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백십삼만의 정벌군과 백만의 후방 지원군 (3)
개소문이 왕박의 소문을 쫓아 서호까지 내려오니 어느새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서호에서 왕박이 해적질을 한다는 소문이 무성하여 개소문이 홀로 해적 소굴을 찾아갔으나, 왕박을 사칭한 조무래기들이었다.
“도적이 도적을 사칭하는구나. 가소롭도다.”
개소문의 조롱에 해적 무리가 일제히 달려들었으나, 개소문 하나를 당해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개소문도 팔을 베어 치료가 필요했다.
“왕박이 한곳에 머물지 않으니, 세월만 허비하는구나.”
개소문이 탄식을 하며 다친 팔을 천으로 감쌌다.
개소문의 말처럼 왕박은 결코 한곳에 정착하지 않았다.
마치 메뚜기 떼처럼 작은 성과 마을을 휩쓸고는 한동안 얌전히 지내다가 다시 멀리 떨어진 마을을 습격하였다.
“또 소문을 쫓아야 하는가?”
개소문이 지친 몸을 이끌고 인근 마을에 들어가 약방을 찾았다.
다행스럽게도 마을 사람들의 안내로 쉽게 약방을 찾은 개소문이 다친 팔을 치료할 약을 주문하였다.
“팔을 다쳤소. 치료할 약을 부탁하오.”
“처방전은 없는 게요?”
“고작 이런 상처에 처방전이 필요하오?”
개소문이 팔을 내밀어 보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상처를 감싼 흰 천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에 혈색이 좋지 않은 약방 주인이 히죽 웃으며 답하였다.
“검상이로군. 그래, 팔을 다쳤으면 의원을 찾아가야지. 약방을 찾아오면 어찌하오?”
약방 주인의 입꼬리는 웃는 듯 올라갔으나, 표정은 굳어 있어 무척 어색하였다.
“한가이 의원을 찾아갈 형편이 아니오. 약이나 주시오.”
“약이야 드릴 수는 있으나, 내상이 아닌데, 약만 먹어서야 되겠소?”
이에, 개소문이 자신의 팔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바르거나 먹는 것으론 내 팔을 치유하기 어려운 게요?”
“보아하니, 검이나 날붙이에 베인 듯한데, 그런 외상은 약을 먹어 치료할 수 없다오. 자칫하면 곪아서 팔을 잘라야 하오.”
개소문의 팔을 가리키며 약방 주인이 약을 건네었다.
“일단 지혈이 되도록 이 약을 바르고 깨끗한 천으로 감아 보시오. 뭐, 흉은 남겠으나, 어찌어찌 아물기는 할 게요.”
약을 받아 든 개소문이 값을 치르고 몸을 돌리자, 약방 주인이 물었다.
“그런데, 황제를 모시고 있어야 할 갓쉰동 나리께서 어쩌다가 이리 떠돌게 된 게요?”
개소문이 놀라 몸을 획 돌려 약방 주인을 노려보았다.
“뭘 그렇게 놀라 바라보는 게요?”
약방 주인이 히죽히죽 웃으며 물으니, 개소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대는 누구요?”
개소문의 물음에 약방 주인이 대꾸도 없이 발을 옮겨 문을 닫고는 개소문에게 손짓하였다.
“오늘 장사는 그만하고, 대화나 나눠 봅시다.”
약방 주인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니, 개소문도 망설이지 않고 뒤를 따랐다.
‘적이라면, 내게 독을 줘 해치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내게 악의는 없는 듯하니, 이야기나 들어보자.’
개소문이 방으로 들어오자, 약방 주인이 차를 내오며 자리를 권하였다.
“해칠려고 마음 먹었다면, 그대는 이미 죽었을 게요.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의심할 필요도 없소.”
약방 주인이 찻잔을 개소문에게 건네며 히죽 웃었다.
“나를 어찌 아는 게요?”
이에 약방 주인이 웃으며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니, 놀랍게도 얼굴 가죽이 벗겨졌다.
“인, 인피면구?”
개소문이 놀라 중얼거리니, 약방 주인이 빙그레 웃었다.
“나의 벗, 언지창이 시체의 얼굴 가죽을 벗겨 가면을 만들어 주었다오. 내가 황제에게 쫓기는 신세라 말이오.”
인피면구를 벗은 약방 주인의 얼굴은 개소문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당진평, 그대가?”
“그렇소. 당진평이외다. 어쨌든 황제의 총애를 받는 갓쉰동 나리를 이곳에서 뵙다니… 참으로 오랜만이오. 반갑소.”
개소문이 급히 주위를 둘러보고는 찻잔에 시선을 두었다.
이에, 당진평이 허허 웃었다.
“걱정마시오. 그대를 해칠 생각이었다면 그대가 이 약방에 들어선 그때 죽었을 것이오. 독을 다루는데, 나만 한 이가 없다는 것, 잘 알지 않소. 하하하.”
개소문도 당진평의 말에 수긍하여 찻잔을 단숨에 비웠다.
뜨거운 찻물이 목을 타고 넘어갔으나, 예상대로 독은 없었다.
“이렇게 성장하셨으니, 이전처럼 마구 하대할 수도 없고. 이젠 대장부가 되셨구려.”
당진평이 한가한 소리를 하니, 개소문이 다그쳐 물었다.
“내 동료들은 어찌 된 게요?”
“그게 말이오. 나는 양소와 양광을 도와 독고황후를 독살하였다오. 그땐 황궁에도 나의 수하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었지. 헌데 말이오.”
당진평이 잠시 말을 멈추니, 개소문이 조급해 물었다.
“그대의 사연 따위는 듣고 싶지 않소. 나의 동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말해주시오. 그들은 어디 있소?”
“이야기엔 순서가 있는 법이오. 어쨌든, 양소가 자결한 이후… 관군들이 나의 객잔들을 몽땅 허물고, 황제는 황궁 내 내관과 궁녀는 물론 잡일꾼까지 모두 죽였지. 아마도 나와 연관된 자들을 찾지 못해 다 죽인 것 같소.”
개소문도 아는 이야기라 마음이 조급해 노려보았으나, 당진평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사실, 내가 객잔을 운영한 것은, 객잔은 세상 어느 마을에나 하나쯤 있어도 의심을 사지 않기 때문이었소. 헌데, 황제가 세상 모든 객잔을 의심하니, 이렇듯 약방으로 대체하게 된 것이지. 약방도 세상 어느 곳에나 존재하고, 소문을 취합할 수 있으니 참 좋더이다.”
“그대의 구구절절한 사연 따위는 듣고 싶지 않소. 나는 한시라도 빨리 내 동료들을 찾아 고구려로 돌아가야 하오. 그대라면 나의 동료들이 어디 있는지 알 것 아니오? 어서 말해주시오.”
“각지의 약방들을 통해, 정보를 취합하고 있으니, 당연히 알지.”
당진평이 놀리듯 말을 멈추니, 개소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갓쉰동 나리의 동료들은 왕박이 데려갔다 하오. 헌데, 그 왕박의 행방이 묘연하지요?”
잠시 말을 멈춘 당진평이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왕박은 본래 태원 인근 태왕산에 산채를 둔 도적 무리의 수괴요. 이연이 북방 반란 세력을 제압할 당시 겁을 집어먹고, 각지를 떠돌다가 어찌 된 영문인지, 산동에서 관을 급습해 갓쉰동 나리의 동료를 구해갔다오. 그리고는 이 중원을 빙 돌아서 말이오. 다시 태왕산으로 갔다오. 하하하.”
태왕산은 개소문에게도 악연이 있는 곳이었다.
“그, 태왕산?”
“그렇소. 황 교두가 그대들을 공격하던… 아주 위급한 상황에 내가 그대들을 구했었지. 바로 그 태왕산이오.”
“나의 동료들을… 그 태왕산에 가면 만날 수 있는 게요?”
개소문이 다시 물으니, 당진평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왕박은 태왕산에 있으나, 그대의 동료들은 그곳에 없다오.”
“그럼 나의 동료들은 어디 있단 말이오?”
개소문의 재촉에 당진평이 빙그레 웃었다.
“오태산에 있을 게요. 왕박이 태왕산으로 다시 간 이유는, 바로 당신 동료들을 오태산에 데려가기 위함이었다오.”
“오태산?”
“그곳에 데려가면, 당신 동료들의 다리를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
“오태산에 누가 있기에, 다리를 고친단 말이오?”
“그 산에 악살이 있지. 악살이라면, 그대 동료들을 걷게 할 수 있을 것이오.”
당진평이 악살을 언급하니, 개소문도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남궁천…….”
“그렇소. 갓쉰동 나리도 알 것이오. 바로 그 남궁천이 오태산에 있다오.”
팽무성, 야수, 쇼락, 공손향이 오태산에 있을 것이란 당진평의 말에 개소문의 마음이 급해졌다.
“고맙소. 그대와 악연이 깊으나, 생각해 보면… 그대가 딱히 나를 해친 일은 없으니, 나 역시도 그대와 다툴 생각은 없소. 부디, 약방 잘 운영하기 바라오.”
급히 인사를 건네고 일어나는 개소문에게 당진평이 말을 건네었다.
“갓쉰동 나리는 대장부로 성장하였으나, 어려서와 다름없구려.”
개소문이 몸을 돌려 바라보니, 당진평이 말을 이었다.
“담대하고, 용감하며 의리가 깊으나, 마음이 여리오. 나는 갓쉰동 나리가 황제를 죽여 나도 덕을 보길 바라였소. 황제를 나리가 죽였다면 나는 이렇듯 숨죽여 지내지 않아도 될 터인데, 어찌 황제를 죽이지 않은 게요?”
꾸짖듯 묻는 당진평에게 개소문은 답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그대가 죽여야 할 때, 죽이지 못하고 멈춘… 아니 도망친 탓에… 세상은 큰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다오.”
“전란?”
서호까지 오면서 조금도 군 동원령을 듣지 못하였기에, 개소문이 놀라 물었다.
“그렇소. 황제는 꽃이 피기를 기다려 백만의 정벌군과 백만의 후방 지원군을 동원할 것이오.”
“그, 그게 가능한 말이오? 아직 아무런 명도 없었거늘?”
“황제 양광은 지나칠 정도로 영민하고 치밀한 자요. 그는 그간의 노역을 통해 순간 동원 가능한 수를 확인하였소. 용의주도한 황제는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때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는 게요.”
“…….”
“꽃이 필 시기가 되면 동원령을 내릴 것이고, 백만의 대군이 운하와 대로를 통해 낙양에 모일 것이오.”
개소문이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라만 보니, 당진평이 손가락을 들어 개소문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대가 황제를 죽이지 않았기에 일어나는 참극이오. 죽일 수 있을 때, 그대는 죽였어야 했소.”
“전쟁을 멈추라…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 글을 남겼건만…….”
개소문이 중얼거리자, 당진평이 허허 웃으며 말하였다.
“하하하, 그 야심만만하고 영민한 황제가 고작 그대의 서신에 마음을 바꿀 거라 믿은 게요? 너무도 어리고, 세상을 모르는군. 몸만 성장하였지, 아직 아이일 뿐이었어. 하하하.”
당진평이 조롱하여도, 개소문은 반박할 수 없었다.
“돌아가, 황제의 목을 벨 것이오!”
개소문의 말에 당진평이 더욱 크게 웃었다.
“하하하! 뭐라, 돌아가 황제의 목을 벤다라… 하하하, 우리 갓쉰동 나리가 떠난 뒤, 황제는 운하와 서원의 물줄기를 따라 세운 궁을 돌며 지내기에, 황제가 어느 궁에 머물고 있는지, 그 누구도 정확히 아는 이가 없다오. 황제는 이렇듯 자신의 안위를 돌보며, 꽃이 피기만 기다리고 있다오.”
웃음기를 지운 당진평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전쟁은 그대의 고구려뿐만 아니라, 이 수나라 백성들에게도 참담한 고통이 될 것이오. 그리고, 황제를 피해 숨어 지내야 할 내게도 고통이고 말이오. 이 모든 고통들은 오직 그대 때문에 일어나게 된 것이오.”
당진평의 비난에도 한마디 변명조차 못 한 개소문은 힘없이 약방을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따스해지고 있었다.
“곧, 봄이겠구나. 낙양으로 돌아가 황제의 목을 베야 할 것인가? 오태산의 동료들을 데리고 고구려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
몸은 성장하였으나, 이제 고작 열일곱 살인 개소문으로선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고구려 태왕 자리를 준다던 황제의 제안이 너무도 달콤하여 죽이지 못한 것이다. 나는 그런 놈이었다. 내가 황제를 죽이지 않아 천하가 고통을 겪게 된 것이다. 모두가 나의 죄다.”
개소문은 그저 다가올 전쟁에 가슴 아파 자신을 책망하며 발을 떼지 못하였다.
* * *
황제 양광은 휘하 그 어느 장수보다 고구려와 전쟁을 치른 경험이 많았다.
“내 비록 패전하였으나, 고구려를 상대로 어떤 전략과 전술을 세워야 할지 잘 알고 있소.”
그는 대소 신료 그 누구의 조언과 충언도 필요하지 않았다.
“백만의 정벌군이 낙양에 집결하여 출정할 것이오.”
황궁이 아닌, 서원의 궁에 대소 신료들을 불러 명하는 황제 양광의 두 눈이 확신에 차 빛나고 있었다.
“고구려가 우리의 보급을 끊지 못한다면, 백만의 정벌군에 맞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오. 하여, 이 정벌군의 보급은 백만의 후방 지원군이 맡아, 적이 감히 보급을 끊지 못하게 할 것이오.”
황제가 역사상 유례없는 백만의 정벌군과 백만의 후방 지원군을 언급하였으나, 그 누구도 감히 이견을 다는 이 하나 없었다.
이에 더욱 자신만만해진 황제 양광이 말을 이었다.
“또한, 수군 십만이 바다를 건너, 평양성 앞에 대기하며, 보급로가 길어진 정벌군에게 군량미를 보급하게 할 것이오.”
수륙 양동 작전이었으나, 이전 침공에서 주나후에게 내려졌던 평양성 공략 명령과는 결을 달리하였다.
보급의 중요성을 황제 양광이 그 어느 장수보다 잘 알고 있기에 가능한 전술이었다.
“들으시오! 이 전쟁의 승패는 보급에 달려 있다는 점 명심하기 바라오. 하여, 나는 양현감에게 총괄토록 하여 그 중임을 맡길 터이니, 내가 출정한 이후 모두가 양현감의 명을 따라 보급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시오.”
보급을 담당할 백만 후방지원군을 양현감에게 맡긴 황제 양광은 정벌군의 좌장군 우문술에게 사십오만 정병을 맡겼다.
그리고 우장군 우중문에게도 사십오만 정병을 맡기고, 자신도 이십삼만 정병을 이끌고 정벌에 나서겠다 선언하였다.
이미 각지의 정병과 동원 가능한 장정 수는 물론이요.
군량미 비축분까지 기재된 장부가 올려져 있었고, 황제 양광은 이를 토대로 정벌군의 규모를 산정하였다.
이에 감히 그 누구도 이견을 내지 않으니, 황제 양광의 명에 따라 각지에서 기재된 정병과 장정 수에 맞게 동원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