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주유천하(周遊天下) (9)
개소문과 온동이 독고영을 구하기 위하여 태원으로 향하던 무렵, 고구려의 평양성에서는 개소문이의 모친이 세상을 떠났다.
고구려의 승리를 이끌기 위해 전장에 나섰던 부군 연태조가 시신으로 돌아오자, 그 충격에 앓아눕더니 끝내 일어나지 못한 것이다.
잠시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기에, 요동성 전시 조정에서도 을지문덕을 비롯한 오부 귀족들이 조문 길에 나섰다.
전시 조정을 비우지 못하는 태왕을 대신하여 이복 동생인 태자 고건무가 장인 조의두대형 동금호와 처남 종리소형 동정찬을 대동하고 조문하였다.
상주는 장자인 개소문을 대신하여 차남 연정토가 맡았고, 일가와 다름없는 모용상과 모용설이 조문객을 맞이했다.
고구려 최고의 권력인 막리지를 장자가 성인이 될 시, 승계하라는 태왕의 명이 있었기에, 연태조의 상보다도 오히려 더 많은 조문객이 밤낮으로 줄을 잇고 있었다.
수행원도 없이 홀로 조문을 온 을지문덕이 향을 피우고 예를 올린 뒤, 이제 고작 여덟 살 연정토와 인사를 나누었다.
“슬픔이 얼마나 크겠소. 형님은 무사히 돌아오실 터이니, 심려치 마시게.”
“배려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연정토가 감사를 표하니, 기다리고 있던 모용상이 을지문덕을 상석에 자리한 태자 건무에게 안내하였다.
“태자 전하 강녕하시었나이까.”
을지문덕이 오랜만에 만난 태자 건무에게 공손히 예를 올리니, 건무가 그늘진 얼굴로 을지문덕의 어깨를 두드리며 치하하였다.
“그대의 노고가 많을 것이오. 항상 애써 주시오.”
말을 달리며 칼을 휘두르고 화살을 날리는 전장과 사냥터에서는 밝은 표정인 건무였으나, 평양성 내에서는 항상 근심과 수심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을지문덕이 건무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근심이 가득해 보이시옵니다. 걱정거리가 있으신지요?”
이에 건무가 손을 내저으며 말하였다.
“조문객이 웃을 수야 없지 않소. 아무 일도 없으니, 심려하지 않아도 되오.”
“태자 전하께서 근심이 없으시다니, 참으로 다행이옵니다.”
을지문덕이 자리에 앉으며 건무에게 공손히 잔을 올리니, 건무가 들이켜고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실은, 말이오.”
“말씀하소서.”
“나는 내게 주어진 이 태자 자리가 너무도 무겁고 힘드오. 나는 전장을 누비는 장수가 어울리는데… 속히 태왕 페하께서 후사를 보시어 올바른 국본을 세우셔야 할 터인데… 참으로 걱정이오.”
이에 을지문덕이 아무런 말도 못하니, 건무가 을지문덕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한 모양이오. 총관은 괘념치 마시오.”
을지문덕이 공손히 잔을 받아 비우고는 무겁게 말하였다.
“태자 전하, 곧 전쟁이 다시 시작될 것이오며, 이곳 평양성도 전장의 중심에 서게 될 것입니다. 부디, 태자 전하께옵서 용맹히 이 평양성을 지휘하여 주옵소서.”
조문 중에도 마음은 곧 있을 전쟁에 향한 태자와 을지문덕을 조금 떨어져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타인의 죽음을 보는 여인 모용설이었다.
모용설은 머리 숙여 공손히 조문객들을 맞이하였으나, 낮게 내리 깔린 그녀의 눈은 실상 조문객 모두를 살피고 있었다.
아마도 조문 온 오부 귀족과 신료들 중 누구의 명이 길고 짧으며, 이들이 어떤 죽음을 맞이할지 미리 살펴보는 듯하였다.
을지문덕과 대화를 마친 태자 건무가 환궁하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니, 모든 조문객이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태자가 떠난 뒤, 을지문덕도 오부 귀족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자리를 떠나니, 연정토가 밖으로 나와 배웅하였다.
을지문덕이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 모용설이 연정토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말하였다.
“둘째 공자에게 할 이야기가 있소.”
이에 연정토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용상과 단 사부에게 시선을 보내었다.
“오래 비울 수는 없으니, 함께 모여 이야기합시다.”
연정토가 모용설에게 말하고는 앞장서 안채로 향하니, 모용상과 단 사부도 빠르게 뒤를 따랐다.
* * *
밤이 깊어 어둠이 내린 길을 말에 오르지 않고 걷던 을지문덕이 허공을 올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하였다.
“창주 너는 모용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듣고 오너라.”
이에, 어두운 밤하늘이 꿈틀거리더니, 흑의 사내가 연태조의 집으로 날아들었다.
어둠과 동일한 복색을 한 창주는 지붕과 지붕을 사뿐히 밟고 소리 없이 이동하여, 미리 파악해 둔 곳에 멈추어 귀를 기울였다.
바로 연정토와 모용설 일행이 자리한 안채였다.
태자와 을지문덕이 떠난 연태조의 집은 상중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떠들썩하며 웃음이 넘쳐나고 있었다.
술에 취한 조문객들의 목소리에 예의란 없었다.
어린 상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분위기였다.
창주가 눈살을 찌푸리며 안채 소리에 더욱 집중하였다.
“설 누님, 말씀하시지요.”
어린 상주 연정토의 목소리가 창주의 귓속으로 전해졌다.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첫째 공자의 모습을 보았소.”
모용설이 나지막하면서도 차분히 말하였다.
그러나 모용설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형님을요? 형님을 보았단 말씀이십니까?”
타인의 죽음을 보는 모용설이 연개소문의 모습을 보았다니, 놀람은 당연하였으리라.
“설 누님 어서 말씀을 해보십시오. 형님을 보셨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연정토가 불길한 마음에 연신 다그치니, 모용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첫째 공자의 죽음을 본 것이 아니네.”
이에 연정토가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시간을 두고 모용설이 다시 말하였다.
“오늘 이곳에 조문 온 이들 중 대부분은 첫째 공자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네.”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놀라 묻는 연정토에게 모용설이 담담히 답하였다.
“그렇네.”
“대부분이라면… 누가, 누가 포함된 것입니까? 설마…….”
“태왕의 관을 쓴 태자가 성년이 된 첫째 공자에게 목이 잘리고, 팔다리가 나뉘어 강에 뿌려지네. 또한 오늘 상중인 이곳에서 웃고 떠든 오부 귀족 대부분도 죽음을 맞고, 그들의 시신은 개의 밥이 되네.”
이에, 연정토가 할 말을 잃었는지 아무 소리도 못 내니, 성미 급한 모용상이 대신 말하였다.
“누님, 우린 어찌하면 좋습니까?”
“운명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 첫째 공자가 돌아올 때까지 주위 시선을 끌지 않고 지냄이 좋을 듯하다.”
모용설은 이미 태자 건무를 비롯한 이들의 죽음을 확정짓고 있었다.
이에, 단 사부가 엄히 말하였다.
“태왕이 된 태자가 죽음을 맞든, 오부 귀족들이 개밥이 되든, 그들의 운명일 뿐입니다. 첫째 공자가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따르고 도우면 그만이지요. 그것이 우리의 역할이란 것만 명심하면 됩니다. 그 원인과 이유는 우리에게 필요 없습니다.”
누구도 단 사부의 말에 이견을 다는 이 없이 한참 동안 침묵만 이어졌다.
그리고 어두운 밤하늘을 검은 새처럼 창주가 날아갔다.
어둠의 장막이 내린 밤하늘 속으로 사라지는 창주의 발밑에선 아직도 웃음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 * *
노가장에 피어오른 누런 연기에, 걸음을 멈추고 망설이던 팽무일의 시야에 장문 앞에 서서 머뭇거리는 야수의 모습이 들어왔다.
야수도 누런 연기를 맡고 본능적으로 발을 멈춘 듯했다.
“어라? 쥐똥만 한 사부와 꼬마가 안 보이네? 설마… 안으로?”
팽무일이 불안한 마음에 공손향을 홀로 두고 야수에게 다가가 물었다.
“두 꼬마, 안으로 들어갔나?”
이에, 야수가 한숨을 내쉬더니, 두 자루 박도를 뽑아 들고는 장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 돼! 들어가면 안 된다고. 저 연기 산공독이라고… 내력을 소진당할 거라고.”
내력을 소진시키는 산공독은 지닌 내력이 깊을수록 그 피해가 크며, 해독제를 지니지 못한 이는 무공을 펼치지도 못한 채 당하기 일쑤였다.
여전히 발을 옮기는 야수의 팔을 팽무일이 잡아 세우며 고개를 저었다.
“대해처럼 끝없이 솟구치는 내력을 지니지 않은 한, 산공독에 맞서는 것은 불가능해. 들어가면 죽음뿐이야.”
“놔.”
야수가 팽무일의 손을 뿌리치고는 다시 한 발 앞으로 옮겼다.
“헉!”
아무리 숨을 참아 보아도 장원 안에서 흘러나오는 누런 연기에 벌써 다리 힘이 풀리고 있었다.
휘청이는 야수에게 팽무일이 다가가 팔을 잡아끌며 말하였다.
“어서 빠져 나가야 해. 저 아이들은 우리가 구할 수 없다고.”
“놔.”
자신을 잡아끄는 팽무일을 힘겹게 뿌리치며 야수가 다시 발을 옮겼다.
팽무일이 다시 다가가려 발을 옮기다가, 안에서 흘러나오는 누런 연기에 기겁하여 멀찍이 떨어졌다.
그 사이 야수가 비틀비틀 걸음을 계속 옮겼다.
그리고, 장원 안에서 격노한 온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추잡한 발 치우라고!”
* * *
온동은 채 부인의 시신을 짓밟으며 조롱하듯 묻는 당진평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여 무작정 달려들며 주먹을 휘두르니, 당진평의 수하 한 명이 앞을 막고는 온동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요 녀석이 맹랑하구나.”
온동은 자신의 멱살을 가볍게 쥐어 올리며 히죽거리는 사내의 턱을 노려 힘껏 발길질을 하였다.
그러나 사내는 가볍게 온동의 발을 잡아 쥐고는 껄껄 웃었다.
“아이고, 무서워라. 아주 파닥거리는구나.”
온동이 익힌 무예는 파산귀검과 비검술, 백두검법으로 모두 검을 이용한 무공이었다.
물론, 독고선에게 독고창법을 전수받고 팽무성에게 팽가도법을 비롯한 권법과 보법, 심법 등의 귀결을 전해 듣고 외웠으나, 제대로 수련을 하지 않아 펼쳐낼 재간이 없었다.
검을 지니지 않고, 주먹과 발만 놀리는 것은 조금도 위협이 되지 못함을 온동도 그제야 깨달았으나, 이미 사내의 손에 잡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뒤였다.
‘내가… 성급했어… 너무 흥분하여… 이런 제길! 망할!’
마음 깊이 자책하였으나, 억센 손아귀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었다.
이때, 개소문이 눈을 부릅뜨고 앞으로 나오며 엄히 말하였다.
“내 아우에게서 손을 떼라!”
“손을 떼라! 크크크. 손을 안 떼면 어찌 할 테냐?”
사내는 개소문이를 조롱하며 온동을 마구 흔들었다.
“그렇다면, 용서는 없다.”
개소문이 허리춤에 찬 두 자루 검을 뽑아 들며 단호히 말하였다.
기세 좋게 검을 뽑아 든 개소문이를 언지창이 유심히 지켜보았고, 당진평은 여전히 채 부인의 시신에 발을 올린 채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 발 치우라고!”
사내에게 멱살 잡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온동이 악을 쓰는 순간, 개소문이 맹렬히 달려들며 사내를 향해 검을 뻗었다.
백두검법의 초식으로 순간 몸을 날려 적을 찌르는 공격 일변도의 수법이었다.
온동의 멱살과 발을 쥐어 손이 자유롭지 못한 사내가 놀라 급히 뒤로 물러나다가, 바닥에 널브러진 하오문의 졸개 시신을 밟고는 휘청였다.
그 순간, 개소문의 검이 사내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악!”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사내가 온동을 바닥에 패대기치고는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보법을 밟으며 빠르게 접근한 개소문의 검이 더욱 빨랐다.
정확히 사내의 목에 검을 겨눈 개소문이 바닥에 쓰러진 온동을 불렀다.
“아우, 괜찮은가?”
“네, 형님.”
온동이 씩씩히 일어나 바닥에 널린 검 중 하나에 눈을 두다가 고개를 내젓고는 조그만 돌멩이들을 각기 양손에 쥐었다.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검은, 아직 어린 온동에게 무리인 모양이었다.
온동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개소문이 사내의 목에 검을 겨눈 채 엄히 명하였다.
“모두 물러나고, 그 부인에게서 발을 떼거라. 따르지 아니 할 경우, 이놈의 명줄은 여기서 끝을 맺을 것이다!”
이에, 당진평이 크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재미있구나! 하하하.”
쩌렁쩌렁 울리는 웃음에 온동이 휘청이고, 개소문이의 심장이 요동쳤다.
상당한 내력이 실린 웃음이었다.
크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두 아이들을 바라보며 당진평이 수하들에게 엄히 명하였다.
“무엇하느냐! 당장 저 꼬마들을 잡아들이지 않고!”
이에, 십여 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는 개소문과 온동에게 달려들었다.
개소문은 더 이상 인질은 필요치 않다 생각하여 사내의 목에 들이 댄 검을 빼고는 발을 날려 사내의 복부를 걷어찼다.
“어이쿠!”
사내가 날아가 처박히며 비명을 지르는 동안, 십여 개의 검이 개소문과 온동에게 향했다.
“이얍!”
온동이 빠르게 파산귀검의 보법을 밟으며 힘껏 돌을 날리니, 달려들던 사내가 머리를 맞아 벌러덩 나자빠졌다.
연이어 날린 돌에 또 다른 사내가 쓰러졌다.
개소문이는 빈손이 된 온동을 지키기 위해 앞을 막으며 파천신검 네 초식을 차례대로 펼치다가 순서를 바꿔 펼쳤다.
맹렬히 찔러 오던 검들이 파천신검의 단단한 방어에 막혀 맥없이 튕겨났다.
“검막?”
개소문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언지창이 놀라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개소문이가 펼쳐 내는 검광은 마치, 단단한 철벽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