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185화 (185/328)

185화 겨울 전쟁 (25)

한왕 양양의 대군이 고구려 군과 일전을 벌이던 그 순간.

임유관으로 주나후의 수군이 보급 물자를 운송해 왔다.

멀리 떨어진 해안가에서 물자를 나르기 시작한 수레들이 줄 지어 들어왔고, 수군총관 주나후도 임유관에 도착해 채휘와 공지열을 만나고 있었다.

“이곳을 수복하여 다행이오. 고생하셨소이다.”

주나후가 공지열과 채휘의 노고를 치하하며 거침없이 상석에 앉았다.

공지열은 상석을 내어주고도 불쾌한 기색 없이 반겼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보급 물자뿐만 아니라 주나후의 수군까지 임유관에 합류하였으니, 한시름 놓은 모양이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한왕 전하께서 무척이나 기다리고 계실 터이니, 속히 물자를 운송해야겠습니다.”

이에 채휘가 근심을 담아 말하였다.

“근방에 고구려 군이 아직 남아 있을 터인데… 운송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깟 고구려 놈들 따위.”

채휘의 근심을 주나후가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여기를 지키고 있을 터이니, 두 분이 각기 군을 나누어 두 갈래 길로 물자를 나르시구려. 설마 두 군데 모두 고구려 놈들에게 당할 리야 없지 않겠소.”

그러나 채휘는 여전히 염려스러운 듯 이견을 내었다.

“군을 나누어 수송하다가 모두 공격을 당하면 어찌합니까?”

“아니! 장수가 어찌 적에게 당할 걱정부터 하는 것이오! 그런 정신으로 어찌 전쟁을 치르려 하오? 지금 한왕 전하께서는 보급이 끊기어 무척이나 고달픈 상황인 것을 모르는 게요?”

“주 총관! 말씀이 지나치시오.”

주나후의 호통에 채휘가 얼굴이 벌게져 말하니, 공지열이 급히 말을 끊었다.

“채 장군 고정하십시오. 주 총관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이때, 한왕의 전령이 도착하여 공지열의 부장을 따라 들어와 아뢰었다.

“한왕 전하께옵서 속히 보급 물자를 보내라 명하시었습니다.”

이에 주나후가 채휘를 힐끔 쳐다보고는 전령에게 바로 말하였다.

“당장 출발할 것이니, 너는 기다렸다가 길을 안내하거라.”

전령이 명을 받으니, 주나후가 다시 채휘에게로 시선을 옮겨 말하였다.

“두 갈래 길이 두려우면, 홀로 수송하시겠소?”

이에, 채휘가 답이 없으니 주나후가 피식 웃고는 공지열에게로 시선을 옮겨 말하였다.

“역시, 두 분이 나누어 가시는 게 좋겠소이다. 한왕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즉시 떠나도록 하시오.”

공지열이 공손히 명을 받으니, 채휘도 더는 이견을 내지 못하고 주나후의 지시를 묵묵히 따랐다.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두 장수가 각기 길을 나누어 물자가 실린 수레를 호위하며 임유관을 떠났다.

* * *

강이식이 보낸 전령도 임유관 인근 고구려 진영에 도착하였다.

마침 정찰 나갔던 군사가 돌아와 임유관에서 수나라 군이 두 갈래 길로 물자를 수송 중임을 보고한 뒤였다.

물자를 수송 중인 수나라 군을 급습하기 위해 한참 논의 중이었던 상장군 대건상이 전령에게 물었다.

“대장군의 전갈이 무엇이더냐?”

“막리지 합하께 직접 고해야 하옵니다. 합하는 어디 계시온지요?”

전령이 물음에 제대로 답하지 않으니, 대건상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이에, 대모달 태홍이 나서 말하였다.

“상장군, 전령을 제가 합하께 데려가겠소이다.”

“아니, 그대가 수고할 필요 없소이다. 내가 데려가겠소.”

대건상이 태홍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하고는 전령을 데리고 막사 밖으로 나왔다.

막사 밖에는 오옥으로부터 연태조의 처방을 전달 받은 의관이 서 있었다.

“너는 왜 여기 서 있는 게냐?”

대선상의 물음에 의관이 두려워 떨며 답하였다.

“대모달께서… 항상 곁에 있으라 하시어.”

“그래서 이 추위에 그렇게 떨고 있는 것이냐? 그럼 수고하거라.”

대건상이 미간을 좁혀 말하고는 전령을 데리고 연태조의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연태조의 막사 앞은 십여 명의 군사들이 삼엄히 지키고 있었으나, 막사 안에는 시중드는 군사 한 명뿐이었다.

침상에 누운 연태조에게 간단히 머리 숙여 예를 표한 대건상이 시중드는 군사에게 말하였다.

“너는 잠시 나가 보거라. 따로 부르기 전까지 안에 들어오지 말라.”

시중드는 군사가 마뭇거리자, 연태조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여 나가도 좋다 말하였다.

“상장군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나가… 있거라.”

연태조의 호흡이 무척 거칠었다.

시중드는 군사가 나가자, 대건상이 전령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대장군이 보내온 전령입니다. 너는 합하께 아뢰거라.”

이에, 전령이 연태조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서신은 없사옵고, 전언만 있사옵니다.”

“말… 하거라.”

연태조가 힘겹게 명하니, 전령이 소리 낮춰 전하였다.

“임유관에서 한왕에게 전하는 보급을 급습하되, 반은 태우고 반은 한왕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반은… 태우고, 반은… 전달… 되어야 한다라…….”

연태조가 전령의 말을 곱씹으며 중얼거리더니, 상장군 대건상에게 시선을 옮겼다.

“상장군, 적이… 두 갈래… 길로 수송하지 않는 한… 쉽지 않은… 일이겠구려.”

이에, 대건상은 연태조에게 바로 답하지 않고, 전령을 바라보며 엄히 말하였다.

“보다시피 막리지께서 중상을 입으셨다. 너는 속히 돌아가 온달에게 오옥이란 의관을 다시 보내라 전하거라. 온달 그자가 데려간 의관이 있어야 합하의 환우를 살필 수 있느니라.”

“상장군… 나는 괜… 찮소.”

연태조가 힘겹게 말하였으나, 대건상은 매섭게 눈을 빛내며 전령에게 다시 명하였다.

“무엇하느냐? 속히 돌아가 전하지 않고! 합하의 환우가 매우 위중하다. 어서 가거라.”

머뭇거리던 전령이 위압감에 급히 떠나자, 대건상이 연태조 곁으로 다가와 말하였다.

“합하, 전장에서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대장군이 원하는 대로 잘 처리할 터이니 심려치 않아도 되십니다.”

“상장군만… 믿겠소. 대장군이… 뜻한… 바가 있는… 듯하니, 계획… 대로… 잘 처리해 주시오.”

“실수 없게 하겠나이다.”

연태조를 안심시킨 대건상이 다시 자신의 막사로 발을 옮겼다.

그가 없는 동안 대모달 태홍이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는지, 이미 지도에 여러 표시가 놓여져 있었다.

“합하께서는 어떠신지요?”

태홍이 연태조의 상태를 물었으나 대건상은 제 할 말만 하였다.

“막리지께서는 적의 수송을 계획대로 모두 끊으라 하셨네.”

이에, 태홍이 다시 물었다.

“전령이 전해온 것은 무엇입니까?”

“대모달은 알 필요 없네.”

대건상이 잘라 말하고는 지도를 내려다보며 명하였다.

“대모달은 채휘를, 모달은 공지열을 급습하게. 나는 이곳을 지키고 있겠네.”

대모달 태홍과 모달 여범이 바로 명을 받으니, 대건상이 눈을 가늘게 뜨고 태홍에게 말하였다.

“대모달은 여기에 의관은 두고 가시게. 그가 변고를 입으면 합하를 돌볼 이가 없네.”

이에, 태홍이 그저 고개만 끄덕여 답하고는 막사 밖으로 발을 옮겼다.

잠시 뒤, 태홍과 여범이 각기 군을 이끌고 떠나자, 대건상이 막사 밖으로 나와 멍하니 서 있는 의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소인의 성은 시요. 이름은 자호라 불립니다.”

“시자호라… 그래 시 의관이로군. 한족인 게야. 그렇지?”

“소인의 태생은 한족이오나, 요동에서 자란 고구려인이옵니다.”

시 의관이 두려워 떨며 답하니, 대건상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 고구려인이라. 좋아. 내 그대를 믿고 합하의 환우를 맡기겠네. 합하께서 위중하시니, 함께 보러가세.”

대건상이 시 의관의 등을 떠 밀며 걸음을 옮겼다.

다시 연태조이 막사 안으로 들어온 대건상이 시중드는 군사에게 나가라 명하니, 연태조가 의아해 물었다.

“상… 장군, 어인… 일이오?”

“합하의 상태를 살피러 왔습니다. 그리고 따로 올릴 말씀도 있기에…….”

대건상이 할 말이 있다 말하니, 연태조가 시중드는 군사에게 나가도 좋다 명하였다.

시중드는 군사가 나가자, 대건상이 시 의관의 손을 쥐고 질질 끌다시피 연태조의 앞에 세우고는 말하였다.

“합하, 본인은 합하를 좋아하였습니다.”

“상장군… 그러셨소? 고맙… 구려. 나 역시… 상장군…을 무척… 믿고… 의지… 하였소.”

“합하, 하오나. 좋아한다 하여,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더군요.”

대건상의 차가운 말에 연태조의 눈빛이 흔들렸다.

“상… 장군… 그게… 무슨 말이오?”

“합하, 본인은 국장 어른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대건상의 말에 연태조가 놀라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합하… 용서하소서.”

대건상이 왼손을 들어 연태조의 입을 막고는 오른손으로 시 의관의 손을 쥐어 연태조의 가슴에 박힌 대롱을 후려쳤다.

푹!

연태조의 가슴에서 대롱이 뽑혀 바닥에 떨어졌다.

쿨럭쿨럭.

뻥 뚫린 연태조의 가슴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며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이에, 시 의관이 놀라 바닥에 주저앉자, 연태조의 입을 막은 손을 치우며 대건상이 연태조와 시 의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연태조는 비명은커녕 폐가 쪼그라드는 고통에 숨도 제대로 못 쉬었고, 시 의관은 이 광경에 벌벌 떨며 오줌까지 지리고 있었다.

“너 이놈! 감히! 네가 대고구려의 막리지를 시해하려들다니! 이놈!”

대건상이 벼락 치듯 크게 호통을 지르며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들었다.

이에, 밖에서 경계를 서던 군사들이 놀라 뛰어들었고, 대건상이 빠르게 명하였다.

“당장! 의관을 불러라! 합하가 위중하시다! 서둘러라!”

군사들 중 한 명이 의관을 부르러 달려가자, 대건상이 치켜든 검으로 시 의관을 내리치며 말하였다.

“대고구려의 막리지를 감히 시해한 벌이다. 달게 받거라!”

“사, 살려 주십…….”

시 의관은 말도 끝맺지 못한 해 머리가 갈라져 쓰러졌다.

그리고 어느덧 힘겹게 숨을 몰아쉬던 연태조의 가슴에서 더 이상 피가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합하… 합하!”

대건상이 검을 떨구고는 연태조를 부둥켜안고 소리쳤다.

그러나 연태조는 이제 대답은 고사하고 숨조차 내뱉기 힘겨워 그저 원망스런 눈빛으로 대건상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합하! 돌아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합하! 속히 의관을 부르라! 의관을!”

연태조를 부르며 울부짖던 대건상이 고개돌려 소리치니, 이제 막 안으로 들어오던 의관이 놀라 달려와 급히 연태조의 상태를 살폈다.

잠시 맥을 짚고 숨을 살핀 의관이 몸을 떨며 대건상에게 말하였다.

“우, 운… 운명하셨… 습니다.”

“뭐라? 이놈이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쉽게 말하는구나!”

대건상이 벼락 치듯 호통 치며 의관을 발로 걷어차더니, 바닥에 쓰러진 의관의 멱살을 잡아 연태조의 곁으로 끌고 갔다.

“살려내라. 살리지 못한다면 이놈처럼 될 것이다.”

대건상의 겁박에 의관이 털썩 주저앉아 싹싹 빌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만 주십시오. 부디, 살려 주십시오.”

“너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합하를 살리란 말이다.”

대건상이 차갑게 말하며 의관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어 연태조의 가습에 대었다.

“살려라. 살리지 못하면 너는 죽는다.”

이미 차갑게 식어 가는 연태조의 몸을 의관이 벌벌 떨며 어루만지기 시작하였다.

이 부질없는 짓을 대건상은 눈물 흘리며 내려다보았다.

이때, 막사 안으로 모용상이 뛰어들어왔다.

“합하!”

연태조가 위중하다는 소리를 들었는지, 단 사부와 모용설도 뒤따라 들어왔다.

성한 곳 하나 없어 온몸을 천으로 둘둘 감아 지혈한 모용상이 연태조의 몸을 어루만지는 의관을 붙잡고 물었다.

“어떤가? 어떠신가?”

“소인은… 소인은… 살릴 수 없습니다. 합하는 이미… 합하는 이미…….”

의관이 말도 채 끝내지 못하니, 모용상이 기가 막혀 대건상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오? 어찌 합하가… 합하의 치료가 잘 진행되고 있다들었거늘… 어찌?”

이에 대건상이 울먹이며 답하였다.

“합하의 시술을 담당함 오옥이란 의관을 온달이 데려갔네. 신묘한 재주를 지닌 의관이었는데… 그 의관만 있었다면, 합하는 결코 이리 되시지 않으셨을 터인데…….”

“무엇이라? 온달 그자가?”

모용상이 이를 바드득 갈며 물으니, 대건상이 바로 답하였다.

“그렇네. 온달이 데려갔네. 합하를 치유하던 오 의관을 말일세.”

대건상의 말에 단 사부가 시 의원의 시신과 연태조의 가슴에 난 구멍을 번갈아 살피며 물었다.

“이자는 누구고, 합하의 가슴에 난 이 구멍은 무엇이오?”

“오옥이 합하의 가슴을 뚫어 쪼그라드는 허파를 폈네. 그런데 이 한족 출신의 시 의관이 그만… 합하의 가슴에 박힌 이 대롱을 뽑았다네. 하여, 내가 이자를 죽인 거네.”

대건상이 울먹이며 말하니, 조용히 듣던 모용설이 전신의 기운이 빠져 스르륵 주저앉았다.

“합하… 어찌 온달이… 어찌 이리도… 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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