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주유천하(周遊天下) (12)
온동과 개소문이 행군원수부 앞 광장을 뒤집어놓고 사라진 뒤, 한왕 양양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한왕 양양은 곳곳에 방을 붙이고, 추격대를 구성하는 한편, 고구려 정벌도 재준비하느라 매우 분주하였다.
이와 달리, 아무런 실권도 없는 태자 양광은 무료한 나날만 지속될 뿐이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태자 양광은 매일 같이 탁현 외곽으로 사냥을 나섰으니, 한왕 양양은 내심 이를 비웃었다.
이날도 태자 양광은 양소와 수행원 넷만 대동한 채, 탁현 외곽으로 사냥 나왔다.
딱히 잡은 것도 없이 오후가 되자 태자 양광은 요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허름한 객잔으로 말을 돌렸다.
몇 차례 방문한 적 있는 이 객잔 앞을 수행원 넷이 엄중히 지켰고, 미리 연락 받은 객잔 주인은 다른 손님을 받지 않은 채 태자를 맞이하였다.
“누추한 곳을 이토록 찾아주시어 황공할 따름이옵니다.”
연신 엎드려 절을 올리는 객잔 주인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태자 양광이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객잔 주인이 허리도 펴지 못한 채 뒤 따르니, 양소가 그의 어깨를 쥐어 뒤로 서게 하고는 객잔 안으로 발을 옮겼다.
객잔 주인은 양소가 들어간 뒤에야 뒤따라 안으로 들어가 태자가 자리한 탁자 앞에 공손히 섰다.
이에 태자 양광이 객잔 주인을 올려다보니, 객잔 주인이 당황하여 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소인이 본디 배운 바가 없어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에, 태자 양광이 빙그레 웃었다.
“이토록 용서를 구하니, 그럼 용서를 하겠소. 그래, 당 단주 오랜만이오.”
태자 양광이 객잔 주인을 당 단주라 부르자, 양소가 창가로 다가가 서서 잠시 주위를 살폈다.
“소인, 당진평 태자 전하를 알현하옵니다.”
객잔 주인이 일어나더니 바닥에 머리를 대고 절을 올렸다.
객잔 주인은 바로, 사천당가의 장주이자, 살수 집단 형제단의 단주인 당진평이었다.
“술과 고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당진평이 몸을 일으켜 공손히 말하니, 태자 양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단정한 여인들이 술과 고기를 내어와 상을 차렸다.
당진평이 공손히 술을 따라 올리니, 태자 양광이 들이켜고는 물었다.
“그래, 잘 되고 있소?”
“사해가 동포이며, 형제이옵니다. 황궁이라 하여 다르지 않사옵니다.”
“그래, 그것 참 잘 되었소.”
태자 양광이 흡족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당진평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월국공께 맡기셔도 되실 터이온데… 전하께서 이렇듯 미천한 소인을 찾아주시니, 감개무량할 따름이옵니다.”
“독기 오른 내 아우와 함께 행군원수부에만 있다간, 나까지 실성할 것만 같아서 말이오. 하하하. 헌데, 그 아이를 보았다고 전해들었소만…….”
월국공 양소에게 당진평이 전했던 말을 태자 양광이 떠올린 듯 물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말투와 무심한 듯한 표정이었으나, 실상 태자 양광이 직접 방문한 목적은 이 물음 때문이었음이 분명하였다.
‘듣고 싶은 말이 있어서 직접 찾아 왔구나. 양소를 통하여 들어도 될 터인데… 어찌하여?’
당진평이 의아해하며 태자 양광의 안색을 슬그머니 살피고는 답하였다.
“부끄럽습니다. 소인이 금강대도란 검에 욕심을 지녀, 노가장이란 곳을 찾아갔던 일이 있었나이다.”
“금강대도라… 하여?”
“하온데, 그곳에는 행군원수부 한왕 휘하 조피골이 졸개들을 이끌고 먼저 와 있었습니다.”
“오호, 그랬소? 그래, 금강대도를 두고 다툰 게요?”
“아니옵니다. 저보다 먼저 온 이가 있었으니, 그가 하오문의 졸개들을 베고 금강대도를 가져간 듯했습니다. 그리고 조피골은 제가 들어서니, 감히 맞서지 못하고 줄행랑을 놓았습니다.”
“허허, 먼저 온 이가 있다라… 안타깝게 되었구려. 그래서 어찌 되었소?”
“노가장을 살피던 중, 그 아이가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노가장을 돕기 위해 온 듯하였습니다.”
“노가장을 돕기 위하여? 허, 그 아이도 참… 남을 돕고 구하는 것에 머뭇거림이 없구려.”
태자 양광과 당진평이 언급한 아이는 바로 개소문이가 분명했다.
“전하께옵선, 그 아이에게 관심이 지대하신 듯하옵니다.”
당진평이 조심스럽게 말하니, 태자 양광이 껄껄 웃었다.
“내 생명의 은인 아니오. 사람이란 은원을 바로 해야 하는 법 아니겠소.”
이에 당진평이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태자 양광이 다시 당진평에게 물었다.
“그래, 그 아이와 한바탕 일전을 벌린 게요?”
“송구하오나, 그 아이가 공이 있음을 그 당시엔 알지 못하여…….”
“괜찮소. 당 단주가 보기에, 그 아이의 무예가 어떻소?”
“방어는 상당하오나, 공격은 대단치 않았사옵니다. 허나, 아직 어린 나이라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훗날 대적할 이가 적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당진평의 대답에 태자가 흡족해 술을 들이켜고는 다시 물었다.
“당 단주, 그 아이를 데려오시오. 내가 곁에 두고 중용하고 싶소.”
이에, 양소가 놀라 태자 양광 곁으로 다가오고, 당진평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소인… 월국공께도 아뢴 바 있사오나… 그 아이는…….”
“말하시오.”
태자 양광이 의아해 재촉하였다.
“송구하오나, 곁에 두실 수 없사옵니다.”
“뭐라?”
태자 양광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애써 화를 누르는 듯하였다.
이에, 양소가 당진평을 대신하여 태자 양광에게 말하였다.
“전하, 소인도 당 장주에게 얼마 전 그 아이의 내력을 전해 들었사온데… 갓쉰동 그 아이는…….”
양소가 말꼬리를 흐리자, 태자 양광이 재촉하였다.
“군사는 어서 말하시오.”
“고구려 막리지, 연태조의 장자 개소문이옵니다. 수와 고구려가 전쟁을 하는 시국인지라… 결코 곁에 두실 수 없는 아이옵니다.”
“뭐라? 그 아이가 고구려 재상의 장자란 말이오? 어찌 그런 신분이 높은 아이가… 떠돌고 있는 게요?”
태자 양광이 더욱 관심을 보이니, 양소가 한숨을 내쉬며 답하였다.
“그 아이가 떠도는 사정은 알 수 없사오나, 곁에 두시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의 왕은 그 아이가 성년이 되면 아비의 뒤를 이어 막리지를 승계하도록 명하였나이다. 그 아이의 재주와 기상은 아까우나, 곁에 두실 수는 없나이다.”
“아니오. 나는 황제가 되어 대원마저 복속하고 진정한 천하통일을 이룰 것이오. 허면, 고구려도 나를 따르게 될 것이니, 결국 그 아이도 나를 따라야 할 것이오.”
태자 양광이 더욱 개소문이에게 마음을 두어 말하고는, 당진평에게 엄히 명하였다.
“당 단주는 들으시오.”
“하명하시옵소서.”
“그대는 즉시, 갓쉰동을 찾아서 내게 데려오도록 하시오. 이 일은 절대로 한왕은 물론이요. 그 누구에게도 알려져선 안 되니, 수하에게 시키지 말고 그대가 직접 나서길 바라오.”
태자의 엄한 명에 당진평이 머리 숙여 답하니, 양소는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 * *
자신을 두고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도 모른 채, 개소문이는 남궁으로 항하고 있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팽무일과 공손향을 부부로 가장하고, 온동과 개소문은 시동 행세를 하였다.
야수는 공손향이 탄 수레를 끄는 마부로, 쇼락은 팽무일의 말고삐를 쥐고 앞장서는 시종 행세를 했다.
팽무일이 쉴 새 없이, 쇼락을 꾸짖고 온동과 개소문이에게 잔심부름을 시키니, 영락없는 주인과 노비의 모습이었다.
거들먹거리는 것이 적성에 맞는 팽무일이었기에, 누구도 이들을 의심하는 이 하나 없었다.
“자, 이제부터… 남궁에 들어가는 거라고.”
꽤 번성한 마을 입구에 들어서며 팽무일이 말하였다.
하북에 위치한 남궁은 한 때 남궁 일족의 발원지아자 집성촌이었고, 지금은 남궁세가의 장원이 있는 세력지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남궁은 남궁세가에게 내려진 봉지로 이 일대에서 남궁세가의 위상을 능가할 이는 오직 황제밖에 없었다.
“여기서 서북으로 가면 태원이지. 오대산에서 서남이고, 이곳에선 서북… 뭐, 아무튼… 그 외팔이가 남궁 씨 일족이라면… 이곳에서 찾으면 된다고. 어렵지 않아.”
남궁 일대에 접어드니, 팽무일이 주절주절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하북에선 우리 팽가장과 언가장이 무학명가로 알아주지. 그런데 말이야. 이 남궁세가도 하북에 있거든… 그래서 말인 즉! 남궁세가는 우리 팽가장보다 아래란 말인 거야. 따라서 팽가장의 장자인 나를 너는 우러러 봐야 하는 게야.”
팽무일이 멀뚱멀뚱 바라보는 온동에게 으스대었다.
“대단한 논법이로군요. 말이 어찌 그렇게 되는 건가요?”
“어찌 그리 되기는 자연스럽게 되는 거지. 그런데, 어째 거리가 수상하네.”
팽무일이 길가에 서성이는 사내들을 힐끔거리며 말하였다.
온동도 주위를 살펴보니, 병장기를 지닌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남궁세가의 본원이라, 병장기를 지닌 이들이 많은가 봐요?”
온동의 말에 팽무일이 콧방귀를 뀌었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 남궁 씨들은 고집스럽게 검만 사용한다고. 저렇게 잡다한 병장기 따위는 지니지 않아.”
팽무일의 말대로 검과 도뿐만 아니라, 창과 월도, 봉, 선장, 환, 단검, 도끼 등 다채로운 병장기를 지닌 사내들이 제각기 무리 지어 길가를 서성이고 있었다.
“지들끼리 거리를 두고 있는 꼴이, 한패는 아니란 거야. 내가 이런 건 잘 알지.”
산전수전 다 겪고, 산채를 세우고 산적 두령 노릇까지 한 팽무일이었으니, 누가 누구와 일행인지 한눈에 살필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것을 어찌 그리 잘 알아요?”
온동이 의아해 물으니, 팽무일이 껄껄 웃었다.
“이런 거 파악 못하면 산적 두령 노릇 못하지. 털어먹을 무리의 수는 한눈에 계산되어야 수탈에 나설 인원을 꾸릴 수 있는 거라고.”
“아… 산적까지 했어요? 나쁜 짓 참 많이 했네요.”
온동이 비웃었으나, 주위를 살피느라 팽무일은 말이 없었다.
“사부, 일단 객잔을 찾아 잠시 상황을 봅시다.”
팽무일이 말을 따라 걷는 개소문에게 말하였다.
개소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니, 팽무일이 온동에게 명하였다.
“얘야, 잠시 머물다가 갈 만한 곳이 있는지 찾아보고 오너라.”
이에 온동이 공손히 허리 숙여 명을 받는 척하고는 객잔을 찾아 나섰다.
잠시 뒤, 객잔을 찾은 온동이 돌아와 길 안내를 하며 말하였다.
“객잔을 찾긴 하였는데… 병장기를 지닌 이들이 가득이네요.”
“허… 이상하네. 병장기를 지닌 외지인들을 두고 볼 남궁 씨가 아닐 터인데… 이곳이 어떤 곳이라고…….”
팽무일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병장기를 지닌 채 거리에 서성이는 사내들에게서 남궁세가에 대한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쨌든 객잔에 가서 상황을 좀 살펴보자.”
객잔에 당도해 보니, 온동의 말대로 수상한 사내들로 가득하였다.
이에, 팽무일이 마중나온 객잔 주인에게 거드름 떨며 말하였다.
“우린 산동에서 태원으로 가는 길인데, 잠시 쉬어갈 방을 마련하게나. 그런데, 장사가 잘 되는 듯하이.”
“죄송하오나, 방이 모두 차서… 더는 받지 못합니다.”
“뭐야? 마중 나온 것이 아니라 문전박대하러 나온 게야? 아니 뭐 이런?”
팽무일이 언짢아 말하니, 객잔 주인이 주위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이곳 사정을 모르시는 듯하온데, 지나가는 길이시면 계속 지나가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곳은 사정이 좋지 못합니다.”
“남궁을 떠나라고? 아니 네가 남궁세가의 가주라도 되는 게냐? 궁주라도 되는 게냐? 일개 객잔 주인 따위가 어찌 떠나라 말하는 것이냐?”
팽무일이 일부러 언성을 높여 말하니, 객잔 주인이 기겁하여 팽무일에게 소리를 낮추라 손짓하며 말하였다.
“제발 소리 좀 낮추십시오. 이곳 남궁에는 이제 가주도 궁주도 없을 뿐더러, 남궁세가의 장원은 불에 타 폐허가 된 지 오래입니다.”
“뭐라? 남궁세가의 장원이 불에 타?”
팽무일이 놀라 물으니, 객잔 주인이 더욱 소리 낮춰 말하였다.
“제발 지나가시는 길이시면 그만 돌아가십시오. 곧, 큰 싸움이 벌어질 것입니다. 일단 살고는 봐야 하니, 어서들 가십시오.”
이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개소문이 물었다.
“큰 싸움이라니… 누구와 누가 싸운단 말이오?”
“남궁세가의 큰 공자와 남궁세가를 불태운 저들과의 싸움이지요. 큰 공자께서 돌아오시면, 외지인들은 모두 죽이고 말 것입니다.”
객잔 주인이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