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난공불락 요동성 (5)
안촌홀(安寸忽)에 자리한 산성을 중원인들은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이라 불렀고, 고구려인들은 안시성이라 하였다.
드넓은 요동의 평야가 끝나고 험준한 산맥이 시작됨을 알리는 영성자산은 평원을 굽어보며 동쪽으로는 박암성, 요동성, 신성과 연결되고, 남으로는 건안성, 비사성, 오골성과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영성자산 능선을 따라 외성을 쌓고, 성안에 계곡을 끼고 본성을 따로 더 세웠다.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영성자산의 험준한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살려 능선을 따라 외성을 쌓았기에 산 전체가 안시성이라 봐도 무관하였다.
단단한 돌로 기초를 세우고, 그 위에 흙과 돌을 덮으니 적의 공격에 성벽이 무너지지 않는 구조였다.
또한 본성 안으로 계곡물이 흘러들어와 식수 걱정을 따로 하지 않았다.
덕분에 강적을 맞이할 경우 청야전술을 펼치면, 일대 십만 명 이상의 백성을 수용할 수 있었다.
평야와 맞닿은 외성 부분이 매우 적어 방어가 용이하고, 외성은 물론 본성에서도 평야의 적을 굽어보며 전술을 펼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안시성을 공략할 외적은 거친 능선에 세워진 외성 공략이 어려워 평야와 이어진 외성 공략을 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수의 백십삼만 대군이 요동벌 평야에 자리한 요동성 함락을 목표로 집중하는 동안, 안시성은 청야전술을 펼쳐 인근 백성들을 성안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이날도 속속들이 인근 백성들이 안시성 안으로 몰려들었고, 온달과 양만춘은 외성에서 주위를 살폈다.
평양에 남아 있으라 하여도 말을 듣지 않고 안시성까지 따라온 평강이 전란을 피해 안시성으로 피난 온 백성들을 돌보았고, 막바우와 경우는 언제나처럼 온달의 뒤를 따라 순시를 돌며 투닥거리고 있었다.
“자네들 그렇게 싸울 거면, 본성 안에 들어가 싸우게. 정신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참다못한 양만춘이 경우와 막바우에게 한소리 하였으나, 이미 익숙해진 온달은 허허 웃었다.
“성주, 안에 들어가 싸우면 백성들이 놀라고 걱정할 게요. 그냥 우리 뒤나 따라다니며 싸우게 둡시다. 저 두 사람이 저리 보여도 주먹다짐은 하지 않더이다. 허허허.”
온달이 편을 들어주니, 경우가 양만춘을 향해 입을 삐죽 내밀고는 막바우의 옆구리를 찌르며 잔소리하였다.
“그러게, 어찌 그대는 내게 한마디도 안 지려고 하는 게요? 어찌 그리도 사내대장부가 입이 촉새인 게요?”
이에 질세라 막바우도 한소리 하였다.
“그러는 그대는 사내대장부가 아니고 여자 졸장부요? 수염도 안 나는 그 입으로 쉴 새 없이 잔소리질이면서 누구보고 촉새라 하는 게요!”
말이라면 막바우도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기에, 또다시 투닥투닥 다툼이 일고, 이에 기가 질린 양만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장군 어찌 이런 고초를 겪으며 그간 숱한 전장을 누비셨습니까? 저라면 적보다 저들의 입을 먼저 베었을 터인데, 과연 장군이십니다.”
이에 온달이 그저 허허 웃더니, 별안간 눈이 휘둥그레져 손으로 북쪽을 가리켰다.
양만춘이 온달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평야를 내달려 고구려 백성들이 안시성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수나라 기병 백여 기가 쫓고 있었는데, 그 기세가 매우 사나워 보였다.
“수의 정찰대입니다… 저들이 안시성으로 피난 오는 우리 백성들을 쫓고 있습니다!”
양만춘이 격분해 목소리를 떨며 말하였다.
이에, 온달이 바로 명하였다.
“경우, 막바우! 기병들을 준비하라! 백성들을 구하러 나가겠다.”
“저도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겠습니다.”
양만춘도 따라나서려 했으나, 온달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성주는 안시성을 지키시오. 혹여 적의 유인책일 수도 있소.”
“하오나.”
“수의 대군이 뒤따르고 있을 수도 있으니, 남아서 수성을 대비하심이 좋을 듯하오.”
양만춘도 더는 이견을 달지 않고 바삐 본성으로 발을 옮겼다.
* * *
안시성을 향해 도주하는 백성들은 바로 뒤까지 쫓아온 수의 기병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평원을 내달리기 바빴다.
짐도 버리고 도주하는 백성들 속에서 이제 열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자신보다 더 어린 여자아이의 손을 쥐고 내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 소녀들의 뒤를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맹인 소년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앞이 보이지 않음에도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고 잘 달렸다.
이들은 맹인이 된 온동과 독고영, 팽운으로 온동의 나이 열다섯, 독고영도 어느새 열세 살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팽 장주의 여식 팽운도 일곱 살이 되었으니, 온동이 고구려를 떠난 지 벌써 칠 년이 지난 셈이었다.
“오라버니! 제 손! 제 손 잡으세요!”
독고영이 오른손으로 팽운의 조그만 손을 쥐고도 온동이 걱정되어 왼손을 내밀었다.
“영아! 어서 달려라! 나는 괜찮다. 어서 달려라!”
앞도 보지 못하는 온동이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하고는 등 뒤까지 쫓아온 수나라 기병들의 말발굽 소리에 집중하였다.
무척이나 거리가 좁혀져 있었다.
‘이대로 도망치다간, 백성들이 저들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말 것이다. 망설일 수 없다.’
결심을 다진 온동이 독고영의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옅은 미소를 짓고는 획 등을 돌렸다.
“오라버니! 안 돼요!”
독고영이 온동의 생각을 읽고 소리쳤으나, 이미 결심을 굳힌 온동은 무작정 말발굽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내달리며 말하였다.
“멈추지 말고 달려라! 영아, 나는 언제나처럼 네게 갈 것이다.”
독고영은 온동이 염려되었으나, 어린 팽운마저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어 그저 앞으로 내달렸다.
‘오라버니… 꼭, 언제나처럼 오셔야 해요. 저는 오라버니를 믿어요.’
그러나 이미 수나라 기병을 지척에 둔 온동에게 독고영의 바람이 전해질 리 만무하였다.
“어서 오너라.”
온동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자신처럼 맹인이었던 남궁천에게 받은 쇠지팡이를 단단히 쥐었다.
“이놈! 어디서 앞을 막는 것이냐!”
바로 앞까지 들이닥친 수나라 기병이 온동을 향해 소리치며 장창으로 찔러왔다.
이에 온동이 쇠지팡이 속에서 검을 쑥 뽑아내고는 왼손에는 쇠지팡이를 오른손엔 검을 쥐고 몸을 날렸다.
사아악!
온동의 검이 바람을 가르고 더불어 자신을 장창으로 찔러오는 수나라 기병의 목도 베었다.
주인 잃은 말이 놀라 온동에게 앞발을 치켜드니 온동은 바람이 전해오는 기를 느껴 뒤로 훌쩍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여전히 속도를 늦추지 않고 밀려오는 수나라 기병들을 향해 일갈을 날렸다.
“나부터 밟고 지나거라!”
이에 수나라 기병들이 온동을 얕잡아 보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어디서 눈먼 놈이 나서는 것이냐!”
“앞이 보이지 않으니, 전장이 장난으로 보이는 거냐?”
온동을 향해 온갖 조롱을 퍼부으며 수나라 기병들이 장창을 앞세워 달려들었다.
이에, 온동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바람이 전해오는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였다.
온동이 소리를 쫓아 고개를 기울이던 순간, 온동의 검이 전광석화처럼 바람을 갈랐다.
그리고 바로 앞까지 말을 몰아온 수나라 기병의 장창이 잘려 날아가고는 말의 목이 몸뚱이에서 분리되었다.
머리가 없는 말이 수나라 기병을 태운 채 온동을 지나쳐 갔다.
온동은 또다시 소리에 집중해 고개를 돌리고는 급히 몸을 솟구쳤다.
어느새 온동의 가슴팍까지 다가왔던 장창이 목표를 잃어 허공을 찌르니, 그 틈에 온동이 허공에서 장창을 밟아 한 번 더 몸을 솟구쳤다.
그리고는 허공에서도 소리에 집중하여 곧장 검을 내리쳤다.
“으악!”
머리가 쪼개진 수나라 기병이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피를 뿌렸다.
온동은 발이 땅에 닿자마자 재빨리 고개를 갸웃해 소리를 쫓더니, 곧바로 몸을 숙여 내달리며 검을 세로로 휘둘렀다.
이에 온동의 검에 다리가 잘린 말이 긴 울음을 내지르며 쓰러지고, 말에 깔린 수나라 기병이 장창을 온동에게 날렸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에 온동이 가로로 허공을 베며 물러서지 않으니, 날아들던 장창이 온동의 검에 잘려 떨어졌다.
“저놈에게 화살을 날려라!”
수나라 장수의 외침이 일자, 온동이 급히 자세를 가다듬고 더욱 소리에 집중하였다.
활에 화살을 먹이는 소리에 이어 활시위를 당기는 소리가 사방에서 전해졌다.
그리고 백여 대의 화살이 일제히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밀려왔다.
빠르게 밀려오는 소리에 집중하던 온동이 강하게 땅을 밟으며 검을 내리쳤다.
“파산귀검!”
온동의 외침과 함께 검기에 땅이 파이더니, 작은 돌과 흙이 솟구쳤다.
그리고는 밀려드는 화살들을 향해 작은 돌과 흙이 검기에 휩싸여 날아갔다.
“으아악!”
되돌아 날아든 화살과 온동이 날린 검기에 수나라 기병들이 기겁해 비명을 질렀고, 이보다 더욱 놀란 말들이 울부짖으며 제 주인들을 떨구었다.
“이 괴물 같은 놈이!”
온동이 날린 파산귀검 검기에 팔이 잘린 수나라 장수가 격분해 소리 지르며 달려들었다.
쐐애애액!
이때 멀리서 매의 울음이 길게 울더니, 한 줄기 바람이 되어 온동에게 달려들던 수나라 장수의 가슴팍에 꽂혔다.
“컥!”
영문도 모른 채 비명을 내지른 수나라 장수는 바람에 실려 멀리 날아가 땅에 처박히더니, 그대로 즉사하였다.
“매… 매의 울음?”
온동이 매의 울음이 시작되었던 방향으로 몸을 돌리니, 이 틈을 노려 수나라 기병들의 장창이 밀려들었다.
“한눈팔지 마라!”
이어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리고는 온동의 얼굴을 스쳐 두 대의 화살이 길게 뻗었다.
온동의 배후를 공격하던 수나라 기병 둘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졌다.
이에, 온달이 소리의 주인을 향해 기뻐 외쳤다.
“겨, 경우님! 온달님!”
매의 울음을 내며 나는 화살은 필경 온달의 효시가 분명하였고, 한 번에 두 대의 화살을 날리는 신궁은 경우가 틀림없었다.
이어서 너무도 거칠지만 꿈에도 잊지 못할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누군데, 우리 장군님과 경우 저 친구를 아는 게냐?”
어느새 막바우가 장창을 쥐고 온동을 지키며 묻고 있었다.
“막… 막바우님… 막바우님…….”
온동이 너무도 기쁘고 반가워 말문이 막히니, 입을 대신하여 굵은 눈물이 눈을 가린 검은 천을 적셨다.
“너, 혹시?”
막바우가 눈이 가려진 온동을 천천히 살피고는 말에서 뛰어 내려 떨리는 손으로 온동의 작은 얼굴을 감쌌다.
“너… 너… 너…….”
맹인이 된 온동의 모습에 막바우는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 사이 화살을 날리며 다가온 경우가 말 위에서 막바우를 내려다보며 한소리 하였다.
“한창 싸움 중이다. 여기는 전장이고, 지금은 전투 중이란 사실 좀 잊지 마라. 사람이 저리 흐리멍덩해서야.”
혀를 차며 지청구하는 경우를 올려다보며 막바우가 굵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경우, 경우… 흑흑… 엉엉… 아이고!”
마침내 막바우가 통곡을 하니, 경우는 기도 차지 않아 막바우에게 지청구를 하려 했다.
그러나 막바우가 어루만지는 소년의 조그만 얼굴이 왠지 눈에 익어 경우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너… 너!”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모습이 분명 맹인이었다.
조그만 얼굴을 검은 천으로 가려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웠으나, 어릴 적 총기가 넘치던 모습이 남아 있었다.
“너!”
경우도 말에서 뛰어 내려 온동을 덥석 안고는 그저 울었다.
이에, 수나라 기병 속으로 뛰어들어 운철대검을 한껏 휘두르던 온달이 의아해 뒤돌아보았다.
“어찌 저러는? 너희는 막바우 장군과 경우 장군을 지켜라!”
온달은 막바우와 경우의 행동이 의아했으나, 혹여 이들이 상할까 염려되어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지키게 하고는 도주하는 수의 기병들을 쫓았다.
그러나 한껏 신이 나 내달려야 할 누렁이가 어찌 된 영문인지, 발을 멈추고는 경우와 막바우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렁아, 어찌 된 게냐?”
결코 단 한 차례도 자신의 뜻을 어긴 일이 없는 누렁이었기에, 온달이 당황하여 물었다.
이에 누렁이가 말귀를 알아듣기라도 한 듯, 길게 울고는 온달을 태운 채 뚜벅뚜벅 말발굽을 옮겼다.
막바우와 경우에게 점차 가까이 다가가며, 이들이 안고 있는 사내아이에게 온달이 시선을 옮겼다.
“그 아이가… 누구요?”
왠지 가슴이 두근거려 온달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에, 막바우가 제대로 답도 하지 못한 채 눈물, 콧물이 범벅이된 얼굴로 울먹였다.
“장군… 장군… 흑흑…….”
온달이 두근대는 심장을 억누르며 누렁이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막바우, 경우와 함께 온동을 와락 껴안았다.
“돌아왔구나. 돌아왔어. 참 잘 되었구나. 잘 되었어.”
온달은 입술을 깨물어 울음을 삼키고는 조금도 온동의 눈을 가린 검은 천에 대해 묻지 않았다.
“돌아왔으니, 이제 되었다. 되었어.”
비록 작은 전투였으나, 나름 승전을 거두었음에도 막바우와 경우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고, 온달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