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주유천하(周遊天下) (2)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고구려의 태왕은 겨울을 요동성에서 보내며 전시 조정을 지휘하였고, 수의 황제 양견은 장안성에서 고구려 정벌을 지휘하였다.
황제 양견은 요서를 지키지 못한 태자 양광에게 죄는 추후 물을 터이니, 한왕 양양을 도와 고구려 정벌에 나서라 명하였다.
또한 백제와 신라에게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의 남쪽을 공격하라 요청이 아닌 명을 내렸다.
이에, 백제는 크게 반발하여 사신을 내쳤으나, 신라는 매우 반겼다.
당항성이 분주해지고, 신라의 정예 상주군도 북진 준비를 하였다.
황제 양견은 한왕 양양에게도 봄이 오면 고구려의 태왕을 입조케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는 즉, 봄이 오면 반드시 고구려 정벌을 완수하란 의미였다.
지난겨울 전쟁 동안 동상으로 손발이 상한 군사가 반절이 넘고, 성한 말을 찾을 수 없는 한왕으로선 삼십만 대군을 채우기 위해 인근 성과 마을에 강제 동원령을 내려야 했다.
“건장한 사내라면 나이를 가리지 말라!”
한왕의 명에 따라 군사들과 관리들이 건장한 장정 어깨까지 오는 막대기를 들고 다니며, 막대기보다 큰 사내들은 강제로 끌고 갔다.
이런 수나라의 동태를 비롯한 남녘의 움직임은 을지문덕이 취합하여 전시 조정에 알렸다.
이에, 건무가 평양성을 주축으로 한수이남 방비를 시급히 진행하였고, 이를 주시한 수의 수군총관 주나후가 한왕에게 아뢰었다.
“평양성은 고작 오천의 군사 뿐이옵고, 고구려의 수군기지 비사성은 수군 일만여 명에 군선 백이십여 척, 보군 오천뿐이옵니다.”
“그대가 어찌 그리 정확히 아시오?”
한왕 양양이 물으니, 주나후가 빙그레 웃었다.
“소장에겐 고구려 내부에 벗이 많습니다.”
“벗이라 하였소?”
“그렇습니다.”
“그 벗이 정보를 주고 무엇을 원하더이까?”
“평화이옵니다. 물론, 고구려의 항복을 전제로 한 평화지요. 제 벗은 고구려가 감히 대국인 수와 맞서 이길 수 없음을 잘 아는 현명한 인물입니다.”
“음…….”
“하여, 고구려의 패망을 막기 위해, 항복을 원하고 있습니다. 평양성을 저의 수군이 함락시켜 항복을 받아내고, 고구려왕이 입조하여 황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영리한 인물이로다. 감히 소국이 대국에 맞서 패망하지 않은 예가 없었지.”
한왕 양양이 만족하여 웃으니, 주나후가 말을 이었다.
“봄이 오면, 소장이 바다를 건너 평양성을 치겠나이다. 전하께옵선, 대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진격하시옵소서. 전하께서 요동성에 당도하시기 전에 고구려의 태왕이 머리를 조아리며 강화를 요청할 것이옵니다.”
주나후의 장담에 한왕 양양이 흡족해 껄껄껄 웃으니, 이를 지켜보던 태자 양광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이에, 한왕 양양이 비웃음 가득한 시선으로 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묵묵히 밖으로 나온 태자 양광이 뒤따르는 양소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주 총관의 말대로 승리할 것 같소?”
“쉽게 얻은 정보는 가짜이옵니다. 의심해야하지요.”
양소는 주나후가 입수한 정보가 가짜라 단정 지었다.
“그렇군.”
태자 양광이 짧게 중얼거리고는 바삐 걸음을 옮기며 말하였다.
“그렇다면, 봄에는 내 아우 양이의 목이 장안성에 걸리겠군. 내 목도 위험해질 터이니, 어서 준비합시다.”
* * *
아비의 죽음도 모른 채, 개소문이는 전운이 감도는 탁현으로 향하고 있었다.
“형님, 저기… 저 노래가 무엇이죠?”
이제 겨우 몸을 추스르게 된 온동이 강가에 앉아 노래 부르는 사내를 가리켰다.
해가 바뀌며 온동의 키도 자라고 남녘 억양도 사라져 있었다.
공손성의 대군 속을 누비며 온동을 구한 열대여섯 살 남짓 되어 보이던 소년 장수는 또래보다 체격이 큰 개소문이었다.
온동을 구한 개소문이는 수나라 군사들의 추격을 간신히 피하자, 돈을 아끼지 않고 의원을 찾아 온동을 치유하였다.
태자 양광이 준 금덩이 덕에 온동이 목숨을 건진 셈이었다.
온동이 가리킨 곳으로 개소문이가 시선을 옮기니, 남루한 차림의 사내가 강물을 내려다보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長槊侵天半
긴 창 하늘을 찌르고,
輪刀耀日光
둥근 칼 햇빛에 번쩍이며,
上山吃獐鹿
산에서는 노루와 사슴을,
下山吃牛羊
마을에서는 소와 양을 잡아먹으며,
忽聞官軍至
관군이 전장에 도착했구나.
提刀向前蕩
칼 들고 적을 치러 나선다지만,
譬如遼東死
요동 개죽음을 깨달아라.
斬頭何所傷
머리 잘리고 온몸 상할 것을.
“이보시오! 그 노래가 무엇이오?”
개소문이가 노래 부르는 사내를 향해 소리쳐 물었다.
이에 사내가 고개 돌려 개소문이와 온동을 바라보더니, 허허 웃었다.
“허허허, 듣고도 모르는 게냐? 한왕이 작대기보다 큰 사내는 모두 끌고 가서 죽자고 하여, 요동으로 끌려가 개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도망가겠다는 노래다.”
너무도 당당히 말하니, 개소문이가 오히려 당황하여 주위를 살폈다.
“아니, 그런 말을 함부로 해도 되는 거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거. 말이나 시원히 하고 죽어야겠다. 그런데 너는 무엇을 하는 놈인데, 어린놈이 하대를 하는 게냐?”
이에, 개소문이가 머리 숙여 사과를 하였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어른을 몰라뵈었습니다. 존성대명이 어찌 되시는지요?”
태도가 공손해진 개소문이를 바라보며 사내가 껄껄 웃었다.
“귀여운 놈이로세. 하하하. 나는 왕박(王薄)이라 하고 내가 부른 노래는 무향요동량사가(无向辽东浪死歌)다. 내가 지었지. 하하하.”
“…….”
“나는 한왕과 함께 지난 겨울 전쟁에 참여하였고… 지금은 이렇게 군영에서 도망쳐 노래나 부르는 신세다. 그래, 보아하니… 소년 장수의 키가 아직 작대기보다 작으니, 탁현에 들어가도 되겠구나. 하하하.”
자신을 왕박이라 밝힌 사내가 개소문이와 온동의 키를 살피며 말하고는 휘청휘청 걸음을 옮겼다.
“조심들 하거라. 아이들은 금세 키가 자라고, 더 자라면 끌려가 요동에서 개죽음 당하느니라. 하하하.”
탁현과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왕박에게 개소문이가 물었다.
“어른께선 어디로 가시는지요? 여비가 없으시오면 제가 조금 보태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왕박에게 호기심과 함께 호감도 생긴 모양이었다.
“여비라 하였느냐?”
귀가 솔깃해졌는지, 왕박이 급히 몸을 돌려 물었다.
“배도 고프고, 칼도 사고, 말도 사고, 나를 지켜줄 무사도 구해야겠으니, 여비 좀 많이 주거라. 하하하.”
크게 기대하지 않은 듯 농을 섞어 말하는 왕박에게 개소문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그런 쓰임새가 있으시군요. 여기 있으니, 넉넉히 사용하십시오.”
금 한 덩이을 손에 쥐어주니, 왕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정말 이것을 내게 주는 것이더냐?”
“장부는 일구이언하지 않습니다.”
개소문이가 잘라 말하니, 왕박이 크게 웃었다.
“장부라… 하하하, 그래… 너 같이 어린아이도 장부라 말하며 이토록 기개가 높은데, 나는 고작 강물에 뛰어들어 죽을지, 끝없이 도망쳐야 할지 망설이기만 했구나. 하하하.”
한참을 웃은 왕박이 개소문이의 눈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하였다.
“너는 이 금으로 내가 무엇을 할지 모를 것이다. 하여, 내가 말하니 귀담아 듣거라. 너는 나를 만난 일도 없고, 이 금을 준 일도 없는 것이다. 너는 나를 모르는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어찌 그래야 합니까?”
개소문이의 물음에 왕박이 정색해 말하였다.
“나는 이 금으로 군영에서 도망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모우고 모아, 이 빌어먹을 수나라를 무너뜨릴 것이다.”
“…….”
“내가 성공하면 나는 너를 찾아 왕에 봉할 것이나, 내가 실패하면 너까지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니, 너는 나를 본 일이 없다고 지금부터 생각해야 하느니라. 하하하.”
왕박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장담을 하고는 휘청휘청 걸음을 옮기니, 강가에 우거진 갈대밭 속에서 이십여 명의 사내들이 기어 나와 그의 뒤를 따랐다.
모두 하나같이 허리춤에 칼을 찼고, 긴 창을 잘라 단창을 만들어 쥐고 있었다.
낡고 찢어진 옷이었으나 모두가 동일한 색과 모양을 지녔으니, 바로 수나라 행군원수부의 복색이었다.
“형님, 모두 탈영병들입니다.”
온동이 조심스럽게 말하니, 개소문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탁현과 가까워지니, 탈영병들이 더욱 느는구나. 저 왕박이란 사내… 큰 사고를 칠 듯한 눈빛이던데… 모용설 누님이 이곳에 계셨다면, 누님에게 저자의 운명을 물어보았을 터인데, 아쉽구나.”
멀어져 가는 왕박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개소문이와 온동이 다시 걸음을 옮겨 탁현으로 향하였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왕박과 개소문이는 서로의 얼굴을 가슴 깊이 각인하였다.
훗날 왕박이 난을 일으켜 수의 운명을 뒤흔들 때, 중원을 주유천하하던 개소문이와 다시 만나게 되니, 운명의 끈은 실로 질기고 기이할 따름이었다.
왕박의 말대로 탁현에 들어서니, 군사들과 관리들이 긴 막대기를 들고 다니며 장정들의 키를 재고는 막대기보다 큰 장정들은 나이 구분 없이 끌고 갔다.
이에, 울부짖는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끌려가는 장정들을 따라가니 모든 거리와 집들이 울음바다였다.
“이곳에서… 아우의 의부와 사부의 시신이 있단 말이지?”
개소문이가 북새통인 사위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귀가 밝은 온동은 온갖 소리에 정신이 혼미한 기색이었다.
“아우, 온동 아우. 괜찮은가?”
개소문이의 물음에 그제야 온동이 정신을 차려 답하였다.
“형님, 이곳에 제 의부의 시신과 사부의 시신이 있습니다. 수습하여 제 도리를 할 있게 부디, 도와주십시오.”
아이답지 않게 점잖은 온동을 내려다보며 개소문이 답하였다.
“아우는 내 스승이신 온달 장군의 일가이니, 내가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아우의 의부는 내 의부이고, 아우의 사부는 내 사부네.”
열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체구였으나, 개소문이도 아직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말투는 어른 못지않게 담대하고 위엄 있었다.
아마도 온동의 말투가 점잖아진 것은 개소문이와 함께 하며 개소문이에게 배워 변한 모양이었다.
“형님, 우선 팽가장부터 가시죠.”
온동이 기억을 되살려 앞장서니, 개소문이가 온동이 기억을 신통히 여기며 따랐다.
이때, 두 아이의 앞을 사람들이 몰려가며 소리쳤다.
“처형이 시작된다!”
“행군원수부에서 처형이 집행된다!”
개소문이가 급히 달려가는 사내의 팔을 잡아 세워 물었다.
“처형이라니요? 누굴 처형하지요?”
막대기보다 작아 끌려가지 않은 듯 키가 작은 사내가 개소문이를 돌아보며 답하였다.
“외지인인가? 북주 잔당의 수괴가 잡혔잖아. 그리고, 고구려의 간자도 잡혔고… 팽가장의 잔당도 잡혀서 처형하는 거야. 아! 북방 이민족도 잡혔다지? 고구려를 돕던 그… 뭐라더라? 몽고? 아무튼 대단한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신이 나서 서둘러 가고 싶은 듯 사내가 소매를 털어 개소문이의 손을 뿌리치고는 행군원수부를 향해 내달렸다.
“형, 형님…….”
온동이 멀어져 가는 사내를 바라보며 개소문이를 불렀다.
사내가 한 말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형님, 팽가장의 생존자는 노진평이 구해간… 채 부인과 팽장주의 딸뿐입니다.”
개소문이는 한 명 더 떠올렸으나, 애써 언급하지는 않았다.
‘나의 제자 팽무일도 팽가장의 생존자인데…….’
온동의 근심 어린 눈을 들여다보며 개소문이 빙그레 웃었다.
“온동 아우, 우리도 가 보세. 이 형님이 있는 한, 염려할 것 없네. 나는 무적이네.”
두 아이도 몰려가는 사람들을 따라 행군원수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행군원수부 앞 광장으로 들어서니, 높이 세운 단 위에 다섯 명의 남녀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고 이들의 뒤로 월도를 쥔 참형인이 서 있었다.
광장엔 군사들이 단을 중심으로 늘어서 있었고, 그 수가 천여 몇 가량 되어 보였다.
“아니! 저! 저!”
단 위를 올려다 본 온동이 놀라 소리치다가 급히 제 입을 손으로 막았다.
개소문이도 단 위를 올려다보니, 아는 얼굴이 보였다.
“팽무일… 저 자가… 그리고… 저 사람도… 있구나.”
팽무일 이외에도 개소문이의 눈에 익은 인물이 있었으니, 적봉진에서 온달과 함께 수차례 마주한 이였다.
온동도 쇼락을 알아보고 중얼거렸다.
“쇼락… 쇼락님이… 그리고, 저 여인은… 분명, 공손향인데…….”
단 위에는 쇼락과 팽무일, 공손향, 우문도웅 그리고 해권이 무릎 꿇린 채 참형을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