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주유천하(周遊天下) (16)
기분이 좋아진 팽무일이 고기를 입에 욱여넣으며 우걱우걱 씹으니, 그 소리에 온동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조그만 것이… 어른 식사하시는데 인상을?”
팽무일이 씹던 고기를 꿀꺽 삼키고는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온동은 오히려 손가락을 하나 입에 대고 소리를 낮추라 시늉하였다.
“쉿!”
온동의 행동에 팽무일도 뭔가 수상한 낌새를 느껴 살며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창 식사에 열중하던 야수도 슬그머니 손에 든 고기를 내려놓았고, 쇼락은 공손향의 손에서 술잔을 떼어 탁자 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개소문이도 씹던 고기를 꿀꺽 삼키며 소리 죽여 물었다.
“아우야, 뭔 일이냐?”
“이 객잔에 우리 말고 더 있습니다.”
온동이 수상한 소리에 집중하며 답하였다.
“객잔에 우리 말고 누가 더 있는 게 뭐가 이상해?”
팽무일이 온동에게 바짝 붙어 이견을 내었으나, 그 역시도 소리를 낮춰 말하고 있었다.
“쇳소리가 들리고… 여러 사람이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요.”
온동이 최대한 소리에 집중하며 나지막이 답하니, 눈치 빠른 팽무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줄곧, 아무… 말도 없다고? 제길… 매복이로군. 헌데, 어찌 알고?”
키가 작은 팽무일이 창밖을 내다보기 위하여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다리의 힘이 풀려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헉!”
팽무일이 신음을 내뱉자, 야수가 급히 입속의 고기를 내뱉으며 나지막이 말하였다.
“퉤! 음식에… 약을. 탔다.”
야수의 눈빛이 풀리고 있었다.
그 순간, 공손향의 몸이 기울어 쇼락에게 기댄 채 혼절하였고, 영문도 모른 채 쇼락은 희미해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으며 온동에게 물었다.
“온동, 음식이 이상하다.”
“몽환약이에요. 음식에 약을 탔습니다.”
온동이 빠르고 낮게 답하였으나, 쇼락은 온동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한 채 의식을 잃었다.
이에 야수가 급히 단전에 손을 모으고 말하였다.
“운기. 조식… 하라.”
팽무일도 급히 호흡을 가다듬고 몸에 들어온 약 기운을 몰아내고자 애썼다.
개소문이도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껴 이를 악물고 객잔 주인이 들어간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감히 누구냐! 썩 나오너라!”
부엌에서 객잔 주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이고! 술 가져갑니다요. 기다리십시오! 하하하.”
꽤 즐거운 듯한 음성이었다.
팽무일이 이를 갈며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망할 자식이!”
팽무일의 욕설에 객잔 주인이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들고 나오며 물었다.
“아니 왜 욕을 하시고… 지랄이신가요?”
객잔 주인의 뒤로 십여 명의 사내들이 제각기 병장기를 지니고 따랐으며, 객잔 이층에서도 십여 명의 사내들이 병장기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고작… 너희뿐이더냐?”
개소문이 사내들을 훑어보며 물었다.
다리의 힘이 풀려 휘청였으나, 아직 정신은 또렷했다.
“이 공자께선 고기를 조금 드셨나 보네. 맛있을 텐데 많이 드시지.”
객잔 주인이 히죽 웃으며 말하니, 격분한 개소문이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벌떡 일어섰다.
“감히… 무엇 하는 놈이길래 약을 탄 것이더냐?”
개소문이 제법 우렁차게 물으니, 객잔 주인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몽환약에 취하고도… 일어서다니, 과연… 헛소문은 아니었군요. 갓쉰동 나리.”
객잔 주인은 이미 개소문이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 나를 알고 있었느냐?”
개소문이 놀라 물으니, 객잔 밖에서 여자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곧 웃음소리가 안으로 이어졌다.
“호호호, 정말 대단하다. 세민이 너는 어찌 이리 영리하단 말이냐? 호호호.”
허리에 칼을 차고, 남자아이처럼 옷을 입었으나, 얼굴만큼은 꽃보다 화사한 소녀였다.
그리고 소녀의 곁에 제법 의젓하게 차려입은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바로 이연의 차남 세민이었다.
이 두 아이의 뒤로 십여 명의 사내들이 병장기를 지닌 채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세민이 온동을 힐끔 쳐다보고는 웃으며 말하였다.
“평양 누님, 저 갓쉰동이란 놈이 온동을 구해 달아났다고 하였으니, 필경! 영이도 구하러 올 것 같았지요.”
“그래? 제법 의리가 있는 놈들이구나. 허나, 이를 어쩌나… 이렇게 잡혀서야, 영이를 구하기는커녕 목이 잘리게 생겼구나. 불쌍도 하여라.”
평양이라 불린 소녀가 조롱하듯 말하며 깔깔깔 웃었다.
수의 태원유수 이연은 북주의 장수였으며 대를 이어 당국공(唐國公)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이는 그의 모친이 수의 독고황후의 언니였기 때문이었다.
이연의 부인 두 씨 역시, 부친이 북주의 장수였으며 북주 무제가 그녀의 외삼촌이었으니, 권세가 대를 이어 내려올 정도로 막강한 집안이었다.
그리고, 이들에겐 삼남 일녀가 있었으니, 첫째는 이건성으로 올해 스물한 살이 되는 청년 장수였다.
이연이 공손성과 함께 돌궐의 침공을 막기 위해 자리를 비운 태원을 이건성이 제법 의젓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둘째는 이세민으로 정월생이기에 올해 열한 살이 된 소년이었는데, 어려서부터 무예에 관심이 깊고 병서를 손에서 놓지 않아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이들과 달리, 셋째 이원길은 아직 어리어 그리 주목받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세민보다 한 살 위 누이가 있었으니,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자아이처럼 호승심도 강할뿐더러, 칼을 차고 말 달리기를 좋아하였다.
독고황후는 이 활달한 소녀를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하여 무척 아끼고 사랑을 주며 평양공주란 칭호마저 내려주었다.
“내가 온동이로구나. 도망간 죄인은… 눈을 뽑는 것이 법도이니, 서글퍼 마라.”
평양이 온동을 가리키며 배시시 웃었다.
무척이나 곱고 화사한 웃음이었으나, 웃음에 담긴 의미는 너무도 잔악하였다.
“뭐라? 누구도 내 아우에게 손대지 못한다!”
개소문이 어질어질한 의식을 간신히 부여잡고 당당히 소리쳤다.
“아… 이런, 이런… 약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요. 송구하옵니다.”
객잔 주인이 두 손을 맞잡고 평양에게 머리 숙여 말하였다.
“이만하면 됐다. 수고했느니라.”
평양이 품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내 던지니, 객잔 주인이 냉큼 받아 품에 넣고는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자, 그럼… 데려들 가자꾸나.”
평양이 아직도 자신들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는 개소문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등을 돌리며 말하니, 사내들이 포박하기 위하여 개소문 일행에게 우르르 달려들었다.
이때, 간신히 몸을 세운 온동이 벼락 치듯 소리치며 탁자 위 젓가락들을 쥐어 날렸다.
“오지 마!”
온동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달려들던 사내들이 어깨와 팔에 젓가락이 박혀 나뒹굴었다.
보잘것없는 젓가락에 상당한 위력이 실려 건장한 체구의 사내들을 날린 것이다.
“오호라! 네놈의 솜씨가 보통은 아니로구나.”
평양이 호기심을 보이며 말하니, 세민이 칼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감히 도망친 죄인이 저항까지 하다니. 네놈의 눈이 뽑히기 전에 천지 분간 못하는 손목부터 베겠노라.”
열한 살 아이치고는 제법 다부진 골격이었고, 빠르게 움직이는 보폭에서 충실히 무예를 갈고닦은 흔적이 보였다.
온동이 다시 손을 뻗어 술잔을 세민에게 날리니, 평양의 뒤에 서 있던 황의 사내가 살짝 소매를 털었다.
텅!
황의 사내의 소매 속에선 그 어떤 것도 날아들지 않았으나, 온동이 날린 술잔은 벽에 부딪친 듯 허공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아니…….”
온동의 얼굴색이 창백해지며 놀라 멍하니 황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단 한 차례도 실패한 적 없던 비검술이 처음으로 거대한 벽에 막혀 정신적 충격이 상당해 보였다.
“황 교두 고맙소!”
세민이 황의 사내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그대로 온동을 향해 내달렸다.
세민의 칼날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온동의 가냘픈 손목을 노리고 있었다.
이때, 개소문이 굳은 두 다리를 억지로 떼어내며 천둥 치듯 외쳤다.
“안 된다 하였다!”
온동의 손목을 내리치던 세민의 얼굴로 거센 바람이 일더니,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몽환약에 취하여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개소문이 무작정 몸을 날려 머리로 세민의 얼굴을 들이받은 것이다.
“세민아!”
평양이 놀라 외치니, 세민이 급히 바닥을 굴러 개소문에게서 멀리 떨어진 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오른쪽 뺨과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이 망할 놈이!”
세민이 씩씩거리며 개소문을 노려보니, 야수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비록 약에 취해 있으나, 개소문과 온동 두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의식은 남아 있는 듯하였다.
“일어나지 마. 운기조식부터 하라고.”
야수를 부르던 팽무일은 운기조식하던 자세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야수가 팽무일을 힐끔 돌아보고는 비틀비틀 앞으로 나왔다.
허리춤엔 두 자루 박도가 있었으나, 야수의 두 손은 박도로 향하지 않았다.
아마도 의식이 희미해져 이미 박도를 쥐고 있다 여기는 듯하였다.
마치 양손에 박도를 쥔 듯 자세를 취하는 야수를 바라보며 평양이 깔깔 웃었다.
“저것은 또 뭐 하는 짓인가? 맨손으로 춤이라도 추겠다는 것인가? 호호호.”
맑고 고운 평양의 음성에 온동의 시선이 이끌렸다.
‘저리도 고운 아이가… 왜 이리도…….’
온동은 평양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온동!”
개소문이 휘청휘청 몸을 움직여 온동에게 다가가니, 세민이 개소문의 등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제대로 피하지도 못하는 개소문이를 야수가 밀어내고는 맨손으로 세민의 칼날에 맞섰다.
“안. 돼…….”
칼날을 쥔 야수의 왼손에서 굵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안 된다고!”
야수가 포효하듯 외치며 세민을 칼과 함께 집어 던졌다.
쿵!
또다시 세민이 바닥에 처박히니, 못마땅한 평양이 눈살을 찌푸렸다.
“뭣들 하는가? 당장 포박하라!”
평양의 명에 사내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그만!”
세민이 몸을 일으켜 세우며 소리쳐 제지하였다.
“저놈이 나의 얼굴을 때려 쓰러뜨렸고, 이놈이 나를 집어 던져 쓰러뜨렸다. 나도 대장부로서 되갚아 줘야 하지 않겠는가?”
칼을 고쳐 쥔 세민이 눈짓으로 물러나라 명하니, 사내들이 한 발 물러난 채 언제든 달려들 준비를 하였다.
“우선 너부터다!”
세민이 몸도 가누지 못하는 야수를 향해 빠르게 보폭을 좁히며 칼날을 들이대었다.
야수는 이미 의식을 잃은 듯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볼 뿐이었다.
“야수!”
개소문이 전신의 힘을 쥐어짜 몸을 솟구치더니, 수박 기술의 땅 밟기와 도끼질을 동시에 펼쳤다.
개소문의 발이 땅에 닿는 즉시 다시 튀어 오르고는 두 손바닥이 세민의 얼굴과 가슴팍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으아악!”
피할 새도 없이 날아드는 개소문의 연속된 공격에 세민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개소문의 땅 밟기와 손날 도끼질은 멈추지 않고 계속 세민을 쫓았다.
“으아악!”
세민의 얼굴이 퉁퉁 붓고, 입술이 터진 입 안에서 피가 튀었다.
뒤로 물러날수록 더욱 빠르게 따라붙으며 사정없이 퍼붓는 개소문의 공격에 세민의 의식이 아득해져만 갔다.
‘이대로… 맞아 죽을 것만… 같다.’
어느새 세민의 몸은 벽에 닿아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너무도 강한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져 이젠 비명도 못 지르고 그저 퍼붓는 공격에 몸만 내맡긴 세민의 고개가 축 늘어졌다.
그러나, 개소문의 계속된 공격에 앞으로 쓰러질 수도 없었다.
세민의 처참한 몰골에 평양이 비명을 지르고, 사내들이 달려들어 개소문의 몸을 잡아끌었으나, 성난 소와 같은 개소문의 완력에 질질 끌려갈 뿐이었다.
“이 고얀 놈!”
평양의 등 뒤에 서 있던 황의 사내가 호통을 치고는 그대로 몸을 날려 개소문의 정수리를 두 주먹으로 내리쳤다.
쾅!
바위도 부술 듯한 타격음이 객잔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개소문의 두 손날은 여전히 만신창이가 된 세민의 얼굴과 가슴을 후려치고 있었다.
“당장 죽여요!”
평양이 급히 소리치자, 황의 사내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개소문의 목을 노린 황의 사내의 손날이 바람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