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주유천하(周遊天下) (14)
온동의 시선도 외다리 사내의 오른쪽 허리춤에 매인 금강대도로 향했다.
그리고는 강보에 싸여 외팔이 사내의 등에 업힌 갓난아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금강대도… 그렇다면… 팽 장주님의 딸 팽운이 분명해.’
금강대도를 알아본 온동이 외팔이 사내를 향해 발을 옮기려던 순간, 팽무일의 손이 온동의 입을 막았다.
“쉿… 소리 내지도, 움직이지도 마.”
팽무일이 온동에게 바짝 붙어 나지막이 속삭였다.
온동의 입을 막은 팽무일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고, 팽무일의 민머리에선 굵은 땀방울이 흘렀다.
팽무일이 바짝 긴장했음을 영리한 온동이 즉시 깨닫고 맹인과 외팔이 사내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두 사내 모두 길게 풀어헤친 머리카락 때문에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남루한 옷차림과 꾀죄죄한 몰골에서 악취마저 풍기니, 맹인 사내가 비키라 말하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이 슬금슬금 거리를 두었다.
팽무일도 온동의 입을 막고 다른 손으로는 개소문이를 잡아끌며 두 사내들과 거리를 벌렸다.
팽무일의 손에 이끌려 발을 옮기면서도 온동은 내심 반가워 외팔이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남궁민 대협의 형님되시는 분이신가?’
개소문도 온동의 시선을 따라 외팔이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자가 노가장에서 금강대도와 팽 장주의 여식을 데려간 외팔이 사내로군. 오늘 밤 이곳으로 악부동 일행을 부른 것도 이자일 터… 헌데, 나의 제자 팽무일은 왜 이리 떨고 있는 것인가?’
자신을 잡아끄는 팽무일의 손이 떨리고 있어 개소문이 무척 의아해하였다.
맹인과 외팔이 사내가 군중 속을 헤치며 천천히 앞으로 나가는 동안, 성미 급한 악부동은 미리 자축하고 있었다.
“달이 이렇게 크고 높이 떴음에도 오지 않는 것은 아마도 겁을 먹고 내뺐음일 게야. 하하하.”
자신들이 두려워 오지 않는다고 악부동이 웃으니, 양지가 거들었다.
“남궁세가의 명성은 이미 이 잿더미가 된 장원과 함께 무너져 내린 게지. 고작 두 형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나. 공연히 나서다가 옥에 갇힌 동생 꼴만 되겠지. 하하하.”
이에, 병장기를 지닌 삼백여 명의 사내들이 제각각 한 마디씩 남궁세가를 조롱하며 웃으니, 무척이나 시끌벅적하였다.
이때 마침내 맹인 사내와 외팔이 사내가 군중 속을 헤치며 앞으로 나오니, 환도를 쥔 사내가 앞을 막았다.
“눈도 먼 놈이 무엇을 구경하겠다고 앞으로 나오느냐? 위험하니 더는 나오지 마라.”
그러나 맹인 사내는 여전히 쇠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니, 이놈이 눈만 먼 게 아니라 귀도 먹은 것이냐?”
환도를 뽑아 들고 사내가 윽박지르던 그 순간.
맹인 사내가 쇠 지팡이 속에서 검을 쓱 뽑아내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람을 갈랐다.
달빛과 횃불에 검날이 빛나고 환도를 뽑아 든 사내의 머리가 잘려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머리를 잃은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허공에 솟구쳤다.
“무엇 하는 놈들이냐?”
악부동이 놀라 소리치고, 겁에 질린 군중들이 비명을 지르며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삼백여 명의 사내들이 저마다 병장기를 뽑아 들고 맹인과 외팔이 사내을 겨누었다.
병장기들이 일으킨 쇳소리에 맹인 사내가 귀를 쫑긋하며 담담히 말하였다.
“누군지 몰라서 묻는 겐가? 그대에게 초청장을 보낸 악살이다.”
내력이 실린 중후한 음성이 매우 묵직하게 주변 공기마저 내리누르는 듯하였다.
대단한 위압감이었다.
“장님이? 네가 악살이라 하였느냐? 네가 정녕 남궁천이란 말이더냐?”
악부동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남궁천과 남궁웅이 셋째 남궁민에게 장주를 넘기고 남궁을 떠난 지 십 년이 지났고, 맹인과 외팔이로 변하였으니 남궁 일대 백성들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저, 장님이… 첫째 공자님이라고?”
“설마… 그 위풍당당했던 그 분일리 가… 없어.”
“봉사가 첫째 공자님이시면… 외팔이가 둘째 공자님이란 말이야? 등에 업은 저 아이는 또 뭐야?”
자신들을 향해 웅성거리는 소리에 외팔이 사내는 무심했으나, 소리에 민감한 듯 맹인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보낸 초청장을 받은 이들은 모두 왔는가?”
낮고 중후한 음성이 맹인 사내의 입을 통해 울려 퍼지니, 내력이 약한 군중들은 속이 울렁거려 더욱 뒤로 물러났다.
이에, 악부동이 단창을 단단히 쥐고 앞으로 나오며 맞섰다.
“그래, 네놈들 몰골이 매우 가여우나, 죽고자 왔으니 죽여야겠지. 눈먼 놈이 먼저 죽겠느냐? 외팔이가 먼저 죽겠느냐?”
악부동의 조롱에 호응해 여기저기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맹인 사내의 신경을 자극하였다.
“소리가… 너무 많구나. 모두 몇이더냐?”
웃음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귀를 쫑긋하며 맹인 사내가 물었다.
“우리가 몇인지도 모르면서 어찌 우리를 대적하겠다는 것이더냐? 옛다! 이거나 피해 보거라!”
근처에 있던 사내가 조롱하며 횃불을 던졌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맹인 사내의 얼굴에 닿으려던 순간, 검광이 빛나고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툭, 툭.
횃불이 바닥에 떨어지고, 횃불을 던진 사내의 머리도 바닥에 떨어졌다.
놀랍도록 빠른 솜씨였다.
‘대여섯 걸음이나 떨어졌었는데… 어느새?’
온동이 놀라 바라보니, 팽무일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절대로 나서지 마라. 저들이 바로 천하의 둘도 없는… 아니 단둘밖에 없는 대악인, 남궁천과 남궁웅이다.”
“대악인이라고요? 하늘 위의 하늘, 남자 중의 남자라 하지 않았나요? 남궁세가는 의를 중시하고 선을 실천하지 않나요? 남궁민 대협은 진정한 협객이셨는데?”
“이놈아, 하늘 중의 하늘. 남자 중의 남자. 대협객… 대인, 이런 것은 저 둘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이다. 저들은 남궁민과 달라. 대악인이라고.”
“아니… 남궁민 대협에게 장주 자리도 양보하고, 가문의 복수를 위해 이렇듯 목숨을 걸고 나서는데도요?”
“장주 자리는 의가 좋아서 셋째에게 넘긴 거고. 내가 저들 형제는 의가 좋다고 말했잖아. 그리고 가문의 복수는 대악인도 할 수 있는 거라고. 이놈이 뭘 자꾸 물어. 아무튼 너희는 절대로 나서지 말라고. 사부 너도 잘 들어!”
개소문은 팽무일이 자신을 사부라 부르면서도 하대를 하였으나, 맹인 사내의 검술에 푹 빠져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저것들을 잡아들여라!”
악부동의 외침에 사내들이 일제히 달려들었고, 맹인 사내가 외팔이 사내의 앞을 지키며 검을 휘둘렀다.
짧게 짧게 휘두르는 검날에 살이 튀고 피가 흩날렸다.
그리고 이어진 비명에 맹인 사내가 더욱 집중하기 위해 고개를 숙여 귀를 쫑긋하였다.
“저 눈먼 놈이 앞을 못 보니, 소리로 위치를 파악하는 모양이다! 다 함께 소리 지르며 달려들어라!”
눈치 빠른 악부동이 소리치니, 이에 호응하여 사방에서 함성을 지르며 맹인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일부러 검과 검을 부딪쳐 맹인 사내의 신경을 날카롭게 하며 달려들던 쌍검을 든 사내의 두 손목이 허공에 뜨고는 이어서 사내의 머리도 떠올랐다.
“나는 눈먼 놈이 아니라, 하늘 위의 하늘! 대협 남궁천이다!”
남궁천의 외침과 함께 그의 주위를 에워싼 사내들의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갔다.
온동은 끝없이 이어지는 비명에 고막이 울리고 머리마저 어질어질했다.
아마도 온동이 지나칠 정도로 청각이 뛰어나기에 겪는 고통이리라.
이와 마찬가지로 시각 대신 청각에 의지해 검을 휘두르는 남궁천도 꽤 신경이 날카로워진 듯하였다.
그러나 예리한 검날처럼 날카로워진 남궁천의 신경은 오히려 더욱 집중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주위에서 들리는 소리를 베고 또 베었다.
검이 잘리고, 사람의 몸뚱이도 잘려 남궁천 주위에 날리었다.
날래고 정확한 베기였다.
“더, 더더욱!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라!”
악부동이 기겁해 소리 지르니, 외팔이 사내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하나뿐인 왼손으로 오른쪽 허리춤에 찬 금강대도를 쓱 뽑아 올리고는 앞을 막은 사내들의 머리와 어깨를 밟고 날듯이 내달렸다.
야수가 펼쳤던 경공술 못지않은 솜씨였다.
“저놈! 저 외팔이를 막아라!”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외팔이 사내를 향해 악부동이 소리쳤다.
“이 외팔이가 바로, 남자 중의 남자! 대인 남궁웅이시다! 모두 벨 터이니, 급하다고 달려들 필요는 없다!”
처음으로 남궁웅이 입을 열었고, 그에게 달려들던 사내들의 병장기와 몸이 분리되며 널브러졌다.
“이놈!”
양지가 방천화극을 뻗으며 남궁웅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세상 무엇이든 두려울 것 없는 금강대도가 검광을 뿌리니, 허무히 방천화극이 두 동강이 나고는 양지의 몸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눕고 말았다.
이에, 벗을 잃은 악부동이 이를 갈며 달려들었다.
황보신유도 바위 같은 몸을 날리며 커다란 주먹으로 남궁웅의 머리를 노렸다.
그러나 남궁웅이 크게 금강대도를 휘젓듯 휘두르니, 악부동의 목이 잘리고 황보신유의 몸뚱이가 갈라져 피를 뿜었다.
달은 아직도 밝았고, 삼백여 명의 사내들이 들고 있던 횃불들은 어느새 폐허가 된 장원 바닥에 떨어져 불을 밝히고 있었다.
삼백 명이 넘는 사내들이 흘린 피는 잿더미가 된 장원을 붉게 물들였고, 남궁천과 남궁웅의 몽뚱이도 일렁이는 불빛을 받아 붉게 타오르는 듯하였다.
“병장기를 지닌 이가 아직 남아 있느냐?”
남궁천이 소리에 집중하며 물으니, 남궁웅이 주위를 둘러보며 답하였다.
“한 명 있습니다.”
남궁웅의 시선은 군중들 속 야수에게 향해 있었다.
두 자루 박도를 찬 야수가 남궁웅의 시선을 피해 길을 여는 군중들 속에서 몸을 드러냈다.
“구경꾼이냐? 아니면 초대받은 자인가?”
남궁천이 야수가 선 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물었다.
야수는 미동도 하지 않았으나, 남궁천은 군중들의 움직임으로 소리의 방향을 찾은 모양이었다.
“시. 건방… 진.”
남궁천의 물음에 야수가 낮게 중얼거렸다.
자신과 아무런 관련 없는 싸움이었으나, 남궁천의 물음이 무척 오만스럽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소리에 집중하던 남궁천이 순간 고개를 저었다.
주위 잡음을 제거하고 더욱 소리에 집중하기 위한 몸짓이 분명했다.
“시건방지다고 하였는가?”
남궁천이 야수의 방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옮기며 물었다.
“그. 렇다.”
야수가 짧게 답하니, 그 소리에 반응하여 남궁천이 몸을 획 날렸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야수의 앞에 바짝 선 남궁천이 다시 고갯짓하며 물었다.
“적인가? 구경꾼인가?”
야수의 자존심이 구경꾼이라 말할 것 같지 않았다.
입술이 실룩거리며 야수의 두 손이 박도로 향하였다.
남궁천이 야수의 몸놀림에 다시 고갯짓하자, 온동이 기겁하여 소리쳤다.
“구! 구경꾼이요! 우린 구경꾼이요! 저 사람은 우리 일행이고, 우리는 구경꾼이에요!”
온동의 외침에 남궁천의 고갯짓이 멈추었다.
그리고 박도에 손을 대었던 야수도 담담히 남궁천을 바라만 보았다.
여전히 야수의 입술이 실룩거리고 있었으니, 온동이 급히 달려오며 소리쳤다.
“우린 구경꾼이에요. 제발! 싸움은 안 됩니다. 안 돼요!”
남궁천과 야수 모두에게 향한 외침이었다.
어린아이의 외침에 남궁천이 야수에게서 몸을 돌렸다.
“구경은 끝났다. 이제 돌아가라.”
명령하듯 짧게 말하는 남궁천의 등을 노려보며 야수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자존심이 반발심을 일으키고 있었다.
“안 돼요.”
빠르게 달려온 온동이 급히 야수의 두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우야, 가자. 아직 밤은 깊고, 해야 할 살인은 많이 남았구나.”
남궁천의 부름에 남궁웅이 날듯이 달려오더니, 겁에 질린 군중들을 향해 소리쳐 말하였다.
“우리 남궁세가는 이곳 남궁에서 죄를 지은 일이 없소. 그대들이 이를 기억한다면, 저 흉악한 것들의 시신을 불태워 주기 바라오. 우리는 해야 할 살인이 많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나, 폐허가 된 장원일지라도 흉한 것들이 널려 있게 하고 싶지는 않소. 부탁하오!”
남궁웅의 외침에 백발이 성성한 늙은이가 나와 허리를 숙이며 답하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따르겠나이다.”
이에, 남궁천과 남궁웅이 흡족해 홀가분히 발을 옮겼다.
“멈추시오!”
개소문이 달려와 남궁천 남궁우의 앞을 막았다.
“누구냐? 적이냐?”
남궁천이 고갯짓하며 물었다.
“적은 아니오만, 등에 업은 그 아이와 금강대도는 두고 가시오.”
개소문이 거침없이 답하자, 남궁천이 소리에 집중하며 말하였다.
“적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