찾아온 거였네. 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