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수 세조 양황제 양광(隋 世祖 煬皇帝 楊廣) (2)
허겁지겁 몸을 돌려 요하를 다시 건너 도주한 수나라 군사들은 제 스스로 요택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개마무사를 비롯한 고구려와 북방 초원의 기병들은 애써 요택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진을 치니, 수나라의 삼십만 대군은 꼼짝없이 수렁에 갇힌 셈이었다.
마른 땅을 찾아 요택을 벗어나고자 해도, 보병 일색의 수나라 군은 기 씨 형제들이 이끈 부월수들의 파천진에 막히고, 창검수들과 노궁수들의 화살에 쓰러질 뿐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개마무사들의 무시무시한 돌진에 허겁지겁 다시 요택 안으로 들어가기 바빴다.
요택 내에서도 마른 땅을 찾아 외곽을 살피면, 여지없이 카사르와 호타크의 부족 전사들이 화살을 날리며 인간 사냥을 즐기니 점점 더 요택 중심으로 진을 옮겨야 했다.
가혹한 습지는 무거운 가마솥을 놓고 불을 지필 수조차 없어, 한왕 양양은 생쌀을 씹으며 허기를 채워야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고통은 바로, 갈증이었다.
요택의 습지에 고인 물은 마실 수 없는 상태였음에도 갈증을 못 이긴 군사들은 이를 마시며 배탈을 일으키고 연신 설사를 하였다.
요택 안은 수나라 군사들의 배설물과 토사물로 역한 악취를 풍겼고, 모든 이들이 피부 질환과 식중독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이는 또 다른 질병을 일으켜 쓰러지는 군사들이 끊이질 않았다.
“퇴각조차 쉽지 않으니, 주 총관에게 서둘러 평양성을 함락하라 전하고, 황제 폐하께도 전황을 알리어 지원군을 요청하라.”
한왕 양양이 고심 끝에 전령을 보내니, 전령들은 사지를 뚫고 수군총관 주나후와 황제 양견에게 달려갔다.
이에, 장안성 황제 양견은 매정히 답신을 보내었다.
[총력을 다한 정벌군이다. 더는 지원을 바라지 마라. 패퇴는 죽음뿐이니, 살고자 한다면 요동을 취하라.]
한왕 양양이 절망하던 그때, 주나후에게서 답신이 당도하였다.
[평양성 함락을 위하여 바다로 나가나이다. 하오나, 한왕 전하께서 위급하시니, 요동에 상륙하여 고구려 군의 배후부터 치겠나이다. 고구려 군이 당황하여 포위를 풀면 요하를 건너소서. 소장은 그때 다시 배를 돌려 평양성으로 향하겠나이다.]
“참으로 듬직한 장수로다!”
한왕 양양이 크게 기뻐 부르짖으니, 수나라 군에게도 희망이 보이는 듯하였다.
그러나 주나후의 수군이 요동에 상륙하기 위해선, 고구려의 수군 기지 비사성 앞을 지나야 했다.
* * *
“고구려 수군은 일만에 불과하다.”
요동 상륙을 위해 비사성 앞으로 방향을 정하며 수의 수군총관 주나후가 중얼거렸다.
이미 북장원에게서 받은 정보로 비사성의 군세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자신감이 충만하였다.
수나라의 수군은 총 칠만으로 한왕 양양이 이끈 보군에 비하여 겨울 전쟁 동안 피해가 적었다.
바다를 가득 메운 수의 군선들이 군량미를 포함한 보급물자까지 싣고 요동으로 향하였다.
만일 이 기습 상륙이 성공한다면 요하를 지키는 고구려 군은 배후를 급습당하게 되고, 한왕 양양은 그 여세를 몰아 요하를 건너 요동성으로 향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후, 주나후가 다시 수군을 군선에 태워 평양성으로 향한다면 고구려는 이를 막을 방도가 전무했다.
이미 남쪽에서 신라가 움직이고 있었기에, 한수 이남 방비를 위해 동금호가 아들 동경찬과 함께 군을 이끌고 나갔으니, 평양성은 태자 건무가 소수 병력으로 주나후의 수군을 막아야 했다.
“총관, 이대로 평양성으로 향하심이 옳지 않겠습니까?”
부총관이 이견을 내었으나, 주나후는 단호하였다.
“이 전쟁, 한왕께서 정벌에 성공한다면, 그분이 태자가 되고 이후, 황제에도 오르실 것이다. 나는 한왕 전하를 구해 연을 맺고, 평양성을 함락해 공을 세울 것이다.”
욕심이 과한 듯 보였으나, 이미 고구려 수군의 군세를 파악한 뒤였기에 주나후로서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하오나, 평양성만 점령하여 항복을 받아낸다면 한왕 전하를 둘러싼 포위도 풀리게 될 것이온데…….”
부총관이 다시 이견을 내자, 주나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대는 어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오? 우리가 한왕 전하를 돕지 않고 평양성을 함락한다면, 한왕 전하께서 우리를 공만 탐한다 여기게 될 것이오. 쉽게 연도 맺고 공도 세울 수 있는데 어찌 이를 행하지 않는단 말이오?”
“우리가 요동에 상륙하도록 고구려 수군이 두고 보겠나이까?”
“이보시오 부총관! 고구려 수군은 고작 일만이오. 우리는 칠만이니, 뭐가 두렵소? 해상전은 육상전과 달리 숫자 놀음이란 말이오. 칠만과 일만! 이 계산이 어렵소?”
이에 부총관도 더는 이견을 달지 않았다.
양만춘이 신성과 안시성의 군사들을 몰래 이끌고 비사성에 들어간 사실을 북장원도 파악하지 못하였으니, 북장원에게 정보를 받은 주나후의 계산 역시 조금 어긋나 있었다.
* * *
고구려의 수군 기지 비사성은 절벽에 세워진 성이었다.
이 성 아래에 포구가 있고, 평소 포구엔 군선들이 늘어서 해상의 적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수의 수군이 다가오는 이 시점, 비사성 아래 포구엔 군선들이 한 척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편 비사성 인근 바다에는 작은 돌섬들이 산개해 있었고, 적의 수군이 비사성 포구를 함락시키거나 앞을 통과하기 위해선 이 돌섬들을 지나야 했다.
고구려가 비사성에 수군 기지를 세운 이유는 바로 이 돌섬들에 있었다.
적이 비사성 포구를 함락하기 위해 온다면 해상에 뿌려지듯 펼쳐진 돌섬들을 의지하여 적을 막아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돌섬과 돌섬 사이는 마치 협곡처럼 물이 굽이쳤고, 밀물과 썰물에 따라 해류가 빠르게 이동하기를 반복하였다.
게다가 이 물길 속엔 암초들이 숨어 있었으니, 물길을 모르는 이들은 함부로 지나다가 좌초하기 일쑤였다.
마침내 일자로 길게 늘어서 진형을 갖춘 수의 수군 전단이 돌섬들 사이를 통과하기 시작하였다.
주나후도 물길을 잘 아는 장수였기에, 빠른 돌파로 돌섬 사이를 통과하다가 물속에 숨은 암초에 좌초될 것을 우려하여 물이 빠지는 때를 택하였다.
해류를 역으로 거슬러 느리게 통과하며 암초를 피하겠다는 심산이었고, 부총관을 비롯한 모든 장수들이 이 판단에 동의하였다.
숫적 우위를 지니고 있었으니, 해류를 거슬러 오르며 느리게 진군해도 두려울 것은 없다 여겼고 나름 신중한 진행이었다.
십여 개의 작은 돌섬들 사이를 통과하기 위해 일자 진형이 분산되어 군선들이 제각각 흩어졌고, 물살을 거슬러 천천히 진격이 이뤄졌다.
경계는 나름 삼엄했고, 언제든 고구려 군의 기습에 맞설 준비도 충분하였다.
그러나 세상 모든 돌발 상황을 대비할 수는 없었다.
해류를 거슬러 통과하는 수의 군선들을 향해 돌섬에 숨은 고구려 군사들이 몸을 드러내더니, 불화살을 날리고 기름을 담은 통을 띄웠다.
물살을 탄 기름통이 빠르게 수의 군선에 부딪치니, 이를 기다려 돌섬의 군사들이 불화살을 날렸다.
선두의 군선들이 화염에 휩싸이고, 뒤엉킨 다른 군선들을 향해 물에 둥둥 뜬 기름에 불이 붙어 빠르게 밀려오니, 군사들이 기겁하여 뱃머리를 돌리기 바빴다.
그러나 물살을 거슬러 돌섬 사이를 통과하던 중이었기에, 수의 군선들은 뱃머리를 돌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뱃머리를 돌리지 마라! 오히려 뒤엉켜 불이 붙을 것이다! 돌파를 강행하라! 빠르게 불길을 통과해야 한다!”
이에, 주나후가 불길을 피하고자 돌파를 명하니, 화염에 휩싸인 선두 군선들을 밀어제치며 힘겹게 노를 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돌섬에 자리한 고구려 군은 지리적 이로움을 십분 활용하여 불화살을 연신 날리고 기름을 담은 통을 계속 바닷물에 띄웠다.
계산이 빠른 주나후가 돌섬들에서 화공을 퍼붓는 고구려 군의 군세를 살폈다.
‘일만… 일만… 십여 개 돌섬에 제각기 천여 명이 배치되었다. 도합 일만이다. 일만… 고구려 수군 전체를 이 돌섬에 투입하여 화공을 펼치는 것이다.’
생각을 마친 주나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노를 저어라! 이 망할 돌섬만 통과한다면 우리의 앞을 막을 적은 없다! 적은 해상전에서 이길 수 없다 여겨 화공을 펼친 것이다. 이곳만 통과하면 우리를 막을 고구려 군은 어디에도 없느니라!”
아직도 수적 우위를 믿고 주나후가 외쳤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돌섬 사이를 통과한 수의 군선들을 향해 어린진(魚鱗陣)을 펼친 고구려 군선들이 들이닥쳤다.
어린진은 돌파에 강한 진형으로 물살을 거슬러 돌섬을 통과하느라 산개된 수의 군선들을 요격하기 좋은 진형이었다.
빠른 물살을 타고 수의 진형을 들이박으며 돌섬 사이 불길 속으로 다시 밀어 넣는 고구려 군선들의 기세에 대장선 주나후가 절망하여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도대체 어디서 수군을 채웠단 말인가? 북장원 그자가 나를 속였단 말인가?”
수의 군선들이 화염을 뚫고 돌섬 사이를 통과할 때마다, 여지없이 어린진을 펼친 고구려 군선들이 돌진하여 다시 불길 속으로 밀어 놓기를 반복했다.
이에, 퇴각하기 위하여 뱃머리를 돌리고자 해도 화염 속에서 배들이 서로 뒤엉켜 그저 거센 해류에 밀리기만 하였다.
그리고, 돌섬을 돌아 수의 진영 배후에도 고구려 군선들이 나타나 어린진을 펼치며 퇴로마저 끊으니, 앞뒤가 막힌 수의 군선들은 계속 화염 속에 갇혀야 했다.
돌섬에선 계속하여 불화살을 날렸고, 수나라 군선은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화살을 날릴 여력조차 없었다.
게다가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저어 돌섬 사이를 황급히 빠져나와도 물속에 숨은 암초를 살피지 못하여 좌초할 뿐이었다.
어느덧 물살이 바뀌고 해도 저물어 갔으나, 수나라 군선들은 여전히 돌섬 사이에 갇혀 활활 타오를 뿐이었다.
해가 지고도 한참 동안 수나라 군선들이 내뿜는 화기에 일대 바다가 환하게 밝았다.
주나후가 이끈 수군 칠만이 모두 비사성 앞 바다에서 수장되었다는 소식은 보름이 지나서야 한왕 양양에게 전해졌다.
오직 주나후가 요동에 상륙하여 고구려 군의 배후를 급습하기만 기다렸던 한왕 양양에겐 날벼락 같은 비보였다.
완연한 봄이 되며 요택도 마른 땅이 나타나고 있었으나, 수군의 전멸로 인하여 절망한 한왕 양양은 더 이상 전의를 지니지 못하였다.
“땅이… 이 빌어먹을 습지가… 말랐다. 이제 걸어서 퇴각해도 된다. 우리는 이제 퇴각해도 된다.”
실성한 듯 중얼거린 한왕 양양이 벌떡 일어나 명하였다.
“퇴각한다! 탁현으로 돌아가 재정비하리라! 퇴각하라! 전군 퇴각하라!”
그러나 요택이 마른 땅을 보였다고 하여 수나라 군사들에게 좋은 일도 아니었다.
땅이 마르니, 기병들이 말을 달리기 좋아진 것이다.
수나라 군이 등을 보이니, 고구려 철기병들의 돌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카사르와 호타크의 부족 전사들 역시 인간 사냥을 즐기며 수나라 군의 측면을 괴롭혔다.
변변한 진영도 갖추지 못한 수나라 군은 쫓기기만 하다가 쓰러졌고, 진영을 벗어나 도주하는 군사들이 줄을 이었다.
이젠 목을 베며 탈영을 막을 장수들조차 전무하였다.
기세등등했던 한왕 양양은 초라한 몰골로 그저 만리장성을 향해 두 발로 내달리기 바빴다.
그러나 만리장성은 너무도 멀었고, 말이 질주하기 좋은 시절을 맞이한 고구려 군은 너무도 가혹하였다.
한왕 양양과 함께 전장에 나섰던 태자 양광은 양소와 함께 모든 전황을 지켜보며 고구려 정벌에 가장 합당한 시기를 머릿속에 각인하였다.
‘요택이 마른 완연한 봄에 출병해야 한다. 고구려와의 전쟁은… 이 시기 이외에 다른 시기는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