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223화 (223/328)

223화 난공불락 요동성 (4)

불길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수나라 군사들의 모습은 지옥도와 다름없었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가니, 석양을 받아 더욱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수나라 군사들의 오금을 저리게 하였다.

감히 불길 속으로 군사들이 진격하지 못하니, 장수들이 독려하며 목을 베었다.

그러나 군사들은 목이 베이면서도 불길 속으로 뛰어들지 못하였다.

이에, 황제 양견이 손을 들어 명을 내렸다.

관풍행전에 퇴각을 알리는 깃발이 내걸리고 북이 울리니, 군사들의 목을 베던 장수들도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목을 벤다고 불 속에 뛰어들 사람이 어디 있겠소. 괜한 짓이오. 사기만 떨어뜨릴 뿐이니, 오늘은 일단 쉬도록 합시다.”

관풍행전 안으로 몸을 돌리며 황제 양견이 말하니.

고구려와 수, 양측 군사들에게 하룻밤의 휴식이 마련되었다.

“보아라 갓쉰동. 이 전쟁은 내가 하고자 하면, 서로 죽일 듯 싸우고 내가 멈추면 이렇듯 평화가 온단다.”

곁에 없는 개소문에게 황제 양견이 말하고는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 * *

다음 날 아침이 되자, 황제 양견은 전군에게 고기와 술을 내려 전날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그리고 관풍행전 안에서 모든 장수를 불렀다.

“백십삼만 대군이오. 백만을 빼고 십삼만 대군만으로도 오만의 군사가 지키는 저 요동성 공략은 하룻밤에 마무리해야 하는 법이오. 아니 그렇소?”

그 누구도 이견을 대지 못하니, 황제 양견이 빙그레 웃었다.

“백십삼만 대군으로 저 요동성을 함락함은 매우 당연한 일이오. 그렇기에, 그냥 이겨서는 아니 되오.”

잠시 말을 멈춘 황제 양견이 장수들과 눈을 일일이 맞추며 말을 이었다.

“항거불능으로 대승을 거두어야, 이후 자잘한 성들 공략에 부담이 적은 법이라오.”

말을 마친 황제 양견이 손을 드니, 호위시랑이 깃발을 들고 와 펼쳤다.

놀랍게도 깃발 안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각종 공성 병기의 설계도였다.

“보시오. 이것들은 비루(飛樓), 동차(橦車), 운제(雲梯), 지도(地導)라 하오.”

황제 양견이 일어서 깃발 속 공성 병기들을 가리키며 말하니, 모두가 놀라 탄복하였다.

비루의 모습은 높다랗게 솟은 집으로 지붕 위에는 쇠가죽을 덮고 아래에는 긴 사닥다리가 붙어 있었다.

비루는 군사들이 위에 올라 요동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할 수 있었다.

수나라 군이 미리 준비한 정란과 비슷하였으나, 그 크기가 한결 크고 단단하여 마치 작은 성과도 같았다.

동차는 큰 궤에 바퀴를 달고 그 속에 들어가 쇠뭉치로 성을 파괴하는 공성 병기였다.

충차와 비슷하였으나, 이 역시 크고 단단하여 방어력이 높고, 성문이 아닌 성벽 파괴용으로 그 공격력 또한 높았다.

운제는 바퀴가 여섯 개나 달린 공성 병기로 세 길이 넘는 사닥다리 두 개를 서로 연결하여 접었다 펴며 군사들이 성벽 위를 오를 수 있게 하는 용도였다.

또한 지도는 성 가까이 굴을 파 들어가 공격하는 공성 병기로, 황제 양견이 준비한 비장의 무기였다.

“이 지도(地導)로 요동성 아래 길이 열리면, 고구려의 저항도 끝을 맺게 될 것이오. 이후, 그 어떤 성도 이 지도를 두려워하여 감히 맞서지 못하고 성문을 열게 될 것이오.”

깃발에 그려진 지도의 모습은, 요동성 근처에 작은 집들이 세워져 있었고, 두 채의 집들이 짝을 이뤘다.

그리고, 이들 집들 사이에 땅 밑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 집들은 땅을 파는 군사들이 쉬며 적의 공격을 피하는 용도요. 그리고 이 집들 밑으로 군사들이 들어가 굴을 팔 것이오. 땅속에 길을 내며 나무 기둥을 세우고 나무로 천장을 만들어 무너지지 않게 해야 하오.”

황제 양견이 깃발 속 요동성을 가리켜 말을 이었다.

“땅 밑의 우리 군사들을 요동성 성벽 위에선 결코 공격할 수 없소. 안전이 보장된 상태에서 요동성 안까지 길을 내고, 동시에 대군이 성 안으로 진입하면 강이식은 도주도 못 한 채 잡히고 말 것이오.”

너무도 영민한 황제 양견에겐 책사가 필요치 않았다.

“이 두 채의 집에 가려 고구려 군은 결코 땅속에 길이 열리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오.”

장수들은 전장의 모든 것을 만기친람하는 황제 양견에게 감히 이견을 내지 못하였으니, 양견은 더욱 세세한 것까지 혼자 계획하고 결정을 내렸다.

‘나는 이미 전장의 모든 것을 월국공 양소에게 배웠다. 내가 곧 진리고, 나만이 승리로 이끌 수 있다.’

황제 양견의 자신감은 극에 달하였고, 강이식의 요동성은 이제 곧 함락될 듯하였다.

* * *

전날과 다름없이 요동성을 포위한 수나라 군의 공세는 맹렬하였다.

그러나, 성벽 위에 담을 세운 여장에 몸을 가린 고구려 군은 사혈을 이용하여 화살을 날리고, 성 안에 마련된 포차와 발석거로 맞섰다.

이에 수나라 군사들의 피해가 늘고 고구려 군이 또다시 화공을 펼치니, 관풍행전에서 퇴각을 알리는 깃발이 올라갔다.

겨우 한숨 돌린 공별이 불길 너머 수나라 진영을 바라보며 의아해 고개를 갸웃하였다.

“대장군, 어찌 정란이 움직이지 않는 걸까요? 충차 또한 제자리를 지키고, 적은 발석거와 포차도 가동하지 않고 있사옵니다. 어찌 된 영문일까요?”

이에 수나라 진영을 바라보던 강이식의 두 눈이 빛났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 나무를 옮기는 수나라 군사들이 들어왔다.

“저것들이 뭔가를 짓는 듯한데?”

그의 궁금증은 하룻밤도 지나지 않아 풀렸다.

나무를 옮긴 군사들의 앞으로 정란이 나와 지키고, 군사들이 밤을 새워 비루를 완성한 것이었다.

비루는 바퀴가 달리지 않아 정란처럼 이동이 불가했지만, 작은 성루 같은 비루가 높이 솟아오르니, 요동성 안을 굽어보고 전략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화살이 닿겠는가?”

강이식이 물으니, 공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화살은 닿을 것이나, 적의 화살은 사거리가 짧아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의 군사들이 비루 위로 밧줄을 걸어 쇠뇌를 끌어 올리니, 공별이 당황해 버벅거렸다.

“저, 저… 저!”

고구려 군보다 사거리가 짧은 활을 연노로 만회하고자 한 것이다.

비루 위로 쇠뇌들이 계속 올라가고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연노라… 수의 황제는 만만치 않구나.”

요동성 아래에서 연노를 발사할 시, 여장에 몸을 가린 고구려 군에게 타격을 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비루 위에 자리 잡은 연노는 달랐다.

수십 개의 거대한 화살을 날릴 수 있는 연노가 비루 위에서 요동성을 굽어보며 화살을 날릴 경우, 여장에 몸을 가려도 머리 위로 쏟아질 화살을 피하기란 불가했다.

요동성을 빙 둘러 비루 백여 개가 완성되고, 수의 진영에서 또 다른 공성 병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천히 진영 앞으로 운제가 나오고 동차도 뒤를 따르니, 그제야 충차도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들 공성 병기에 이어 마침내 발석거와 포차도 진영 앞으로 나오니, 비로서 수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포차와 발석거가 돌과 거대한 화살을 날리고, 비루에서 쇠뇌가 쇠로 만든 화살을 성벽 위로 쏟아붓기 시작하였다.

연노 한 대에서 수십 개의 쇠화살이 발사되고, 비루마다 연노 세 대가 설치되었으며, 이런 비루가 요동성을 에워싸고 백여 개나 세워졌으니, 요동성의 성벽 그 어느 곳도 비루의 공격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에 맞춰 전장의 거인 정란이 요란한 굉음을 일으키며 천천히 전진하였다.

그리고 그 아래를 동차와 충차가 맹렬한 기세로 요동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 뒤를 이어 백여 대의 운제가 요동성 성벽을 향해 다가왔다.

하늘에선 비루에서 날린 쇠화살이 쏟아지고, 포차와 발석거에서 날린 거대한 화살과 돌이 성벽을 강타했다.

땅에선 각종 공성 병기들이 몰려드니, 요동성 성벽 위는 일대 아수라장이 되었다.

“정란을 불태워라! 저 높이 솟은 오두막에 화살을 퍼부어라!”

비루의 정체를 파악한 강이식이 급히 명을 내렸다.

이에, 고구려 군이 정란과 비루에 맹렬히 화살을 날렸다.

불붙은 화살을 날리고, 포차와 발석거도 기름통과 불붙은 나무를 날려 불길을 일으켰다.

이에, 성벽을 파괴하던 동차가 급히 물러나고, 성문에 다가왔던 충차가 불에 타들어 갔다.

운제도 십여 대 불길에 휩싸였으나, 이내 곧 일제히 퇴각하였다.

그러나 포차와 발석거가 만든 불길에서 떨어진 비루는 고구려 군이 날린 불화살을 수나라 군사들이 급히 끄며 버틸 수 있었다.

제법 단단히 비루 위에 세워진 집이었을뿐더러, 불이 붙지 않도록 물에 적신 쇠가죽을 둘러 수나라 군사들은 큰 손실 없이 불을 끌 수 있었다.

전장의 거인 정란이 불에 타 군사들이 땅에 처박혔으나, 비루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쇠뇌를 날렸다.

여장에 몸을 가린 고구려 군의 피해가 늘자, 강이식이 급히 명하였다.

“저 높이 솟은 오두막의 약점은 바로 저 사다리다! 사다리를 태워라!”

강이식이 쇠뇌에 채울 쇠화살을 사다리로 나르는 수나라 군사들을 가리켜 외치니, 공별이 즉시 이를 받아 명하였다.

“저 오두막의 위를 태우지 말고 아래를 태워라! 불길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법! 아래를 태우면 걷잡을 수 없이 탈 것이다!”

이에, 고구려 군이 일제히 비루의 아랫부분을 노려 불화살을 날리고, 발석거와 포차도 비루를 겨냥해 불붙은 나무와 기름통을 날렸다.

불길이 비루의 아랫부분에 붙으니, 사다리로 쇠화살을 나르던 수의 군사들이 기겁해 물러났고, 불길이 점차 비루 위까지 이어졌다.

비루 위에 단단히 마련된 집에서 연노를 달리던 수나라 군사들도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비루의 아랫부분이 불길에 휩싸여 휘청이다가 마침내 무너져 내리니, 위에 세워진 집이 그 모습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이에 고구려 군이 환호성을 지르며 더욱 기세 높여 불화살을 날리니, 또다시 관풍행전에서 퇴각을 알리는 깃발이 올라갔다.

“저런 성루를 쌓으리라 생각도 못 하였구나.”

강이식이 겨우 한숨을 내쉬며 말하니, 공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백만대군입니다. 적의 수가 많으니, 못 만드는 것이 없군요. 이러다간 산도 쌓고 성도 만들겠습니다.”

“이미 궁전은 세웠으니, 성이라고 못 쌓을 리 없겠군.”

강이식이 공별의 말에 동의하며 관풍행전을 바라보았다.

이동식 궁전인 관풍행전 가장 높은 곳에 황제 양견이 앉아 전장을 굽어보고 있었다.

“저놈이 뭘 그리 보는 거지?”

황제 양광이 바라보는 곳으로 강이식도 시선을 돌리니, 요동성과 거리를 두고 작은 집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집? 막사도 아니고… 집을? 여기 눌러살려고 집을 짓는 것은 아닐 테고… 어찌하여 집을 짓는 것인가? 황제, 그대는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게요?”

요동성을 빙 둘러싸고 두 채의 집들이 서로 짝을 이뤄 지워지고 있었으니, 그 수가 사십 개에 달하였다.

“사십 채의 집들이라… 그것도 진영 앞에?”

공별이 중얼거리다가 성벽 위로 뛰어올라 살폈다.

아무리 살펴도 특별할 것 없는 집이었다.

“기와도 있고, 벽도 세웠고… 집이 맞는데… 왜지?”

도통 이해할 수 없어 공별이 중얼거렸다.

수많은 군사들이 달라붙어 세우니, 하룻밤 안에 집들이 완성되었고, 다음 날 아침에 이들 집 안으로 군사들이 꾸역꾸역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모두 몇이나 들어가던가?”

강이식의 물음에 공별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하였다.

“도대체 어찌 생겨 먹은 집인지, 백 명도 넘게 들어갔는데도 나오는 놈이 한 놈도 없습니다. 이놈들이 땅으로 꺼졌나?”

공별의 말에 강이식이 놀라 수나라 진영 앞에 세워진 집들을 뚫어져라 응시하였다.

그리고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공별 네 말이 맞다. 저놈들은 땅으로 꺼졌느리라.”

“네? 장군 그게 무슨?”

공별이 놀라 물으니, 강이식이 의문의 집들을 가리켰다.

집으로 들어간 군사들은 나오지 않았으나, 집 밖으로는 흙들이 뿌려지고 있었다.

어느새 두 채가 짝을 이룬 집들 사이에 흙이 쌓여 작은 구릉을 이루었다.

“저놈들은… 지금 땅을 파고 있는 것이다. 두 채가 하나씩 짝을 이루었으니, 도합 스무 개의 땅굴이 우리 요동성을 향하고 있다.”

강이식의 말에 공별이 기겁해 눈을 크게 뜨고 살폈다.

“대장군, 어찌하면 좋습니까?”

공별의 다급한 물음에 강이식도 답을 지니지 못하여 그저 입술만 일그러뜨릴 뿐이었다.

“빌어먹을 두더지 같은 놈들…….”

요동성 땅 밑에서 스무 개의 땅굴이 열리고, 일시에 수나라 군이 올라온다면 이를 막을 방도는 전무해 보였다.

이때, 황우가 성벽 위로 올라오며 느긋한 소리를 하였다.

“대장군, 외성과 내성 사이에 해자를 파십시오.”

“해… 해자?”

강이식이 물으니, 공별도 따라 물었다.

“해자는 성 밖에 파는 것인데… 성 안에 파라고?”

이에 황우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하였다.

“꼭 밖에만 파란 법 있나? 안에다 파면 누가 때려죽이는 법이라도 있는가?”

이에 강이식이 기뻐 황우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래, 황우 네 말이 맞다. 요동성의 외성과 내성 사이에 해자를 파자꾸나. 어서 황우 네가 시작하거라. 급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