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218화 (218/328)

218화 백십삼만의 정벌군과 백만의 후방 지원군 (2)

“뭐라? 입조하여 내게 머리만 조아리고 충성을 맹세하면 평화를 얻을 터인데, 고작 그것조차 못하겠다 하더냐?”

불같이 화를 내는 황제 양광에게 고구려에서 돌아온 사신은 태왕의 전언을 사실대로 고하지 못하였다.

“남쪽의 백제와 신라가 분란을 일삼아 평양성을 비우기 어려운 듯하옵니다.”

이에, 황제 양광이 잠시 생각하더니 명하였다.

“허면, 너는 다시 고구려에 가 내 말을 전하거라. 내 친히 백제와 신라를 정벌할 터이니, 고구려는 길을 열어 맞을 준비를 하라 일러라.”

사신이 식은땀만 주르륵 흘리며 우는 얼굴로 명을 받고 물러나니, 황제 양광이 대소 신료들을 물리고 개소문에게 말하였다.

“보았느냐? 내 신하가 감히 내게 거짓을 말하고 있다. 그리도 고구려의 왕이 두렵단 말인가?”

“그대는 내게 평화를 약조하였소. 어찌 약조를 어기려 하오?”

“나는 고구려를 정벌하려는 것이 아니다. 고구려의 남쪽, 백제와 신라를 벌하려는 것이지.”

“수의 대군이 고구려 땅을 지나도록 태왕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허면, 갓쉰동 네가 고구려의 왕이 되거라. 내 친히, 고구려 왕의 목을 베고, 너를 그 자리에 앉힐 터이니. 너와 내가 천하를 나누어 다스리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평화가 아니겠느냐?”

너무도 달콤한 제안이었다.

이때 개소문의 나이 열여섯 살이었다.

체구는 그 어느 장정보다 당당하고 컸으나, 아직 노회하지 않은 소년일 뿐이었다.

자신의 제안에 개소문의 눈빛이 빛나자, 황제 양광이 더욱 자상하면서도 부드러운 음색으로 말하였다.

“나는 너를 한몸처럼 여기고 있다. 너는 나의 일가와 다름없고, 나의 아들과 같다. 갓쉰동, 네가 고구러의 왕이 되어라. 내가 수의 황위에 있는 한, 너의 고구려와 나의 수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단다.”

개소문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으나, 그 흔들리는 눈빛만으로도 영민한 양광에게 속내를 읽히고 있었다.

“갓쉰동아, 망설일 것이 무엇이더냐? 너의 고구려에 왕만 바뀌는 것이란다. 너도 이제 열여섯이니, 곧 성인이 될 것이다.”

“…….”

“나는 성인이 된 네가 고구려의 왕이 되어 나와 함께 천하의 평화를 이룰 꿈을 꾸고 있느니라. 나의 수나라와 너의 고구려가 형제의 연을 맺어 서로 위아래 없이 왕래한다면, 이 땅의 백성들은 그 무엇을 두려워하고 근심하겠느냐?”

“…….”

“고구려의 왕을 태왕이라 부른다지? 나는 황제요. 너는 태왕이 되는 것이다. 우리 둘은 세상 그 누구보다 서로를 믿고 의지하니, 전쟁은 있을 수 없다. 이는 오직 너와 나만이 할 수 있는 대업이니라.”

야심만만한 열여섯 살 소년 장수 개소문에게 이보다 더 달콤한 제안은 없을 것이다.

“갓쉰동, 아이는 꿈을 지녀야 하며, 그 꿈은 항상 대업이어야 한다. 그러나 황위나 왕위에 오르지 못할 대업은 반쪽짜리일 뿐이다.”

“…….”

“영리하지 못한 왕은 백성을 곤경에 처하게 하고, 국운을 쇠락시킬 뿐이다. 당금, 고구려의 왕이 그러하다. 하여, 네가 고구려의 국운을 일으킴이 옳을 듯하구나.”

“…….”

“갓쉰동아, 너는 그간의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을 통하여 보았을 것이다. 나는 백만의 대군을 일으킬 수 있고, 백만의 후방 지원군을 만들 수 있다.”

그제야 개소문은 황제 양광이 수백만의 백성들을 노역에 동원한 것이 단순히 충성과 복종을 확인하고자함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자는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을… 그리고 빠르게 동원 가능한 능력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검증하였구나. 이자의 말대로 이제 수나라 각지에선 언제든 수백만의 군대가 꾸려질 수 있다.’

황제 양광의 치밀하고 영민함에 개소문이 놀라니, 이를 바라보며 황제 양광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갓쉰동아, 고구려의 태왕은 수의 강함을 모르는구나. 참으로 어리석은 인물이다. 나는 평화를 원한다. 허나 신뢰할 수 있는 이가 고구려의 태왕이어야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너를 반드시 고구려의 왕으로 세울 것이다. 이것이 나의 큰 그림이다.”

마침내 개소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겠소.”

거절이 아닌, 숙고를 말하니 황제 양광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 생각해 보거라. 나는 네가 있어 참 좋구나.”

어느새 밤은 깊었고, 환관들과 궁녀들이 황제의 침소를 살피었다.

황제 양광이 침소에 드니, 밤에도 황제의 곁을 떠나지 않는 개소문은 침소 한쪽에 앉아 잠든 황제를 바라보았다.

‘대운하와 장성 보수 증축. 그리고 돌궐 정벌… 이 모두는 고구려 정벌을 염두에 둔 일련의 포석이었다. 어쩌면, 이 낙양성 천도 역시도 고구려 정벌을 위함일지도… 운하를 따라 세워진 수많은 궁전들 또한 돌발 상황에 대비해 마련된… 그… 이동식 궁전 관풍행전과 용주도 전쟁을 대비한 것이었다.’

차분히 생각해 보니, 황제 양광이 행한 모든 일들은 오직 고구려 정벌을 염두에 둔 것들이었다.

이에 개소문의 등골이 서늘해지며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저자를 죽여야 한다. 지금 죽이지 못한다면, 전쟁의 광풍이 고구려를 휩쓸 것이다.’

개소문이 살며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대었다.

‘아니다. 나를 믿고… 이렇듯 무장한 나를 지척에 두고 잠든… 나를 믿는 저자를 죽일 수는 없다.’

무장을 허락한 것도 황제 양광이요.

자신을 지척에 둔 것도 황제 양광이었다.

‘내가 고구려인임을 알면서도 나를 믿고 의지한 자다. 그런 자를… 죽일 수는 없다. 그러나, 저자가 살아 있으면, 고구려는 전쟁을 피할 수 없다. 죽여야 한다. 지금, 나만이 저자를 죽일 수 있다.’

마음을 굳힌 개소문이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개소문 이외엔 그 누구든 자신을 배신하여 목을 노릴 수 있다고 생각한 황제 양광은 근위장 장형은 물론이요.

환관과 궁녀들조차 침소 주위에 얼씬도 못 하게 하였으니, 개소문이 황제 양광의 목을 벤들 누구도 이를 저지할 수 없었다.

허나,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대고도 개소문은 쉽사리 뽑아 들지 못하였다.

‘이자는 내게 신의를 어긴 일이 없다. 이자의 말대로 내가 고구려의 왕이 된다면, 천하가 평화로워질 수도 있다.’

태왕의 자리가 탐이 나고, 평화가 간절했다.

평화를 명분으로 태왕의 자리를 취할 기회였다.

‘이자는 나를 태왕에 앉힐 힘을 지녔다. 강대한 수나라 전역이 모두 이자를 두려워하며 복종함에도 불구하고, 약소국 고구려의 태왕 따위가 심기를 거스르고 있다. 내가 태왕이 된다면, 이자와 함께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대업이다.’

탐욕은 온갖 명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평온히 잠든 황제 양광과의 거리는 고작 오보.

언제든 목을 벨 수 있었고, 언제든 그의 앞에 무릎 꿇고 고구려의 태왕이 되어 함께 대업을 이루자 다짐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개소문은 이 오보를 유지한 채 날이 밝도록 망설이며 서 있었다.

* * *

황제 양광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눈을 떴다.

“갓쉰동, 궁녀들에게 물을 대령하라 이르거라.”

언제나 침소 한쪽에 있을 개소문을 찾아 황제 양광이 명하였다.

그러나, 묵묵히 일어나 궁녀를 부르던 개소문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불길한 마음에 침상에서 벌떡 일어난 황제 양광은 자신의 머리맡에 놓인 서찰에 시선을 고정하였다.

조심스럽게 서찰을 집어 들고 펼친 황제 양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를 믿고 지척에 둔 그대의 목을 취할 수 없어 떠나오.

그대의 제안은 너무도 달콤하여 차마 얼굴을 마주하고 거절하지 못하였소.

나의 탐욕이 부끄러울 따름이오.

내, 그대에게 간절히 바라니, 부디 고구려 정벌을 단념해 주오.

만일 그대가 내 청을 거절하고 고구려 정벌을 강행한다면.

내 돌아와 그대의 목을 취할 수밖에 없음을 한탄할 뿐이오.

이미 그대가 성군이 되기는 어려울 터이나, 고구려 정벌로 인하여 목숨마저 잃는 일은 없길 바라오.]

개소문이 남기고 떠난 서찰을 읽고 또 읽은 황제 양광이 마침내 눈물 흘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내가 정을 주고 신뢰를 보였건만! 하하하. 그래, 이 세상에 나를 진심으로 위하고 따르는 이는 없다. 오직 힘으로 굴복시켜 복종케 해야만 따를 뿐이다. 좋은 말로 어르고 달래 봐야 배신만 할 뿐이다. 세상은 오직 힘으로, 오직 힘만으로 굴복시켜야 한다. 하하하.”

* * *

황궁을 벗어난 개소문은 서둘러 산동의 당진평을 찾아 말을 달렸다.

‘황제가 인질로 잡힌 이들을 해칠 것이다. 급하다.’

쉼 없이 말을 달리고 달려 마침내 산동에 도착하니, 어느새 가을이 찾아오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낙양에서 군을 일으켰다는 소식은 없었다.

개소문이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감금되어 있던 객잔을 찾으니, 어찌 된 영문인지 폐허로 변해 있었다.

황망한 개소문이 지나가는 노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노인장, 이 객잔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소?”

“그대는 이곳 사람이 아닌 모양이구려. 이 객잔은 몇 해 전, 월국공 양소가 자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관군들이 들이닥쳤다오.”

“뭐라? 관군이?”

“그렇소. 이미 객잔 주인은 도주한 뒤였고, 관군들이 일하던 이들을 잡아가고 이 객잔을 허물었다오. 이 객잔 말고도, 산동 일대의 객잔 대부분이 이렇게 되었다지. 아마도 이 객잔들과 월국공이 관련 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대는 이 객잔과 어찌 되는 관계요?”

장황히 설명하던 노인이 개소문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살폈다.

당장이라도 관에 고할 듯한 노인의 기세에 개소문이 소매에서 은전을 꺼내 쥐여주었다.

“이 객잔에 친구들이 감금되어 있었다오. 나는 이 객잔과 원한이 있는 인물이니, 의심하지 않아도 좋소.”

큰 횡재를 한 노인이 은전을 소매에 감추며 웃는 얼굴로 답하였다.

“대인이 이 객잔과 어떤 관련이 있든 내 알 바 아니니, 개의치 마시옵소서.”

연신 개소문에게 허리 숙여 예를 올리고는 노인이 떠나자, 개소문도 페허가 된 객잔 앞에 더 머물 수 없어 말에 올랐다.

“어디를 가야… 찾을 수 있을까?”

자신이 구하러 올 날만 기다렸을 팽무성, 야수, 쇼락, 공손향 등의 얼굴이 아른거려 고구려로 말을 돌릴 수 없었다.

‘동이도 구하지 못하고, 독고영과 팽운도 구하지 못하였으며, 이젠 내가 구해주기만 기다렸을 이들마저 두고 떠날 순 없다. 반드시 찾아 함께 고구려로 돌아갈 것이다.’

이렇듯 마음을 정하였으나, 드넓은 세상 어디에 있을지 모를 이들을 찾기란 막막하였다.

이때, 개소문에게 은전을 받은 노인이 급히 달려와 개소문을 불렀다.

“이보시오 대인!”

“어찌 부르시오?”

“여기 감금당했던 사람들을 찾는다고 하셨지요?”

“그렇소만…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시오?”

“이 객잔에서 일하던 이들을 관군이 잡아갈 때, 몸을 못 쓰는… 그러니까, 다리를 못 쓰는 이들을 질질 끌고 갔는데… 사내 셋과 여인이었을 겁니다요.”

노인의 말에 개소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이… 그들이 잡혀갔소? 지금 관에 있는 게요?”

이에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없지요.”

“없으면 어디 있단 말이오?”

“몇 달전, 왕박이란 놈이 도적 떼를 이끌고 관을 습격하여 곡식과 재물을 약탈하였다지요. 그때 파옥도 하여, 갇혔던 이들이 모두 도망쳤다 합니다.”

어디선가 왕박이란 이름을 들어본 듯하여 개소문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왕박?”

“군영에서 도주한 놈으로 도적 떼의 괴수가 된 자이온데, 그자가 이끈 도적 떼가 날로 강성해져, 출몰하였다는 소리만 들어도 관의 군사들이 지레 겁먹고 도주하기 바쁘지요.”

그제야 개소문은 탁현 강가에서 만났던 사내를 떠올렸다.

‘그자가 왕박이었지. 결국 도적 떼의 괴수밖에 못될 인물이었구나. 내가 준 금이 도적 떼를 꾸리는데 한몫한 듯하니, 씁쓸하구나.’

개소문이 이렇듯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리니 노인이 눈치를 살피며 말하였다.

“대인, 파옥해 도주한 이들 대부분은 왕박의 도적 떼에 합류하였으니, 혹여 대인께서 찾는 이들도 그 무리 속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치 뭔가를 더 바라는 듯한 눈치가 보여 개소문이 소매에서 은전을 꺼내어 쥐여주었다.

“그래, 그 왕박은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겠소?”

이에 또다시 횡재한 노인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였다.

“북은 곧 전쟁에 휘말릴 것이라 말하며 남으로 내려간다 했으니…….”

노인도 정확히는 모르는 눈치였다.

이에 개소문이 실망한 기색을 보이니, 노인이 한마디 덧붙였다.

“왕박은 이미 상당한 규모를 지닌 도적 떼의 수괴라… 남쪽으로 내려가시다 보면 곧 소문을 듣게 되실 것이옵니다. 관군도 마주치면 도망치기 바쁜 도적 떼이니, 그 소문이 어디 가겠습니까요.”

소문을 따르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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