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수 세조 양황제 양광(隋 世祖 煬皇帝 楊廣) (7)
오태산 중턱, 석굴 앞에선 온동이 며칠 전 떠났던 어득구를 기다렸다.
온동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거동이 불편한 자신을 염려해 고구려에 돌아가지 않은 어득구에 대한 고마움과 무한 신뢰를 품고 있었다.
‘공연히 내가 개소문 형님을 찾고자 하여, 어득구 어르신을 곤경에 빠뜨린 것은 아닐는지…….’
근심 가득한 온동의 곁으로 남궁민이 소리 없이 다가와 섰다.
온동을 시험해 보기 위해 조금의 인기척도 내지 않았으나, 시력을 잃고도 청각에 의존한 온동은 여지없이 남궁민의 존재를 느끼며 말하였다.
“이토록 소리를 내지 않고 다니시니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인기척을 내셔도 되십니다.”
온동의 말에 남궁민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 그래, 인기척을 내고 다녀야겠구나. 네 청력이 나의 두 눈보다 우월하구나.”
이에, 온동이 빙그레 웃었다.
“두 눈을 대신하여, 남궁천 사부님께 청각으로 사물을 보는 법을 익힌 덕분이지요.”
“하하하, 형님께선 네가 원래 청력이 뛰어나 잘 배운 것이라 하던데… 겸손이 지나치구나.”
껄껄 웃던 남궁민이 별안간 검을 휘둘렀다.
소리도 없고 살기도 내뿜지 않았으나, 온동은 자신의 목을 노린 검을 몸을 틀어 피하고는 파산귀검 초식을 밟아 거리를 벌렸다.
“아, 이런 이런… 이번에도 피하였구나. 하하하.”
남궁민이 껄껄 웃으니, 그제야 온동도 따라 웃으며 다시 남궁민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이에 남궁민이 인자한 미소를 담아 말하였다.
“온동아, 팽가장의 가전 무술을 팽운에게 가르치려면 네가 먼저 익히는 것이 좋단다.”
“허나, 팽가장의 무예를 익힐 수는 없습니다.”
“네가 익히지 않고, 말로만 가르치는 것은 한계가 있단다. 아직 팽운이 어리니, 네가 먼저 익혀 원리를 깨달은 뒤 팽운에게 전수하는 게 바람직해 보이는구나.”
온동이 망설여 답하지 못하니, 어느새 석굴 안에서 나온 독고영이 웃으며 말하였다.
“그럼 이렇게 해요.”
“어떻게 말이냐?”
온동의 물음에 독고영이 함께 나온 송현을 가리켰다.
“오라버니가 팽가장 가전 무예들의 초식을 불러주고, 저와 송현님이 듣고 글로 남길게요. 우리 둘이 서로 나누어 적으면, 어느 누구 한 명이 외워 익히지 못할 것이에요. 그리고 우리 둘이 각자 적은 초식을 하나로 합쳐 훗날 팽운에게 전하면 팽운이 스스로 익히겠지요.”
독고영의 제안이 그럴 듯하여 온동이 고개를 끄덕이려던 그 순간.
산 아래 인기척이 온동의 귀를 자극하였다.
“가쁜 숨… 말발굽 소리… 한 필의 말과 한 사람입니다.”
눈으로 보지 않고도 온동이 정확히 말하니, 남궁민은 시야에 닿지 않는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하였다.
“저 아래 소리까지 들리느냐?”
이에 온동이 답하지 않고 빠르게 내달려 산을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함께 가자꾸나!”
온동이 염려된 남궁민도 경공을 펼쳐 내려가니, 어느새 온동을 앞서 갔다.
앞이 보이지 않는 온동을 위해 산길을 안내하고자 앞장선 것이었다.
그 덕분에 온동은 남궁민의 발소리를 쫓아 장애물을 피하고 굽어진 산길을 무사히 돌아 내려갈 수 있었다.
“아니, 이런!”
앞장서던 남궁민이 놀라 부르짖으니, 온동도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다가왔다.
한 필의 말이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말 위에는 더 거친 숨을 몰아쉬는 사내가 있었다.
“어득구 어르신!”
온동이 숨결로 어득구의 존재를 인지하여 소리치니, 남궁민이 어득구를 말에서 내리며 말하였다.
“검상이다.”
어득구가 목과 가슴에서 피를 뿜고 있었다.
남궁민이 서둘러 지혈을 하며 말하였다.
“목을 다쳐 말하기 어려울 것이요. 말하지 마시오.”
남궁민이 소매를 찢어 어득구의 목을 감쌌다.
그러나 어득구는 손을 내저어 온동을 붙잡고는 온동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잡아끌었다.
“거, 검상…….”
꿀럭꿀럭 피가 뿜어져 나오는 어득구의 가슴에 손을 댄 온동이 중얼거렸다.
목을 다친 어득구는 말을 하지 못하였으나, 누구에게 당하였는지 알려주기 위해 온동의 손을 한참 동안 자신의 가슴에 대더니,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차갑게 식어가는 어득구의 가슴에서 온동이 손을 떼지 못하니, 남궁민이 온동의 손을 살며시 잡아떼며 말하였다.
“이미 운명을 달리하였다.”
이에 온동이 비틀비틀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어찌… 누구에게…….”
남궁민이 어득구의 목과 가슴을 살피며 짧게 답하였다.
“상흔이 지나칠 정도로 깔끔하다. 결코, 베이거나 찔린 상처가 아니다.”
“하오면?”
“일자로 곧게 날아와 박혔다. 비검술이다.”
“비… 검술…….”
온동이 놀라 말을 잇지 못하였다.
“개소문도 너처럼 비검술을 하느냐?”
남궁민의 물음에 온동이 대답을 대신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민은 재차 어득구의 상흔을 살피며 눈살을 찌푸렸다.
“황제의 행차를 지척에서 수행한 소년 장수가 갓쉰동이란 소문이 있더니, 역시… 개소문이었던가?”
“허나, 어찌… 형님께서… 어득구 어르신을?”
온동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으니, 남궁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개소문은 이미 황제를 측근에서 수행하는 자리에 올랐다. 이제 그만 잊거라.”
* * *
어득구가 두 눈으로 개소문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하여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려 황제의 처소에 잠입하던 순간.
이미 어득구의 존재를 눈치채고 대기하던 개소문은 망설임 없이 두 자루 검을 날렸다.
비검술을 발휘해 날린 이 두 자루의 검은 정확히 어득구의 목과 가슴에 박혔다.
개소문의 존재만 확인하고 몸을 빼려던 어득구의 계획은 멀리서 날린 두 자루 검에 허무하게 무산된 것이다.
그러나 어득구는 자신에게 검을 날린 이가 누구인지 두 눈에 새겼으며, 이를 온동에게 알리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목이 뚫려 말을 할 수 없었으나, 어득구는 온동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대며 이렇듯 말하고 싶었다.
‘개소문이야. 황제의 곁에 개소문이… 온동, 개소문을 잊어.’
그러나 성대가 잘린 어득구는 끝내 말을 남기지 못한 채 명을 달리하였다.
어득구를 대신하여 남궁민이 상흔을 통해 어득구가 비검술에 당하였다고 말하니, 온동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비검술을 사용하는 이가… 개소문 형님 말고 더 있을 터이니… 상흔만으로는… 단정을…….”
온동은 힘없이 말을 끝맺지 못하였다.
어득구의 상흔에서 자신이 수련하던 비검술의 잔상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온동, 너도 느꼈을 것이다. 비검술을 사용하는 이가 개소문 말고 더 있을 터이나, 어득구는 네게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 알려주기 위해 온 것이다. 상흔만으로도 네가 알 수 있는 인물, 개소문이기 때문이다.”
* * *
황제 양광은 자신의 처소에 잠입한 괴한을 개소문이 비검술을 펼쳐 물리치니, 매우 기뻐하면서도 자신의 목을 노린 세력을 찾고자 하였다.
“내가 죽으면, 누가 가장 좋아할까?”
황제 양광이 물었으나, 개소문은 답하지 않았다.
이에 황제 양광이 다시 물었다.
“헌데, 너는 왜 그자를 쫓아 잡지 않은 것이더냐?”
“그자를 쫓아 내가 자리를 비울 시, 그대의 목을 노려 다른 괴한이 급습하면 어찌하오?”
이에 황제 양광이 흡족해 껄껄 웃었다.
“과연! 나의 갓쉰동이로다. 내 너만 믿는다. 오직 너만이 나를 지키고 살릴 수 있으니, 너는 결코 내 곁을 떠나지 마라.”
이에 개소문이 담담히 말하였다.
“멀리 못가 절명했을 것이오. 군사들을 풀어 자객의 수급을 찾아오라 명하겠소.”
“아니다. 그따위 자객이 뭐가 중요하냐? 내 목을 노리는 이가 있음을 안 것이 중요할 뿐이지.”
황제 양광의 두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 * *
낙양 황궁으로 돌아온 황제 양광은 양소를 대전으로 불렀다.
“월국공, 당 장주와 만나셨소?”
황제 양광이 물으니, 양소가 개소문에게 시선을 옮겼다.
“폐하, 잠시 갓쉰동을 물리소서.”
이에, 황제 양광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갓쉰동은 나의 목숨과도 같소. 그 어느 자리에도 배제할 수 없소.”
“하오나…….”
“갓쉰동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는 나도 들을 이유가 없소.”
황제 양광이 일등공신 월국공 양소에게 이토록 단호히 대하니, 개소문이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잠시 거리를 두고 있겠소.”
“아니다. 너는 내 곁을 떠나선 아니 되느니라.”
“나의 검은 거리를 접을 수 있소.”
개소문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그제야 양광이 웃으며 허락하였다.
이에 개소문이 대화를 듣지 않기 위해 멀찍이 떨어져 서니, 양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자신보다 개소문을 더 신뢰하는 황제에 대한 원망이 담긴 듯하였다.
“월국공 말하시오.”
황제 양광이 양소의 심정 따위는 살피지 않고 재촉하였다.
한시라도 개소문을 자신의 곁에 바짝 두고 싶어 조급해 보였다.
이에, 양소가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나지막이 말하였다.
“갓쉰동은 고구려의 막리지 연태조의 장자, 연개소문이옵니다. 곁에 두셔선 아니 되옵니다.”
“…….”
“갓쉰동이 찾고자 하는 이들은 폐하와 적대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독고 씨의 독고영이란 아이와 팽가장의 팽운이란 아이입니다. 이들은 행군원수부를 급습하였던 남궁 씨와도 관계를 맺고 있으며… 태원에 잠입하였던 고구려 세작들과도 관련이 있사옵니다.”
이에, 황제 양광의 얼굴에 어둠이 내리 깔렸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황제 양광이 입을 열었다.
“그게 뭐가 중하오?”
“폐, 폐하…….”
“월국공은 당 장주에게 고작 그런 정보만 전해 듣고 온 것이오? 내 곁에서 갓쉰동을 떼어 놓고자 온 것이오?”
황제 양광의 눈에서 살기가 흘렀다.
“폐, 폐하… 어찌…….”
“구중궁궐에 갇힌 나라고… 눈과 귀가 없는줄 아시오?”
“폐하…….”
“갓쉰동이 고구려의 막리지 연태조의 아들이란 사실을 나 역시 알고 있었소. 갓쉰동이 연개소문이라 하여 뭐가 달라진단 말이오? 월국궁, 갓쉰동은 고구려인이니, 고구려 세작들과 알고 지낼 수도 있는 것 아니오?”
“폐, 폐하…….”
“어찌, 내가 듣고자 하는 말은 알아오지 않고, 갓쉰동을 내게서 떼어내려고만 하시는 게요?”
목소리는 높지 않았으나,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양소는 황제 양광의 살기 띤 두 눈에서 자신의 죽음을 읽었다.
“월국공, 나는 그대가 당 장주에게서 나의 갓쉰동이 찾고자 하는 이들의 행방을 알아오길 바라였소. 헌데… 그대는, 어찌 나를 실망시키는 것이오?”
일등공신 월국공 양소가 답하지 못하고 머리만 조아리니, 황제 양광이 손짓으로 물러나라 명하였다.
이에 양소는 절을 올리고 힘없이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양소가 물러난 뒤, 황제 양광은 지필묵을 대령시키고는 손수 서신을 작성하였다.
자신을 황제로 옹립한 일등공신 월국공 양소에게 보내는 서신이었다.
말없이 곁에선 개소문은 황제 양광이 적는 글귀를 내려다보며 경악을 금하지 못하였다.
‘이자가… 정녕…….’
서신을 작성한 황제 양광이 환관을 불러 월국공에게 전하라 명하니, 개소문은 다가올 일이 예상되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밤이 되어 풀이 죽은 채 귀가한 월국공 양소는 황제 양광의 서신을 받았다.
[월국공, 그대에게서 부친에게 받지 못한 정을 느꼈소.
그대는 나의 스승이요.
나의 아비요.
허나, 모두가 나보다 그대를 더 두려워하고 따르니, 너무도 두렵소.
월국공, 부디 그대가 나를 위해 결단을 내려 주시오.
그대의 장자 양현감은 그대 대하듯 중히 여길 것이오.]
서신을 고이 접은 양소가 장자 양현감을 불렀다.
“너는 황제 폐하를 성심을 다해 모셔야 하느니라. 네가 다른 마음을 품는 일이 생기면, 우리가 피 흘려 세운 수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니라. 맹세하거라.”
이에, 양현감이 영문도 모른 채 아비의 명에 따라 맹세하였다.
“소자, 충심을 다해 황제 폐하를 보필하겠나이다. 심려치 마시옵소서.”
양소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양현감에게 쉬라 말하였다.
불길한 마음이 들었으나, 아비의 명에 양현감은 처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홀로 남은 월국공 양소는 대들보를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나 역시도 아들처럼 여겼고… 황제에 옹립하기 위해 의를 버리며 악을 택하였다. 후회는 없다. 다만 아직… 가르칠 것이 남아 있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황제 양광의 서신에 절을 올린 양소는 대들보에 비단 천을 감고는 목을 메고 자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