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주유천하(周遊天下) (17)
강철도 자를 듯한 내력이 황의 사내의 손날에 실렸다.
이때, 객잔 문 앞에서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죽이지 마라.”
이에, 황의 사내가 급히 내력을 거두고 완력으로만 개소문의 목을 후려쳤다.
푹!
크게 몸을 휘청였으나 개소문의 두 손날은 여전히 세민의 얼굴과 가슴팍을 후려쳤다.
이미 의식을 잃은 세민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개소문의 가슴에 기댄 채 쓰러졌다.
개소문도 황의 사내가 연이어 날린 손날에 의식을 잃고 세민의 몸을 덮으며 쓰러졌다.
“오라버니!”
평양이 객잔 안으로 들어온 젊은 사내를 향해 소리쳤다.
“조용히 하라.”
젊은 사내는 평양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건네고는 쓰러진 세민과 개소문에게 다가가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망신이…….”
“오라버니, 우리가… 죄인들을 잡았어요.”
평양이 의식을 잃은 개소문 일행을 가리키며 젊은 사내에게 말하였다.
젊은 사내는 이연을 대신하여 태원을 다스리던 장자 이건성이었다.
“잡았다? 맞아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구나.”
건성이 세민의 몸을 덮은 개소문의 몸을 발로 밀어 걷어내며 말하였다.
세민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입술과 눈의 혈관이 터져 피로 물들어 있었다.
“태원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내가 다스리고 있다. 헌데 너희는 어찌 나와 상의도 없이 일을 벌였느냐?”
건성이 몸을 돌려 평양을 노려보며 엄히 꾸짖었다.
“우리가 충분히 잡을 수 있었어요. 고작 이런 죄인들 따위 잡는 것은 오라버니에게 알리지 않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리석은 것! 이놈들은 대군 속을 누비며 도망친 놈들이다. 헌데 고작 너희가 상대할 수 있다 생각한 것이더냐?”
“잡았잖아요!”
평양이 버럭 소리 지르며 대드니, 건성이 다가와 평양의 뺨을 후려쳤다.
쫙!
평양의 조그만 몸이 휘청이다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이까짓 죄인 따위 잡은들, 너희의 몸이 상한다면 그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놈들 백만 명보다 아버지께선 너희 둘이 소중하시다. 아버지를 슬프게 하지 마라.”
엄히 말한 건성이 황의 사내에게 다가가 대뜸 가슴팍을 발로 걷어찼다.
강한 타격에도 황의 사내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황 교두! 너는 어찌 아이들과 어울려 이런 장난질이나 하는 것인가? 그대의 무공을 고작 애들 놀이에나 쓸 생각인가?”
건성의 호통에도 황의 사내는 대답 없이 그저 묵묵히 서 있을 따름이었다.
건성은 황의 사내를 잠시 노려보다가 세민을 번쩍 안아 들었다.
“무엇들 하느냐? 이놈들을 묶고 압송하라! 세민이는 내가 데려가겠다.”
건성이 세민을 안고 객잔 밖으로 나가니, 사내들이 달려들어 개소문 일행을 포박하기 시작하였다.
* * *
온동의 의식이 돌아왔을 땐 이미 쇠사슬에 묶여 어두운 토굴에 갇힌 뒤였다.
철컹, 철컹.
온동이 몸을 움직이니, 쇠사슬이 출렁이며 쇳소리를 냈다.
쇠사슬의 끝은 벽에 이어져 있는 듯하였다.
“형님! 형님!”
한 치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을 향해 온동이 소리쳤다.
“시끄러!”
어둠 저편에서 팽무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서 쇼락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온동, 일어났는가?”
쇼락의 목소리와 함께 쇠사슬이 내는 쇳소리가 온동의 귀를 자극했다.
쇼락과 팽무일도 쇠사슬에 묶여 있는 듯하였다.
“아이. 깨어났군. 나도. 잘 있고… 저 끝에 공손향. 님도 있다.”
야수도 의식을 찾았는지 온동에게 말하였다.
온동이 내심 안심하며 다시 개소문을 찾았다.
“다, 다들 무사하신 거죠? 그런데, 개소문 형님은? 형님! 형님!”
그러나, 개소문의 대답은 없었다.
“혀, 형님…….”
온동이 당황하여 어둠 속을 두리번거리며 귀를 기울였다.
“그. 아이. 소리가 없다. 아직. 나도 못 들었다.”
야수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으나, 온동은 더욱 정신을 집중하여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공손향이 내는 숨소리, 팽무일이 내는 한숨 소리, 쇼락과 야수의 심장 박동 소리 그리고 미세하지만 또 다른 심장 박동 소리가 온동의 귀에 전해졌다.
어둠 속 저 멀리, 야수의 우측 어둠 속에서 미세한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거기! 거기에 형님이 있어요! 거기에 있다고요! 야수님 우측에 형님이 있어요!”
온동이 기뻐 소리쳤으나,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기에, 개소문이를 살필 수 없었다.
“형님! 형님!”
온동이 애타게 불러보았지만, 개소문이는 조금의 의식도 돌아오지 않은 듯 대답이 없었다.
* * *
어둠 속에서 며칠을 보냈는지 알 수도 없었다.
식사는 주어지지 않았고, 대소변도 가릴 수 없었다.
어두운 토굴 안은 피비린내와 지릿한 내음으로 가득하였다.
개소문은 아직도 미세한 심장 박동 소리만으로 살아 있음을 알릴 뿐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혀, 형님…….”
배고픔과 탈수로 앉아 있을 기력조차 없는 온동이 개소문의 심장 박동 소리를 향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때, 눈부신 빛이 토굴 안으로 밀려 들어오며, 여자아이의 맑고 높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열흘이 지났다. 살아 있는지 살펴보거라!”
여자아이의 명을 받은 사내들이 횃불을 들고 토굴 안으로 들어오더니, 구역질을 했다.
여자아이도 뒤따라 들어오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헛구역질을 하였다.
“지독한 악취로다. 이것들은 사람이 아니고 짐승들이었구나.”
횃불에 일렁이는 여자아이의 얼굴에 조롱이 가득하였다.
온동은 자신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에 부끄러우면서도 횃불에 환하게 빛나는 여자아이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객잔에서 세민과 함께 사내들을 이끌고 자신들을 공격한 평양이었다.
꽃보다 화사한 평양의 아름다움에 취한 온동을 누군가 발로 걷어찼다.
“이놈입니다!”
아마도 온동을 찾았던 모양이었다.
“이 조그만 놈이 아버지와 공손성 총관의 대군 속에서 도망친 그놈이란 말이지?”
평양이 다가와 횃불로 온동의 얼굴을 비추며 물었다.
“그러하옵니다.”
쓰러진 온동의 얼굴을 밟으며 사내가 답하니, 평양이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하였다.
“모두 끌어내라! 오늘 벌을 내릴 것이다!”
평양이 앞서 나가니, 토굴 곳곳에서 쇠사슬을 잡아끄는 소리가 일기 시작하였다.
허기와 탈수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이들을 사내들은 쇠사슬을 잡아당기며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토굴 밖으로 나오니, 너무도 눈 부신 햇살에 온동은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였다.
함께 끌려 나온 야수와 팽무일, 쇼락, 공손향은 반쯤 의식이 없는지 그저 쓰러져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끌려 나온 개소문은 여전히 심장 박동 소리만으로 살아 있음을 알릴 뿐이었기에, 온동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너무도 찬란하고 눈 부신 햇살에 오히려 눈을 뜨지 못한 온동의 귀로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놈의 눈을 뽑고, 저놈은 일으켜 세우라!”
태원유수 이연의 차남 이세민이었다.
명을 받은 사내들이 눈도 뜨지 못하는 온동을 붙잡아 앉히고, 의식 없는 개소문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개소문이는 축 늘어져 두 발로 서지 못하였다.
“땅에 기둥을 박고, 기둥에 묶어 세워라!”
세민의 명에 사내들이 커다란 나무 기둥을 옮겨와 땅에 박고는 개소문이를 묶기 시작하였다.
눈도 뜨지 못한 온동은 개소문이 묶이는 소리에 집중하며 슬그머니 바닥을 더듬었다.
엄지 손톱만 한 작은 돌멩이가 손끝에 닿았다.
살며시 손가락 끝으로 돌멩이를 끌어 손에 감춘 온동이 다시 주위 소리에 집중하였다.
“황 교두! 죄인이 도망치면 우리가 어찌하였소?”
평양의 고운 음성이 들려왔다.
“눈을 뽑았습니다.”
황 교두의 갈라진 음성이 온동의 귀속에 파고들었다.
평양의 물음이 다시 이어졌다.
“그렇다면, 감히 내 동생을 때린 놈은 어찌해야 하오?”
이에, 황 교두의 대답이 이어졌다.
“일전에도 첫째 공자를 때린 놈의 오른팔을 잘랐었지요. 이놈은 두 손으로 때렸으니, 두 팔을 잘라야겠군요.”
황 교두가 기둥에 묶인 개소문이를 힐끔 쳐다보며 답하니, 평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라버니를 때렸던 남궁 씨 형제 중 둘째의 팔을 황 교두가 잘랐었지. 남궁 씨 형제 중 첫째의 눈도 뽑고 말이야. 이놈의 두 팔도 황 교두가 직접 자르시오.”
평양의 매서운 명에 세민이 고개를 저었다.
“누님, 황 교두가 저놈의 팔을 자르기 전에, 저놈과 다시 겨루고 싶소.”
의식도 없어 홀로 서지도 못하는 개소문과 겨루고 싶다고 말하니, 평양이 빙그레 웃었다.
“첫째 오라버니께서 허락하셨으니, 이놈의 눈은 뽑고 저놈의 두 팔은 자른다. 그러나 그전에 세민이가 저놈과 겨루기를 원하니, 잠시 시간을 내어주겠다.”
이에 세민이 흡족해 미소지었다.
아직도 세민의 얼굴과 입술은 퉁퉁 부은 상태였다.
“하오면, 이것들은 어찌하오리까?”
황 교두가 팽무일과 야수, 쇼락, 공손향을 차례대로 가리키며 물었다.
“저것들은 행군원수부 한왕 전하에게 보낼 것이나, 지금은 전하께서 출병으로 바쁘실 터이니, 고구려 정벌 후 돌아오시면 아버지께서 손수 한왕 전하께 승전 선물로 바치실 것이다. 사지가 멀쩡해야 하니, 다리만 부러뜨리시오.”
맑고 고운 음성과 달리 너무도 차갑고 매서운 명령이었다.
“둘째 공자의 겨룸 이후 하오리까?”
황 교두의 물음에 평양이 잘라 말하였다.
“고작 다리 부러뜨리는데 시간 끌 것은 없소. 지금 하시오.”
평양의 명에 황 교두가 의식 없는 팽무일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땅을 밟을 때마다 가공할 내력에 발자국이 깊게 새겨졌다.
조금씩 더 내력을 끌어올리며 팽무일 앞에 선 황 교두가 높이 발을 치켜올리고는 그대로 팽무일의 오른쪽 다리를 밟았다.
뚝!
정강이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리고, 의식 없는 팽무일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으악!”
또다시 황 교두의 발이 팽무일의 왼쪽 다리마저 밟아 부러뜨렸다.
“으아악!”
길게 비명을 내지른 팽무일이 의식을 잃자, 황 교두의 걸음이 야수에게로 향하였다.
어느새 의식을 찾은 야수가 누워 황 교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 부신 햇살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야수가 으르렁거렸다.
“죽… 일 것이다.”
“남궁 씨 형제들도 내게 그런 말을 했으나, 찾아온 일도 없다.”
황 교두가 피식 웃더니, 야수의 오른쪽 다리를 힘껏 밟았다.
“끅.”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은 야수가 햇살에 가려진 황 교두를 올려다보았다.
이에, 평양이 냉소하며 소리쳤다.
“의식도 좋고, 참을성도 대단한 놈이로군. 확실히 밟아 비명을 지르게 하시오!”
명을 따라 황 교두의 발이 더욱 내력을 실어 야수의 왼쪽 다리를 짓이겼다.
“끄…….”
입속으로 비명을 삼키며 야수가 햇살에 가려진 황 교두를 노려보았다.
토굴 속에 갇혀 지내는 동안 상한 시력이 차츰 회복되는지, 야수의 동공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었다.
황 교두는 야수를 힐끔 내려다보고는 여전히 의식 없는 쇼락과 공손향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어지는 비명에 온동이 몸을 부르를 떨며 손끝으로 또 다른 돌멩이를 끌어와 살며시 쥐었다.
‘눈은 보이지 않아. 하지만 소리에 집중하면 돼. 형님만이라도 도망치게 해야 해.’
공손향의 다리마저 황 교두가 부러뜨리자, 기다렸다는 듯 세민이 개소문을 향해 발을 옮겼다.
“잠깐!”
발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온동이 소리쳤다.
“나를 불렀는가?”
세민이 의아해 물으니, 기다렸다는 듯 온동이 답하였다.
“아무리 어려도 사내라면 사리분간은 할 것이다!”
“뭐라?”
“의식도 없고, 몸도 묶인 상대와 겨룬다니, 개도 들으면 비웃을 일이다. 부끄럽지 않은가? 이렇듯 수하들이 많은데 뭐가 두려워 정정당당히 겨루지 못하는가?”
온동의 물음에 세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물을 가져와 이놈에게 뿌려 의식이 돌아오게 하라! 나는 의식이 돌아온 놈과 겨루겠노라!”
자존심 강한 세민이 명하니, 이내 곧 개소문이에게 물을 뿌리는 소리가 온동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기동에서 풀려난 개소문이 천천히 의식을 찾으며 주위를 살피기 시작하였다.
“아우… 제자… 야수…….”
토굴에 갇힌 동안 내내 의식 없이 눈을 감고 있었던 덕분에 개소문이는 온동보다 시력이 먼저 돌아오고 있었다.
처참한 몰골로 쓰러진 팽무일과 야수, 쇼락, 공손향에게서 온동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긴 개소문이 그나마 멀쩡한 온동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아우가… 무사하여, 다행… 이로구나.”
탈수와 허기 속에도 개소문이는 밝은 태양 아래 두 발로 당당히 서 있었다.
이제 겨우 의식이 돌아왔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강인한 체력이었다.
그리고 이를 비웃으며 세민이 걸음을 옮기더니, 빠르게 주먹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