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주유천하(周遊天下) (3)
개소문과 온동이 놀라 단 위를 바라볼 때, 행군원수부의 관문으로 창검을 치켜든 한 무리의 군사들이 나왔다.
그리고 뒤를 이어 한왕 양양이 장수들과 무림 고수들을 대동하여 모습을 드러냈다.
팽가장에서 살육을 펼친 제갈여와 단목순, 진숙, 조피골 등의 모습에 온동은 가슴 속 가득 차오른 분노를 간신히 억눌러야 했다.
한왕 양양의 행차 뒤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태자 양광이 양소와 함께 나왔는데, 양현감이 보군을 이끌고 호위하였다.
황제 양건이 있는 장안성을 제외하고는 현재 이곳 탁현이 수의 중심임을 보여주는 행차인 셈이었다.
지난 전쟁에서 벼락출세한 문술이 기세 좋게 외쳤다.
“모두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려라!”
아직 전시 중임을 감안하여 간소화한 행차였으나, 구경을 나온 백성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편히 구경하게 하라.”
한왕 양양이 크게 인심을 베푸니, 문술이 다시 호령하였다.
이 행군원수부에서만큼은 한왕의 위세가 태자 양광을 넘고 있었으며, 향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시 이 위세는 더욱 강대해질 것이 분명하였다.
태자 양광은 한왕과 조금 거리를 두고 마련된 의자에 앉아 묵묵히 단 위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단 위에 무릎 꿇린 공손향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태자 양광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자 전하! 소녀, 전하를 도와 전장을 누볐사옵니다. 이 몸! 이미 북주와 연을 끊었음을 위충 총관께서 태자 전하께 말씀하신 바 있고, 태자 전하께서도 저를 받아들이며 공을 세워 과를 덮으라 하셨나이다. 저는 더 이상 우문도웅과 그 어떤 교류도 없었나이다. 부디, 해량하시옵소서!”
목이 터져라 공손향이 외쳤으나, 태자 양광은 그녀를 그저 말없이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에, 한왕 양양이 껄껄껄 웃으며 일어나 꾸짖었다.
“네, 이년! 감히 태자 전하까지 물고 늘어질 셈이더냐? 우문도웅을 포함한 너희 북주 잔당을 추포한 사실을 황제 폐하께도 이미 아뢰었고, 황제 폐하께옵선, 애써 장안성으로 압송할 필요 없이 너희의 명줄을 끊으라 명하셨느니라.”
한왕 양양이 태자를 힐끔 쳐다보고는 비웃듯이 공손향에게 다시 말하였다.
“태자 전하께서 고작 너를 살리기 위해 황제 폐하의 명을 거역할 것 같더냐?”
이미 태자 양광은 위층이 천거한 공손향을 구명하기 위하여 황제 양견에게 읍소하였으나 아비의 회신은 무척이나 간결하였다.
—영주를 잃은 네가 북주 잔당 여인의 목숨을 걱정할 처지더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자 양광은 동생인 한왕 양양에게도 공손향을 살리기 위해 읍소하였다.
이에, 한왕 양양은 좋은 말로 아이 달래듯이 말하였다.
“태자 전하, 아니 형님. 아버지를 모르십니까? 저 여인의 목숨이 중한 게 아닙니다. 형님, 저 여인을 제가 살려 준다면, 황제 폐하께옵선 반드시 형님과 저 여인의 관계를 의심할 것입니다. 버릴 것은 버리셔야 하옵니다.”
따르는 이가 적은 태자 양광으로선 수하들이 사라질 때마다 그 세가 더욱 약해져만 갔고, 이를 기뻐하는 이가 바로 한왕 양양이었으니, 요서에 세를 지닌 공손향을 북주 잔당으로 엮어 제거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천추산에서 패해 도주한 공손향은 야수와 함께 태자 양광을 돕기 위하여 탁현으로 왔었다.
이때 마침 탁현 일대를 휘저으며 징집과 징발하던 군사들에게 숨어 있던 우문동웅이 추포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왕 양양이 행군원수부 군사들을 풀어 북주 잔당을 모두 추포하라 명하니, 태자 양광을 만나기 위해 행군원수부를 찾은 공손향이 붙잡히게 된 것이다.
“나는 억울하오! 내 발로 걸어 행군원수부에 들어왔거늘, 어찌 아직도 나를 북주 잔당이라 모는 것이요? 한왕 전하, 소녀는 쓰임새가 많사옵니다! 아직도 요서와 요동에서는 소녀의 일가가 그 힘을 지니고 있사오니, 반드시 고구려 정벌에 도움이 될 것이옵니다!”
공손향이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하다가 간절히 애원하였으나, 한왕 양양의 표정은 싸늘하였다.
“형을 집행하라.”
한왕 양양이 차갑게 명을 내리니, 문술이 단 위 참형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죄인들의 참형을 집행한다!”
북이 울리고, 커다란 월도를 쥔 참형 집행인들이 무릎 꿇린 사람들 뒤에 섰다.
월도의 날이 햇빛에 시퍼렇게 빛났다.
좌에서 우 순서대로 쇼락, 팽무일, 해권, 우문도웅, 공손향이 참형을 기다려야 했다.
쇼락의 뒤에 선 참형 집행인의 월도가 높이 치켜 올라가자 온동이 한발 앞으로 나가며 개소문이를 불렀다.
“형님…….”
온동의 눈빛은 두려움 따위에 굴하지 않고 있었다.
“아우는 물러나 있게. 아직 몸이 성하지 않으니, 나서면 안 되네.”
개소문이가 온동의 어깨를 뒤로 잡아끌며 말하였다.
등에 맨 다섯 자루의 검과 허리춤에 찬 검 두 자루에 의지해 개소문이가 무겁게 발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이때, 행군원수부 앞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들의 어깨와 머리를 밟으며 누군가 날듯이 처형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머리는 봉두난발하였고, 커다랗고 육중한 두 자루의 박도를 지닌 사내였는데, 눈빛이 매우 흉폭하였다.
“누구냐?”
놀라 묻는 문술에게 답도 하지 않고, 훌쩍 몸을 날려 단 위로 오른 사내가 거침없이 박도를 휘둘렀다.
참형 집행인들의 팔이 월도를 쥔 채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으아악!”
팔이 잘린 참형 집행인들의 비명이 울리고, 문술의 호령으로 군사들이 단 위로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단 위로 머리를 올림과 동시에 두 자루 박도에 머리가 갈리고 정수리가 쪼개지기 바빴다.
“뭣들 하느냐!”
한왕 양양이 놀랍고도 두려워 소리치니, 창검을 든 군사들이 일제히 단을 에워싸고 올랐다.
이에 사내가 크게 원을 그리며 단 위를 빙그르 돌았다.
“으악!”
“아악!”
손이 잘리고 얼굴이 베인 군사들이 단 아래 쌓여만 갔다.
“야수…….”
태자 양광이 소리 죽여 중얼거리자, 뒤에 서 있던 양소가 나지막이 말하였다.
“전하, 안으로 드시지요. 누가 죽든, 그 죽음을 굳이 전하께옵서 지켜보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아니오. 나는 저 야수란 사내가 참으로 마음에 드오. 그가 죽든 그가 누굴 구해 여길 나가든, 지켜보고 싶구려.”
태자 양광이 시선을 고정한 채 답하니, 양소가 양현감에게 명하였다.
“돌발 상황이다. 변고가 생기지 않도록 전하의 호위에 만전을 가하라.”
양소의 심려와 달리, 야수는 태자 양광의 목숨을 노리지 않았으니 양현감의 호위는 크게 필요가 없었다.
두 자루 박도를 휘두르며 단 위를 야수가 장악하였으나, 이내 곧 행군원수부에서 궁수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에, 한왕 양양이 손을 들어 궁수들을 제지하였다.
“사로잡으라. 저놈이 뭐하는 놈인지 파악하고 죽여도 늦지 않다.”
비록 야수가 단 위에서 활개치고 있었으나, 행군원수부 앞 광장에서 자신의 위세를 낮추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는 무엇 하는 놈이더냐?”
한왕 양양이 앉은 채 묻자, 야수가 단 위로 오르던 군사의 목을 베어 머리통을 한왕에게 던지며 답하였다.
“북주 제일검, 야수다!”
주군인 우문도웅과 공손향을 구하기 위해 홀로 처형장에 뛰어든 야수의 두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야수라… 북주 제일검?”
한왕 양양이 뒤에 선 제갈여를 돌아보며 물으니, 제갈여가 두 손을 모은 채 앞으로 나오며 답하였다.
“소인이 저자의 재주를 시험해 보겠나이다.”
“오호라! 제갈세가의 신기로 저자를 제압하려는 게요?”
한왕이 흡족해 웃으니, 제갈여가 짧게 예를 올린 후 단을 향해 내달리다가 몸을 날렸다.
가볍게 솟구친 제갈여가 단 한 쪽에 사뿐히 내려앉으니, 야수의 눈빛이 더욱 사나워졌다.
“누구도 오르지 못한다!”
야수가 제갈여를 향해 소리치며 달려드니, 제갈여가 빙그레 웃었다.
“누구도 오르지 못한다 하여 그대들이 이곳을 빠져나갈 수는 없지 않소? 하하하.”
제갈여의 말처럼 아직도 단 아래는 군사들이 에워싸고 있었으며, 단 위에선 그 누구도 결박조차 풀지 못한 상태였다.
눈치 보던 팽무일이 몸을 돌려 우문도웅에게 자신의 손을 보이며 말하였다.
“내 손 좀 풀어주시오.”
이에 우문도웅도 몸을 돌려 뒤로 결박된 손으로 팽무일의 결박을 더듬어 풀고자 애썼다.
야수와 마주한 제갈여가 결박을 풀고자 애쓰는 우문도웅을 힐끔 쳐다보더니, 가볍게 털듯 소매를 흔들었다.
이 광경에, 팽가장의 참극이 떠오른 온동이 크게 소리쳤다.
“은하침통!”
제갈여가 날린 수십 개의 은빛 침을 향해 야수가 박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박도의 검풍에 휘말린 은빛 침들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은빛 침을 모두 날리지 못하였는지, 우문도웅이 비명을 질렀다.
“아악!”
두 눈에 침이 박혀, 검은 동자가 사라져 가며 피를 뿜고 있었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도 우문도웅의 손은 멈추지 않고 마침내 팽무일의 손을 결박한 밧줄을 풀고야 말았다.
빛이 꺼져 가듯 시력을 잃어가는 우문도웅이 팽무일을 향해 말하였다.
“공손향… 공녀의 결박도 풀어주시오.”
이에 팽무일이 차가운 시선으로 거절하려다가 뭔가 떠올랐는지, 공손향의 결박을 풀어주고는 쇼락과 해권의 결박도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이들에게 월도를 쥐어주며 말하였다.
“이곳을 뚫고 나가야 하니, 살고 싶으면 죽을힘을 다해 포위를 뚫으시오.”
아마도 이들의 힘을 빌려 도주할 모양이었다.
우문도웅을 부축한 공손향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니, 팽무일이 소리쳤다.
“그럼 뚫으시오!”
이에 해권이 앞장서고 쇼락이 그 뒤를 따르며, 공손향이 우문도웅을 부축해 단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팽무일은 이들과 정 반대로 몸을 날리며 소리쳤다.
“힘내시오!”
팽무일은 행군원수부 담장을 밞고 한 번 더 솟구쳤으나, 궁수들의 화살이 그의 뒤를 따랐다.
“악!”
다리와 등에 화살이 박힌 팽무일이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크게 몸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잽싸게 몸을 굴려 공손향 곁으로 이동한 후, 히죽 웃었다.
“나도 좀 부축해 주시구려.”
“닥쳐라!”
괜히 공손향의 호통만 들은 팽무일이 다리에 박힌 화살을 뽑으며 말하였다.
“뭐, 그럼 혼자 걷지. 자, 이제 뚫고 나가 보자고요. 다들 힘냅시다!”
우문도웅과 공손향이 단 아래로 뛰어내린 것을 확인한 야수가 박도를 맹렬히 휘두르며 제갈여에게 달려드니, 제갈여도 소리비도를 꺼내 들고 맞섰다.
쾅!
그러나 야수의 강렬한 일격에 소리비도가 허공에 붕 뜨고 제갈여도 야수의 발길질에 채여 단 아래로 처박혔다.
이에, 야수가 단 아래로 몸을 날리니, 진숙이 달려와 앞을 막았다.
“광동 진가장의 진숙이라 하오. 쉽게 가시도록 두고 볼 수야 없어 이렇듯 대형의 앞을 막게 되었소이다.”
한껏 멋을 내며 격식차려 예를 올리는 진숙의 말 따위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야수가 맹렬히 달려드니 그 기세가 매우 사나워 자신도 모르게 진숙이 한 발 물러났다.
이에 진가장의 이십팔숙이 진숙을 돕기 위해 날아들어 야수에게 검을 겨누었다.
“길. 길을. 죽고 싶지. 않다면. 길을 열어라!”
야수가 이를 바드득 갈며, 이십팔숙을 향해 달려들었다.
제법 거리를 두고 있었으나 박도의 검풍에 자신들의 옷자락이 휘날리자, 이십팔숙의 얼굴에 두려움이 어렸다.
“이십팔숙, 저놈의 기세가 상당하니… 일격에 꺾어야 하오.”
진숙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하니, 이십팔숙이 검을 고쳐 잡고 일제히 달려들 채비를 하였다.
이 순간, 하오문의 조피골이 공을 세우기 위해 우문도웅과 공손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들은 우리가 잡는다!”
이에 하오문의 졸개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니, 해권과 쇼락이 월도를 휘두르며 맞섰다.
그러나 하오문의 졸개들뿐만 아니라 군사들까지 달려드니 해권과 쇼락으로선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야수가 돕기 위해 진숙과 이십팔숙에게서 박도를 거두고 몸을 날렸다.
“이때다!”
진숙의 외침에 이십팔숙이 일제히 몸을 날려 야수를 향해 검을 찔러 갔고, 진숙도 야수의 등을 노려 달려들었다.
진숙이 공을 세우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는 단목순도 무한보를 밟아 야수의 앞을 막으며 팔십일식유성환상검을 펼쳤다.
“단목세가의 단목순이라 하오!”
한가히 인사 따위 나눌 처지가 아닌 야수가 우선 먼저 앞을 막은 단묵순을 발로 걷어차 날리고는 획 돌며 박도를 휘둘러 이십팔숙의 검을 막았다.
“큭!”
그러나, 진숙의 일격이 야수의 옆구리에 가해졌고, 뒤이어 제갈여의 소리비도가 야수의 어깨에 박혔다.
“행군원수부의 사람이 없는 줄 아셨나 보구려.”
야수를 조롱하듯 제갈여가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