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주유천하(周遊天下) (20)
집무실 방향에서 병장기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남궁천은 사색이 되어 중얼거렸다.
“큰일이다. 이렇듯 쉽게 독고영을 구하였는데, 둘째가 시선을 끌고자 벌써 움직였구나.”
남궁천, 남궁웅, 남궁민 삼 형제는 독고영을 구하기 위하여 일부러 복수하러 오는 척 악살소멸부를 건성에게 보냈고, 주위를 끌기 위하여 남궁웅이 소란을 부린 것이다.
그러나 남궁천은 평양을 독고영이라 생각하고 있으니, 홀로 황 교두를 대적하게 된 둘째 남궁웅이 염려되었다.
“셋째야! 둘째가 위험하다. 독고영은 내가 이미 구했으니, 너는 어서 먼저 오태산으로 가거라! 나는 둘째를 구해 오태산으로 돌아가겠다!”
별채 안으로 크게 소리친 남궁천이 평양을 번쩍 들어 옆구리에 끼고는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날듯이 달려갔다.
이에, 별채 안에서 진짜 독고영과 마주한 남궁민이 놀라 급히 뛰어나왔으나, 이미 남궁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이런, 큰형님은 누굴 구한 것이지?”
남궁민이 뒤따라 나온 독고영을 돌아보며 중얼거리더니, 독고영의 뒤에 서 있는 송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항아님, 그대는 이곳에 계속 갇혀 지내실 것이오?”
“싫어요. 갇혀 지내기도 싫고. 이곳 자체도 싫어요.”
송현이 단호히 고개를 저어 말하니, 남궁민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우리와 함께 오태산으로 갑시다. 따르시겠소?”
남궁민의 미소는 강제적이지도 않고 위압적이지도 않았다.
팽가장에서 남궁민의 의협심을 익히 보아 잘 아는 송현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남궁민은 끊임없이 비명이 울리는 곳으로 잠시 시선을 옮기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형님이 먼저 가라 하셨으나, 두 분 형님을 두고 갈 수 없고. 그렇다고 이들을 데리고 싸움이 한창인 저곳으로 갈 수도 없고…….”
망설이는 남궁민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독고영이 말하였다.
“형님이 걱정되시면 구하러 가세요. 사랑하는 이를 구하지 못하면 후회하실 거예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무척이나 조숙한 말투였다.
남궁민은 커다란 눈망울을 빛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독고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가, 아가는 어른을 배려할 필요가 없단다. 나의 두 형님은 천하무적이시니,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야. 일단 우리부터 안전한 곳으로 가자꾸나.”
독고영을 번쩍 들어 안으며 남궁민이 송현을 돌아보니, 그녀도 힘껏 내달릴 준비를 마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내가 알아요. 저쪽으로 가지 않고 담을 몇 개 넘으면 밖으로 나갈 수 있어요.”
송현이 앞장서서 내달리며 말하니, 남궁민도 빠르게 그 뒤를 쫓았다.
“항아님 대단한 경공이시오!”
가볍게 담장을 넘는 송현을 칭찬하며 뒤따라 담장을 넘던 남궁민의 앞으로 누군가 날아들었다.
“멈추고, 아이를 놓거라!”
송현과 남궁민 사이를 가르고 날아든 여인이 날카롭게 외치며 철편을 휘둘렀다.
촤아악!
쇳소리를 일으키며 철편이 날아드니, 독고영을 안은 남궁민이 뒤로 물러나며 검을 뽑아 들었다.
왼손으로 독고영을 안았으나 빠르게 날아든 철편에 맞서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ㅤㅊㅘㄱ!
가볍게 철편을 튕겨낸 남궁민이 일격필살을 노리며 여인을 훑어보았다.
“철편이라… 특이한 무기로다. 그대를 베기 전에 이름이라도 알아야겠소. 그대는 뉘시오?”
여인을 노려보며 남궁민이 물었다.
이에 여인이 배시시 웃었다.
“나를 베겠다라. 시건방진 놈이로다. 나는 선예라 한다. 내가 누군지 알았으니, 벨 것이냐?”
선예의 물음에 답 대신 남궁민의 검이 날아들었다.
달빛을 받은 검날이 푸르스름하게 빛나며 다가오니, 선예가 뒤로 훌쩍 물러서며 철편을 휘둘렀다.
창처럼 길게 뻗은 철편이 남궁민의 목을 노렸다.
“대단한 내력이오! 훌륭하오!”
남궁민이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검날로 철편을 후려쳤다.
그러자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듯 철편이 구부러지다가 다시 튕겨 나오며 곧게 뻗어 남궁민의 눈을 노렸다.
이에 남궁민이 다시 검으로 쳐내며 선예와 거리를 좁혔다.
그러나 이번에도 구부러졌던 철편이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남궁민의 머리를 노렸다.
이에, 남궁민이 빙그레 웃더니 뒤로 훌쩍 물러나며 물었다.
“그대는 나만 노리고 이 아이는 다치게 하지 않으려 애쓰는구려. 그대는 이곳 인물이시오?”
“시끄럽다. 나는 이곳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아이뿐이니, 살고자 한다면 아이만 두고 가거라.”
선예의 차가운 대답에 남궁민이 독고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 여인을 아느냐?”
독고영이 고개를 저으니, 남궁민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아이가 그대를 모른다고 하는데 어찌 아이를 두고 갈 수 있겠소. 그대는 이곳 인물도 아니고, 아이와 아무 관련도 없으니, 그대가 길을 비켜야 옳을 듯하오.”
“혀가 긴 놈이로다. 나는 그 아이를 구하러 왔으니, 살고자 한다면 아이를 두고 가거라. 길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다.”
남궁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선예의 철편이 다시 날아들었다.
이에, 남궁민이 껄껄 웃더니 무릎을 튕겨 가볍게 솟구치고는 그대로 허공에서 철편을 밟으며 선예를 향해 내달렸다.
남궁민의 신기에 놀란 선예의 눈동자가 커졌고, 이내 곧 그녀의 눈망울에 검광이 일었다.
“악!”
선예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날이 아닌 칼등으로 선예의 이마를 후려친 남궁민이 송현과 함께 담장을 넘으며 소리쳤다.
“그대는 이곳 인물이 아닌 듯하니, 어서 도망치시오!”
선예가 이를 바드득 갈며 일어섰을 땐 이미 남궁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 *
개소문 일행들이 갇힌 우리 앞으로 새처럼 창주가 내려앉았다.
난데없이 창주가 나타나니 개소문이 놀라 물었다.
“누구시오?”
이에 창주가 손가락을 자신의 입에 대고 소리 죽여 말하였다.
“쉿! 목소리를 낮추어라. 네가 개소문이더냐?”
“그렇소.”
“구하러 왔다. 걸을 수 있겠느냐?”
개소문이 고개를 끄덕이니, 창주는 미리 구한 열쇠로 재빨리 우리를 열기 시작하였다.
“저들도 구해주시오.”
우리 밖으로 나오며 개소문이 말하니, 창주는 머뭇거림 없이 다른 우리들도 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팽무일을 비롯한 야수, 쇼락, 공손향 등은 다리가 부러져 일어서지 못하였다.
밖으로 기어 나온 팽무일이 개소문을 올려다보며 죽는소리하였다.
“사부, 나 두고 가지 마. 두고 가면 나는 필경 죽을 거야.”
“사부가 제자를 두고 갈 리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개소문이 단호히 답하며 팽무일을 번쩍 들어 등에 없고는 야수를 우리 안에서 끌어내어 왼쪽 옆구리에 끼었다.
그리고는 다시 쇼락도 끌어내어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는 어이없어 멍하니 바라보는 창주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갈 것이냐?”
창주의 물음에 개소문이 우리 안에서 기어 나오는 공손향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공손향의 옷자락을 입으로 물어 들어 올렸다.
“뭐, 뭐야? 그 여인까지?”
공손향을 물어 올린 개소문이 고개를 끄덕이니 공손향이 땅을 바라보며 허우적거렸다.
“아무리 봐도 실성한 여인인데… 두고 가는 것은?”
그러나 개소문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고, 공손향은 뭐가 그리 좋은지 꺄르르 웃기까지 하였다.
“돌겠군. 이곳은 넓다. 잘 따라오거라.”
별수 없이 창주가 앞장서니, 업고 들고 입에 문 개소문이 잘도 따라왔다.
이때 병장기를 쥔 사병 한 무리가 개소문 일행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수상한 놈들이다! 막아라!”
“죄인들이 도주한다!”
호각이 울리고 소란스러워지자, 창주가 검을 뽑아 들고 사병들을 향해 날아갔다.
이때, 사병들의 등 뒤에서 철편이 바람을 가르더니, 피가 튀고 살점이 날리었다.
철편을 다루는 냉혹한 여인, 선예였다.
“으아악!”
갑작스럽게 등 뒤에서 나타난 선예의 공격에 당황한 사병들 속으로 뛰어든 창주가 칼춤을 추니, 이내 곧 몸과 분리된 머리들이 밤하늘 위로 날리기 시작하였다.
“도대체 저것들은 다 무엇인가?”
사병들을 제압한 선예가 개소문이 물고 업고 옆구리에 낀 사람들을 가리키며 물으니, 창주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였다.
“입에 문 저 여인은 누님이 업으시구려.”
“도대체 무엇들인지부터 답하라!”
선예의 다그침에도 창주라고 답을 지닐 리 없어 그저 손가락으로 공손향만 가리킬 뿐이었다.
별수 없이 선예가 공손향을 업으니, 그제야 입이 열린 개소문이 감사를 표하였다.
“고맙소.”
“닥치고 따라오기나 하거라!”
선예가 짜증을 부리며 날듯 담장을 뛰어넘으니, 창주와 개소문도 그 뒤를 따랐다.
담장을 넘을 때마다 사병들이 달려들었으나, 손이 자유로운 창주가 이들의 목을 베며 길을 열었다.
담장 십여 개를 넘고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관저 안에서는 여전히 비명이 울리고 있었다.
* * *
관저 밖에서 마차를 준비하고 대기하던 해권이 선예가 업고온 공손향을 놀라 바라보다가 개소문이 업고 끼고 온 팽무일과 야수, 쇼락에 한 번 더 놀라 물었다.
“어찌… 못 걷는 것인가?”
오랜만에 재회한 해권이 반가워 개소문이 머리 숙여 예를 올리고는 훌쩍 뛰어 마차 위에 올랐다.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개소문의 대답에 해권이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독고영을 구해 오지 못한 선예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검을 쓰는 놈이었는데, 그놈이 독고영을 데려갔습니다. 어서 출발이나 합시다.”
선예가 독고영을 언급하니, 개소문이 해권을 바라보았다.
해권은 그저 말없이 마차를 몰아 나갈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둠이 내린 길을 시원스럽게 마차가 내달리기 시작하였고, 이연의 관저에선 아직도 비명이 울렸다.
* * *
개소문 일행이 마차를 타고 떠나자마자 담장을 뛰어넘어 관저 밖으로 나오는 이들이 있었다.
평양을 옆구리에 낀 맹인 남궁천과 그의 둘째 동생 외팔이 남궁웅이었다.
“형님! 그 아이는 독고영이 아니라잖소. 왜 안고 다니시오?”
남궁웅이 몸을 솟구치며 물으니, 남궁천도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몸을 솟구치며 답하였다.
“이 아이가 없으면 우린 저놈에게 죽는다. 어서 도망이나 치거라!”
남궁천의 외침과 동시에 담장을 뛰어넘어 관저 밖으로 나온 이가 있었으니, 바로 천하제일검 황무문이었다.
평소 그 어떤 적과 맞서도 칼을 뽑아 든 일이 없던 황 교두의 양손에 검이 들려 있었다.
두 자루 검을 번뜩이며 황 교두가 몸을 날리니, 이내 곧 남궁천의 등이 닿을 듯하였다.
“이놈! 내게 다가오지 마라!”
남궁천이 평양을 들어 올리며 외치니, 황 교두가 급히 뒤로 몸을 날려 땅에 내려섰다.
이에, 남궁천이 겨우 한숨 돌리며 재차 몸을 솟구쳐 허공을 날듯 멀어져 갔다.
“황 교두 어서 쫓으시오!”
이때 사병들을 이끌고 관저 밖으로 나온 건성이 소리쳤으나, 제자리에 선 황 교두는 그저 고개만 저을 뿐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건성이 달려와 황 교두의 가슴팍을 걷어차며 호통을 질렀다.
“왜 안 쫓는 것이냐! 네놈이 감히 내 명을 거역하는 것이더냐!”
“이대로 쫓다간 공녀님의 목숨이 위험합니다.”
“그렇다고 안 쫓을 것이냐!”
얼굴이 시뻘게진 건성이 재차 발길질하였으나, 황 교두는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며 답하였다.
“남궁 씨 형제들은 결코 어린 소녀를 해칠 악인들이 아닙니다. 제가 쫓지만 않으면 풀어줄 것입니다. 믿으소서.”
“이놈이 감히 누구를 가르치려 드는 것이냐!”
건성이 황 교두의 뺨을 후려치니, 이때 마침 관저 밖으로 나온 세민이 달려와 건성의 앞을 막으며 외쳤다.
“형님, 황 교두의 말이 옳습니다! 저들은 결코 누님을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추격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돌려보낼 것이옵니다.”
세민마저 자신의 뜻을 거역하니 더욱 화가 치민 건성이 사병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말을 대령하라! 내가 쫓겠다.”
잠시 뒤, 사병들을 이끌고 추격에 나서며 건성이 세민에게 엄히 말하였다.
“너와 황 교두는 다녀온 뒤 처벌을 내리겠다. 그때까지 처박혀 있거라!”
건성이 사병들과 함께 멀어져가니, 세민이 황 교두를 올려다보며 말하였다.
“황 교두 갓쉰동이란 놈도 도망쳤다오. 아마도 오늘 침입한 놈들이 두 패였던 모양이오.”
“그놈들은 제가 잡아오겠나이다.”
황 교두에겐 평양을 인질로 삼은 남궁 씨 삼 형제보다 개소문 일행 추적이 수월한 모양이었다.
“애써 잡아올 필요는 없소. 끌고 오기 번거롭다면 머리만 가져와도 좋소.”
세민이 냉정히 판단을 내리니, 황 교두가 바로 명을 받아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