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난공불락 요동성 (3)
황제 양광이 금빛 찬란한 마차에 올라 선두에 서고, 금색 갑주를 걸친 어영군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우문술의 좌군과 우중문의 우군이 넓게 펼쳐 요동의 드넓은 들판을 가득 메운 채 행군하였다.
이들 좌우 군대는 상장과 아장을 각각 한 명씩 두었다.
또한 좌우 군의 기병은 사십 대로 하고, 각 대는 백 명씩 구성하여, 십 대가 한 단이 되게 하였다.
보군은 팔십 대로 구성하고 다시 또 이를 사 단으로 꾸렸다.
각 단마다 각각 편장 한 명을 두었고 깃발은 물론, 갑옷, 투구, 갓끈, 인장끈 등의 색을 각 단마다 다르게 하였다.
황제의 상징인 금색을 중심으로 좌우 군의 각 단들이 각기 그 색을 달리하여 깃발을 드높이니, 요동벌이 무척이나 화려하였다.
이에 맞서 고구려는 요동의 크고 작은 이십여 개의 성들이 일제히 평지에 자리한 요동성을 중심으로 방어진을 펼쳤다.
들과 평야는 버리고, 성 밖 마을의 우물에 독을 풀었으며, 수나라 군이 혹여 이용할 수 있는 집들은 모두 벽을 허물고 천장을 무너뜨렸다.
수나라 군의 말이 먹을 초지는 불태웠으며, 들과 야산의 곡물은 뽑거나 태웠다.
인근 백성들은 일제히 요동 이십여 성으로 피신하였고, 남자는 나이를 불문하고 무기를 들었으며, 여인들도 수성에 필요한 일을 도왔다.
요하를 건너고도 나흘의 시간을 두어 요동성 앞에 당도한 황제 양견은 관풍행전을 세우라 명하고는 그곳에서 전시조정을 꾸렸다.
요동성은 한나라 때 공손 씨 일족이 세운 평지성으로, 이후 고구려가 증축 보수하여 성벽은 높고 매우 단단하였다.
요동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구성되었으며, 내성 안에는 요동성탑(遼東城塔)이 세워져 주위를 내려다보았다.
성벽 위에는 별도로 담을 쌓았는데, 이를 여장(女墻)이라 하였다.
여장은 밖으로 구멍을 내었는데, 이 구멍은 군사들이 여장에 몸을 숨긴 채 화살 등을 쏠 수 있는 사혈(射穴)이었다.
또한 각 문에는 문루(門樓)가 세워져 있었고, 성의 모서리마다 각루(角樓)가 설치되어 군사들을 지휘하고 적을 내려다보며 공격할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요동성을 올려다본 황제 양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탄복하였다.
“지독한 놈들이로다. 성벽 위에 또 담을 세우다니, 이토록 공성전에 진심인 놈들은 처음이로다.”
중국의 성벽은 고구려의 성벽과 달리 무척 넓어 많은 인원이 성벽에 올라 그 수로 적을 대적하였다.
이와 달리, 고구려의 성벽은 그 위가 좁고 담마저 세워 성벽 위에 적이 올라도 담 뒤에 숨어 싸울 수 있었다.
“우리가 준비한 공성 병기만으로는 부족할 듯싶구나.”
황제 양견이 이렇듯 중얼거릴 때, 요동성의 성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황제!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소!”
대장군 강이식이 낭아봉을 비켜 들고 말 위에서 예를 표했다.
“저자로군, 오랜만이로다.”
황제 양광이 빙그레 웃으니, 사홍을 도와 부교를 건설하였던 소부감 하조가 나서 말하였다.
“고구려의 대장군 강이식이 전장의 예를 갖추니, 우리도 장수를 내보내어 겨루게 하소서. 우의위대장군 설세웅이라면 능히 강이식을 제압하리라 사료되옵나이다.”
하조의 추천에 황제 양견이 우의위대장군 설세웅을 불렀다.
장창을 쥐고 허리에 검을 찬 설세웅이 말에서 내려 황제 앞에 무릎 꿇었다.
설세웅은 토욕혼 정벌을 비롯하여 여러 전장에서 그 공이 큰 인물이었다.
황제 양견이 돌궐의 금산을 공격해 계민가한의 항복을 받아낸 뒤, 서장 공략을 시도하니, 설세웅이 옥문도행군대장으로서 전장을 지휘하였다.
돌궐의 계민가한(啓民可汗)이 설세웅을 도와 함께 서역의 이오(伊吾)를 합공하기로 했으나, 배신하여 약속을 어기고 도주하였다.
설세웅은 계민가한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군을 이끌고 사막을 건너니, 방심하고 있던 이오의 군대들이 싸우기도 전에 항복하였다.
이처럼 설세웅은 배신에도 물러서지 않고, 광활한 사막조차 그의 앞을 막지 못하는 장수였다.
“장군, 그대라면 검귀라 불리는 저 강이식을 대적할 수 있다 하는데, 가능하겠소?”
황제 양견의 물음에 설세웅이 힘차게 답하였다.
“죽을지언정 패하여 돌아오지 않겠나이다.”
이에, 황제 양견이 흡족해 웃었다.
“좋소, 부디 살아 돌아오시오.”
황제에게 예를 올리고 설세웅이 말에 올라 앞으로 나아갔다.
“대장군! 설세웅이 인사 올리오!”
적색 갑주를 걸친 설세웅이 소리 높여 외치고는 머리를 숙여 예를 표하니, 당당하면서도 무척이나 용맹스러워 보였다.
이에 강이식도 앞으로 말을 몰아 나오며 짧게 머리를 끄덕여 예를 표했다.
“다짜고짜 서로의 목을 베기 바쁜 전장에서 뭔 예를 그리 차리시오. 아무튼 반갑소. 설 장군.”
서로가 서로의 위명을 들은 지 오래인지라, 처음 대면하였으면서도 낯설지 않았다.
“대장군, 그럼 소장이 먼저 가겠소이다!”
적색 갑주에 적색 피풍의를 날리며 설세웅이 말을 달려왔다.
이에 강이식도 검은색 갑주에 두 개의 뿔이 솟은 투구를 쓰고 검은색 피풍의를 휘날리며 말을 몰아 나왔다.
요동성 성벽 위에선 공별이 언제든 설세웅을 향해 화살을 날릴 채비를 하였고, 성문에선 황우가 말을 달려나갈 준비를 하였다.
또한 설세웅의 뒤에는 넓게 진을 펼친 수나라 백십삼만 대군이 언제든 요동성을 공략할 준비를 마치고 황제의 명만 기다리고 있었다.
깡!
설세웅의 창날과 강이식의 낭아봉이 서로 부딪쳐 불꽃을 튀겼다.
그리고, 낭아봉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설세웅의 창이 부러져 하늘 높이 떠올랐다.
이에 설세웅이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허리에 찬 검을 뽑으니, 강이식이 피식 웃으며 왼손을 뻗어 설세웅의 뺨을 후려쳤다.
“컥!”
한 모금의 선혈을 내뱉으며 설세웅이 말 위에서 휘청였다.
기껏 뽑아 들었던 검도 손의 힘이 풀려 놓치니, 수나라 진영에서 탄식이 터졌다.
승기를 잡은 강이식이 다시 왼손을 뻗어 설세웅의 목을 쥐려 했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말에서 떨어질 것처럼 의식이 흐트러졌던 설세웅이 어느새 정신을 차려 주먹을 날리니, 강이식이 재빨리 몸을 숙여 피하였다.
퍽!
허공을 가른 설세웅의 주먹이 강이식의 투구에 달린 뿔을 후려쳤다.
쇠뿔로 만든 뿔이 부러져 날아가고, 이어서 강이식의 머리에서 투구가 벗겨져 땅에 떨어졌다.
“이놈이!”
투구가 벗겨진 강이식이 격분해 낭아봉을 휘두르니, 설세웅이 온 힘을 다해 양손으로 낭아봉을 움켜쥐었다.
“으아악!”
강이식의 완력이 더해진 낭아봉을 움켜쥔 설세웅은 손목이 으스러지고, 어깨가 빠질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결코 낭아봉을 움켜쥔 양손을 풀지 않고, 말 위에서 몸을 날려 머리로 강이식의 이마를 들이받았다.
쾅!
난생처음, 강이식도 이마가 으깨질 듯한 고통에 신음을 토했다.
“윽!”
이를 놓치지 않고 설세웅이 재차 머리로 강이식의 이마를 들이받았다.
쾅!
두개골이 쪼개질 것 같은 고통에 강이식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이번엔 강이식도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고는 다시 또 머리로 들이받는 설세웅을 향해 자신도 머리를 힘껏 휘둘러 맞섰다.
쾅!
서로의 머리와 머리가 부딪치며 끔찍한 충돌음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침내 설세웅이 축 늘어지자, 강이식이 힘껏 낭아봉을 휘둘렀다.
정신이 아득해지면서도 설세웅은 결코 양손의 힘을 풀지 않았기에, 낭아봉과 함께 떠올랐다.
“이, 이놈이?”
강이식은 설세웅의 끈질김에 놀라 낭아봉을 재차 휘둘러 설세웅을 떨구려 했다.
그러나, 설세웅은 결코 낭아봉을 놓지 않았고, 허공에 몸이 붕 뜬 채로 발을 휘둘러 강이식의 턱을 후려 찼다.
“컥!”
설세웅에게 턱을 가격당한 강이식이 신음을 토하고는 왼손을 휘둘러 설세웅의 명치를 가격하였다.
“컥!”
숨이 턱 막혀 입에서 침까지 질질 흘리면서도 설세웅은 여전히 낭아봉에 매달려 발을 휘둘렀다.
이에 기가 질린 강이식이 낭아봉을 멀리 던져 버리니, 마침내 설세웅도 낭아봉과 함께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지독한 놈이로다.”
강이식이 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설세웅의 몸에 올라타 주먹을 날렸다.
바위도 부술 강이식의 주먹에 설세웅의 머리는 온통 피로 물들었다.
그러나, 머리가 쪼개질 듯한 고통에 의식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설세웅은 주먹을 날려 강이식의 턱을 가격하였다.
결코 힘이 들어가지 않은 주먹이었으나, 설세웅의 꺾이지 않는 기세에 강이식도 기가 질렸는지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데려가라!”
낭아봉을 쥐고 말에 오르며 강이식이 외치니, 설세웅의 부장들이 급히 말을 몰아 나왔다.
성문에서 대기하던 황우도 강이식을 돕기 위해 쇠망치를 쥐고 말을 달려 나왔다.
이에, 강이식이 황우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황우, 들어가자!”
황우와 함께 성문으로 향하던 강이식이 말을 멈춰 세우고는 몸을 돌려 황제 양견에게 소리쳐 말하였다.
“황제! 인사는 이만하면 족하오! 다음엔 그대의 목을 취하러 가겠소!”
이에, 황제 양견이 빙그레 웃었다.
“역시, 강이식은 기개가 드높은 장수로다. 고작 오만의 군사로 나의 백만 대군을 막는 것도 부족하여 내 목을 취하겠다라… 하하하.”
잠시 뒤,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설세웅이 황제 양견의 앞에 무릎 꿇었다.
“죽음으로 죄를 덜겠나이다.”
설세웅의 말에 황제 양견이 허허 웃었다.
“나는 그대가 전장의 귀신 강이식을 이기리라 여기지 않았소.”
“폐, 폐하…….”
설세웅이 분해 말을 잇지 못하니, 황제 양견이 손을 뻗어 설세웅을 일으켜 세웠다.
“설 장군. 그대는 비록 강이식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저 오만한 강이식의 면상에 손과 발은 물론 머리까지 멋지게 날려주었소. 그것이면 족하오. 가서 쉬시구려. 전쟁은 이제부터요.”
설세웅이 비록 패하였으나, 그의 투지는 수나라 군의 전의를 불태우게 하였다.
영민한 황제 양견은 이를 깨닫고 크게 흡족하였으니, 설세웅을 벌하기는커녕 오히려 휴식이란 상을 내린 것이다.
이윽고 이동식 궁전 관풍행전이 세워지니, 황제 양견이 관풍행전 가장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마련하고 지휘하였다.
“길게 끌 것 없다. 요동성을 에워싸고 일시에 공략하라!”
황제 양견의 명에 따라 요동벌에 넓게 진을 펼쳤던 백십삼만 대군이 요동성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진을 좁혔다.
좌군 우문술과 우군 우중문이 황제의 명을 기다리며 관풍행전을 바라보니, 마침내 관풍행전에서 공격 깃발이 올라가고 북이 울렸다.
“공격하라! 요동성을 함락시켜라!”
좌군 우문술이 명을 내리니, 우군 우중문도 공격 명령을 내렸다.
원을 그리듯 요동성을 포위한 백십삼만 대군이 일시에 함성을 내지르며 원의 중심 요동성을 향해 내달렸다.
“와아아아!”
이에, 설세웅과 일전으로 한쪽 뿔이 부러진 투구를 쓴 강이식이 밀려드는 수나라 군사들을 내려다보며 낭아봉을 치켜들었다.
이를 지켜보던 공별이 목청 높여 명하였다.
“살을 날려라!”
이에, 요동성 여장 사혈에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쏴아아!
사다리를 든 수나라 군사들이 화살비 속에서 쓰러지고, 갈고리에 밧줄을 맨 군사들도 성벽 아래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관풍행전에서 이를 지켜보는 황제 양견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강 장군, 그대가 마련한 화살이 나의 백만 대군보다 결코 많지 않을 것이오.”
황제 양견의 말처럼 사다리를 든 군사들이 쓰러지면, 그 뒤를 사다리를 든 다른 군사들이 대신하였고, 밧줄을 든 군사들이 쓰러져도 이 역시 다른 군사들이 대신하여 뒤를 이었다.
요동성 성벽 아래는 수나라 군사들의 시신으로 가득하였으나, 이를 대신할 수나라 군사들은 하늘의 별처럼 많았다.
이를 지켜보던 강이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살을 아끼고, 포차와 발석거를 움직여라.”
강이식의 명에 공별이 소리 높여 외쳤다.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라! 적들에게 불바다의 고통을 안겨 주거라!”
성벽 아래 대기하던 포차와 발석거가 굉음을 내며 불붙은 나무와 기름통을 날렸다.
성 밖으로 날린 기름통들이 사방으로 기름을 뿌리고, 불붙은 나무들이 불길을 일으키니 일대가 불바다가 되었다.
이를 기다려 성벽 위 여장에서 건초 더미를 던지고, 불화살을 날리니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요동성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남기지 말고 태워라!”
공별의 외침에 포차와 발석거가 계속하여 사방으로 불붙은 나무와 기름통을 날리니, 불길에 갇힌 수나라 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타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