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주유천하(周遊天下) (1)
군사들에게 지급할 배급으로 말을 먹여 강이식을 격퇴한 한왕 양양은 그 기세를 몰아 만리장성 너머까지 추격을 가하였다.
“곧 보급이 올 것이다. 추위와 굶주림 따위에 굴하지 말라.”
한왕의 명은 지엄했고, 수나라 군은 계속하여 연승을 거두고 있었다.
고구려 군은 만리장성 너머까지 쫓기어 뿔뿔이 흩어졌고, 이를 대군이 몰아쳐 각개격파하면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만 같았다.
또한 만리장성과 인접한 여러 성에 전령을 보내어 보급과 지원도 요청하였다.
한왕은 고구려 군이 독안에 든 쥐 신세라 여겼고, 자신의 대군은 물자가 여유로워지리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곧 이 믿음이 깨지고 말았다.
“무엇이라? 지원은커녕 보급조차 보낼 형편이 아니라고?”
강이식과 온달이 만리장성을 따라 동에서 서로 이동하며 주요 요충지를 무력화한 사실을 이제야 보고 받은 한왕이 망연자실하여 전령에게 다시 물었다.
“정녕, 아무것도 지원할 수 없다고 하더냐?”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께서 요서로 출병하신 동안… 저 흉악한 고구려 놈들이 이미… 성을 쑥대밭으로 만들어서…….”
“이… 찢어 죽일…….”
한왕이 분통을 터트릴 때, 그토록 기다리던 보급 대신 채휘가 보낸 전령이 당도하였다.
“채 장군은 어찌 오지 않고, 전령만 보낸 것이냐?”
“소, 송구하오나.”
“닥쳐라! 그놈의 송구는 개나 주고 어찌 군량미 대신 내가 온 것인지 썩 말하라!”
“채 쟁군과 공 관주께서 두 갈래로 나누어 물자를 수송하던 중… 고구려 군의 급습을 받았사옵니다. 하여…….”
“하여? 뭘 하여?”
한왕이 칼을 뽑아들고, 전령의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전령은 자신이 말 한마디라도 실수할 경우 목과 몸이 분리될 것이라 여겨 싹싹 빌며 말하였다.
“사, 살려 주십시오. 보, 보… 보급을 다시 수송하실 것이옵니다. 이번은… 만리장성 밖으로 나가지 않으니… 반드시 수송할 수 있사옵니다.”
전령의 말대로 만리장성 밖으로 나가지 않고 수송이 가능한 곳에 한왕의 대군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수송로는 탁현을 지나 오기에, 한왕이 탁현 행군원수부로 회군하는 것과 별 차이 없었다.
“이 머저리 같은 놈!”
한왕이 전령의 목을 베려 칼을 치켜들자, 제갈여가 급히 만류하였다.
“전하, 이 전령의 목을 베는 것은 작은 일이옵니다.”
이에, 한왕이 마음을 진정하고 칼을 내릴 때, 소장황의 부장이 기진맥진해 막사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너는 또 무엇이냐? 소 장군은 어디가고 너만 온 게냐?”
“소 장군께선 온달이 무쇠와 같은 활로 내리쳐… 그만…….”
“뭐라? 화살도 아닌, 활에 맞아서? 온달이 활로 때려 죽였단 말이더냐?”
“매복이었습니다. 보급처는 미끼였고… 급습한 저희의 배후로 고구려 군이… 온달 그놈이… 시커멓고 거대한 칼을 날려 우리 장수 셋을 일격에… 이에 소 장군께서 온달에 맞섰사오나… 활에 얼굴을 맞아…….”
“온… 달… 그놈이… 온달 이놈이…….”
한왕 양양이 이를 바드득 갈자, 제갈여가 진정시켰다.
“온달을 물리치기 위해 무예 고수를 모으셨으니, 그들로 하여금 온달의 목을 가져오라 명하시오면 해결될 일이옵니다. 다만, 현재로선 물자가 부족하고 군을 이끌 장수가 많이 죽고 상하였으니, 정비가 필요하옵니다. 부디, 탁현으로 회군하소서.”
이에, 한왕이 치솟는 분을 삭히며 채휘가 보낸 전령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너는 내가 오늘만큼은 살려 줄 터이니, 즉시 채휘와 공지열, 주나후를 불러와라.”
이번 출정에서 너무도 많은 장수들을 잃었기에, 제갈여의 말처럼 군을 수습해야 할 상황이었다.
“보급만… 보급만 충분하였다면… 다 쓸어버릴 수 있었는데…….”
한왕이 분에 겨워 중얼거리다가 엄히 명하였다.
“탁현 행군원수부로 회군한다. 군을 재정비하여 정벌에 나설 것이다.”
한왕의 명에 빠르게 회군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어느새 만리장성 이남에도 성큼 겨울이 찾아왔고, 눈까지 내리기 시작하였다.
또다시 한왕의 대군은 눈밭을 행군하며 발이 얼고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잠시 배불리 먹고 힘차게 전장을 내달렸던 말들도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하니, 굶주린 군사들이 달려들어 잡아먹느라 진이 무척 어수선해졌다.
이에 한왕이 엄히 명하였다.
“죽은 말은 두고 행군한다. 결코 말의 시체에 손을 대어 행군에 지장을 초래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를 어길 시, 참형에 처할 것이다.”
그러나 굶주린 군사들이 명을 따르지 않아, 행군 중에 목이 베여 눈 위에 널브러지는 시신들이 늘어났다.
마침내, 탁현에 당도하였으나, 손과 발에 동상이 걸려 손가락과 발가락을 잘라야할 군사들의 수가 절반이 넘었다.
* * *
산산이 흩어진 채 만리장성 안까지 도망쳤던 고구려 군이 다시 집결하였고, 그 중심에 카사르의 올루스가 있었다.
올루스 중심 게르 안에서 강이식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그 누구보다 영리한 막리지가 어찌 수의 보급을 모두 끊으신 겐지.”
아직 연태조의 죽음이 전해지지 않았기에, 연태조에 대한 원망이 상당하였다.
비록 보급을 담당하는 올루스의 위치가 발각되어 수의 공격을 받았으나, 온달이 적시에 당도하여 격퇴하였기에 고구려 군의 물자는 여전히 충분하였다.
상장군 주용이 씩씩거리며, 계획과 달리 수의 보급 물자를 모두 끊은 연태조를 비난하였다.
“막리지가 적의 보급을 일부만 태우고 일부는 전해지도록 했다면, 적은 아직도 자신들이 이기고 있다 여기며 뒈질 줄도 모른 채, 우리를 쫓아 계속 지쳐갔을 겁니다.”
“…….”
“을지문덕 공의 계획과 공주 마마의 판단은 정확하시었고, 봄이 오기 전에 적을 지쳐 쓰러지게 할 수 있었습니다. 헌데!”
마치 눈에서 불을 뿜듯 분통을 터트리며 주용이 말을 이었다.
“연태조! 그자는 우리 대고구려의 막리지 자격이 없습니다. 당장, 요동 전시 조정에 그를 문책하라 아뢰셔야 합니다.”
군권을 쥔 막리지를 그자라 부르니, 강이식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 좀 심하이. 내가 그… 막리지… 그자를 좀 아는데, 뭔 꿍꿍이를 한가득 지닌 듯한 얼굴이지만, 그래도 우리 고구려를 위해선 목숨도 바칠 인물이었네. 너무 그자를 나쁘게 보지는 말게나.”
강이식도 노골적으로 막리지를 그자라 부르니, 온달이 괜히 불안하여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님, 막리지 합하께 뭔 사정이 생긴 듯합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중상이었으니… 아마도 부상으로 판단이 흐려져…….”
“아우는 사람이 너무 좋아 문데야. 이 일은 어찌되었든 막리지의 잘못이 크네. 그렇다고 하여, 그자를 문책하라 전시 조정에 아뢸 생각은 없네. 헌데… 오옥이란 의관을 다시 보내라 했다지?”
“네, 상장군 대건상이 보내라고 하여… 호위를 붙여 보내려 합니다.”
“그래, 어찌되었든 군을 통솔하는 막리지네. 중상을 치유할 수 있도록 의관이 잘 당도하게 든든이 호위를 붙이시게.”
강이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던 그 때, 상장군 대건상이 보낸 전령이 게르 안으로 들어왔다.
“대장군! 막리지 합하께옵서…….”
“막리지가 왜?”
“합하께옵서… 돌아가셨습니다.”
전령의 말에 강이식과 온달을 포함한 게르 안 모두가 놀라 할말을 잃고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 * *
수의 대군이 탁현 행군원수부로 회군하고, 고구려 군을 통솔하던 막리지 연태조가 세상을 떠나니, 전쟁은 잠시 소강 상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대모달 태홍은 막리지를 시해한 시자호 의관과 평소 친분이 있다는 죄명을 쓰고 결박당했다.
상장군 대건상은 결백하다고 외치는 태홍의 입에 재갈을 물리라 지시하고는 이어서 요동 전시 조정으로 압송을 명하였다.
또한 막리지 연태조의 시신도 요동 전시 조정으로 옮기라 명하였다.
이에, 아직 부상이 낫지 않은 모용상과 단사부, 모용설이 연태조의 시신을 담은 관을 지키며 요동성으로 향하였다.
모달 여범이 대죄인 대모달 태홍의 압송과 막리지 연태조의 운구를 호위하며 요동성에 당도하니, 요동성이 놀라 들끓기 시작하였다.
전시 조정에 입조한 모달 여범과 모용상, 모용설, 단사부 등이 태왕의 앞에 서니, 참담한 심정의 태왕이 이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막리지가… 어찌하여…….”
태왕이 탄식을 섞어 물었다.
“한족 출신 시자호란 의관이 막리지를 시해하였고, 대모달 태홍이 평소 그 의관과 친분이 돈독하여 압송하였나이다.”
모달 여범이 머리 숙여 답하니, 태왕이 다시 물었다.
“의관이 시해를? 막리지가 상처를 입었던 것이냐?”
“그렇사옵니다, 폐하. 막리지께선 중상을 입으셨고, 이를 치유하던 오옥이란 의관을 위장군 온달이 데려가여… 시자호란 의관이 대신하였사온데… 그 시자호란 의관이 불손하게도 막리지를… 시해하였나이다.”
모달 여범의 말 속엔 은연 중에 온달의 책임이 부각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위장군 온달이 막리지를 치유하고 있던 오 의관을 데려가지 않았다면, 이런 불상사는 단언컨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여범이 재차 온달의 탓으로 몰아갔다.
이에 태왕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잘 이해했노라. 그대는 이만 물러나 쉬거라.”
이에 여범이 크게 예를 올리며 물러나자, 태왕이 모용설, 모용상 남매와 단 사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태왕의 곁에 선 단 공도 오랜만에 보는 동생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막리지의 운구를 지키느라 애썼다. 막리지의 장례는 이곳에서 예를 갖추어 치루도록 할 터이니 심려치 말거라.”
태왕의 자상한 말에도 모용상의 눈매는 싸늘하기만 했다.
“외람되오나!”
모용상이 외치듯 말하였다.
이에 태왕이 부드러운 음색으로 답하였다.
“말하거라.”
“합하의 장례는 이곳이 아닌, 진심으로 슬퍼하는 이가 있는 평양성에서 치르겠소이다. 그곳에 합하의 가족들이 계십니다.”
무척이나 무례한 언사였다.
결코, 일국의 왕을 대하는 언사가 아니었다.
이에 북장원이 크게 노하여 호통을 쳤다.
“이놈! 어디서 감히! 이런 무엄한 놈을 보았나.”
그러나 모용상은 여전히 싸늘한 시선으로 태왕을 쏘아 볼 뿐이었다.
이에 사선종유도 앞으로 나와 꾸짖었다.
“너희 두 년놈이 연의 후예라하더니, 하는 행실이 오만방자하기 그지 없구나. 폐하! 이 두 년놈들과 저 단 사부라는 자는 이민족들로 우리 고구려의 적이 될 수 있는 자들이옵니다. 속히 이들을 구금하시어, 다른 뜻이 없는지 문초하셔야 하옵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을지문덕이 잎으로 나오려 하니, 태왕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만. 경들은 그만들 하시오.”
소란이 가라앉자, 태왕이 모용상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모용상이오.”
“모용상이라… 그래, 네 말이 맞다. 장례는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이 맞구나. 헌데, 너는 어찌 내게 화가 난 것이더냐?”
태왕의 물음에 모용상이 차갑게 답하였다.
“합하는 온달 그자가 오옥이란 의관을 데려가지 않았다면, 결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왕인 당신께옵선 온달의 잘못을 묻지 않을 것이기에 화가 난 것이오.”
“…….”
“합하는 온갖 질시와 의심 속에서도 이 고구려를 사랑하셨소. 그런 합하의 죽음 앞에 책임자 문책 조차 하지 않을 것이기에 더욱 분노하고 있는 거요!”
“그렇다. 네 말이 맞다. 나는 온달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전시 중이고, 온달은 나의 인척이자 이 전쟁에서 필요한 장수다. 막리지를 잃고 그 또한 잃을 수 없다.”
“…….”
“또한, 온달이 정녕 죄를 지었는지 믿을 수도 없다. 내가 아는 온달은! 결단코, 막리지의 의관을 고의로 데려갈 이가 아니다.”
태왕이 진심을 담아 말하였으나, 모용상은 여전히 차가웠다.
“결과가 말하고 있소.”
“그래, 결과가… 이리 되었구나.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태왕이 모용상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크게 명하였다.
“막리지의 운구가 평양성으로 향할 수 있도록 호위하라! 또한 막리지 연태조의 장자가 성인이 될 시, 막리지 지위를 승계하도록 하라!”
태왕의 추상같은 명에 감히 이견을 내는 이 하나 없었다.
그러나 오부 귀족들은 내심 연개소문의 막리지 지위 승계를 매우 못마땅히 여겼다.
‘먼훗날이라 할지라도… 연태조의 장자 개소문이가 막리지에 올라서는 안 된다.’
오부 귀족들 대부분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우리는 이만 가야겠소.”
예도 올리지 않고 등을 돌려 물러나는 모용상에게 태왕이 말하였다.
“막리지는 진심으로 이 고구려를 사랑했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믿고 신뢰하였다. 모두가 그를 의심하고 질시하며 두려워할 때도 나는 그를 아끼고 좋아했었다. 나의 진심이다.”
그러나 모용상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태왕은 절룩거리는 모용상의 다리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모용설과 단 사부도 모용상의 뒤를 따라 발을 옮겼고, 이들의 걸음도 온전하지 못하여 태왕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