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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검귀-207화 (207/328)

207화 주유천하(周遊天下) (21)

덜컹덜컹.

어둠이 짙게 깔린 길을 거세게 달리던 마차는 태원 외곽에 자리한 객잔 앞을 멈추지 않고 지났다.

이 객잔 이층 창가에서는 어득구가 멀어져 가는 마차를 무심히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나만 두고 가네. 허… 뭐,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내가 이해해야지. 그래도 참 무정하네. 의리 없는 인간들 같으니…….”

온동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홀로 남은 신세를 한탄하던 어득구의 시야에, 어둠을 뚫고 쏜살처럼 내달려오는 인영이 들어왔다.

두 자루 검을 지니고 땅에 발이 닿자마자 다시 솟구치기를 반복하며 한 번에 십여 장씩 도약하는 사내였다.

사내는 놀라 바라보는 어득구의 시야에서 사라지듯 순식간에 멀어지더니 어느새 어둠에 동화되어 보이지 않았다.

“황… 교두?”

불길한 마음에 어득구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형님 일행이 무사해야 할 터인데…….”

* * *

태원을 벗어난 마차는 방향을 동북 방면으로 정하여 계속 내달렸고, 높지 않은 산 앞에 당도하였다.

어두운 산길을 올려다보며 해권이 말하였다.

“호랑이가 나올지 도적이 나올지 모르나, 일단 저 산을 넘어 최대한 태원에서 멀리 가도록 합시다.”

해권이 마차를 다시 몰기 시작하니, 마차 지붕 위에 앉아 있던 창주가 해권의 옆으로 내려앉으며 말하였다.

“이 산은 태왕산이라 합니다.”

“이곳 지리를 아는가?”

해권이 의아해 물으니, 창주가 어깨를 으쓱하였다.

“사람들이 이 산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지요.”

“그래 뭐라던가?”

“절대 오르지 말라 하더이다.”

“뭐? 그걸 왜 이제 이야기해!”

해권이 버럭 소리를 지르니, 창주가 다시 어깨를 으쓱하였다.

“그렇다고 우리 처지에 안 넘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해권이 생각해 보니, 창주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이봐 창주, 그래 사람들이 왜 이 산에 오르지 말라 말하던가?”

“도적 떼가 있다지요.”

창주가 담담히 답하니, 해권이 내심 안심하였다.

“도적 떼 따위 정도야… 그래 몇이라던가?”

“이연이 돌궐을 막기 위해 태원을 비운 뒤, 자리 잡은 도적 떼라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한왕 행군원수부에서 도망친 군사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여 꽤 사나운가 봅니다.”

“탈영병들이로군. 부딪쳐서 좋을 일 없으니, 쉬지 말고 산을 넘도록 하세.”

대화를 나누면서도 해권은 계속 달리는 말을 채찍질하여 마차의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불도 밝히지 않고 험한 산길을 마차로 질주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쿵!

길에 솟은 돌에 걸려 마차가 들썩이니, 마차를 끌던 두 필의 말이 비명을 지르듯 길게 울며 주저앉았다.

창주가 급히 마차에서 뛰어내리며 말하였다.

“이대로 계속 달리다가는 말들이 지쳐 쓰러지거나, 나무와 돌에 부딪칠 것 같습니다.”

해권도 마차에서 내리며 창주에게 말하였다.

“말들을 잘 달래서 살살 끌고 갈 테니, 너는 밤이슬 피할 곳을 찾아보거라.”

도적 떼가 자리 잡은 산에서 잠시 머물 곳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창주는 별다른 이견 없이 쉴 곳을 찾아 나무 사이로 몸을 날렸다.

일 다경도 지나지 않아, 돌아온 창주가 말하였다.

“이 길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산 중턱에 폐허가 된 사찰이 있습니다.”

“그래? 그거 잘 되었구나. 그런데 도적 떼는 보이지 않던가?”

해권의 물음에 팽무일이 창주를 대신하여 답하였다.

“도적들의 산채는 정상쯤에 있을 게요.”

“그래? 어찌 그리 장담하나?”

해권이 의아해 물으니, 팽무일이 빙그레 웃었다.

“나야 당연히 잘 알지. 아무튼 내 말 믿으셔도 좋소. 도적 떼도 이런 야심한 밤에는 산채에서 나오지 않을 게요.”

“왜지?”

“왜긴… 오가는 사람이 없으니, 안 나오지. 날 저물 때까지만 산길을 살피고 해 떨어지면 도적 떼들도 하루 일 마친다오. 짐을 털 손님이 없는데 영업 종료해야지. 이 당연한 것을 모르나?”

너무도 자신 있게 팽무일이 말하니, 해권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럴 듯한 말이야. 일단 사찰로 가서 좀 쉬자고.”

해권이 말들을 달래며 다시 마차를 움직였다.

마차가 천천히 산길을 오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산중턱에 자리한 사찰에 당도할 수 있었다.

폐허가 된 사찰 내부는 도적 떼의 습격을 당한 듯 온통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밤이슬 피하기 좋겠어.”

말을 매어 두고 해권이 말하니, 창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 안에서 쇼락을 업어 날랐다.

선예도 공손향을 업고 나오니, 개소문이 팽무일을 업고 뒤를 따랐다.

“나는 저놈인가?”

해권이 야수를 바라보고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야수에게 등을 보이며 말하였다.

“업혀.”

야수를 업고 안으로 들어선 해권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꽤 넓군. 날이 밝을 때까지 잠시 쉬자고. 불을 피우지 마. 추격이 있을 거야. 도적 떼도 걱정되고.”

찬바람은 막을 수 있었으나, 한기는 여전하여 공손향이 몸을 덜덜 떨었다.

“이 여인… 실성하였는가?”

선예가 공손향을 가리키며 물으니, 개소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그리되었습니다.”

“이들을 구해 데리고 다니느라 네가 고생이 많았겠구나.”

선예의 말에 개소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아무도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온동도… 온동이 그토록 구하고 싶어 하던 독고영도… 팽 장주의 딸 팽운도… 그리고 이들도…….”

“네 잘못이 아니다. 힘이 조금 부족했을 뿐이다. 독고영과 팽 장주의 딸은 언젠가 네가 다시 구하면 되느니라. 살아만 있다면 기회는 반드시 오는 법이다.”

“살아 있지 않은… 동이는, 온동은 어찌합니까? 온동은… 그 착한 아이는… 내 아우 온동은 어찌하옵니까?”

눈물을 보이지 않았으나, 개소문의 목소리는 비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동이를 대신하여 네가 독고영과 팽 장주의 딸을 구한다면… 동이도 크게 기뻐할 것이다.”

선예의 말투와 표정은 차가웠으나, 진심으로 위로하는 마음이 전해져, 개소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해권이 개소문에게 다가가 어깨를 다독이며 말하였다.

“고구려 내의 조의선인 무리 중, 우리 해 씨 형제가 이끄는 무리가 가장 세가 크단다. 내가 너를 도울 터이니, 모두 잘 될 것이야.”

개소문이 감격하여 답하려던 그때, 사찰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탁!

탁! 탁!

창주가 살며시 일어나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귀를 기울였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입니다.”

다리를 쓰지 못하는 야수가 벽에 기대앉은 채 나지막이 말하였다.

“추. 격이… 붙었다. 망할.”

북주 제일검 칭호를 지닌 야수였으나, 두 다리가 온전하지 못하여 무척이나 침통한 표정이었다.

항상 지니던 두 자루 박도마저 없으니 그저 두 주먹을 불끈 쥘 뿐이었다.

이때, 귀를 기울이던 창주가 검을 뽑아 들며 손가락을 하나 펴들었다.

“한 명입니다.”

“고작?”

선예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철편을 쥐고 일어서니, 해권과 개소문도 따라 일어섰다.

“너는 뒤로 물러나거라.”

무기를 지니지 않은 개소문을 잡아끌어 뒤에 세우며 해권이 말하였다.

탁!

탁! 탁!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듯 누군가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쿵!

마침내 사찰 안으로 누군가 뛰어내리는 소리가 들리고는 개소문 일행이 몸을 숨긴 불당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한 명… 한 명이라…….”

해권이 낮게 중얼거리더니,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한 명이라면… 고작 한 명이라면…….’

불길한 마음에 검을 쥔 손이 살며시 떨렸다.

슬그머니 창주가 해권의 앞으로 나오며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창주… 물러나라…….”

해권이 창주의 몸을 잡아당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혼자… 쫓아왔다면… 필경, 그놈이다…….

어둠이 일렁이며 해권이 예상했듯 황 교두가 불당 안으로 들어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해권과 황 교두가 잠시 서로를 바라보더니, 황 교두가 감정을 담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밤이 깊었으니, 날이 밝으면 함께 돌아가자.”

마치 일가에게 함께 집에 가자 말하는 듯하여 선예가 어이없어 물었다.

“돌아가? 왜?”

“너희의 몸이 나와 함께 가지 못한다면, 머리만 가져가겠다.”

황 교두의 두 자루 검이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건방지기가 이를 데 없는 놈이로다!”

선예가 불같이 화를 내며 철편을 휘두르니, 해권도 몸을 날리며 소리쳤다.

“내가 막을 테니, 어서 도망쳐라!”

그러나, 불당 앞에 선 황 교두를 쓰러뜨리지 않고서는 밖으로 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리가 부러졌는데, 어찌 도망가냐고! 사부, 나 버리지 마!”

팽무일이 우는소리를 하니, 개소문이 잠시 돌아보고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파천신검 초식을 적수공권으로 펼치며 백두검법의 보법을 밟았다.

창주도 황 교두에게 몸을 날리며 해권에게 소리쳤다.

“형님, 이놈을 제거해야 길이 열립니다. 함께 쓰러뜨립시다!”

선예, 해권, 개소문, 창주 네 사람이 일시에 달려드는데도 황 교두는 제자리를 지키며 조금도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깡!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일고, 선예의 철편이 튕겨 나갔다.

그리고 황 교두의 검이 해권의 검을 잘라 날리고는 뒤이어 날아든 창주의 어깨를 베었다.

“악!”

오른쪽 어깨가 잘린 창주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니, 검붉은 피가 끊임없이 솟구쳤다.

“창주!”

선예가 놀라 외치며 창주를 구하러 달려들었다.

그러나, 매정한 황 교두의 검이 고통에 겨운 창주의 머리를 몸에서 갈라놓고 말았다.

“아아악! 창주!”

자지러질 듯 비명을 지르며 선예가 철편을 휘두르고, 개소문도 수박 기술을 펼치며 발로 황 교두의 머리를 후려쳤다.

황 교두는 가볍게 검을 휘둘러 선예의 철편과 개소문의 발 후리기를 동시에 대적하였다.

철편을 자른 황 교두의 검이 그대로 선예의 가슴에 박히고, 황 교두의 또 다른 검이 개소문의 발목을 베어 갔다.

“악!”

가슴에 검이 박힌 선예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한 모금의 선혈을 토했다.

“비켜!”

발목이 잘릴 위기에 처한 개소문을 몸으로 밀어내며 해권이 소리쳤다.

바닥에 나뒹군 개소문을 대신하여 해권의 손목이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윽…….”

“몸은 필요 없구나. 목만 취하겠다.”

황 교두가 무심히 말하며 선예의 가녀린 목에 검날을 박았다.

툭!

선예의 몸이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지자, 손목이 잘린 고통도 잊은 해권이 격분해 소리쳤다.

“선예! 이 찢어 죽일 놈아!”

손목이 잘려 검도 쥐지 못한 해권이 달려드니, 차가운 검날이 매정하게 해권의 목을 맞이하였다.

투툭.

해권의 몸과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불당 안에 울려 퍼졌다.

“머리만 취하면 된다.”

황 교두의 시선이 개소문에게 향했다.

“이… 이 자식이…….”

개소문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나와 함께 갈 생각이 없는 게로구나. 별수 없지.”

황 교두의 두 자루 검이 다시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도망칠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개소문이 불끈 쥔 주먹에 힘을 실으며 소리쳤다.

“이 괴물! 빌어먹을 자식아!”

맹렬히 달려든 개소문의 주먹이 황 교두의 얼굴을 보기 좋게 후려쳤다.

강한 타격에 황 교두의 몸이 휘청이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황 교두의 두 자루 검도 좌에서 우로 서로 엇갈려 개소문의 몸에 대각선으로 상흔을 남겼다.

“이따위! 이까짓!”

전신을 피로 물들이면서도 개소문은 이을 악물고 황 교두에게 바짝 붙어 다시 주먹을 날렸다.

묵직한 타격에 황 교두의 몸이 다시 휘청였으나, 그의 검음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개소문에게 달라붙어 계속 상처를 남겼다.

“아악!”

어깨와 복부를 동시에 찔린 개소문이 비명을 지르니, 황 교두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네 목을 취하고, 나머지 이의 목도 가져가겠다.”

“망할 자식…….”

꿀럭꿀럭.

피를 뽑아내는 복부를 움켜쥔 개소문이 황 교두의 두 자루 검을 노려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래, 머리가 잘리기 전에 욕이나 실컷 하거라.”

황 교두의 무심한 말과 함께 두 자루 검이 개소문의 목과 가슴을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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