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주유천하(周遊天下) (19)
여느 관저들과 달리, 태원유수 이연의 관저는 군사들을 대신하여 사병들이 경계를 삼엄히 섰다.
이는 아직도 이연이 관릉집단 팔주국의 대장군으로서 그 세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따로 사병을 육성하였기 때문이다.
이연의 사병들은 하나같이 무에가 출중하였으니, 이는 훈련 교두 황무문 덕분이었다.
이연이 아무런 걱정 없이 태원을 비울 수 있었던 것도 황 교두와 사병들을 믿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에 갇힌 개소문 일행에게 음식 찌꺼기를 뿌린 사내가 기분 좋게 휘파람을 불다가 삼엄히 경계서는 사병들을 힐끔거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경계가 더욱 삼엄해 의아해진 사내가 슬그머니 사병들에게 말을 건네었다.
“뭔 일 있소?”
“몰라서 묻나?”
호랑이 수염을 기른 사병이 퉁명스럽게 답하며 음식 찌꺼기 통을 든 사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수상해 보였는지 호랑이 수염을 기른 사병이 물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어디 가고 자네 혼자 돌아다니나? 죄인들에게 음식을 주는 사람은 세 명 아니던가?”
“아, 그게 말이오. 먼저들 갔소. 나는 그 뭐냐… 우리 안에 갇힌 녀석이 말을 거는 통에 뒤쳐졌다오.”
“그래? 못 보던 얼굴인데, 자네 이름이 뭔가?”
호랑이 수염을 기른 사병이 재차 물으니, 음식 찌꺼기 통을 든 사내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답하였다.
“어득구라고 하오. 내가 죄인들에게 음식 나른 지 벌써 며칠인데, 아직도 내 얼굴 모르오? 여기서 잡일 보기 시작한 지 나흘이나 되었는데…….”
“어득구라… 고작 나흘밖에 안 되었으니, 내가 모를 수밖에… 내 말이 기분 나쁘게 들렸다면 미안하네. 아무튼 오늘 밤은 상황이 좋지 않으니, 일찍 돌아가 쉬게나.”
“아니, 뭔 일인데 그러시오?”
“오늘 밤 강적이 올 거야. 첫째 공자님과 황 교두님에게 원한이 있는 놈들인데… 무척 사납다고. 그러니 일찍 돌아가 쉬게나, 괜히 어슬렁거리다가 봉변당하지 말고.”
호랑이 수염을 기른 사내의 표정은 어득구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했다.
“아무튼 고맙소. 그럼 수고들 하시오.”
자신을 어득구라 밝힌 사내가 등을 돌려 걸음을 옮기다가 뭔가 떠올랐는지 발을 멈추고 물었다.
“그런데 말이오. 우리에 갇힌 놈이… 토굴에 갇힌 아이에 대해 묻던데, 그 아이는 밥 안 가져다줘도 되오?”
“밥 줄 필요 없어. 죽었거나 죽을 거야. 시체 썩는 냄새 풍기면 그때나 들어가 태우면 돼.”
“죽은 거요? 죽을 거요?”
“음… 죽었어. 죽은 게 분명해. 아직 살아 있을 리 없어. 그런데 왜 자꾸 관심을 갖는 겐가?”
“함께 음식 나르는 이들도 그 아이에 대해 모르고. 어느 토굴에 갇힌지도 모르기에 궁금해 묻는 게요. 한 번도 음식을 가져다준 일도 없고 해서 말이오.”
“토굴엔 원래 음식을 가져다주지 않아. 죽을 놈들 먹일 필요가 없거든. 아무튼 자네는 관심 가질 필요 없네. 어느 토굴인지는 시체 끌어내어 태울 때 알게 될 거야.”
“그래 알았소. 수고들 하시오.”
인사를 건네며 돌아서는 어득구에게 호랑이 수염을 기른 사병이 말을 남겼다.
“토굴 앞을 지키는 이들이 말하길, 며칠 전부터 시체 썩는 냄새가 풍긴다고 하더군. 아마도 내일쯤엔 시체 끌어내어 태우라는 명이 있을 터이니, 그때 어느 토굴인지 알게 될 거네.”
“시체 태우는 거 냄새가 고약해 싫은데, 묻으면 안 되는 거요?”
“썩어 문드러진 시체라 태우는 게 좋아. 아무튼 그리 알게나.”
* * *
날이 어두워진 뒤 태원유수 관저를 나온 어득구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멀리 떨어진 객잔에 들어섰다.
객잔 주인은 이미 어득구와 안면이 있는지, 이렇다 할 인사도 없었다.
어득구는 여전히 빠르고 경쾌한 보폭으로 계단을 올라 복도 끝 방으로 들어갔다.
붉을 밝힌 방 안에는 이미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있었으니, 해권과 선예, 창주였다.
“오늘 경계가 더욱 삼엄해졌소.”
자리에 앉으며 어득구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던가?”
해권의 물음에 어득구가 고개를 갸웃하며 답하였다.
“강적이 온다고 하였는데… 사병들은 다들 그 강적이 누군지 아는 눈치더이다.”
어득구의 답변에 해권이 탁자 위에 펼쳐진 그림으로 시선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강적이라…….”
해권이 바라본 것은 태원유수 이연의 관저 내부도였다.
손가락으로 관저 안쪽 깊숙이 자리한 별채를 가리키며 해권이 물었다.
“선예, 이곳에 독고영이 있는가?”
“그렇지요. 별당에 송현이란 시녀와 함께 있습니다. 별당 앞은 사병들이 지키고 있으나, 안은 그 둘뿐이지요.”
선에도 관저에서 잡일을 보고 있는지 제법 상세히 답하였다.
해권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번엔 창주에게 물었다.
“창주, 정녕 토굴에 온동이 없던가?”
“관저 내부엔 죄인을 가두는 토굴이 모두 일곱 개가 있습니다만, 그 어느 토굴에도 온동은 없는 듯합니다.”
창주가 그림에 토굴 위치를 표시하며 답하니, 해권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에, 어득구가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 들었는데 말이오. 온동은 죽은 것 같소.”
“뭐라? 죽은 것 같다라?”
“개소문이도 오늘 내게 묻더만… 아무튼 내가 잡일 보는 사람들에게 슬그머니 물었다오. 토굴에 갇힌 애가 있다던데, 그 애는 밥 안 주오? 그런데 말이오.”
“어서 말하게.”
“돌아온 답이… 죽었을 거라 하더이다.”
“뭐라?”
“그 누구도 토굴에 음식을 가져다준 적이 없다고 하더이다. 그리고 토굴에 누가 갇혀 있다면 죽었거나, 죽을 거라 하더이다.”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네.”
“그게 말이오. 경계서는 사병들에게 물었더니, 며칠 전부터 토굴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풍긴다고 하였소. 아마도 내일 시체를 끌어내어 태우게 될 거라 하더이다.”
“허… 이런… 이런…….”
해권이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저 한숨만 내쉬니, 그림을 들여다보던 선예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늘 밤 이연의 관저에 어떤 강적이 올지 모르겠으나, 오늘 밤이 기회 같습니다.”
창주도 선예의 말에 동의해 말하였다.
“경계가 삼엄하다고는 하나, 강적에게 시선이 끌리어 우리에게는 오히려 기회일 것 같습니다.”
이에, 해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 밤 개소문이와 독고영을 구한다. 준비들 하세.”
해권이 결정을 내리니 어득구가 반색하였다.
“아, 그거 잘 되었군. 음식 찌꺼기 뿌리는 것 못 할 짓이던데… 잘 되었어.”
그러나 이어진 해권의 말에 어득구는 곧 크게 낙심하고 말았다.
“어득구, 자네는 오늘 밤 나서지 말게.”
“어찌 그렇소?”
“자네는 내일 다시 관저에 들어가야 하네.”
“뭐요? 왜요? 형님, 어찌 나만?”
“온동의 시신을 태워야 하지 않는가? 재라도 가져가야 하니, 자네는 오늘 밤 나서서 얼굴을 들키면 안 되네.”
“제길… 잡일 더 해야 하네.”
어득구가 구시렁거렸으나, 해권은 시선도 주지 않고 선예와 창주에게 말하였다.
“이연의 관저에는 당금 천하제일 검이라 불리는 자가 있다. 절대로 그와 맞서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에, 선예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천하제일검은 태왕을 지키는 단공 그분 아니오?”
“단공이 중원을 떠돌던 젊은 시절 세인들은 그분을 천하제일검이라 불렀으나, 지금 세인들은 단공을 대신하여 황무문을 천하제일검이라 부른다. 그가 검을 뽑지 않아도 그를 이길 자가 없다 하니, 맞서는 일 없도록 하라.”
해권이 재차 주의를 주니, 창주와 선예가 짧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하였다.
아마도 창주와 선예는 황무문의 천하제일검 칭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 * *
교두 황무문과 이연의 장남 건성이 집무실에서 굳은 표정으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두 사내가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집무실 안으로 평양이 들어오며 방긋 웃었다.
“오라버니, 뭐가 그리 근심이시오?”
“근심 따위는 없다.”
“오라버니 얼굴에 근심이라 써 있는데도 없다 하시오?”
평양이 앙증맞은 눈을 빛내며 곁에 앉으니, 건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밤이다. 돌아다니지 말거라. 오늘 밤 남궁 씨 형제가 우리 둘을 노리고 다시 올 것이다.”
“오라버니도 참… 그깟 것들이 뭐가 두렵다고 방에 웅크려 숨으란 말이에요? 우리에게는 황 교두가 있잖아요.”
“얘야, 황 교두가 아무리 뛰어나다 하여도 관저 모두를 그에게 맡기고 지키라 할 수는 없단다. 남궁 씨 형제는 이제 셋이 되었다고 하니, 이전보다 강해졌을 것이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니, 어서 네 처소로 돌아가 있거라.”
건성이 엄히 말하니, 평양이 입을 뾰로통 내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양이 집무실 밖으로 나가자, 건성이 황 교두에게 시선을 건네며 말하였다.
“곧 달이 머리 위로 오를 것이네.”
“곧장 우리를 노리고 오리라 생각됩니다.”
황 교두가 담담히 말하니, 건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존심이 강한 자들이다. 우리가 그 두 형제의 눈을 뽑고, 팔을 잘랐으니 곧장 이곳으로 오겠지.”
“첫째 공자께서는 심려치 마십시오. 소인이 있는 한, 그 누구도 감히 허튼짓할 수 없나이다.”
황 교두가 무심한 표정으로 장담하니, 건성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 *
건성과 황 교두가 자리한 집무실에서 나온 평양은 곧장 별채로 향하였다.
“독고영이가 잘 있는지 보러 가야겠구나. 갇혀만 지내는 것도 고역일 거야.”
평양은 평소 독고영과 대화는커녕 가벼운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었다.
독고영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평양이었으나, 피눈물 흘리는 온동의 몰골에 혼절하던 모습이 안쓰러웠던 모양이었다.
“그것들은 우리의 적이고, 도망친 죄인이었어. 영이도 그 사실을 이해해야 하는데… 아직 어려서… 어쨌든 영이는 고구려인이 아니고 우리 일가이니 언젠가는 이해하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별채로 향하던 평양의 걸음이 멈추었다.
별채 앞을 지키고 있어야 할 사병들이 모두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뭐지?”
사병들의 몸에 상처는 보이지 않았고, 혈흔도 없었다.
불길한 마음에 살며시 몸을 숙여 누워 있는 사병의 코끝에 손가락을 가져가 보았다.
잠을 자고 있는지 숨결이 느껴졌다.
“기절한 거야? 자는 거야?”
소리 죽여 중얼거리는 평양의 등 뒤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기절하여 자는 것이다.”
낮고 중후한 음성에 평양이 놀라 획 돌아보았다.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맹인이 쇠 지팡이로 땅을 짚고 서 있었다.
평양은 이 사내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보았으나, 모르는 척 순진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 누… 구세요?”
“그러는 너는 누구냐? 네가 혹시 독고영이더냐?”
맹인 사내의 물음에 평양이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소리를 지르면 저자가 나를 해칠 거야. 일단 안심시키고 잡아야 해.’
영리한 평양이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순진한 목소리로 답하였다.
“네… 제가 독고영인데… 누구세요?”
“그래? 정말 다행이로구나. 나는 남궁민의 큰형되는 남궁천이라 한단다. 아가, 나와 함께 가자꾸나. 내 아우가 네 걱정이 많단다. 너를 지키지 못하였다고 무척이나 자책하였단다.”
“나, 남… 남궁민이요?”
“그래, 기억하느냐? 팽가장에서 함께 사지를 헤맸다고 하던데… 오늘 내 아우도 너를 구하기 위하여 이곳에 와 있으니, 곧 만나게 될 것이다.”
남궁천이 남궁민을 언급하며 안심시켰으나, 독고영이라 사칭한 평양으로선 호랑이 등에 탄 격이었다.
‘큰일이다. 잠시 위기를 모면하고 속여 잡으려 했더니, 오히려 내가 들통나 경을 치르게 생겼구나.’
평양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으나, 앞을 볼 수 없는 남궁천은 여전히 평양을 독고영이라 생각하여 말하였다.
“네가 여기 있는 줄도 모르고 셋째가 저 안으로 들어가 길이 엇갈렸구나. 우리 함께 안으로 들어가 셋째를 만나도록 하자.”
남궁천이 손을 내밀어 부드럽게 평양의 어깨를 쥐고는 별채 안으로 발을 옮겼다.
이때, 멀리 건성과 황 교두가 자리한 집무실 방향에서 고함이 일었다.
“강적이다!”
“남궁웅이 왔다!”
사병들의 외침과 함께 요란한 발소리가 집무실로 끝없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