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주유천하(周遊天下) (8)
팽무일의 눈빛이 심상치 않자, 노가장이 염려된 개소문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자는 허튼 짓 따위 꿈도 꾸지 마라.”
개소문이 엄히 말하니, 팽무일이 대충 고개를 끄덕여 답하였다.
“뭐, 그러던가요.”
노가장과 거리를 두고 숲으로 들어가 쇼락과 야수가 땅을 파고 우문도웅의 시신을 묻었다.
그 사이, 팽무일과 공손향을 치유한 의원이 시신을 묻고 잠시 숨을 고르는 쇼락과 야수를 치유하였다.
외상이 심하였으나 다행스럽게도 근골이 상한 이가 없어 안심해도 좋을 듯하였다.
“몇 개월 요양하며 치유하시면, 깨끗이 나을 것입니다.”
의원이 한가로운 소리를 하였으나, 그 소리를 들을 여유는 없었다.
“말은 고맙지만, 그럴 처지가 못 되오. 이만 내려들 가시구려. 우리도 갈 길이 바쁘니 아쉽지만 헤어져야겠소.”
개소문이 점잖게 말하니, 의원과 약방 주인은 애늙은이 소리를 하는 개소문이에게 연신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아쉽다니요. 절대로 아쉽지 않습니다. 염려마시고 속히 가십시오.”
이에, 팽무일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의원과 약방 주인을 노려보며 엄히 말하였다.
“너희들은 말이야. 오늘 새 삶을 살게 된 거야. 마음 같아선 싹 다 죽여서 입을 막고 싶으나, 정말 아쉽게도 살려 보내는 거라고. 입단속 잘 하라고. 괜한 소리하면, 내가 찾아갈 거라고.”
겁박하기 위해 팽무일이 주먹으로 바로 옆 소나무를 힘껏 후려치니, 우지끈 소리를 내며 밑동만 남기고 쓰러졌다.
“제자는 어찌 소나무에게 몹쓸 짓을 하는가!”
개소문이 호되게 야단치고는 쓰러진 소나무를 치우라 명하였다.
팽무일이 소나무를 낑낑거리며 치우는 동안 온동은 주위를 둘러보며 공손향에게 말하였다.
“노가장에서 좌측 숲으로 들어와 밑동만 남기고 쓰러진 소나무 옆이니, 기억하기 좋을 듯해요.”
반쯤 정신 나간 공손향이 온동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원과 약방 주인을 떠나보내고, 반대 방향으로 산을 넘으며 온동이 개소문에게 말하였다.
“형님, 저 때문에 항상 고생이십니다.”
“고생이랄 것도 없다. 허나, 우리 고구려와 수가 한창 전쟁 중인 엄중한 이 시국에 조금도 우리 고구려에 도움이 되지 못하니, 그것이 마음에 걸릴 뿐이다.”
“형님, 우리가 고구려에 있다한들, 우리와 같은 아이에게 주어질 중임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맡겨진 중임이 없다면 찾아서 하면 그만이다. 구할 사람을 구하고, 찾을 사람을 찾으면 속히 돌아가자꾸나.”
“네, 잘 알겠습니다.”
두 아이의 대화를 조용히 듣던 팽무일이 콧방귀를 뀌며 중얼거렸다.
“조그만 것들이 어른 흉내를 더럽게도 잘 내는구나. 말투만 보면 나보다도 어른인 줄 알겠어. 제기랄.”
이 소리를 귀가 밝은 온동이 못들을 리 없었다.
“형님, 저자를 데리고 다녀야 합니까?”
“데리고 다니지 않으면, 반드시 사고를 치고 비명횡사할 것이니, 스승된 입장에서 어찌 두고 갈 수 있겠나.”
이 소리에 팽무일이 기가 막힌 듯 투덜거렸다.
“비명횡사라니… 나 원 별.”
앞서 가던 쇼락이 구시렁거리는 팽무일을 힐끔 돌아보더니 발을 멈추었다.
“어찌 그러우?”
팽무일이 의아해 묻자, 쇼락이 말을 끌고 길에서 벗어나 숲으로 들어가며 손짓하였다.
이에 온동과 개소문이도 말을 끌고 쇼락의 뒤를 따르고 팽무일도 뭔가 심상치 않다 여겨 공손향의 손을 끌고 숲으로 들어갔다.
팽무일과 공손향의 말이 아직 산길에 남아 있으니, 쇼락이 급히 뛰어가 두 마리 말을 끌고 숲으로 들어갔다.
“형님, 말발굽 소리입니다. 상당한 인원입니다.”
귀가 밝은 온동이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소리를 느껴 말하였다.
이에 개소문이가 산길을 뚫어져라 살피니,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 십여 명의 사내들이 말을 타고 아래에서 올라오기 시작하는데, 모두 병장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중 눈에 익은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하오문의 문주 조피골이었다.
“이 고개를 넘으면, 노가장이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저희가 추적하고 또 추적하여 마침내 찾아내었지요.”
졸개가 자랑스럽게 답하니, 조피골이 기뻐하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래 좋다. 어서 서두르자.”
개소문은 조피골이 졸개들을 이끌고 향하는 노가장이 궁금하며, 한편으로는 걱정되었다.
조피골 일행이 지나자, 온동에게 나지막이 말하였다.
“저자들이 노가장이란 곳에서 흉한 짓을 벌일 듯하다.”
이에 온동이 단호히 잘라 말하였다.
“형님, 우리 일이 아닙니다. 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탁현에 있어야 할 저들이 우리의 앞을 지나 산을 오른다는 것은. 이미 벌써 곳곳에 방이 붙고 추격대가 우리를 쫓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그러나 어찌 곤경에 처한 이를 두고 갈 수가 있느냐?”
개소문이 정색해 말하며 산길로 나가려던 그때, 산 아래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온동이 급히 개소문이를 잡아 세웠다.
“형님, 누군가 또 올라옵니다.”
이에 팽무일이 구시렁거리며 산길로 발을 옮겼다.
“이런 제길,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을 피해 숨어만 다닐 거야? 그렇게 해선 태원까지 못가지. 나가자고.”
야수가 급히 팽무일의 둥근 머리를 잡아 누르며 나지막이 말하였다.
“안. 돼.”
“왜? 뭐가 안 돼? 머리 좀 누르지 말라고. 이렇게 다녀선 태원까지 못가. 겁 좀 먹지 말라고.”
팽무일이 투덜대니, 이번엔 쇼락이 다가와 입을 막고는 산길을 노려보았다.
다시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커다란 향로를 네 명이 들고 그 뒤로 십여 명의 사내들이 올라오는데, 모두 흑의를 입고 병장기를 지니고 있었다.
후각이 좋은 쇼락이 향로를 주시하니, 온동이 낮게 기어 쇼락의 곁으로 다가가 향로를 살폈다.
행군원수부 연회에서 보았던 향로와 무척이나 닮았다.
“저 위 노가장이란 곳에 그 칼이 있다 하였겠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온동이 시선을 돌렸다.
팽가장과 더불어 하북에서 명성이 드높았던 진주 언가장의 언지창이었다.
언지창과 나란히 보폭을 맞추는 사내 역시 행군원수부 연회에서 보았던 사내였다.
바로, 사천 당가장의 장주 당진평이었다.
“나와 이름이 같은 자가 지니고 있을 게요.”
당진평의 말에 온동의 온몸에 순간 소름이 돋기 시작하였다.
‘이, 이런… 당진평과 이름이 같다면?’
그제야 온동은 노가장의 군관이 팽 장주의 부인과 딸을 구해 사라진 노진평임을 깨달았다.
‘아… 이런 한심한… 바로 앞에 두고도… 구할 시간이 있었건만… 내 탓이야… 내 탓. 저 향로에서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이들보다 먼저 노가장으로 갈 수도 없고… 큰일이다. 조피골이 올라간 지 꽤 되었는데…….’
당진평 일행이 빠르게 걸음을 옮겨 시야에서 사라지자, 온동이 급히 개소문에게 말하였다.
“형님, 노가장이 위험합니다. 서둘러 가야 합니다.”
이에 개소문이 웃으며 답하였다.
“그래, 곤경에 처한 이를 두고 가면 쓰나. 어서 서두르자.”
개소문이는 온동이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돕고자 한다고 여겨 칭찬하고는 말을 끌고 산길로 나왔다.
먼저 산길로 나온 쇼락이 말에 오르며 온동에게 물었다.
“온동, 다시 오를 것이냐?”
“찾던 사람이 노가장에 있습니다.”
“너무 늦었다. 그래도 갈 것이냐?”
“가야 합니다.”
온동의 단호한 말에 쇼락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머리를 산 위로 향하였다.
“내가 먼저 가겠다. 뒤따라 오거라!”
쇼락이 바람을 가르듯 말을 달려 오르자, 온동이 개소문이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형님, 서두르시지요. 제가 찾던 사람이 바로 저 노가장에 있습니다.”
이에 개소문이도 말에 오르며 팽무일에게 명하였다.
“제자는 저 여인을 지키며 따라 오거라. 온동 서두르자.”
개소문이와 온동이 나란히 달리자, 야수는 말에 오르지 않고 내달리며 그 뒤를 따랐다.
영문도 모른 채 다시 산을 오르게 된 팽무일은 구시렁거리며 공손향의 말고삐를 쥐고 뒤따르며 투덜거렸다.
“정신 나간 여인을 내게 맡기고 신나게 올라가는군. 우리도 가 보자고.”
팽무일과 공손향도 말 머리를 나란히 하며 산에 오르니, 노가장 방향에서 누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팽무일은 불길한 기운을 느껴 급히 말을 멈추고는 누런 연기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산공독… 그래 맞아, 그 향로가 산공독을 피우는 거야. 이대로 무턱대고 갔다간, 다 죽어.”
* * *
개소문이와 온동이 말을 달려 노가장 앞에 도착하니, 먼저 당도했을 쇼락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말에 탄 채, 먼저 들어간 모양이다. 서두르자.”
개소문이가 말에서 뛰어내리며 노가장 안으로 향하자, 온동도 몸을 날려 뒤를 따랐다.
뒤따르던 야수는 발을 멈추고, 노가장에서 피어오른 연기를 올려다보았다.
“산, 공, 독. 아이들이… 위험하다.”
* * *
급히 노가장 안으로 들어든 온동의 코끝으로 메케한 내음이 들어왔다.
“뭐지, 이 냄새는?”
불길한 마음에 숨을 참으며 노가장 안으로 뛰어든 온동의 시야에 누런 연기를 피워 올리는 향로와 바닥에 널브러진 하오문의 졸개들이 들어왔다.
“너희는 또 무엇이냐?”
넓은 장원 한가운데에 선 언지창이 몸을 돌려 온동과 개소문에게 물었다.
온동이 대답대신 주위를 둘러보니, 쇼락이 보이지 않았다.
‘쇼락님은 무사하신 거야. 여기 들어오지 않으셨어. 하면, 어디 가신 거지?’
온동이 안심하며 다시 주위를 살피니, 언지창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너희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답하라!”
“답을 해야 하는가?”
개소문이 널브러진 하오문의 졸개 시신을 응시하며 물으니, 언지창이 더욱 언짢아 인상을 구겼다.
“어린놈의 혓바닥이 영 못쓰겠구나.”
이때 당진평이 집 안에서 나오며 말하였다.
“우리보다 조피골이 먼저 온 모양일세. 여기 안에 시신이 좀 있네.”
당진평의 뒤로 수하들이 여인과 사내의 시신을 집 안에서 질질 끌고 나왔다.
온동이 놀라 바라보니, 바로 팽 장주의 처, 채 부인과 노진평의 시신이었다.
“이… 이놈들이!”
온동이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치니, 당진평이 의아해 바라보았다.
“얘야, 너는 누구냐? 너도 이 노가장 사람이더냐?”
분노한 온동이 대답대신 오히려 당진평에게 물었다.
“네놈이 죽인 것이냐?”
“허, 이 어린놈의 말버릇이 영…….”
“닥쳐라! 네가 저들을 죽인 것이더냐?”
온동이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다그쳤다.
“그건 아니고, 이들은 우리가 오기 전에 하오문의 졸개들이 죽인 거란다. 혹여 복수를 하고 싶다면 하오문에 하거라. 우린 여기에 있던 하오문 나부랭이들을 죽인 은인이니, 고마워해야 한단다. 뭐, 우리가 다 죽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은인이란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 당진평이 채 부인과 노진평의 시신을 질질 끌고 나오는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이놈들아! 뭐가 무겁다고 질질 끌고 다니느냐! 좀 번쩍 들어서 안고 나와야지! 저 아이들이 불쾌해 하잖냐!”
온동과 개소문이를 놀리는 듯한 언사였다.
온동이 주먹을 부르르 떨자, 개소문이 온동의 손을 꼭 쥐며 당진평에게 물었다.
“정녕, 그대들이 해친 것이 아니오?”
“아니라니깐. 우리가 오기 전에 이미 하오문 놈들이 들이닥쳤어. 우린 아니야. 오히려 얼쩡거리던 하오문의 졸개들을 죽인 은인이라고. 하하하.”
껄껄껄 웃던 당진평이 채 부인과 노진평의 시신을 발로 툭툭 차며 온동에게로 시선을 옮겨 물었다.
“너, 이들과 관계가 어찌 되느냐?”
이에, 온동이 매섭게 노려보며 말하였다.
“발로 차지 마.”
“뭐? 뭐라 했느냐?”
당진평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발로 차지 말라 하였다.”
“발로 차지 말라 하였다고? 하하하. 내가 오늘 기분이 상하여 좀 차도 된다. 신경 쓰지 말거라.”
당진평이 여전히 시신을 발로 툭툭 차며 말하니, 온동이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에, 당진평이 팽부인의 시신에 발을 올리고는 물었다.
“얘야, 내가 오니 조피골이 놀라 졸개들만 내버려두고 도망치더군. 그런데… 말이야.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내뺐단 말이야. 아무것도.”
당진평의 발이 팽부인의 시신을 짓누르기 시작하였다.
“얘들아, 내가 찾는 것이 여기 있었는데… 그것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을까? 너희가 혹시 알 것 같은데, 칼이거든.”
당진평이 발로 팽부인의 시신을 더욱 짓누르니, 시신에서 뼈마디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온동이 입술을 깨물며 당진평을 노려보다가 간신히 분을 참으며 짧게 물었다.
“아이는?”
“아이? 어떤 아이? 너희 말고 아이가 여기 더 있었느나?”
당진평이 의아해 되묻자, 그제야 온동이 겨우 안심해 한숨을 내쉬며 생각하였다.
‘팽 장주의 부인과 노진평은 죽었지만, 팽 장주의 딸은 무사한 거야. 그런데, 어디 있는 거지? 누가 데려간 건가?’
팽운이 살아 있어 안심하면서도 이제 한 살 지난 아이가 보이지 않자, 한편으론 불안해지는 온동이었다.
이때, 언지창이 하오문의 졸개 시신을 발로 뒤집어 살피더니, 당진평을 향해 말하였다.
“이놈들의 명줄을 끊은 이가 누군지 알겠군.”
“그래? 그렇다면 그놈이 하오문 놈들을 죽이고 금강대도를 가져간 게로군. 누군가?”
당진평이 온동과 개소문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고 언지창에게 물었다.
“남궁세가의 솜씨네.”
언지창의 대답에 온동의 두 눈이 놀랍고도 반가워 휘둥그레졌다.
“남궁세가라…….”
당진평이 중얼거리더니, 시선을 온동에게로 옮기며 물었다.
“얘야, 네가 남궁세가 인물을 아는 모양이로구나. 그렇지?”
단지평의 발은 여전히 채 부인의 시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필경, 온동을 자극하기 위한 행동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