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난공불락 요동성 (1)
고구려가 예상하였던 수의 침공 시기는 정월이었다.
그러나 수의 황제 양광은 이보다 늦게 출병하였으니, 꽃 피는 사월이었다.
“요택의 패전 때문이라도, 땅이 단단한 정월을 출병 시기로 정하리라 생각하였건만, 수의 황제 양광은 생각보다 느긋한 성격인 모양이오.”
태왕이 이렇듯 마음 편히 말하니, 신하들이 불만을 토로하였다.
“폐하, 지금 수의 출병 시기가 예상보다 늦었다고 말할 상황이 아니옵니다.”
태대사자 사선종유가 먼저 입을 여니, 이에 질세라 종리위두대형 북장원도 말을 보태었다.
“폐하, 이제라도 황제에게 사람을 보내어 강화를 요청하시옵고, 수의 군대가 물러간 뒤 입조하소서.”
이에, 상장군 주용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종리위두대형! 어찌 감히 폐하께! 머리를 조아리고 싶거든 종리위두대형께서나 투항하여 납작 머리를 조아리시구려!”
“뭐라? 그대가 지금 누구에게 머리를 조아리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인가?”
종리위두대형 북장원이 노하여 눈을 부라리니, 태왕이 껄껄 웃었다.
“장인, 그만하시오. 장인도 머리를 조아리지 말고, 나도 머리를 조아리지 맙시다. 아직 싸우기도 전인데, 머리 조아릴 생각부터 해서야 되겠습니까?”
태왕이 부드럽게 말하였으나, 종리위두대형 북장원은 여전히 언성을 높여 말하였다.
“하오나, 전하! 강화도 시기가 있사옵니다. 그 시기를 놓친다면, 황제가 크게 노하여 강화 조건 또한 우리에게 불리해질 터이오니, 한시라도 빨리 사람을 보내시어…….”
북장원의 장황한 말을 태왕이 끊었다.
“장인, 싸우기도 전에 강화부터 맺자고 하면, 오히려 얕보지 않겠소?”
“이미 수의 황제는 우리 고구려를 얕보고 있사오니, 얕볼 것을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북장원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반박하니, 태왕이 난처한 듯 허허 웃었다.
“허허, 장인… 나는 수의 황제가 얕보는 것이 싫소. 하여, 우리 고구려가 결코 힘에 밀리지 않음을 가르쳐주고, 함부로 얕잡아 보지 못하게 하고 싶소.”
그러나 태왕이 그 어떤 말을 해도 오직 강화만이 정답이라 믿는 북장원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수의 황제가 이끈 침공군은 그 수가 백십삼만에 달하옵니다. 유례없는 대군이온데, 어찌 우리가 힘에 밀리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오직 강화만 주장하는 북장원이 못마땅한 상장군 주용이 다시 나서 말하였다.
“소장은 선대 태왕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결코 그 어떤 강적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았소. 내가 머리를 조아리는 대상은 오직 태왕 폐하뿐이오.”
“…….”
“헌데, 그대는 어찌하여 태왕 폐하께 굴욕을 강요하는 게요? 폐하의 굴욕은 나의 굴욕이고, 만백성의 굴욕이오. 소장은 굴욕을 감내하느니, 차라리 전장에서 죽을 것이오!”
“상장군, 백십삼만이오! 백십삼만! 백십삼만이 몽둥이만 들고 쳐들어와도, 감당하기 어려울 터인데, 갑주를 걸치고 무장한 정병이오! 정병 백십삼만! 강화를 맺지 않고 맞선다면 그대의 말대로 전장에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란 말이오!”
결코 북장원도 물러서지 않고 소리쳐 말하니, 이를 동조하는 신하들과 반대하는 신하들도 제각기 거들고 나섰다.
이에 대전 안이 무척 소란스러워지니, 더는 회의 진행이 불가했다.
보다 못한 강이식이 한발 앞으로 나와 우렁차게 아뢰었다.
“폐하! 소장 강이식 아뢰나이다.”
강이식의 음성이 대전 안을 쩌렁쩌렁 울리니, 그제야 제각각 목청을 높이던 대소 신료들이 진정하여 말을 멈추었다.
“대장군 말하시오.”
“적의 대군은 이제 막 낙양을 떠났으니, 소장도 요동성으로 향하여 단단히 지키고 있겠나이다. 간압하여 주시옵소서.”
강이식의 요청에 태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대장군, 요동성에 전시조정을 꾸리는 것이 좋겠소?”
“불가하옵니다. 대적할 적이 백만 대군이기에… 요동성에 전시조정을 꾸림은 너무도 위험하옵니다.”
강이식이 이렇듯 답하니, 태왕도 이전 전쟁과 상황이 다름을 안타깝게 여기며 말하였다.
“대장군, 요동성 방어가 쉽지 않을 터이니, 부디 조심 또 조심하시기 바라오.”
백만 대군을 막아야 할 강이식에게 조심하란 말 이외에 다른 말도 할 처지가 아니니, 태왕의 마음은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내 곧 태연히 표정을 바꾸니, 강이식은 내심 태왕의 담대함에 탄복하였다.
‘폐하도 두려우실 터인데, 저리도 동요치 않으려 애쓰시는구나.’
이때, 종리대형 명림신이 조심스럽게 나서 아뢰었다.
“수의 황제 양광은 세 차례나 사신을 보낸 자입니다. 그가 비록 백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침공 중이오나, 전쟁보다 강화를 원할 터. 요동성이 버티는 동안 반드시 수의 황제를 설득하시어, 강화를 맺으셔야 하옵니다.”
또다시 강화가 언급되니, 상장군 주용을 비롯한 무장들이 언성을 높였고, 오부 귀족들로 구성된 신료들이 이에 소리쳐 맞섰다.
이 소란을 가만히 지켜보던 을지문덕이 봉황의 눈썹을 꿈틀거리며 앞으로 나와 태왕에게 아뢰었다.
“폐하, 소인을 막리지에 올려주소서.”
을지문덕이 당당하면서도 위엄있게 말하니, 일순 대전 안에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곧 을지문덕을 꾸짖는 북장원의 음성이 정적을 깼다.
“뭐라? 이 와중에 그대는 권력을 탐하는 게요?”
노회한 정치인 북장원의 호통에도 을지문덕은 전혀 물러섬이 없었다.
“하오면, 국장께서 황제에게 엎드려 강화를 요청하실 것이온지요?”
“뭐라?”
“소인 권력이 탐나, 막리지 자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요동성에서 대장군이 강적을 막아 시간을 끌어준다면, 소인이 대 고구려의 재상 막리지 신분으로 수의 황제와 강화를 맺고자함이옵니다.”
을지문덕이 당당히 강화를 언급하니, 귀가 솔깃해지는 북장원이었다.
“강화… 을지공 그대가 직접 황제를 설득하여 강화를 맺겠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손쉽게 이길 전쟁을, 황제가 어찌 강화를 맺겠습니까? 대장군이 요동성을 단단히 지켜 황제를 지치게 한다면, 소인이 홀로 적진에 들어가 강화를 성사시키겠나이다.”
지략과 언변이 뛰어난 을지문덕이 직접 황제를 설득해 강화를 성사시키겠다고 하니, 북장원으로서는 이보다 기쁜 일이 없었다.
구겨졌던 미간을 풀며 북장원이 한껏 을지문덕을 추켜세웠다.
“만고의 충신이며, 우리 대 고구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상인 을파소의 후예, 을지문덕 공이 손수 나서 황제를 설득하겠다니, 이는 곧 강화가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소이다. 과연 충신이로다.”
북장원을 따라 대소 신료들도 을지문덕을 칭찬하기 바쁘자, 태왕이 고개를 갸웃하였다.
“그대들은 을지문덕이 막리지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 게요?”
태왕의 물음에 북장원이 정색하여 답하였다.
“송구하오나, 폐하… 소신 북장원 아뢰나이다. 부디, 을지문덕을 막리지에 임명하시어 군을 통솔케 하고, 수의 황제와 강화를 맺도록 하시옵소서.”
이에, 사선종유를 비롯한 대소 신료들도 머리를 조아리며 을지문덕을 막리지에 임명하라 청하였다.
“폐하, 을지문덕을 막리지로 임명하시옵소서.”
“간압하여 주시옵소서.”
모두가 을지문덕을 막리지로 임명하라 청하니, 태왕도 고개를 끄덕여 답하였다.
“그대들 모두의 뜻이 이렇듯 하나가 되니, 참으로 보기가 좋소. 내 그대들의 뜻을 따라 을지문덕을 막리지에 임명하니, 모두 을지문덕을 따라 이 전쟁, 우리 고구려의 손실이 적도로 노력해 주시오.”
태왕은 유독 손실을 강조하였으나, 북장원을 비롯한 대소 신료들의 머릿속은 오직 강화만 가득하여 이를 가볍게 여겼다.
* * *
온달은 대전에서 한마디 의견도 내지 않은 채 조용히 물러났다.
그가 집에 당도하니, 기다리다 지친 막바우가 급히 달려와 맞이했다.
“장군, 어찌 되었습니까? 출병입니까?”
막바우의 물음에 손을 저어 대답을 대신한 온달이 안으로 들어서니, 평강과 경우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군 출병이시온지요?”
평강이 근심을 담아 물으니, 이에 경우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적봉진으로 향해야 합지요?”
그러나 온달은 무척 상심한 듯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에, 성미 급한 막바우가 참다못해 소리쳐 물었다.
“아니, 장군! 대답 좀 해보시오! 이렇듯 장군이 벙어리가 되어 돌아올 줄 알았다면, 나도 입궁하였을 것인데, 아니, 속 터지게… 뭐라도 말 좀 해보시오!”
막바우의 재촉에 온달이 겨우 입을 열었다.
“을지 공이 막리지에 올라 수의 황제와 강화를 맺을 것이오.”
“뭐? 뭐요? 싸우지도 않고 뭔 강화 타령이오? 이런 망할!”
막바우가 버럭 성질을 부리니, 경우가 옆구리를 찔러 자제시켰다.
“좀 닥치시게. 어디서 성질을 부리는 겐가?”
경우의 지청구에 그제야 막바우가 얌전해지니, 평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전쟁은 없는 것이옵니까?”
“그렇지는 않소. 대장군이 요동성을 단단히 지키며 시간을 끌고, 그 사이 을지문덕 공께서 수의 황제를 설득해 강화를 맺을 것이오.”
“백만 대군이온데, 가능하겠습니까?”
평강의 물음에 온달도 답하지 못하였다.
백만 대군을 상대로 요동성이 얼마나 버텨낼지 알 수도 없었고, 백만 대군을 이끌고 온 수의 황제가 선선히 강화를 맺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 * *
다음날, 강이식이 요동성으로 떠나니, 온달과 평강, 경우와 막바우도 이를 배웅하였다.
오랜 벗 을지문덕도 막리지 신분으로 배웅 나오니, 강이식이 무척 반겼다.
“을지 공, 그대가 처음으로 나보다 관직이 높아졌구려. 출세하셨소. 하하하.”
강이식의 놀림에 을지문덕이 빙그레 웃었다.
“대장군의 목이 요동성에서 떨어질지, 강화를 맺으러 황제를 찾아간 내 목이 먼저 떨어질지 우리 내기해 볼까요?”
“하하하, 그거 재밌겠구려. 그래 해봅시다. 누구 목이 먼저 떨어질지 참으로 궁금하구려. 하하하.”
강이식이 호탕하게 웃으며 답하였다.
이에, 온달이 슬그머니 대화에 참여하였다.
“두 분 목은 부디 무탈하길 바라오며, 소장은 어찌하면 되옵니까? 적봉진에서 군을 이끌고 적의 수송 물자라도 급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런 임무를 부여받지 못하였으니, 답답한 모양이었다.
이에, 을지문덕이 고개를 저었다.
“수의 후방 지원부대가 보급 물자를 수송하는데, 그 규모가 백만이라 하네. 적봉진의 소수 병력으로 보급을 끊는 것은 불가하네. 이번 전쟁은 우리가 겪었던 그 어떤 전쟁과 그 규모가 다르다네.”
“하오면, 역시 강화 말고는 대책이 없는 것이옵니까?”
온달의 물음에 을지문덕이 답하지 못하니, 강이식이 온달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말에 올랐다.
“나, 가네. 원하는 만큼 시간을 끌 터이니, 부디… 우리 고구려의 손실이 적게 나는 선에서 강화를 맺어 보시게.”
물러설 줄 모르는 강이식의 입에서조차 강화가 언급되니, 온달도 더는 제 주장을 펼 수 없었다.
“제길! 너무 많긴 많아. 백만 대군이라니… 빌어먹을… 강화밖에 도리가 없는 건가 봐.”
막바우가 구시렁거리는데도, 어찌 된 일인지 경우가 자제시키지 않았다.
경우도 강화 이외에 방도가 없는 이 상황에 크게 낙심한 듯 의기소침해 있었다.
* * *
온달 일행이 집에 돌아오니, 반가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군,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안시성의 젊은 성주 양만춘이었다.
“아니, 성주! 정말 오랜만이오.”
온달이 반가워 양만춘의 손을 덥석 잡으니, 경우도 오랜만에 만난 벗이 반가워 양만춘의 어깨를 툭 쳤다.
“연락이나 좀 하고 오시지.”
경우의 핀잔에 양만춘이 허허 웃었다.
“비밀리 다니라 하시어, 연락할 수가 없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