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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검귀-212화 (212/328)

212화 수 세조 양황제 양견(隋 世祖 煬皇帝 楊廣) (3)

겨울부터 시작한 전쟁은 봄이 절정을 이룰 무렵, 수의 처참한 패배로 마무리되었다.

수군 총관 주나후는 비사성 앞바다에 수장되었고, 그가 이끈 수군 칠만여 명 중 단 한 명도 살아 돌아간 이가 없었다.

또한 한왕 양양이 이끈 삼십만 대군 중 만리장성을 넘어 돌아온 이는 고작 삼천여 명에 불과하였다.

삼십만 대군은 병들어 죽고, 도주하였으며, 고구려 군의 집요한 추격에 싸늘한 시신이 되었다.

이들이 강제 징집되었던 지역에선 민란의 기미조차 보이며 민심이 흉흉해졌다.

탁현을 비롯하여 장정들이 징집되었던 지역은 봄이 되어도 일할 사람이 없으며, 참담한 전사 소식에 가가호호마다 울음이 끊이질 않았다.

패전 소식을 접한 수의 황제 양견은 침묵하였다.

조정의 대신들은 그저 두려워 누구도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한동안 침통한 표정을 짓던 황제 양견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들어라! 고구려 정벌로 인한 백성들의 고초가 심하다. 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균전(均田)을 넓히겠노라. 또한, 진행 중인 대운하 공사를 비롯한 모든 토목 공사 역시 줄이겠노라. 더불어 과제(科第)를 여니 널리 참여하도록 알리라!”

황제 양견은 민심을 읽을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극심한 피해를 입은 백성들의 원망을 잠재우기 위해 토지를 균등히 나누는 균전제를 확대하고, 대상을 넓혀 과거를 열도록 하였다.

이는 모든 귀족들의 불만을 높였다.

그러나 참담한 패배로 진노가 극에 달한 황제 양견의 앞에서 그 누구도 감히 내색하지 못하고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너희는 들으라!”

황제 양견이 불길이 이는 눈으로 대신들을 둘러보며 다시 말하였다.

모든 신하들은 황제 양견이 어떤 분부를 내릴지 두려워 마른 침만 삼켰다.

“이후, 고구려와는 그 어떤 전쟁도 치르지 않겠노라. 너희는 이를 마음 깊이 조각하여 후대에도 전하도록 하라. 하여 고구려와 화의를 맺을 사신단을 속히 준비토록 하라.”

황제 양견이 고구려 정벌이 없을 것이라 단언하니, 일부 신하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일부 신하는 의아해 고개를 갸웃하였다.

고구려와의 전쟁 종언 선언 역시, 백성들의 동요를 의식한 발언이었다.

패전 이후, 복수하고자 가혹한 징병이 있으리라 여겨 민심은 들끓었고, 황제 양견은 이를 잠재우기 위해 신속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황제 양견은 무장 출신으로 성정이 거칠고 난폭하였으나, 치밀하고 영리한 인물이었다.

민심을 읽을 수 있었고, 백성들을 이용하여 귀족 세력의 힘을 약화시킬 줄 알았다.

사실, 이 모든 조치는 황제 양견이 극도로 두려워하는 독고황후의 머리에서 나온 계책들이었다.

“세상 모든 화의는 깨지라 있는 것이옵니다. 고구려와의 전쟁은 없으리라 백성들이 여기게 하시어, 혼란을 잠재우소서. 나라가 안정된 이후, 고구려 정벌은 언제든 가능하옵니다. 또한 균전과 과거를 시행하시어, 민심을 얻고 귀족 세력의 힘을 견제하소서.”

독고황후가 이렇듯 부드럽게 계책을 내놓으니, 황제 양견도 옳다 판단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전쟁에서 패하고도 오히려 민심을 얻고 귀족 세력을 약화할 수 있었으니, 황제 양견으로선 나름 만족할 만하였다.

문제는 패전 책임을 지닌, 한왕 양양과 태자 양광의 처우였다.

독고황후는 두 아들 모두 아끼어 처벌을 바라지 있었으나, 황제 양견은 생각이 달랐다.

그리고 태자 양광의 생각 또한 달랐다.

* * *

민심은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균전제로 땅을 받은 백성들은 환호하였고, 곧 있을 과거 시험을 반기었다.

북방을 어지럽히던 돌궐도 돌아가 공손성과 이연도 군을 돌렸으며, 더 이상 고구려와 전쟁이 없을 것이란 황제의 말을 백성들은 진심으로 믿었다.

패전의 아픔은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며 아물고 있었다.

공손성이 장안의 서북 방면을 지키고, 이연이 동북 방면을 단단히 지키니, 황제 양견도 내심 안심하며 수의 내실을 다지고자 하였다.

밤이 깊자, 황제 양견이 인수궁 대보전에 시종무관장 장형 과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우문술을 은밀히 불렀다.

기골이 장대한 장형은 인수궁 내에서 황제 양견을 지키는 근위장이었다.

이에 비해 작지만 날래고 기마에 능하며 활을 잘 다루는 우문술은 장안성을 지키는 장수였다.

인수궁의 안과 밖을 지키는 이들을 황제 양견이 은밀히 부름은 필경 모반에 대비함이 분명하였다.

황제 양견은 자신이 총애하는 장형과 우문술 역시 자신에게 충심을 다하고 있다 믿었다.

“신상필벌(信賞必罰)은 명확해야 하는 법. 자식이라 하여 이를 등한시한다면 필경 반발이 일 것이다.”

황제 양견이 무겁게 입을 여니, 장형과 우문술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너희는 듣거라. 나는 내일 태자 양광과 한왕 양양에게 자결을 명하는 서신을 보낼 것이다. 자식이 부모의 명을 따름은 당연한 일이나, 만일 반발한다면 참극이 일 수 있다. 하여!”

장형과 우문술이 침을 꿀꺽 삼키니, 이를 내려다보며 황제 양견이 말을 이었다.

“너희는 인수궁의 안과 밖을 철저히 지키며 그 누구도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라!”

두 아들을 죽이기 전, 미리 자신의 안위를 단속한 것이다.

이에, 장형과 우문술이 머리를 조아려 명을 받으니, 황제 양견이 흡족해 미소를 지었다.

그에겐 아들이 많았고,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누지 않으니, 패전 책임을 두 아들의 죽음으로 민심을 달래고자 한 것이다.

아마도 첫째 양용을 다시 태자로 세울 심산인 듯하였다.

그러나 양용의 행실을 못마땅히 여긴 독고황후의 반대 역시 만만치 않을 것이다.

황제 양견도 가장 큰 견제 세력인 독고황후가 마음에 걸렸으나, 인수궁 안과 밖을 이 두 장수가 단단히 지킨다면, 두려울 것은 없었다.

독고황후가 화를 내고 반발한다면, 그녀에게도 죽음을 선사할 심산이었다.

이미 황제 양견의 마음속엔 아름다운 선화부인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불편한 독고황후를 제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리라.

두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분노한 독고황후마저 인수궁에서 사라지게 할 마음이었기에, 황제 양견에겐 장형과 우문술 이 두 장수의 힘이 절실했다.

그러나, 영리한 황제 양견도 오판한 부분이 있었으니, 태자 양광의 책사 상서우 복야 양소였다.

양소는 조정 대신들에게 신망이 높고, 널리 친분을 맺으며 숱한 전장에서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지금은 비록 나이 들어 백발이 성성하였으나, 그의 백발만큼 인맥 또한 늘어나 있었다.

황제 양견이 믿고 총애하는 이 두 장수, 장형과 우문술 역시 양소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었다.

게다가 양소를 태자 양광에게 천거한 이가 바로 우문술이었다.

우문술은 행군총관이 되어 진을 정벌하고 안주 총관이 되었을 당시, 양주에 주둔 중이던 진왕 양광에게 그 공을 모두 양보한 일이 있었다.

이를 고맙게 여긴 양광이 황제 양견에게 수주 총관으로 우문술을 주청하였고, 우문술이 이를 보답하고자 양광에게 양소를 천거하였다.

이후, 양소가 양광을 곁에서 보필하며 독고황후의 눈에 들도록 행실을 바로잡아주니, 마침내 독고황후가 첫째 양용을 폐위하고 양광을 태자로 세우게 되었다.

황제 양견이 이런 세세한 속사정을 알 리 없기에, 일생일대의 실수를 범하고 만 것이다.

대보전에서 물러난 장형과 우문술은 서로 눈치만 살피며 그저 말없이 자신의 처소로 향하였다.

“태자와 한왕이 자결을 한다면… 독고황후가 황제를 가만두지 않을 것인데…….”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처소에 들어선 우문술은 바로 아들들을 불렀다.

우문술에겐 세 명의 아들이 있었으니, 모두 비범하고 무예가 출중하였다.

첫째는 우문화급(宇文化及)이었고, 둘째 우문지급(宇文智及), 셋째는 우문사급(宇文士及)으로 모두 기마에 능하며 활을 잘 다루었고 검과 창술이 뛰어났다.

“황제께서 어찌 이 야심한 밤에 부르셨나이까?”

첫째 우문화급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에, 우문술은 아들 셋을 잠시 바라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어 대보전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였다.

아비의 말이 끝나자 가만히 듣던 둘째 우문지급이 입을 열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사옵니다. 황제도 죽고 태자도 예외는 아니지요. 허나 자결하란 서신으로는 죽지 않사옵니다.”

“허면?”

우문술이 물으니, 우문지급이 바로 답하였다.

“황제를 따른다면 태자와 한왕을 상대로 싸워야 할 것이오며, 태자를 도우면 그 누구와도 싸우지 않으셔도 되시옵니다.”

이에, 우문술이 잠시 침묵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급이 네가 양소를 만나야겠구나. 내일이면 서신이 태자와 한왕에게 향할 것이니, 서신보다 먼저 양소를 만나야 하느니라.”

이에 우문지급이 바로 일어나 아비의 전언을 마음에 새기고 탁현으로 향하였다.

* * *

장안성의 사정도 모른 채, 태자 양광과 양소는 호위 네 명만 대동한 채 탁현 외곽으로 사냥을 나왔다.

실상 사냥은 핑계에 불과하였고, 이들의 목적지는 허름한 객잔이었다.

양소와 태자 양광이 창가에 자리하자, 객잔 주인 행색을 한 당진평이 다가와 절을 올렸다.

“당 장주, 그대는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오. 맞소?”

태자 양광이 담담히 물었다.

그러나 듣는 이는 등에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당진평이 머리를 조아린 채 답하였다.

“맞사옵니다.”

“나는 곧 장안성으로 가야 하오. 아마도 황제 폐하께선 패전의 죄를 묻고, 형님을 다시 태자로 책봉하실 것이오. 그 뒤에 내가 살아 있겠소?”

이에, 당진평이 더욱 머리를 조아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인이 무엇을 하면 되오리까?”

“그것은 그대가 잘 아리라 생각하오. 내게 시간을 만들어 주시오.”

태자 양광이 당진평의 답도 듣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자, 양소가 따라 일어나며 당진평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하려던 것을 하면 되네.”

이에 당진평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니, 태자 양광이 발을 옮기다가 무심히 물었다.

“헌데, 그 아이… 찾았소?”

“찾아, 잘 지키고 있나이다.”

“허면, 내가 장안성으로 향하기 전에 볼 수 있겠소?”

이에 당진평이 곤혹스러운 듯 조심스럽게 답하였다.

“산동에 가둬둔 상태라… 시일이 걸리나이다.”

“허면, 장안성으로 데려오시구려.”

이에 당진평이 더욱 조심스럽게 답하였다.

“거친 아이오나, 전하께서 보시고자 하신다면 얌전한 아이로 만들어 앉힐 수 있나이다.”

“아니, 나는 거친 아이가 좋소. 내가 그 아이를 볼 수 있게 자리나 마련해 주시오.”

“명을 받사옵나이다.”

당진평이 예를 다해 명을 받으니, 태자 양광이 흡족해 미소를 지으며 객잔을 나섰다.

“형제단은 세상 어디에도 있다지요?”

태자 양광의 물음에 양소가 나지막이 답하였다.

“특히 궁에 많사옵니다. 궁은 천하의 중심이기에 당 장주가 무척 공을 들였다지요. 덕분에 인수궁은 형제단이 가득하옵니다.”

“허면, 언젠가는 근심거리가 될 터이니, 당 장주도 살려두면 좋지 않겠구려.”

말에 오르며 태자 양광이 무심히 말하니, 양소가 잠시 태자를 올려보다가 소리 죽여 답하였다.

“확실한 태자 전하의 사람으로 만드소서. 궁엔 적이 가득한 법이니, 그가 필요한 날이 또 올 것이옵니다.”

항상 양소의 말을 귀담아듣던 태자 양광이었으나, 아무런 답도 주지 않은 채 그저 말을 몰아 앞서 나갈 뿐이었다.

이에 양소도 말에 올라 태자의 등을 바라보며 뒤를 따랐다.

태자와 양소가 객잔을 떠나자, 당진평은 바로 수하들을 불러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이에 수하들이 장안성과 산동으로 나뉘어 바삐 말을 몰아나갔다.

“늙은이는 죽어서 태자를 만나고, 어린아이는 살아서 태자를 만나게 되는구나.”

홀로 객잔에 남은 당진평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사람을 죽여 이토록 큰 공을 세울 기회는 내 생에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내게도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으니, 반드시… 잡고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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