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주유천하(周遊天下) (6)
온동과 개소문 일행은 쉬지 않고 밤을 새워 말을 달렸다.
개소문이는 날이 밝으면 추격대뿐만 아니라 각지에 방이 붙고, 사방에서 자신들을 추격하리라 여겼기에, 최대한 탁현과 거리를 벌린 후 만리장성을 넘고자 했다.
날이 밝아올 무렵, 뒤따르던 공손향이 급히 소리쳤다.
“잠시만! 잠시만! 멈춰 주세요!”
이미 공손향의 말은 멈춘 상태였고, 그녀의 곁을 야수가 지키고 있었다.
개소문이와 온동이 말을 멈춰 돌아보니, 우문도웅이 말 위에 엎드린 채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쇼락이 급히 다가가 우문도웅의 목에 손을 대어보고는 온동을 향해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온동, 이자는 여기까지다. 살아 있으나, 더는 살 수 없다.”
“의원에게 보여도 살 수 없나요?”
“그건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의원을 찾아갈 형편이 못 된다. 이자는 눈에 침이 박힌 순간, 죽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두고 가야 한다.”
쇼락과 온동의 대화를 알아들을 리 없는 공손향이 답답해 물었다.
“얘야,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게냐?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게지?”
이에, 쇼락의 말을 온동이 바로 통역하여 공손향에게 전하였다.
“함께 가기 어렵겠어요. 이 사람… 곧 죽을 거라 합니다.”
“네가 뭘 안다고! 조그만 아이가 어찌 함부로 말하는 거냐!”
공손향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자, 해권과 야수도 우문도웅의 곁으로 말을 몰아 맥을 짚어 보았다.
우문도웅은 그저 말 위에 엎드린 채 미동조차 없었다.
야수가 침통한 표정으로 공손향을 바라보았고, 해권이 무표정으로 말하였다.
“아직 숨은 붙어 있으나, 곧 죽을 거요. 맥이 약해서 더는 갈 수 없고, 의원에게 데려갈 처지도 못 되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살려야 해. 살려야 한다고!”
공손향이 부정하며 우문도웅의 곁으로 말을 바짝 붙였다.
“아직 살아 있어. 살아 있다고!”
우문도웅의 맥을 짚으며 공손향이 주위 모든 이와 시선을 하나 하나 맞추었다.
그녀의 눈은 도와 달라 말하고 있었으나, 그 누구도 그녀를 도와줄 처지가 못 되었다.
“제발… 제발! 부디, 살려 주시오. 살려 주시오. 우리 주군을… 살려 주시오. 의원에게 데려가 주시오. 제발…….”
공손향이 간절히 애원하며 울부짖으니, 우문도웅의 의식이 돌아와 시력 잃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공녀… 나와 연을… 끊었다 말하더니, 어찌… 나의 죽음을… 애달파 하시오? 허허허…….”
“주군! 의식을 찾으셨습니까?”
공손향이 기뻐 소리쳤으나, 야수는 여전히 침통한 표정이었다.
“나는… 틀렸소. 갈 곳 잃은… 그대가 걱정이구려.”
우문도웅이 오히려 공손향을 걱정하여 말하고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말을 타기 어려워 보이는군.”
개소문이가 말 위에서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니, 온동이 안쓰러워하면서도 고구려의 적이었던 이들을 더 도와야할지 망설였다.
“형님, 어떡하지요?”
“사람을 살리는데, 망설임은 필요가 없지.”
개소문이가 잘라 말하며, 공손향을 도와 우문도웅을 살리고자 했다.
“일단 수레를 구해와야겠습니다.”
말에서 내리며 개소문이가 말하자, 공손향이 기뻐 소리쳤다.
“야수! 수레를! 수레를 가져와!”
이에, 해권도 말에서 내리며 말하였다.
“수레를 가져온들, 어찌 의원에게 데려갈 수 있겠나. 연 공자, 포기하게.”
자신이 누구인지 해권이 알아보고 말하니, 개소문이가 놀라 물었다.
“나를 아시오? 그대는 누구시오?”
행군원수부 앞에서 사투를 벌이며 함께 사지를 뚫었으나, 추격을 피해 도망치기 바빠 정작 서로가 누구인지 통성명조차 나누지 못했으니, 놀람은 당연하였다.
“나는 요동 서부총관 을지문덕 공을 모시는 해권이라 하네.”
해권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개소문이가 머리 숙여 예를 표하였다.
“해모수의 후예셨군요.”
개소문이의 말에 온동이 해권에게 시선을 옮겼다.
“해모수의 후예?”
인자했던 해진을 떠올려 물으니, 해권이 온동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그렇다. 나는 조의선인의 큰 스승인 해진의 아우다.”
해권이 해진의 아우라 밝히자, 그동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온동이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였다.
“해진… 해진님이… 해진 스승님이…….”
“안다. 팽가장의 참극을 알고 있다. 형님의 시신을 수습하고, 연공자와 너의 행방을 찾고자 했던 것인데, 저자 때문에 잡혔구나. 허허.”
해권이 온동의 머리를 자상히 쓰다듬으며 말하니, 말 위에 앉은 팽무일이 콧방귀를 뀌었다.
“쳇!”
“제자는 뭔 짓을 한 것이냐?”
개소문이가 엄히 물었으나, 팽무일은 여전히 콧방귀만 뀔 뿐 답이 없었다.
이에, 해권이 허허 웃으며 말하였다.
“서로 오해가 있었다. 허허허.”
해진과 독고선, 팽무성 등은 목이 베인 채 머리 없이 행군원수부 앞에 내걸려 있었다.
팽가장 인물들이 모두 죽었으니, 감히 행군원수부 앞에 내걸린 시신에 손을 댈 이가 없으리라 여겨 밤에는 지키는 군사조차 없었다.
이를 파악한 해권은 해진과 독고선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야심한 밤을 노려 수나라 군사로 변장하여 잠입했으나, 이미 먼저 온 이가 있었다.
동생 팽무성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수나라 군사로 변장하여 잠입한 팽무일이었다.
팽무일은 해권이 행군원수부 군사라 생각하여, 일격에 해치우고 팽무성의 시신을 수습하고자 했으나, 안타깝게도 쉽게 제압될 해권이 아니었다.
해권도 무턱대고 공격하는 팽무일을 수나라 군사로 여겨 살수를 펼쳤으나, 팽무일을 결코 제압할 수 없었다.
결국 서로가 살수를 펼치는 사이, 에워싼 수나라 군사들이 화살을 날려 이들을 제압하게 된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제길!”
팽무일이 해권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파천신검의 방어 초식은 매우 훌륭하였지만, 공격 초식이 전무해 해권을 제압하지 못한 것이 못내 억울한 모양이었다.
해권이 팽무일을 힐끔 쳐다보고는 개소문이를 보며 물었다.
“연 공자, 저자가 펼친 무공이 매우 훌륭하더군. 대단한 방어였지. 헌데, 우리 조의선인의 보법을 펼치더군. 어찌된 영문이지?”
해권의 물음은 담담하였으나, 온동은 말투 속에서 살기를 느꼈다.
‘조의선인의 무공은 조의선인이 아니면 익힐 수 없어. 해권님이 형님을 벌하실지도… 방법을 찾아야 해. 거짓이라도 변명거리를 찾아야 해…….’
온동이 개소문이를 돕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던 그 순간.
개소문이가 너무도 쉽게 답하였다.
“제가 가르쳤습니다.”
“뭐라? 네가?”
개소문이를 대하는 해권의 태도가 어느덧 바뀌었다.
“그렇습니다.”
“조의선인이 아닌 자는 조의선인의 무예를 익힐 수 없음을 알고 있을 터.”
해권의 두 눈이 살기로 빛났다.
이에, 개소문이가 담담히 답하였다.
“저 역시 조의선인의 수련을 하였으니, 모를 리 없습니다. 하여, 저자를 조의선인에 귀의하게 하여 제자로 받아들여 백두검법의 보법과 심법을 가르쳤습니다.”
“뭐라? 조의선인에 귀의하게 하였다고?”
해권이 어이없어 그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웃은 해권이 아이답지 않게 체구가 크고 당당한 개소문이를 위아래로 살피더니, 인자하게 말하였다.
“아직 네가 아이라 세상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였구나. 조의선인은 너와 같은 아이가 귀의하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란다.”
개소문이에게 말하는 해권의 표정이 꽤 누그러져 있었다.
“하오면, 제가 큰 죄를 지었군요. 벌을 받겠습니다.”
개소문이의 말에 해권이 껄껄껄 웃더니, 아직도 말 위에 앉은 채 노려보는 팽무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썩 내려와 예를 갖추라. 조의선배 해권이다.”
해권이 조의선인의 스승이라 밝히니, 팽무일이 쭈뼛쭈뼛 말에서 내려왔다.
‘저자의 무공이 강하긴 해도 나보다 약하던데, 신분이 높다고 나를 마구 하대하는구나. 아무튼, 지금은 시끄럽게 다투지 않는 게 좋을 듯하니, 뭔 소리를 하는지 두고나 보자.’
팽무일이 머리를 굴리며 예를 올리니, 해권이 그를 천천히 살폈다.
민둥머리와 검은색 조복을 입은 모양새가 조의선인가 흡사했다.
“그 머리는 조의선인에 귀의하기 위해 일부러 자른 건지, 빠진 것인지 모르겠으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행군원수부에 잠입한 그 용기를 높이 평하여 조의선인의 귀의를 받아들이노라. 너는 이제 조의선인의 선배인 연개소문의 정식 제자이니라.”
이에, 개소문이와 온동이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팽무일은 자신이 정식으로 조의선인에 귀의한 것이 좋은 일인지 알 수는 없으나, 크게 나쁠 것도 없다 생각하여 선심 쓰듯 머리 숙여 예를 올렸다.
“감읍하나이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팽무일의 말투에도 해권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사실, 정보를 취합하는 것이 업인 해권은 팽무일이 어떤 인물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자가 아무리 간악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여러 사람 앞에서 개소문이를 스승으로 모셨으니,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헛된 짓은 삼갈 것이다. 만약 이자가 개소문이를 업신여기고, 조의선인의 명예를 실추할 경우, 모든 조의선인들이 나서 척살하면 그만이다.’
해권도 나름의 판단으로 팽무일을 개소문이의 제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또한 혼자 힘으로 대적하기 어려운 팽무일을, 조의선인들을 모아 척살할 명분도 마련한 셈이다.
한편으로는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중원인의 특성 상, 여러 사람 앞에서 개소문이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으니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리란 계산도 지녔다.
명예 따위는 개나 줘버린 팽무일이었으나, 하북의 검술명가 팽가장의 장자였기에 이런 예의는 익힌 터라, 사람들 앞에서 개소문이를 함부로 대하기 더욱 어려워졌다.
‘이미 스승으로 모신 거 또 확인해 모신들 대수인가. 무예나 더 익힐 수 있다면 그만이지.’
팽무일이 얼굴을 붉히며 애써 위안했다.
‘내 비록, 가문에서 쫓겨난 신세지만! 우리 팽가장을 불태우고 몰살시킨 놈들에게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이 녀석보다 더한 놈도 스승으로 삼고 수련해야 한다.’
팽무일이 이런 다짐을 마음 속 깊이 새길 때, 공손향이 소리쳐 말하였다.
“인사는 그만들 하시고. 우리 주군을 구해주시오!”
이에, 해권과 야수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였다.
이미 적으로 만나 겨뤄 보았던 사이였기에, 야수의 표정이 무척 껄끄러운 듯했다.
끝내 야수가 해권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구고는 소리 죽여 부탁하였다.
“우… 우리. 주군을. 구해주시오.”
이에, 해권이 허허 웃으며 말하였다.
“허허, 이것 참… 그래, 어차피 사지를 헤매는 처지인데, 더 나빠질 것이야 없겠지. 어디 한번 의원을 찾아보자.”
마침내 해권이 결정을 내리니, 온동이 쇼락에게 말을 전하였다.
“쇼락님, 수레를 구해오실 수 있으십니까?”
아직 해도 뜨지 않아 사방이 어두워 수레를 구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쇼락은 아무런 이견 없이 온동의 부탁을 선선히 들어주었다.
“걱정 마라. 수레는 내가 구한다.”
말을 마친 쇼락이 어둠 속으로 말을 몰아 자리를 떠났다.
“여기서 기다리면 쇼락님이 반드시 수레를 구해오실 겁니다. 잠시 쉬고 계시지요.”
온동이 해권과 개소문이에게 말하니, 공손향이 안심해 한숨을 내쉬었다.
야수가 공손향을 대신해 온동에게 감사를 표하였다.
“소년. 고맙… 다.”
숱한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야수는 우문도웅이 살기 어려움을 알고 있었으나, 살리고자 애원하는 공손향의 마음도 이해하고 있었다.
‘공녀는… 이제. 세상 어디에도. 의탁할… 곳이 없다. 그래서… 주군의 죽음을 부정하는… 거야.’
북주 잔당과 돌궐을 도와 고구려와 전쟁을 치르고, 수의 태자 양광을 도와 고구려와 전쟁을 치르었으나, 결국 세상 어디에도 몸 둘 곳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돌궐, 고구려, 수 모두와 적대적 관계가 된 공손향의 처지를 안타까이 여기며 야수가 개소문이와 온동에게 시선을 옮겼다.
“목숨을… 구해준, 인사가… 늦었다. 내 목숨의… 빚은, 너희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 갚겠다. 반드시.”
이에, 해권이 눈을 반짝이며 말하였다.
“북주 제일 무사, 야수. 나는 그대가 결코 허언을 하리라 생각하지 않소. 약속을 지킬 수 있을 때까지, 이 두 아이의 곁을 떠나지 않기 바라오.”
해권의 말에 야수가 당황하여 할 말을 찾지 못하자, 팽무일이 피식 웃었다.
‘실로 이해타산이 빠른 자로다. 저 무시무시한 야수에게 아이들을 지키게 하다니… 사지를 헤매는 나로선 나쁠 것은 없다.’
추격대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몰려들 수나라 군사들이 두려운 팽무일로선 해권의 말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야수 대형은 허언할 사람이 아니지. 북주 제일검이 그런 사람일 리가 없다고.”
팽무일까지 거들고 나서니, 야수는 더욱 당황하여 변변한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