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주유천하(周遊天下) (13)
개소문은 남궁세가의 장원이 재가 되었다는 객잔 주인의 말에, 남궁에서 더는 볼일이 없다고 생각하여 온동을 바라보았다.
온동이 무척 상심한 듯 조그만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이에, 개소문이 온동을 위하여 조그만 단서라도 건지고자 객잔 주인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곳 남궁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이오?”
슬그머니 은을 쥐어주며 물으니, 객잔 주인의 입이 귀에 걸렸다.
“실은 말입니다.”
주위 시선을 의식하여 개소문이의 소매를 끌고 이동하니, 일행 모두가 슬금슬금 뒤따랐다.
“이곳 남궁의 주인인 남궁세가의 장주는 셋째 남궁민 공자셨지요. 그분은 의가 넘쳐 스스로를 불살이라 부르셨는데…….”
온동은 팽가장에서 남궁민이 자신을 불살이라 칭하며, 누구도 자신의 앞에서 죽지 않으리라 외치던 말을 떠올렸다.
“하온데, 산동 악자장의 악부동이란 위인도… 자신을 불살이라 칭하였답니다.”
이에, 온동은 행군원수부 연회에서 독고황후에게 자신을 불살이라 칭하던 악부동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스스로를 불살이라 칭한 인물이 하나 더 있었구나.’
객잔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는 온동을 힐끔 보고는 개소문에게 계속 이야기하였다.
“악부동이란 인물은 말로는 의를 중시하고 정도를 지키는 듯하지만, 실상은 산동 해적 무리의 수괴였습지요.”
“이런 나쁜 사람이 있나.”
개소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였다.
“아무렴요. 나쁘지요. 하여 이를 못마땅히 여긴 남궁민 장주께서 산동 악가장을 찾아가 혼쭐을 내신 일이 있었습니다요.”
“그것 참 잘했군.”
개소문이 꽤 신이나 말하니 객잔 주인이 소리를 낮추라는 듯 손짓을 하였다.
“쉿! 소리를 좀… 아무튼 일이 잘못되려니… 한왕 전하께서 무예 고수를 부르실 때… 이 악부동이란 인물도 초청한 모양입니다요.”
“허허… 그랬나? 그래서?”
“그래서 말이옵니다요. 일이 어찌 돌아간 것인지… 글쎄 남궁민 장주가… 팽가장의 팽무성 일당을 도운 죄로 한왕 전하에게 붙잡히셨다지 뭡니까?”
마음이 조급한 온동이 재촉하였다.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이 남궁에 장주가 없으니… 무서울 것 없는지… 악부동이란 인물이 행군원수부 군사들을 이끌고 이 남궁세가의 장원을 불태우고… 쑥대밭을 만들었지 뭡니까. 영문도 모른 채, 남아 있던 남궁세가의 식솔들은 그때 모두 죽임을 당했지요.”
“아…….”
온동이 탄식을 하니, 객잔 주인이 의아해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남궁민 장주께서는 셋째 공자셨습지요.”
이에, 팽무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불살 남궁민의 위로… 하늘 위에 하늘, 남궁천. 사내 중의 사내 남궁웅이 있었지.”
팽무일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객잔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맞습니다요. 첫째 남궁천 대협과 둘째 남궁웅 대인이 있으시지요. 세 형제는 의가 좋았기에… 두 분은 장주 자리를 놓고 형제간 다툼이 없도록 셋째 공자에게 남궁을 맡기고 주유천하 중이셨지요. 하온데… 두 분께서 이곳의 참극을 들으셨나 봅니다.”
객잔 주인이 더욱 눈치를 살피며 말하였다.
“악부동과 함께 이곳 남궁세가의 장원을 도륙 낸 이들에게 얼마 전에… 악살소멸부(惡殺消滅符)와 함께 서신이 전달되었는데 말입니다요.”
“…….”
“제가 보지는 못 하엿으나, 듣자 하니… [그대에게 흉액이 끼어 악살을 막아주기 위해 악살소멸부를 보내니, 보답하고자 한다면, 정월 보름에 남궁으로 오라]라는 서신이었다고 합니다요.”
객잔 주인이 악살소멸부를 언급하니, 팽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악살소멸부라… 남궁천이로군.”
개소문이 의아해 팽무일에게 물었다.
“악살소멸부와 남궁천이란 인물이 관계가 있는가?”
“네 이놈! 감히 시종 따위가 어디서! 아주 무엄한 놈이로고!”
팽무일이 호통을 치며 개소문의 머리를 쥐어박고는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말하였다.
“네놈이 모르는 것 같으니, 설명해 주마. 남궁천은 도가에 푹 빠진 인물로, 적을 대할 때 초청장을 보내는데… 항상 악살소멸부를 동봉한단다.”
“그래, 그것이 뭔 관계가?”
“이놈아! 흉액이 걸려 있으니… 자신을 이기면 흉살을 면할 것이고… 자신을 못 이기면 죽는단 말이지. 다시 말하면… 남궁천이 바로 흉액의 근원 악살이란 뜻인 게야.”
“그렇군…….”
개소문이 이해하여 고개를 끄덕이니, 객잔 주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악살소멸부는 남궁천 대협의 상징과도 같습지요. 헌데… 이 악살소멸부가… 한왕 전하께도 서신과 함께…….”
“헉! 뭐?”
팽무일이 놀라 물으니, 객잔 주인이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였다.
“하여… 행군원수부의 무예 고수들이 한왕 전하의 심기를 살펴 이곳으로 몰려 온 것이옵지요. 오늘 밤이 정월 보름이니, 이 남궁에서 살육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남궁에 병장기를 지닌 사내들이 몰려든 이유를 깨달은 개소문이 객잔 주인에게 물었다.
“오늘 밤이라… 그래, 악부동과 한왕 이외에 악살소멸부를 받은 이들이 몇이나 된다 하던가?”
“남궁세가의 장원이 도륙당할 때, 악부동과 평소 친분이 돈독했던 산동 황보세가의 황보신유. 그리고 신창 양가장의 양지란 인물이 행군원수부 군사들을 이끌고 왔습지요. 예상하건데… 그들도 받았을 듯합니다요.”
“한왕도 악살소멸부를 받았으니, 이곳에 와야 하지 않는가?”
개소문의 물음에 팽무일이 어이없어 하며 주먹으로 개소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에라이 이놈아! 한왕이 체면 구기려고 어찌 직접 움직이나? 행군원수부에서 잔뜩 호위 받으며 있겠지. 아마도 이곳은 잡다한 놈들이 오고, 꽤 실력 있는 것들은 행군원수부에 남았을 게야.”
“…….”
“뭐 어쨌든 행군원수부 군사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 그래도 한왕이 체면을 생각하여 군사는 움직이지 않은 모양이로군.”
팽무일은 주위 시선을 의식하여 개소문이를 쥐어박고 하대하였으나, 그래도 제법 상세히 설명하며 개소문의 눈치를 살폈다.
“아… 그렇군.”
개소문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니, 객잔 주인이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이만, 남궁에서 벗어나심이 좋을 듯합니다.”
“좋은 구경이 오늘 밤 있는데 어찌 가겠나? 그대는 너무 심려치 마시게.”
의젓하게 말하는 개소문을 객잔 주인이 위아래로 살피다가 팽무일에게 시선을 옮겨 물었다.
“송구하오나, 이 시종 분이… 고집을 부리시니, 대인께서 좋은 말로 타이르시어…….”
“닥쳐라! 이게 뭔 말이야 방귀야! 시종이면 시종이지 시종 분은 뭔 소리냐! 이놈이고 저놈이고 영 돼먹지 못하였구나!”
팽무일이 버럭 역정을 내니, 객잔 주인이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물러섰다.
“더 드릴 말씀이 없으니, 소인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개소문이 수고했다며 은전을 또 건네었다.
“들어가시게.”
객잔 주인이 안으로 들어가자, 온동이 바로 개소문에게 말하였다.
“형님, 아무래도 금강대도와 팽운을 데려간 사람이 남궁천 같습니다.”
이에, 팽무일이 고개를 저었다.
“외팔이라며? 남궁천은 사지가 멀쩡하다고. 외팔이 맞지?”
쇼락에게 팽무일이 물으니,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쇼락에게 온동이 대신 말을 전하였다.
“온동, 외팔이 검객이 갓난아이를 안고 날듯 질주하였다.”
쇼락의 말을 온동이 모두에게 통역하여 전하니, 팽무일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남궁천도 아니고, 남궁웅도 아니야. 두 형제 모두 사지가 멀쩡하다고. 희한하네… 뭐 아무튼 오늘 밤 보면 알겠지.”
팽무일이 밤까지 남아서 지켜보자 말하니, 개소문이 칭찬하였다.
“제자의 의협심이 깊어지는 듯해 기쁘구나. 잘 생각하였다.”
“의협심은 개뿔. 남아서 지켜 본다 하였지 돕는다 했소? 내가 누굴 돕고 말고 할 처지가 아니라고 사부. 알겠소? 어쨌든 제갈여와 같은 무예 고수들은 행군원수부에서 한왕을 지키고 있을 것이니, 그나마 여기는 좀 낫긴 할 것 같소.”
개소문은 팽무일이 투덜대든 말든 개의치 않고 온동에게 시선을 옮겼다.
고심이 가득해 보였다.
“아우, 왜 그러는가? 너무 걱정하지 말게. 반드시 팽 장주의 딸을 찾게 될 것이네.”
이에 온동이 개소문이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형님, 대협객이신 남궁민 장주께서 아직 행군원수부에 갇혀 계신 듯합니다. 저는 그분이 도망치셨을 거라 생각하였는데…….”
개소문이는 팽운을 데려간 한쪽 팔이 없는 검객을 남궁민이라 여겼던 모양이었다.
“음, 그런 협객이 옥에 갇혀서야 쓰나. 훗날 반드시 내가 행군원수부의 옥을 깨고 구할 터이니, 심려치 말게.”
개소문이 아무렇지도 않게 장담하니 팽무일이 기겁해 소리쳤다.
“아니 좀 사부는 닥치시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행군원수부 옥을 어찌 파옥한단 말이오?”
“어찌 파옥할지는 행군원수부로 돌아가다 보면 좋은 수가 생기겠지.”
“뭐요? 아니, 기껏 도망쳤는데 거길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단 말이오. 제발 정신 좀 챙기고 삽시다. 사부! 내 말 듣소?”
팽무일이 아무리 지청구를 해도 개소문이는 귀가 먹은 듯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 * *
날이 어두워지자, 거리에 서성이던 사내들과 객잔 안의 사내들이 쏟아져 나와 일제히 폐허가 된 장원으로 발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남궁 일대의 백성들도 좋은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멀찍이 떨어져 뒤따랐으니, 온동과 개소문 일행도 이들 속에 섞여 발을 옮겼다.
폐하가 된 장원은 먼저 자리한 이들이 횃불로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팽무일의 예상처럼 제갈여를 비롯하여 단목순, 진숙 등 절정 고수들은 보이지 않았다.
군중 속에 몸을 가린 채 발을 옮기던 온동의 시야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악부동…….’
단창을 쥔 악부동이 장원 중앙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 방천화극을 쥔 양지와 거대한 바위를 연상시키는 황보신유가 있었다.
온동이 조심스럽게 군중과 보폭을 맞추어 발을 옮기는 동안 팽무일이 뒤따르며 개소문과 온동에게 잔소리를 했다.
“사부, 오늘은 내가 갓쉰동이다! 이런 소리 좀 하지 말라고. 우리는 도주 중인데… 대놓고 나 잡아가라는 것도 아니고… 알았소? 그리고 꼬맹이 너는 대뜸 돌멩이 날리지 말라고. 나서지 말란 말이야. 알았냐? 듣고 있냐?”
팽무일이 아무리 지청구를 해도 개소문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답도 없었고, 온동은 그저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이었다.
이에 맥이 빠진 팽무일이 야수를 찾아 뒤를 살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멀리 떨어져 따라오는 야수가 보였다.
‘그래, 저자가 좀 믿음직하지.’
쇼락은 공손향을 지키며 객잔 앞에 남아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준비를 하였고, 야수는 두 아이를 지키기 위해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으니, 팽무일도 나름 안심할 수 있었다.
“어쨌든 말썽 피우지 말자는 말이오. 우리도 좀 살아야 하지 않소?”
팽무일이 소리 죽여 연신 주위를 주던 그 순간, 휘영청 떠오른 달을 올려다보던 악부동이 크게 소리쳐 말하였다.
“이 부족한 악부동을 따라 함께하여 주신 행군원수부 영웅호걸께 감읍할 따름이오! 우리는 오늘 이곳에서, 감히 한왕 전하께 악살소멸부를 보낸 저 무도한 간적을 잡아 한왕 전하께 바치도록 합시다!”
다함께 공을 세우자는 악부동의 외침에 병장기를 지닌 사내들이 함성을 질러 답하였다.
온동이 빠르게 살펴보니, 병장기를 지닌 사내들의 수는 어림잡아도 삼백 명이 넘어 보였다.
아마도 악부동과 양지, 황보신유가 수하들을 불러들인 모양이었다.
‘절정 고수는 아니라 하여도 숫자가 너무 많구나.’
온동이 걱정스러운 듯 주위를 살피니, 팽무일이 인상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시끄러워 죽겠네. 악부동 저 인간, 소리는 왜 질러댄 거야. 짖지 않는 개가 무는 법인데, 쯧쯧.”
“허허, 그 말이 옳지.”
누군가 팽무일의 뒤에서 맞장구를 쳤다.
낮고 중후한 음성으로 팽무일이 급히 뒤 돌아 보았다.
두 눈에 검은 천을 감아 두른 맹인(盲人)이 쇠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내가 좀 나가야 하니, 길 좀 열어 주시겠소?”
맹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팽무일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지팡이로 땅을 더듬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맹인의 뒤로 강보에 갓난아이를 감싸 등에 업은 외팔이 사내가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특이하게도 팔은 하나인데, 사내의 좌우 허리춤엔 제각기 검이 매어 있었다.
그 중, 팔이 없는 우측 허리춤에 매인 검에 팽무일의 시선이 꽂혔다.
“그… 금강대도?”
그토록 애타게 찾던 금강대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