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주유천하(周遊天下) (11)
창주가 어두운 밤하늘을 날아 을지문덕의 숙소로 날아가던 그 시점.
웃고 떠드는 조문객 무리 속에 숙연히 앉아 있던 북장원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랑이 같던 연태조가 떠나고. 고작 여덟 살 어린아이가 남으니, 다들 이토록 좋아하는구나. 허나, 아이는 자라고 수모는 잊지 못하는 법이다. 굳이 이런 무리 속에 섞여 있을 필요가 없다.’
이때, 사선종유가 북장원을 불렀다.
“종리위두대형, 어디 가시오?”
“밤도 깊어 가고, 조문도 마쳤으니 가야지요.”
“허허, 조문객이 하나둘 떠나면 어린 상주가 너무 외롭지 않겠소? 아비를 잃고, 어미마저 잃었으니 이 얼마나 가엽소. 일가처럼 밤을 새워야 어린 상주의 슬픔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지 않겠소? 이리 와 한잔 하시구려.”
술병을 들고 사선종유가 손짓을 하였다.
이에 북장원은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냉정히 잘라 답하였다.
“나는 내일 아침에 다시 올 터이니, 상주에게 인사나 전해주시구려.”
북장원이 성큼성큼 발을 옮기니, 술에 취한 조문객들이 엉거주춤 일어나 예를 올렸다.
북장원이 대문을 나설 때까지 상주 연정토는 보이지 않았고, 너무도 어린 연수영이 대신 그를 배웅하였다.
“아가, 힘내야 하느니라.”
연수영에게 자상히 말한 북장원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이때, 안에서 명림신이 급히 뛰어나와 북장원과 보폭을 맞추었다.
“늦었군. 그래, 상주는 어디에 있던가?”
걸음을 옮기며 북장원이 소리 죽여 물었다.
“안채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합니다.”
마치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해들은 듯 말하였다.
“아무리 어린아이라 하여도, 어찌 상주가 자리를 비우고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눈단 말인가? 그래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하던가?”
명림신은 뒤따르는 수행원들에게 손짓으로 떨어져 있으라 명한 후, 북장원에게 바짝 붙어 나지막이 말하였다.
“역모를 논하더이다.”
“뭐라? 역모를… 고작 그 어린 것이? 그럴 리가 있나.”
이에, 명림신이 북장원의 귀에 대고 한참을 속삭였다.
아마도 명림신은 연태조의 가노 중 누군가를 포섭하여, 연정토가 안채에서 나눈 대화를 엿듣게 한 모양이었다.
만일 산전수전 모두 겪은 연태조가 살아 있었다면, 결코 조문객으로 분주한 이때 결코 안채에서 따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한 연정토와 모용설 그리고 성미가 급한 모용상과 단 사부 등은 주의 깊지 못하여 비극을 만들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북장원이 다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그 여인이 타인의 죽음을 본다 하였는가?”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음… 조문객을 맞이하며, 그들의 죽음을 보았단 말이다… 음…….”
북장원의 고심이 깊어 보였다.
“태왕께 아뢰실 것이옵니까?”
“벌어지지 않은 일이다.”
“하오나, 저들은 역모를 논하였습니다.”
“이보게 명림신, 그 여인은 연태조의 장자가 태왕이 된 건무를 시해하였다고 했네. 허나 건무는 아직 태왕이 되지 않았으니, 이 역시도 사실과 다르네. 내가 이를 태왕에게 아뢴들, 어린 상주를 음해한다고 여기실 것이네.”
“하오나, 증인이 있습니다.”
“태왕은 말일세. 내가 누구를 음해하고 싶다면 증인 따위는 수백 명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네. 내 비록 장인이지만, 태왕은 나를 정치적 동반자로 여기지 않는다네.”
“하오면, 이를 두고 보실 것이옵니까? 태왕에게 아뢰셔야 하옵니다.”
“허허, 영리한 자네가 오늘은 총기가 흐트러졌군. 죽는 이는 태왕이 아닌데, 어찌하여 계속 태왕에게 아뢰라 하는가?”
“하오면…….”
“그렇네. 정작 죽는 이는 건무 아닌가? 당사자에게 말해야지. 그럼, 그가 알아서 하지 않겠나.”
북장원의 말에 명림신이 탄복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위두대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소인 아직 시야가 짧음을 느꼈습니다.”
“사람을 미리 포섭해 밀담을 엿듣게 한 자네의 재주도 훌륭하네. 우리는 이만 건무를 만나러 가 보세.”
명림신의 등을 두드려 노고를 치하한 북장원이 앞장서 걸음을 옮기다가 뭔가 떠오른 듯 발을 멈추고 물었다.
“그런데, 건무가… 태왕이 된다 하였는가?”
“그렇사옵니다.”
이에, 북장원이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깊이 탄식하였다.
“허… 이런… 결국, 건무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는 겐가?”
* * *
며칠 뒤, 발인을 마친 을지문덕이 요동성으로 향하였다.
이에 태자 건무가 이례적으로 을지문덕의 요동행을 배웅 나왔다.
“전하께옵서 어찌 이렇듯…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을지문덕이 공손히 예를 올리니, 건무가 을지문덕의 몸을 잡아 세우며 말하였다.
“총관께서는 계속 애쓰셔야겠구려. 부디, 이 고구려를 지켜 주시오.”
며칠 새 무척 마음이 약해져 보였다.
“소신, 단언컨대 적이 요동을 밟지 못하도록 막겠나이다.”
을지문덕의 장담에도 건무의 얼굴엔 여전히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을지문덕은 건무의 안색을 살며시 살피고는 다시 예를 올린 후, 요동성으로 향하였다.
멀어져 가는 을지문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태자 건무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총관만 믿소. 태왕 폐하를 지켜주시고, 우리… 고구려를 지켜주시오. 그리고… 나도… 살려 주시오.”
이에, 함께 배웅 나온 동금호가 엄히 말하였다.
“전하, 태산처럼… 굳센 바위처럼 마음을 단단히 하여 흔들림이 없으셔야 하옵니다.”
“장인…….”
“요설일 뿐입니다. 들었다고 하는 이는 연태조의 가노이며, 그를 포섭한 이는 명림신이고, 전하께 전한 이는 북장원입니다. 이들 중 누군가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어린 상주를 음해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장인, 모용설은 타인의 죽음을 보는 여인입니다.”
“그 또한 증명되지 않은 요언일 뿐입니다. 한 치 앞도 못 보는 인간이 어찌 남의 죽음을 볼 수 있겠나이까? 요설에 휘둘려서는 아니 되옵니다. 마음을 굳건히 하시옵소서.”
“장인, 나는 차라리 장수가 되어 온달과 함께 말을 달리고 싶소. 태자 자리는 내가 원한 것이 아니오. 더구나 내가 태왕이 되어 연태조의 장자에게 죽임을 당한다니… 나는 싫소. 태왕도 싫고, 죽는 것도 싫소.”
동금호가 말없이 바라만 보니, 태자 건무가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리듯 말하였다.
“나는 정말… 두렵소.”
* * *
먼저 요동성으로 돌아온 해권이 을지문덕을 맞이하였다.
“총관께 아뢸 것이 있사옵니다.”
“애썼다. 들어가 말하자꾸나.”
을지문덕은 해권과 어득구, 선예, 창주를 대동하고는 서부총관부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집무실로 이동하였다.
다른 이의 눈과 귀를 염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 보안이 확보된 곳이었다.
해권이 탁현 행군원수부의 군세와 동향을 먼저 아뢰니, 을지문덕이 선예에게 명하였다.
“기억하여 글로 남겨라.”
이에, 선예가 조용히 머리 숙여 명을 받았다.
을지문덕이 다시 해권에게 시선을 옮겨 물었다.
“그래, 수고가 많았다. 적의 동향 파악 이외에… 다른 일도 잘 보았느냐?”
이에 해권이 해진과 독고선의 시신을 수습하던 중, 행군원수부 군사들에게 사로 잡혔던 일을 말하였다.
을지문덕이 놀라니, 해권이 온동과 연개소문의 도움으로 사지를 벗어난 일을 차례대로 말하였다.
모두 들은 을지문덕이 그간의 노고를 또 한 번 치하하였다.
“참으로 고생이 많았구나. 헌데 너를 온동과 개소문이 구했다니 실로 놀랍고도 놀라운 일이다.”
“총관, 온동과 개소문 일행은 태원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온동은 독고선의 누이 독고영을 구하기 전에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총명하고 천하의 둘도 없는 기재라 할지라도,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우리가 도와야합니다.”
해권이 온동과 개소문을 돕고자 말하니, 선예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아니 될 소리입니다.”
단호히 말하는 선예에게 해권이 의아해 물었다.
“어찌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냐?”
이에, 어득구가 선예를 대신하여 말하였다.
“개소문이가… 흉살이라 그렇소.”
“뭐라 흉살? 개소문이가 귀살이란 말은 나도 들은 바는 있다. 허나 아직 아이일 뿐이고, 모두 허언일 뿐이다. 개소문이는 성정이 바르고, 올곧은 아이다.”
해권이 개소문이를 두둔하니, 선예가 고개를 저었다.
“개소문이는 향후 태왕이 된 태자 전하를 시해한다 하더이다.”
“뭐라? 그게 무슨 소리냐? 도대체 태자 전하가 언제 태왕이 되고, 태왕이 된 태자 전하를 어찌 개소문이가 시해한단 말이더냐? 그래, 그 이유가 무엇이라더냐?”
해권의 물음에 선예가 답을 하지 못하니, 조용히 듣던 창주가 입을 열었다.
“제가 엿들었습니다.”
“뭐라?”
놀라 묻는 해권에게 창주가 그간 있었던 일을 차분히 설명하였다.
한참 동안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해권은 창주의 말이 마무리되자, 한숨을 내쉬었다.
“아… 어찌…….”
눈빛이 크게 흔들리는 것이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어 무척 혼란스러운 듯했다.
대화를 조용히 지켜보던 을지문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해권을 도와 어득구, 선예, 창주는 태원으로 향하라.”
“총관!”
해권이 기쁘고도 놀라워 부르짖으니, 어득구와 선예도 소리쳐 이견을 내었다.
“총관, 어찌 이런 명을 하시옵니까? 개소문이는 흉살, 귀살이옵니다. 도와서도 아니 되고 구해서도 아니 되옵니다.”
“안타깝고도 불쌍하오나, 개소문 그 아이가 살아 돌아오면 반드시 고구려의 흉사만 있을 것이옵니다.”
을지문덕은 어득구와 선예의 반대에도 다시 명하였다.
“따르라.”
이에, 창주가 몸을 일으켜 명을 받았다.
“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어득구와 선예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총관, 어찌… 그 아이는 귀살입니다. 어찌하여 대살성을 고구려에 들이시려 하시옵니까?”
어득구의 물음에 을지문덕이 짧게 답하였다.
“아직 아이일 뿐이다.”
이에 선예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아니옵니다. 아이는 자라지요. 개소문이가 성년이 되면 막리지를 승계할 것이고, 그때는 너무도 위험합니다. 살려두면 화근이 됩니다.”
이에 해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언성을 높여 말하였다.
“선예, 내가 본 개소문이는 결코 악한 구석이 없는 아이였네. 그런 아이가 어찌! 납득하기 어렵네.”
“개소문이가 돌아오면, 막지리의 죽음이 위장군 온달과 관련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장군만 해할 것 아닌가? 물론 위장군도 해쳐선 안 되겠지만… 개소문이는 위장군 온달을 스승처럼 여기고 있네. 반드시 잘 풀릴 수 있을 게야.”
해권이 여전히 개소문이를 두둔하였으나, 선예는 차갑기만 하였다.
“잘 풀리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선예의 물음에 해권은 답을 내지 못하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을지문덕이 냉정히 말하였다.
“두말하지 않겠다. 너희는 명을 따르라.”
“하오나 총관!”
선예가 크게 반발하였다.
이에 을지문덕이 선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하였다.
“야심가인 연태조를 나는 물론이요. 많은 이가 의심하고 질시하였다. 어쩌면 막연히 그가 두려워 오해한 것일지도 모른다.”
“…….”
“허나, 연태조는 평생 오해와 질시 속에서도 고구려를 위하여 살았고, 그렇게 죽음을 맞이 하였다. 나는 그의 아들마저 그런 죽음을 맞게 하고 싶지 않다.”
말을 마친 을지문덕이 잠시 선예와 어득구의 눈을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살려라. 살려서 데려오거라. 명이다. 만일 그 아이가 대살성이라면, 내가 직접 명줄을 끊을 것이다.”
을지문덕의 단호한 눈빛에, 어득구와 선예도 명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눈을 피해 행장을 꾸린 해권 일행이 요동성을 빠져 나와 온동과 개소문 일행이 향하고 있을 태원으로 말을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