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수 세조 양황제 양광(隋 世祖 煬皇帝 楊廣) (5)
태자 양광의 서늘한 눈빛에 장형과 우문술은 그저 식은땀만 비오듯 흘렸다.
“어찌 대답들이 없으시오? 내가 죽기를 바라고 있소?”
자신의 물음에 변변한 대답도 내지 못하는 이 두 장수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양광이 다시 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을 못 하니, 양소가 빙그레 웃으며 장형과 우문술을 대신하여 말하였다.
“태자 전하, 이들은 전하를 따라 대업을 이룰 것이옵니다. 이들은 전하가 계셔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나이다.”
양소의 말에 양광은 흡족해 고개를 끄덕였고, 장형과 우문술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양소는 이들의 잔에 술을 가득 따라주며 말을 이었다.
“장담하건데, 한왕 양양은 결코 폐태자 양용을 누를 담이 없오며. 만일 폐태자 양용이 다시 태자에 오른 뒤 황위마저 차지한다면, 평소 자신을 따르지 않았던 이들의 목부터 칠 것이옵니다.”
양소가 빙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장형과 우문술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바로 지금이 목숨을 보전할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을 이들도 깨닫고 있기에, 이 자리에 함께한 것이오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이에 태자 양광이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이니, 양소가 어서 절을 올려 충성을 맹세하라 말하였다.
장형과 우문술이 재차 태자 양광에게 충성을 맹세하니, 마침내 양소가 황제 양견 시해 계획을 말하였다.
양소의 말이 끝나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무거운 정적을 태자 양광이 깼다.
“다들 이해하시었다면, 준비들 하시구려.”
이에, 기다렸다는 듯 장형과 우문술이 급히 예를 올리고는 식은땀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소도 이들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가며, 개소문에게 시선을 옮겼다.
“너도 나를 따라오거라.”
그러나 개소문은 대꾸도 하지 않았고, 태자 양광이 대신 말하였다.
“이 아이는 내 곁을 지킬 것이오. 군사께선 이 아이에 대해 심려치 않으셔도 좋소.”
이에 양소가 무엇인가를 고하고자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거리다가, 태자 양광의 차가운 시선에 그저 예를 올리고 밖으로 나갔다.
모두가 떠나자, 태자 양광은 묵묵히 서 있는 개소문에게 시선을 옮겼다.
“갓쉰동, 너는 호혜와 조고에 대하여 아는가?”
난데없는 물음에 개소문이 무표정히 답하였다.
“진나라 지록위마의 고사를 알고 있소.”
“바로 그렇다.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바로 지록위마의 고사였다.”
호혜는 진시황의 차남이었고, 효심이 깊은 장자 부소에 비해 모든 면에서 부족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진시황이 총애한 환관 조고는 부소가 자신을 못마땅히 여김을 알고, 진시황이 살아있을 때 호혜를 황제로 세워야 한다 여겼다.
이에, 조고는 호혜를 꾀어 부소를 제거하고 진시황마저 시해하여 황위에 오르게 한다.
탐욕스런 조고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황제 호혜보다 더한 권능을 대소 신료들 앞에서 보였으니, 조고가 사슴을 말이라 억지 주장하여도 누구도 이견을 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조고의 폭정에 유방과 항우가 깃발을 드높이니.
조고는 호혜마저 시해하고는 유방에게 진나라를 바칠 터이니, 자신에겐 조나라를 떼어 달라 간청까지 한 인물이었다.
개소문은 지록위마의 고사를 언급한 태자 양광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고, 태자 양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의리 깊고, 정도 남다른 아이다. 내 너를 일가처럼 여길 터이니, 너는 항상 나를 지켜라. 허면, 나는 너와! 너의 동료. 그리고 너의 나라를! 결단코,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내게 원하는 것이 그뿐이오?”
개소문의 물음에 태자 양광이 빙그레 웃었다.
“아버지는 내게 자결을 명하셨고… 내가 거역하면 손수 나의 목을 베시겠지. 이후 형님을 태자로 책봉하실 터이고.”
“수의 황제는 장자의 황위 세습을 원한다 들었으니, 필경 그러할 것이오.”
“나는 살고 싶고! 의지할 이가 현재로선 양소뿐이다. 양소는 장형과 우문술을 지휘하여, 나를 황제로 옹립하겠지. 그는 뛰어난 인물이니, 가능할 게야.”
“…….”
“내가 황제가 된 이후, 그의 권세와 권능은 나를 능가하게 될 것이고… 그때 네가 나를 돕거라. 산동의 네 동료들과 너의 고구려는 보답을 받게 될 것이다.”
당진평에게 인질로 잡힌 팽무성, 야수, 쇼락, 공손성의 안위를 은연중 언급하며, 고구려마저 거론하니 개소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개소문은 화를 누르며 담담히 답하였다.
“수는 나의 나라가 아니오. 누가 어찌 되든, 내 알 바 없소.”
“…….”
“그렇기에, 나는 양소가 죽어도 상관 없소.”
개소문의 대답에 태자 양광이 흡족하여 껄껄 웃었다.
“좋은 답변이다. 좋아! 아주 좋아. 하하하.”
* * *
국상으로 모든 대소 신료들이 인수궁에 입궁하여 밤을 새웠다.
하여, 황후의 빈소를 비롯한 인수궁 내는 항상 울음으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곡을 하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황제 양견과 폐태자 양용이었다.
“황제는 상복을 입지 않는다.”
양견은 이렇듯 말하며 이날 밤도 선화부인의 처소로 발을 옮겼다.
폐태자 양용 역시, 곧 있을 태자 책봉을 기대하며 궁을 벗어나 유흥을 즐겼다.
자신을 폐위한 모친의 죽음이 기뻐 웃음을 지우지 못하니, 비통함에 잠긴 궁에 머물지 못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꾸 웃음이 나오는데, 어찌 빈소를 지킬 수 있겠는가? 하하하.”
자신을 만류하는 이들에게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이렇듯 말하니, 누구도 더는 그를 만류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밤이 깊어갔다.
황제 양견을 지켜야 할 근위장 장형이 직접 태자 양광과 양소, 우문술 등을 선화부인의 처소로 안내하였다.
선화부인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던 황제 양견은 문을 열고 불쑥 들어온 자신의 아들을 노기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서슬 퍼런 아들의 눈빛에 기가 꺾여 격노하지 못하였다.
“어, 어찌 이러느냐?”
겁에 질려 묻는 아비에게 아들이 답하였다.
“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 내게 살을 주셨나이다. 하온데, 어찌 저를 죽이시려 하시나이까?”
“이, 이놈! 네놈이 죄, 죄… 죄가 없다면… 내 어찌 너를 벌… 하겠느냐! 네놈이 감히 처… 천, 천륜을 버리고 패, 패륜을 택하려 하느냐!”
황제 양견이 두려움을 누르며 나름 엄히 꾸짖었으나, 겁에 질린 아비의 모습에 태자 양광은 더욱 용기를 얻었다.
“아버지, 두려우시나이까? 소자, 그 두려움을 안고 살았나이다. 두려움이 얼마나 심신을 피폐시키는지 알기에, 마지막 효를 다하겠나이다. 편해지소서.”
태자 양광의 검이 번뜩였다.
그리고, 목이 잘린 황제 양견의 곁에서 비명을 지르는 선화부인에게 양광이 시선을 옮겼다.
“너는 본래 나의 것이었다. 효를 다하고자, 아버지께 바쳤으니, 이제 내가 다시 찾겠노라.”
태자 양광의 말에 선화부인이 절망하여 시선을 떨구었고, 양소는 장형과 우문술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너는 남아서 나를 지켜라.”
태자 양광의 명에 개소문이 미간을 구기며 말없이 안을 지켰다.
태자 양광은 충성을 다짐받기라도 하는 듯, 아비의 여인 선화부인을 범하고는 개소문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이미 인수궁 내에는 곳곳에서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근위장 장형이 인수궁 출입을 엄히 단속한 채 살육을 펼쳤고, 우문술이 군사들을 이끌고 독고황후를 따르던 세력을 무참히 베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 대소 신료들이 모두 입궁해 있으니, 이보다 좋은 때가 어디 있겠는가?”
태자 양광이 입꼬리를 실룩이며 웃음을 참더니, 발을 황후의 빈소로 옮겼다.
우문화급과 우문지급, 우문사급 등 세 아들을 대동한 우문술이 빈소를 지키던 한왕 양양을 죽인 뒤였다.
국상 중인 인수궁 내는 장형과 우문술의 군사 이외에 그 누구도 병장기를 지니지 않았기에, 제대로 된 저항조차 없었다.
“호위시랑 선우천과 최희, 수련이 보이지 않는다! 당장 찾아라!”
태자 양광을 따라 빈소에 발을 들인 양소가 고함쳐 명을 내리니, 양현감이 군사들을 이끌고 인수궁 내를 샅샅이 뒤졌다.
“대소 신료들은 모두 죽일 것이오?”
태자 양광의 물음에 양소가 머리 숙여 답하였다.
“이미 살생부를 작성하였나이다. 명확히 따를 이들을 추렸고, 그들을 제한 이들은 궁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옵니다.”
“그렇소? 궁녀들과 내관들은?”
“황제와 황후를 따르던 것들은 함께 죽어야 하나이다. 그들이 살아 있으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이옵니다.”
양소의 답에 태자 양광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양소가 마저 말을 이었다.
“오늘 밤 인수궁을 벗어난 이가 없도록 하여, 황제의 죽음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겠나이다. 날이 밝으면 폐태자에게 황제의 승하를 알려 속히 환궁하도록 하겠나이다.”
“…….”
“황후의 죽음에 비통함을 견디지 못한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음을 통탄하며 인수궁에 망국비를 세우고, 태자와 공손성이 입궁하면 국상을 지키지 않은 죄를 물어 망국비 아래에 참수하겠나이다.”
“좋소. 순서가 좋소.”
태자 양광이 고개를 끄덕여 답하니, 기다렸다는 듯 양소가 우문술에게 손짓하여 부른 뒤 나지막이 속삭여 명을 내렸다.
차츰 인수궁 내의 비명이 잦아들었다.
태자 양광이 양소와 함께 대보전으로 들어서니, 무릎 꿇은 대소 신료들이 모두 성심을 다해 절을 올렸다.
“태자 전하를 따르고자 하는 이들만 남았나이다.”
양소가 나지막이 말하니, 태자 양광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엄히 명하였다.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이 자리에서 상복을 벗어라!”
이에 살고자 하는 이는 즉시 상복을 벗었고,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는 이는 하얀 상복에 자신의 검붉은 피를 뿌려야 했다.
“아직 모두가 나를 따른 것이 아니었구려.”
양광이 시신들을 가리키며 말하니, 벌거벗은 대소 신료들이 두려워 떨었다.
이에, 양소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소신의 눈이 미흡하였나이다. 이제 따르는 이들만 남았으니, 용서하여 주소서.”
양소의 말과 함께, 벌거벗은 대소 신료들이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새로운 황제 양광의 만수무강을 외쳤다.
* * *
날이 밝자, 양소는 폐태자 양용에게 황제의 승하를 알리며 속히 환궁하라 전하였다.
이에, 폐태자 양용은 불길한 마음에 환궁이 아닌 도주를 택하였다.
한편, 인수궁의 참극을 모른 채, 장안성 인근에 당도한 공손성에게도 속히 입궁하라 명하였다.
이에, 독고황후의 국상만 염두에 둔 공손성은 상복으로 환복한 후 무장하지 않고 인수궁에 발을 들였다.
“망국비?”
인수궁에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망국비가 공손성의 시야에 들어왔다.
황제 시해 전, 양소가 미리 준비한 망국비엔 황제 양견의 승하를 통탄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화, 황제 폐하께서… 스, 승하를?”
눈이 휘둥그레진 공손성이 정신을 가다듬어 주위를 둘러보니, 양소가 흰 수염을 가다듬으며 호통을 쳤다.
“국상을 지키지 않은 죄를 물어 공손성의 목을 베거라!”
이에 공손성이 기가 막혀 소리쳐 항변하려 했으나, 어느새 다가온 개소문의 무심한 검이 바람을 갈랐다.
대돌궐 총사련관이자 요격대총관이었던 공손성의 생은 황제 양견의 승하를 알리는 망국비 아래에서 끝을 맺었다.
공손성의 머리를 벤 개소문이 다시 태자 양광의 곁을 지키기 위해 대보전으로 발을 옮기니, 양소도 그 뒤를 따라 대보전에 들어섰다.
“당국공 이연에게도 알려야 하지 않소?”
대보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태자 양광이 물으니, 양소가 고개 숙여 답하였다.
“이연에겐 서신을 보내어 자리를 굳건히 지키라 하였나이다.”
“자리를 지키라?”
“태원을 굳건히 지키는 것이야말로, 이연이 황제 폐하께 충성을 다하는 일이옵니다.”
양소가 거침없이 황제라 칭하니, 태자 양광이 흡족해 미소를 지었다.
“좋소! 당국공은 태원을 단단히 지켜, 내게 충성을 다하라 명하시오. 나는 이 장안성이 쇠락했음을 천명하며, 낙양으로 천도를 명하노니, 이와 더불어 태원에도 이궁을 마련토록 하시오!”
양광이 낙양 천도와 함께 태원에도 이궁을 마련하여 태원유수 이연의 충성을 확인코자 엄히 명하였다.
이에, 양소가 명을 받아 대소 신료들에게 호령하였다.
“듣거라! 황제 폐하의 명이시다. 충심을 다하려 따르도록 하라! 황제 폐하 만세!”
대소 신료들은 그저 벌벌 떨며 양소를 따라 만세를 외칠 뿐, 이견을 내는 이 한 명 없었다.
이렇듯 양광은 즉위식도 거행하지 않고 황위에 올랐으나, 이를 비난할 강직한 신하는 이미 죽어 있었다.
단 이틀 만에 수의 황제는 양견에게서 양광으로 변하였고, 일등공신 양소의 권능 역시 황제 양광 못지않았다.
양광의 곁을 지키던 개소문은 양소를 두려워하는 신료들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살며시 양광에게 시선을 옮겼다.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누지 않는 법. 양광이 양소와 나눌 리 없다. 만일 양광이 일등공신 양소를 해한다면, 나 역시도 해할 수 있다. 천륜을 어긴 자가 신의를 지닐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