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주유천하(周遊天下) (5)
진숙이 쓰러진 이십팔숙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검을 떨구고는 뒤 돌아 월도를 쥔 군사에게 다가갔다.
“그 월도 이리 주시게.”
월도를 받아 든 진숙이 이십팔숙을 지나 개소문이 앞으로 발을 옮겼다.
광동 진가장의 진수는 검이 아닌 월도로 오의는 장주에게만 전해지고 있었다.
진가장 내에 그 위치가 높은 이십팔숙조차 오의를 익히지 못하였으나, 진가장의 장자인 진숙은 월도를 사용하는 진가도법과 진가곤을 전수 받을 수 있었다.
“이십팔숙은 어서 치료하시오.”
진숙이 소매에서 조그만 약병을 꺼내 이십팔숙 수장에게 건넸다.
광동 진가장은 남방계로 중원에 그 위명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의학에도 매우 능통하였다.
이십팔숙들이 몸을 추스르고 뒤로 물러나 치료를 하자, 진숙이 온동과 개소문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온달의 일가인 너는 이미 알고, 너는 누구냐?”
온동과 개소문이를 번갈아 살피며 물었다.
이에 개소문이가 가슴을 펴고 당당히 답하였다.
“나는 갓쉰동이다! 너는 누구더냐?”
“갓쉰동? 그… 네가 태자 전하를 구한 그 갓쉰동이냐?”
진숙이 놀라 물으니, 개소문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하였다.
“그런 일이 있었지.”
개소문이의 답에 진숙은 물론 한왕 양양도 놀라 태자 양광을 바라보았다.
‘형님이 정녕 아버지께 죽임을 당하겠구나.’
태자 양광도 한왕이 자신을 갓쉰동과 엮어 죄를 만드리라 생각하여 그저 허허 웃었다.
진숙이 태자 양광을 힐끔 쳐다보고는 개소문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태자 전하를 구한 공을 생각하여, 고신당하지 않고 죽게 하겠다.”
이 말은 사로 잡혀 한왕 양양에게 고문당한 후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고, 이 자리에서 자신이 명을 끊어 주겠다는 의미였다.
한편으로는 개소문이와 엮여 죄를 덮어 쓰게 될 태자 양광까지 배려한 말이었다.
이에 한왕 양양이 피를 내뱉으며 소리쳤다.
“퉷! 사로잡으라! 반드시 저것들의 배후를 캐야하느니, 반드시 사로잡으라!”
이 말은 반드시 태자 양광과 개소문이를 엮겠다는 의미였다.
양소가 눈살을 찌푸렸으나 태자 양광은 여전히 허허 웃을 뿐이었다.
사방에서 군사들이 에워싸고 진숙이 앞을 막으니, 개소문이도 한 걸음 나아가며 검을 날렸다.
“길을 비켜라!”
개소문이가 힘껏 날린 검이 화살처럼 날아 진숙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진숙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월도를 쥔 채 몸을 옆으로 틀며 왼손으로 큰 원을 그리며 날아드는 검을 눈앞에서 낚아챘다.
매우 부드러우면서도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마치 태극 문양의 윗부분을 왼손으로 그려내는 듯한 동작이었으나, 상대의 힘에 맞서지 않고 부드러움으로 무력화하는 절정의 무예였다.
“아니, 이런…….”
비검술을 가볍게 무력화한 진숙의 몸놀림에 개소문이가 놀라 당황했다.
그러자 온동이 매우 가볍게 파산귀검을 펼쳤고, 이내 흙과 돌을 솟아오르더니, 허공에 떠오른 돌멩이를 낚아채 그대로 날렸다.
비검술을 발휘해 날린 돌멩이가 쏜살같이 자신을 향해 날아드니 진숙이 또다시 몸을 살짝 옆으로 틀고는 왼손으로 허공에 원을 그렸다.
진숙의 왼손이 태극 문양을 그려내며 돌멩이의 위력을 무력화해 낚아채려 했으나, 돌멩이는 전혀 속도가 줄지 않고, 오히려 진숙의 왼손을 강하게 때렸다.
퍽!
손바닥이 뚫리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 오자 진숙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뭘 자꾸 잡으려고 하냐. 나 같으면 피하겠다.”
온동이 진숙을 놀리며 다시 파산귀검을 펼쳤다.
진숙의 발밑까지 땅이 파이고 흙과 돌이 솟아올랐다.
갑작스럽게 시야가 흐려진 진숙이 당황한 순간 흙먼지를 뚫고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퍽!
진숙의 이마에 정확히 명중한 돌멩이가 피를 머금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분노에 겨운 진숙이 피로 물든 얼굴로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이!”
진숙의 월도가 바람을 가르며 온동의 머리를 노렸다.
이에, 개소문이 파천신검을 펼치며 온동을 지키자, 진숙의 월도는 허무하게도 튕겨 나왔다.
그리고 이틈을 노려 온동이 또다시 돌멩이를 날렸다.
퍽!
진숙은 안면이 뭉개지는 듯한 고통에 휘청휘청 뒷걸음질하다가 그만 엉덩방아를 찧었다.
개소문이가 온동의 앞을 지켜 파천신검을 펼치고, 온동이 파산귀검 보법을 밟으며 비검술을 발휘해 공격하니, 그 위력이 배가 된 것이다.
허무히 진숙이 앉은 채 의식을 잃자, 이십팔숙이 크게 노하여 다시 달려들었다.
이미 예상했다는 듯 온동이 땅에 떨어진 병장기를 마구 잡아 날렸다.
이십팔숙의 비명이 또다시 울리고 격분한 한왕이 소리쳐 명하였다.
“모두 달려들어 사로잡으라!”
뒤에 서 있던 조피골이 한왕의 명을 받아 하오문의 졸개들에게 소리쳤다.
“하오문의 제자들은 저 오만방자한 아이들을 잡아오너라!”
하오문의 졸개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온동과 개소문이에게 달려들었고, 군사들도 창을 앞세워 달려들었다.
“제자야!”
개소문이가 급히 소리치며 파천신검으로 방어를 펼치니, 팽무일도 이를 따라하며 방비를 하였다.
개소문이는 그동안 파천신검 수련에 힘써 본인은 물론이요.
주위까지 단단히 지킬 수 있었기에, 지치고 몸이 상한 야수와 해권, 쇼락 등이 그 틈에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어린. 어린아이가. 정말, 정말… 대단하군.”
야수가 박도를 휘둘러 칼날에 묻은 피를 허공에 뿌리고는, 기세 좋게 달려드는 하오문의 졸개들을 가볍게 베었다.
쇼락과 해권도 온 힘을 다해 월도를 휘두르며 맞섰지만, 베고 또 베어도 끝이 없는 군사들의 수에 점점 지쳐만 갔다.
야수가 휘청대는 쇼락과 해권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서며 박도를 휘둘렀으나, 이내 곧 그의 몸에도 창이 박히고, 칼날이 살점을 후벼팠다.
“너무. 너무… 많구나.”
야수가 힘겹게 중얼거렸다.
혼자라면 경공술을 펼쳐 도주할 수 있었으나, 공손향과 우문도웅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또한 자신을 돕는 두 아이들도 두고 갈 수 없었다.
“사부! 길을 뚫어야 합니다.”
팽무일이 숨을 헐떡이며 말하였다.
그러나 겹겹이 에워싼 포위를 뚫기란 말처럼 쉽지 않았다.
개소문이와 팽무일의 파천신검도 점점 힘이 빠져 가던 그 순간.
한왕 양양이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어느새 온동이 포위망을 뚫고는 멀리 떨어진 한왕 양양의 목에 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문술을 비롯한 한왕 주위 장수들과 호위병들이 온동의 접근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파산귀검 초식을 펼치며 보법을 밟은 온동이 모두 제치고 미끄러지듯 접근해 마침내 한왕의 목에 검을 들이댄 것이다.
체구가 작은 온동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만! 그만!”
온동의 검날이 목을 찔러오자, 한왕 양양이 급히 소리쳤다.
목이 살짝 베이고, 피가 흘렀다.
고통은 심하지 않았지만, 칼날이 언제 목 깊이 들어올지 몰라 한왕이 기겁해 연신 소리쳤다.
“그만! 다들 공격을 중지하라! 그만!”
한왕의 명에 공격이 멈추자, 쇼락과 해권은 월도로 땅을 짚으며 몸을 바로잡았다.
개소문이도 한숨 돌리고는 팽무일에게 명하였다.
“제자는 저들을 지키라.”
개소문이가 공손향과 우문도웅을 가리켰다.
이에 팽무일이 명을 받아 우문도웅을 번쩍 안아들었다.
체구는 작았지만 팽무일의 완력은 상당하여 우문도웅을 안아들고도 힘든 기색조차 없었다.
“말을 대령하고, 길을 열어라!”
아이답지 않게 온동이 매섭게 외치니, 한왕이 바로 받아 명하였다.
“말을… 말을 대령하라!”
이때 미리 준비했던 준마 여덟 필을 양현감이 끌고 나오며 답하였다.
“대령하였나이다.”
이 광경에 양소가 태자 양광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태자 전하께서도… 준마를 준비하라 하시면서 무리한 명이라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 누구도 이런 일을 예상하시지 못하였으니, 세상일이란 참으로 알 수 없구나.’
양소의 생각처럼 태자 양광은 준마를 준비하라 명하였지만, 실상 그 준마에 개소문이 일행을 태울 방책은 없었다.
양현감이 끌고 온 준마에 개소문이 일행이 오르니, 태자 양광이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미리 준비하니, 나름 사용처가 생기는구나. 그래, 못을 파야 개구리가 꼬이듯, 일은 벌려야 결과가 생기는 게지.”
한왕 양양의 목에 검을 들이댄 온동이 말에 오르지 못하자, 개소문이가 온동의 곁으로 말을 끌고 와 말하였다.
“동아, 말에 오르거라. 한왕 그대가 동이보다 먼저 말에 오르고.”
개소문이의 검마저 자신의 목에 닿자 한왕 양양은 어쩔 수 없이 말에 올라야 했다.
이어서 온동이 한왕 양양의 뒤에 오르자 개소문이가 말고삐를 끌며 엄히 말하였다.
“추격하지 마라! 허튼짓은 한왕의 명줄만 끊게 될 뿐이다!”
이에, 한왕의 뒤에 앉은 온동이 한왕의 목에 검을 들이대며 말하였다.
“길을 열라 말해!”
겁에 질린 한왕이 큰 소리로 명하였다.
“길을 열거라!”
비록 아이들의 검이었으나, 절정의 고수들조차 감당해 내지 못한 아이들이었기에, 한왕 양양이 두려워함은 당연하였다.
허무히 한왕을 바라보며 문술이 명을 받았다.
“길을 내어 주거라!”
문술의 명에 길이 열리자, 여덟 필의 말이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달리는 말 위에서 개소문이가 뒤를 돌아보며 크게 소리쳤다.
“쫓지 않으면, 한왕은 놓아 줄 것이다! 허나, 추격한다면 한왕의 목을 벨 것이다!”
멀어져 가는 한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문술이 어쩔 줄 몰라 허둥대니, 태자 양광이 자리에서 일어나 명하였다.
“추격대를 꾸려라! 한왕을 구해야 한다. 추격하지 않으면 저들은 한왕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추격하라!”
이에 문술이 급히 소리쳤다.
“말을 끌고 와라! 당장 추격을 시작한다.”
이때, 소란이 벌어지기 전 행군원수부 안으로 들어갔던 채휘와 공지열이 나오니, 문술이 급히 달려가 아뢰었다.
“한왕 전하께서 죄인들에게 잡혀가셨나이다.”
“뭐라? 아니,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채휘가 기가 막혀 물으니, 문술이 아무런 대답도 못하였다.
이에, 태자 양광이 나서며 말하였다.
“채 장군, 지금은 문책이 중요한 게 아니오. 당장 추격을 해야 하오.”
“명을 받습니다.”
채휘가 태자 양광의 명을 받고는 문술과 함께 군을 이끌고 추격을 하였다.
추격대가 떠나자, 태자 양광이 빙그레 웃으며 양소에게 말하였다.
“추격하면 죽인다 했는데, 내 아우가 죽을지 살지 궁금하구려.”
재미있는 내기라도 즐기는 듯 태자 양광이 말하니, 양소가 나지막이 답하였다.
“아쉽게도 한왕은 살 것입니다.”
“그렇소?”
“그 아이들은 이곳에서 아무도 죽이지 않았나이다. 어른 흉내를 내며 행동한들 그저 아이일 뿐입니다.”
온동과 개소문이의 공격으로 쓰러진 자들을 가리켰다.
이십팔숙을 비롯하여 모두 크게 상하긴 했어도 죽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하, 아이들이란… 군사는 아이들이 한왕을 해치지 않으리라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길을 열어 주게 하였구려. 허허허.”
태자 양광이 기분 좋게 웃으니, 양소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애초에 온동에겐 살생 의지가 없었으니, 인질은 무의미했다.
그러나 이를 알고 있던 이는 오직 양소뿐이었기에, 온동 일행에겐 행운이었다.
양소의 예측대로 한 시진도 못 되어 한왕 양양이 추격대와 함께 돌아왔다.
온동과 개소문이 일행의 말은 양현감이 준비한 준마였기에 추격대와 이미 거리를 벌린 상태였으나, 한왕 양양은 채휘에게 반드시 사로잡아 오라 엄히 명하였다.
“아우가 살아 돌아와 다행이구나. 무척 고생했겠구나.”
태자 양광이 다가와 위로하니, 한왕 양양이 얼굴을 붉히며 답하였다.
“이 모두가 형님 덕분이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그리 판단하실 것입니다.”
이 말 속엔 반드시 갓쉰동과 태자 양광의 관계를 엮어 황제 양견에게 아뢰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에 태자 양광이 껄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하하하. 그래, 모두가 내 덕이다. 하하하.”
전쟁은 어느덧 고구려와 수의 전장에서 대륙으로 옮겨 붙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