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주유천하(周遊天下) (7)
쇼락이 수레를 구해오는 동안, 해권이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 온동과 개소문이에게 말하였다.
“수레를 구해 오면 의원에게 보인 후, 만리장성을 넘도록 하자.”
아마도 의원에게 데려갈 땐 우문도웅의 명도 끊어져 있을 것이라 여긴 듯했다.
“네, 그 말씀이 옳습니다.”
개소문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그러나, 온동은 생각을 달리하였다.
“먼저들 가세요. 저는 더 구하고 찾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고작 여덟 살 남짓 된 아이가 단호히 말하니, 해권이 어이없어 허허 웃었다.
“위장군 온달께서 근심하신다. 도대체 누구를 구하고, 누구를 찾고자 하는 게냐?”
“영이를 구하고, 팽장주의 딸과 부인을 찾아야 합니다.”
온동의 말에 모닥불을 바라보던 팽무일이 놀라 시선을 돌렸다.
‘내 동생의 처와… 딸이 아직 살아 있다니… 허면? 금강대도도 아직… 어딘가에 있단 말일 터인데…….’
금강대도도 욕심나고, 일가도 걱정된 팽무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애야, 금강대도는 누가 지니고 있느냐? 그리고 제수와 조카가 아직 살아 있는 게냐?”
이에 영리한 온동이 팽무일을 의심하여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보기만 하고 답이 없느냐?”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을 하죠.”
맹랑한 대답에 팽무일이 허허 웃었다.
“허허, 뭐 그럼 말하지 말거라. 아무튼 네 말에 따르면 내 제수와 조카가 살아 있는 모양인데… 어디 있는지 알고는 있는 게냐?”
“어디 있는지 알고 있으면, 찾아야 한다고 말하겠습니까?”
온동이 차갑게 답하고는 팽무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마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살펴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나, 나쁜 사람 아니야.”
“나쁜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요. 좋은 사람은 그런 말할 필요 없어요.”
여전히 온동의 말투는 차갑기만 했다.
이에, 개소문이가 팽무일을 힐끔 보고는 온동에게 물었다.
“영이는 누구고, 팽장주의 처와 딸을 찾아야 한다는 말은 무엇이냐?”
이에, 온동이 팽가장에서 벌어진 참극을 이야기하고는 노진평이 구해간 팽장주의 처와 딸 그리고 이연이 데려간 독고영이를 구해야만 고구려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하였다.
“영이를 구하지 못하면 죽어서도 의부를 뵐 면목이 없고, 팽장주의 부인과 딸을 구해 고구려로 데려가지 못하면 팽장주의 얼굴도 뵐 면목이 없습니다.”
지나치도록 어른스러운 말투에 개소문이가 더 어른스러운 말투로 말하였다.
“아우는 이제 고작 여덟 살인데, 언제 죽는다고 그런 말을 하나. 이 형님이 도와줄 터이니 함께 구하고, 찾아보도록 하세.”
애늙은이 같은 두 아이의 대화에 해권과 팽무일이 머리를 긁적였다.
해권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음… 듣고 보니, 쉬운 일이 아니야. 태원유수 이연이라면 공손성과 맞먹을 세력을 지닌 인물인데… 또한 어디 있는지도 모를 팽장주의 부인과 딸을 찾기란…….”
그러나, 온동은 여전히 단호하였다.
“어렵고 힘들다하여 시도조차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 아우의 말이 옳네. 어렵고 힘들다하여 시도조차 안 했다면, 여기 해권님과 나의 제자가 살아 있지 못했을 게야.”
개소문이마저 온동의 말에 동조하니, 해권이 난처하여 머리를 마구 긁적였다.
‘은근히, 나를 구해준 것을 말하네. 이런 맹랑한 꼬맹이를 보았나.’
이때, 눈치 빠른 팽무일이 개소문이에게 공손히 말하였다.
“사부! 저는 그저 사부만 따르겠나이다. 하온데…….”
“제자가 할 말이 있는가?”
개소문이의 물음에 팽무일이 빙그레 웃었다.
“소인은 팽가장의 장자로서 장주인 동생이 세상을 떠난 이상, 장주의 신물인 금강대도를 소인이 지켜야 하옵니다.”
“그렇지. 장자가 원래 지켜야 하는 법이지.”
개소문이가 동조하니, 팽무일이 더욱 공손히 비위를 맞추었다.
“온 공자께서 영 아가씨를 구하시도록 성심을 다해 도울 뿐더러, 제수와 조카를 찾는데도 노력할 터이니… 부디, 장주의 신물을 제가 지킬 수 있도록 사부께옵서 도와주십시오.”
개소문이는 팽무일의 말이 타당하고 기특하다 여겨 고개를 끄덕였으나, 영특한 온동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팽장주의 금강대도는 팽장주의 딸이 물려받고 지켜야 하는 법! 팽가도법을 비롯한 권법과 심법 보법들도 당연히 팽장주의 딸이 전수받을 터인데, 금강대도도 당연히 물려받고 장주가 되어야 하니, 당신은 허튼 생각하지 말아요!”
온동의 호통에 팽무일이 의아해 물끄러미 온동을 바라보았다.
“무공을 전수받고 장주가 된다고? 누구에게 전수받는단 말이지?”
“팽장주께서 제게 무공귀결을 암기하라 하시며…….”
무심결에 답하던 온동이 실수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이에, 팽무일이 온동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다시 물었다.
“내 동생이 네게 암기하라 했다고? 결단코 장주 이외엔 그 누구에게도 들려주지 않을 귀결인데… 그걸 네게? 암기하라고? 암기가 될 리가 없을 텐데…….”
팽무일의 눈빛이 심상치 않자, 온동이 입을 꾹 다물고 대답을 피하였다.
“뭐, 좋아. 사부께서 구하자고 하시면 나는 구할 것이고, 찾자고 하면 찾을 터이니… 금강대도는 장자인 내가 지켜야함이 옳다는 것만 명심하자고.”
온동에게 엄포를 놓듯 팽무일이 말하고는 개소문이를 향해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지켜보던 야수가 팽무일을 향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두 아이. 모두… 내가 지킨다. 칼을 주고. 안 주고는… 두 아이가… 결정할 몫이다.”
“그러시던지.”
감히 야수와 맞설 생각조차 없는 팽무일이었기에, 다시 모닥불로 시선을 옮겼다.
잠시 말이 없던 해권이 팽무일과 야수를 살피고는 개소문이와 온동에게 소리 죽여 말하였다.
“의원까지만 함께 한 후, 나는 요동성에 돌아가 총관에게 이곳 상황을 아뢰어야 한다. 반드시 돌아올 테니, 너희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태원에서 나를 기다려라.”
두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니, 해권이 다시 나지막이 말하였다.
“야수는 말과 행동에 거짓이 없으나, 팽무일은 그렇지 않다.”
이에 개소문이가 진심을 담아 말하였다.
“제가 성심을 다하여 제자가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겠나이다.”
“아니. 아니. 아니야. 절대 뭘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뭘 알려 주려고도 하지 말라고. 절대로 가르치지 마. 절대로.”
해권의 말을 영특한 온동은 즉시 알아들었으나, 개소문이는 의아해 고개를 갸웃했다.
“제자의 심성이 바르지 않음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스승으로서 바른 길로 나아가게 가르침은 마땅히 해야 하는 본분이온데… 어찌하여…….”
“어쩌고저쩌고 간에…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아무것도 가르치지 말고, 아무것도 해주지도 말고, 아무것도 하지 좀 말라고. 알았어? 알았다고 좀 답하라고!”
윽박지르듯 대답을 강요하며 언성을 높이니, 야수와 팽무일이 시선을 돌려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
개소문이에게 다시 주의를 준 해권이 한숨을 내쉬었다.
날이 밝을 무렵이 되자,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쇼락이 돌아왔다.
우문도웅을 돌보던 공손향이 기뻐 눈물지었고, 야수가 우문도웅을 번쩍 안아 수레에 눕혔다.
“주군, 돌아… 가시면. 주군의… 눈에 침을. 박은… 그 놈을 찾아… 그놈. 눈에도 침을 박겠나이다.”
야수가 우문도웅에게 나지막이 말하니, 의식 잃은 우문도웅이 눈물을 흘렸다.
공손향은 휘청휘청 걸어서 수레에 올라 우문도웅을 살폈고, 이미 의원의 집까지 알아냈는지 쇼락이 앞장섰다.
“쇼락님은 한족 말도 모를 터인데, 의원 집은 어찌 알아내고 수레는 어찌 구했을까?”
개소문이가 의아해 물으니, 온동이 빙그레 웃었다.
“쇼략님은 전사이자, 사냥꾼이라… 눈과 냄새로 추적하고 사위를 살피지요. 한족 말은 몰라도 약방에 붙은 깃발은 알아보고 탕약과 약초 냄새도 맡으셨을 겁니다. 믿어도 좋습니다.”
온동의 말대로 쇼락은 정확히 냄새로 아직 문도 열지 않은 약방을 찾아내어 문을 두드렸다.
아직 새벽이라 인적이 없어 다행스러웠다.
잠이 덜 깬 늙은 약방 주인이 나오자, 팽무일이 냅다 목을 움켜쥐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소리 내지 마라. 다 살자고 하는 짓이니, 시키는 대로 하자.”
팽무일의 엄포에 약방 주인이 겁에 질려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또 있느냐?”
“저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마누라도?”
“제… 처는 아들 집에 갔고… 저만 있습니다.”
의심 많은 팽무일은 믿지 않고, 약방 주인의 목을 움켜쥔 채 약방 곳곳을 샅샅이 살폈다.
약방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목을 놔주며 말하였다.
“치료하거라.”
“네? 저는 약을 팔 뿐이지… 의원이 아니온지라…….”
약방 주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니, 팽무일이 주먹을 치켜들며 윽박질렀다.
“어차피 죽을 사람이야. 뭐가 되었든 아무 약이라도 먹이라고. 뭐든 하는 척이라도 좀 해!”
이에, 개소문이 고개를 저으며 팽무일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쓰나. 이보시오, 주인장.”
“마, 말… 말씀하십시오.”
어린 개소문이에게 약방 주인이 굽신거리며 답하였다.
“근처에 의원이 있을 것 아니오. 가서 데려오시오. 제자도 따라가 의원을 모셔오고.”
개소문이의 명에 팽무일이 대뜸 약방 주인의 목덜미를 잡아끌고 나갔다.
“후딱… 아주 조용히 다녀오겠습니다요.”
팽무일이 약방 주인의 목덜미를 쥐고 경공술을 펼치며 사라지니, 해권이 개소문이와 온동에게 다시 당부하였다.
“부디, 나를 기다리거라. 반드시 사람들을 풀어 채 부인의 행방을 알아내고, 태원으로 갈 터이니, 너희는 나를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이에, 개소문이와 온동이 고개를 끄덕여 답하였다.
해권은 불안한 마음에도 탁현의 사정을 아뢰기 위해 요동성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팽무일이 의원을 데리고 오기 전에 우문도웅이 명을 달리하니, 약방 안에는 공손향의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문도웅의 죽음으로 이제 의지할 이 하나 없고, 갈 곳 또한 없어 실성한 듯했다.
마침 의원과 약방 주인의 목을 잡고 안으로 들어오던 팽무일이 놀라 소리쳤다.
“아니, 곡을 하면 어떡해! 당장 소리 좀!”
공손향에게 소리치는 팽무일을 야수가 잡아먹을 듯 다가와 노려보니, 팽무일이 기겁하여 입을 다물었다.
영문도 모른 채 의원과 약방 주인은 팽무일에게 목을 잡힌 채, 공손향이 곡을 멈출 때까지 덜덜 떨어야 했다.
해가 중천에 뜰 때쯤 되어서야 곡을 멈춘 공손향이 멍한 눈으로 야수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주군을 묻어드려야 하는데…….”
“참 가지가지 한다.”
팽무일이 기가 막혀 중얼거리다가, 야수와 눈이 마주쳐 입을 다물었다.
“시신을 이대로 두고 갈 수도 없으니, 묻어 주도록 하자.”
개소문이가 이렇듯 말하니, 온동이 쇼락에게 말을 전하였다.
이에 쇼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적당한 산이 있다. 그곳으로 가자.”
추격대가 들이닥쳐도 사방으로 도주하기 용이한 산을 봐둔 모양이었다.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며, 개소문이가 의원과 약방 주인에게 금을 쥐어주며 엄히 말하였다.
“우리가 의심받지 않도록 일행처럼 함께 동행하시게. 이 금은 용채로 쓰고.”
뜻밖의 횡재에 약방 주인과 의원이 연신 머리 숙여 감사를 표하며 장담하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와 함께 하시면 의심하는 이 아무도 없을 겁니다.”
“아무렴요. 제 일가로 하시면 되옵지요. 제 손자라 하시면 아주 제격이십니다.”
이렇듯 일행이 더 늘어 쇼락이 말한 산으로 향하게 되었다.
높지는 않으나, 숲이 우거져 산세가 험하고 고개에 난 길을 통하여 사방 어디로도 도주할 수 있는 산이었다.
공손향이 산 정상에 우문도웅의 묏자리를 보기 원하여, 말과 수레를 끌고 정상까지 오르니, 제법 큰 장원이 나왔다.
“여기에 장원이 있다니…….”
의문의 장원 근처에 묏자리를 보기 어려워 개소문이가 중얼거리니, 약방 주인이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노가장이라는 곳이옵니다. 노 씨 부부가 죽고는 지난해까지 빈 장원이었는데… 지금은 군관이었던 장자가 돌아와 살고 있습지요. 사람들과 전혀 왕래가 없어서… 대충 근처에 시신을 묻으셔도 되실 것입니다. 아무렴요.”
한 시라도 빨리 시신을 묻고 산을 내려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에, 팽무일이 히죽 웃으며 말하였다.
“고작 군관 한 명이 돌아와 살고 있다고? 그럼 그 한 명만 죽이면, 이곳에 뭘 묻었는지 아무도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