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주유천하(周遊天下) (22)
개소문이 황 교두의 검을 피하기 위해 몸을 틀어보았으나, 전신에 힘이 실리지 않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윽…….”
매섭게 날아들던 황 교두의 두 자루 검도 개소문의 목과 가슴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마치 조롱하듯 바로 앞에 멈춘 검날에 격노한 개소문이 소리쳤다.
“벨 테면 베거라!”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개소문에게 황 교두가 입꼬리를 실룩이며 말하였다.
“독공이로군. 네놈 짓이냐?”
황 교두의 미간이 일그러져 있었다.
“독? 독공?”
개소문이 놀라 되물었으나, 황 교두는 대답하지 않은 채 검을 거두고는 제자리에 앉아 운기조식을 시작하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개소문이 의아해 황 교두에게 소리쳐 물었다.
“무엇하는 짓이냐? 어찌 이다지도 사람을 능멸할 수 있는 것이더냐? 놀리지 말고 죽일 테면 죽이거라!”
그러나 황 교두는 눈까지 감은 채 답이 없었다.
이에, 야수가 벽에 기댄 채 개소문에게 말하였다.
“그의… 말대로. 독공… 이다. 운. 기조식… 하라.”
그제야 개소문도 뭔가 깨닫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워 제대로 살필 수는 없었으나, 누런 연기가 바닥에 깔린 듯했다.
개소문이 힘겹게 제자리에 주저앉아 운기조식을 시도하였으나, 외상이 심하여 집중하기 어려웠다.
이때, 불당 밖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천하제일검 황무문을 이곳에서 뵐 줄이야. 황 교두! 소인 당진평 안에 들어가도 되겠나이까? 하하하.”
이어서 누런 연기를 뿜어내는 향로를 네 명의 사내가 들고 불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당진평과 언지창이 십여 명의 사내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이쿠, 상당한 혈투가 있었구려. 대단들 했군.”
당진평이 해권의 시신을 발끝으로 툭 밀며 히죽 웃었다.
“이… 이놈… 감히 그분의 시신을?”
개소문이 노해 노려보니, 당진평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죽인 게 아니잖아. 죽인 건 이 황 교두님이신데, 어찌 내게 화를 내는가?”
당진평이 이번엔 창주의 시신을 발로 툭 차 밀어내며 물었다.
“그분들의 시신에 발을 대지 마라!”
개소문이 노해 다시 소리치니, 언지창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빠르게 다가와 개소문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컥!”
짧은 신음을 토한 개소문이 축 늘어져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사부! 개소문 사부야!”
팽무일이 놀라 외치니, 언지창이 시선을 팽무일에게 옮겼다.
“죽이지 않았다. 시끄러워 기절만 시킨 것이다.”
언지창이 팽무일에게서 시선을 황 교두에게 옮겨 살피고는 다시 당진평을 바라보았다.
“죽여?”
언지창의 물음에 당진평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가가지도 마시오. 운기조식 중이지만, 다가가면 검을 휘두를 게요.”
당진평의 말대로 황 교두는 눈을 감고 운기조식을 하면서도 귀로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만일 누군가 그를 노리고 다가간다면 짧고 빠르게 검으로 베어 자신의 몸을 지킬 준비도 단단히 하고 있었다.
“천하제일검이야. 일부러 이 상황에서 운기조식을 하며 몸을 지키고 있는 게지. 언지창 그대가 아무리 몸을 단단히 할 수 있다고 해도, 저자의 검은 당하지 못할 거요.”
당진평이 황 교두와 거리를 두고 빙 돌아 불당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고는 수하들에게 손짓으로 개소문과 야수, 팽무일, 공손향 등을 업으라 지시하였다.
“우리를 어찌하려고!”
팽무일이 놀라 물으니, 당진평이 빙그레 웃었다.
“그럼 두고 가? 여기 두고 가면 운기조식을 마친 황 교두가 네놈 목을 벨 건데, 그래도 두고 가?”
비아냥거리듯 물었으나, 팽무일도 더는 불만을 표할 수 없었다.
언지창은 여전히 황 교두가 마음에 걸리는지 당진평에게 다시 물었다.
“이자를 죽이고 가야 하지 않겠나?”
“당국공 이연의 얼굴을 봐서 살려주자고. 뭐 실상, 죽이기도 쉽지는 않아요. 우리가 어찌 죽이겠소? 멀리 떨어져 칼을 던져 죽이나?”
당진평이 농담처럼 말하였으나, 언지창도 자신의 재주로는 운기조식 중인 황 교두를 해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는 이견을 내지 않았다.
“황 교두! 우리는 먼저 가리다! 운기조식 마치면 그대도 얼른 태원으로 돌아가시오. 그렇게 앉아 있다간, 이곳에 터를 잡은 도적 떼들이 달려들 게요. 하하하.”
밖으로 나간 당진평이 껄껄 웃으며 소리쳤으나, 황 교두는 운기조식에 집중하며 대답이 없었다.
야수와 팽무일, 공손향을 후려쳐 의식을 잃게 한 언지창이 당진평에게 바짝 붙어 나지막이 물었다.
“탁현으로 가서 태자 전하를 뵐 것인가?”
“아니라오. 늦었지. 이미 출병하셨을게요. 우린 돌아오실 때까지 산동에서 기다리도록 합시다.”
당진평 일행이 사찰을 떠나자, 무너진 담장 뒤에 숨어 있던 사내들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제법 체구가 건장한 사내가 불당 안을 가리키며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에게 말하였다.
“왕박 형님, 태원의 군사들은 아닌가 봅니다. 안에도 한 명 남아 있던데, 잡아 올까요?”
이에 왕박이라 불린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럼 그냥 산채로 돌아갈까요?”
“장원기, 너는 저들의 뒤를 조용히 따르거라. 나는 애들을 모두 이끌고 가겠다.”
왕박이 사찰 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명 내리니, 장원기가 의아해 물었다.
“왕박 형님, 저자들을 아시오?”
“저자들은 모르고, 저 아이는 안다.”
왕박이 짧게 답하니, 장원기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당진평의 뒤를 쫓기 위해 사찰 밖으로 발을 옮겼다.
* * *
아침이 밝아 이연의 관저로 들어선 어득구는 아직도 어수선한 분위기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침 호랑이 수염을 기른 사병이 보이자, 어득구가 달려가 물었다.
“밤새 뭔 일 있었소?”
“있었지.”
“뭔 일이오?”
“뭔 일인지 너는 알 것 없고. 토굴 속에 들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좀 살펴야겠다.”
“아… 그건 좀 싫은데… 다른 사람이 하면 안 되는 일이오?”
호랑이 수염을 기른 사내의 말에 어득구가 짐짓 싫은 기색을 하였다.
“아니, 자네가 해야지. 잡일 보는 사람 중에서 자네가 제일 아랫사람 아닌가. 자네가 들어가야 해. 싫어도 할 수 없다네. 원래 세상일이 다 그런 거잖아.”
“아니 그래도 싫소만…….”
호랑이 수염을 기른 사내는 싫다고 고개 젓는 어득구를 질질 끌다시피 토굴 앞으로 끌고 갔다.
이미 잡일 보는 사내 둘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보게나.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들어가 살펴보고 나오라고.”
호랑이 수염을 기른 사내가 어득구를 재촉하였다.
“살펴보고, 죽었으면?”
“죽었으면 나와서 죽었다고 말하면 되지.”
“그리고 나서는?”
“그리고? 그 뒤는 내가 나중에 말해주겠네. 어서 들어가게.”
호랑이 수염을 기른 사내는 어득구의 등을 떠밀며 토굴 안으로 밀어 넣고는 횃불을 건넸다.
“어두우니, 발 조심하고.”
토굴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어득구의 코끝으로 역한 내음이 밀려들었다.
“우웩!”
어득구가 헛구역질을 하니, 호랑이 수염을 한 사내가 중얼거렸다.
“하… 그 냄새에 질려서 밥 주러 안 갔더니… 아마도… 이젠 죽었을 게야. 공녀님이 아시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인데…….”
‘뭐? 살아 있던 아이를 굶겨 죽였다고? 이 천하의 못된 놈 같으니.’
호랑이 수염을 기른 사내의 소행이 괘씸해 속으로 욕을 하며 발을 옮긴 어득구는 토굴 끝에 쓰러진 온동을 발견할 수 있었다.
쇠사슬에 목과 손발이 묶여 대소변도 가릴 수 없는 몰골이었다.
온동의 몸에선 구린내와 쉰내뿐만 아니라 살이 썩어들어 가며 풍기는 역한 내음이 가득하였다.
“이… 이런…….”
어득구가 조심스럽게 온동의 얼굴에 횃불을 비추니, 벌레들이 온동의 눈에서 날아올랐다.
“헉!”
어득구가 급히 횃불로 벌레들을 쫓으며 온동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상처가 곪아 썩기 시작한 두 눈에서 벌레들이 꿈틀거렸다.
썩은 살을 파먹는 구더기들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어득구가 욕을 내뱉으며 온동의 얼굴에 붙은 구더기들을 마구 떼어냈다.
통통히 살이 오른 구더기들이 터지며 붉은 피를 뿜었다.
아마도 온동의 피가 분명하리라.
“차, 차가워…….”
이미 죽은 지 오래된 듯 온동의 몸에 생기란 없었다.
“틀렸군. 역시 화장하여 재라도 가져가야 하는 수밖에…….”
어득구가 안쓰러운 듯 온동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온동의 손가락이 꿈틀거리는 것이 어득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 아니…….”
몸도 차가웠고, 맥도 잡히지 않을 만큼 심장도 약하게 뛰어 죽은 듯하였으나, 온동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 살아 있어. 살아 있다고…….”
놀랍고도 기뻐 어득구가 중얼거렸다.
“그… 그런데, 어찌… 해야 하나?”
* * *
잠시 뒤 토굴 밖으로 나온 어득구에게 호랑이 수염을 기른 사내가 다가와 물었다.
“고생했네. 그래 어떻던가? 죽었지?”
“그렇소. 죽었다오.”
어득구가 털썩 주저앉아 답하니, 호랑이 수염을 기른 사내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여기 잠시 있게나. 아뢰고 올 테니 기다리게.”
급히 발을 옮긴 호랑이 수염을 기른 사내가 잠시 뒤돌아와 말하였다.
“끌어내어 태우라시네. 태왕산에 끌고 가 태우면 되니 어서 끌어내게.”
“내가? 내가 끌어내? 저길 또 들어가라고?”
어득구가 자신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으니, 호랑이 수염을 기른 사내가 히죽 웃었다.
“그럼 누가 하나? 이왕 자네가 들어갔던 김에, 다시 들어가 끌어내면 좋지 않은가? 여기 열쇠 있으니 쇠사슬도 풀고 끌어내게나.”
열쇠를 건네며 호랑이 수염을 기른 사내가 어득구를 일으켜 세웠다.
마지못해 다시 토굴 안으로 들어간 어득구가 온동을 질질 끌며 밖으로 나왔다.
호랑이 수염을 기른 사내가 역한 냄새에 눈살을 찌푸리고는 멀찍이 떨어져 온동의 몰골을 살폈다.
어득구가 미리 안에서 기절시켰기에, 온동은 미동조차 없었다.
“어이쿠! 눈에 구더기가! 어서 끌고 가 태우라고! 살이 아주 썩었구만. ㅤㅌㅞㅅ!”
호랑이 수염을 기른 사내가 침을 뱉으며 수레를 가리켰다.
어득구가 인상을 구기며 수레에 온동을 싣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사내 둘이 다가왔다.
잡일 보는 사내들로 어득구와 함께 온동을 태우러 태왕산까지 가려는 모양이었다.
‘이놈들의 명이 오늘까지로구나. 미안하게 되었다.’
어득구가 사내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 * *
온동을 수레에 싣고 태왕산 어귀에 당도하니 사내들이 발을 멈추고 말하였다.
“이 산에는 도적 떼가 있으니, 여기서 태우자고.”
“그래, 더는 오르지 않는 게 좋아.”
어득구가 산을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여기까지 수레를 끌고 왔으니, 당신들이 땅을 파시구려.”
“땅을? 땅을 왜 파나? 태울 건데…….”
“그러게… 괜히 땅은 왜 파?”
사내들이 의아해 물으니, 어득구가 인상을 구기며 말하였다.
“태우면 뼈가 가루가 되어 버린답니까? 힘들게 절구로 뼈를 빻을 것 아니면, 땅 파서 묻어야지. 땅 파기 싫으면 가서 절구 가져오던가. 내가 미리 수레에 삽을 싣고 왔으니 파시든지 절구를 가져오던지 알아서들 하시오.”
어득구의 말에 사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땅을 파기 시작하였다.
“듣고 보니, 땅을 파는 게 좋겠어.”
“그래, 언제 절구를 가져오나.”
구시렁거리며 땅을 파기 시작한 사내들의 뒤로 어득구가 살며시 섰다.
“좀 더 깊게 파야 잘 들어갈 거요.”
자신들이 묻힐 자리인 줄도 모른 채 사내들은 열심히 깊게도 땅을 팠다.
잠시 뒤 사내들의 목을 분질러 땅에 묻은 어득구가 온동을 수레에 싣고는 쏜살같이 태왕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 아이를 좀 씻기고… 치료도 해야 할 건데… 일단 이 산이나 좀 넘고 보자. 그나저나…. 두 눈을 잃었으니, 불쌍하여 어이할꼬.”
마음이 급해 산중턱의 사찰도 지나친 어득구는 한걸음에 태왕산을 넘어 계곡에서 온동의 몸을 닦고는 다시 바삐 수레를 끌었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졌고, 의원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온동은 가냘프게 숨이 붙어 있었으나,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몸 상태였다.
“이 마을에 의원 댁이 어디요?”
어득구가 지나는 노인을 붙잡고 물으니, 노인이 수레에 실린 온동을 들여다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아이는 이 마을 의원이 손 쓸 수 없을 듯한데… 차라리, 오태산의 남궁 씨를 찾아가는 게 좋을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