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183화 (183/328)

183화 겨울 전쟁 (23)

“지난밤은 다들 잘 주무셨는가?”

한왕 양양이 상기된 얼굴로 장수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지난밤 고구려 군의 야습에도 인명 피해는 극미했으나, 상당수의 막사가 불 타 군사들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더구나 군량미를 보관하던 막사들도 불에 타 부족한 물자가 더욱 부족해졌다.

아껴 배급해도 사흘을 넘기지 못할 지경이 되니, 군사들의 사기는 더욱 현저히 떨어졌다.

“우리는 계속 승리를 하고 있는데, 어찌 우리는 춥고 배가 고픈 것인가?”

한왕 양양의 물음에, 모두가 답을 내놓지 못하였다.

“입 속에 뭐라도 들은 것인가? 왜 다들 대답들을 못하는가?”

한왕 양양이 격노해 소리치니, 소장황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야습은 예상하였고, 미리 대비하여 경계를 삼엄히 하였습니다. 적이 진영 안으로 들어올 시 에워싸 섬멸하도록 병력도 배치하였나이다.”

“헌데?”

“하온데… 적은 진영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멀리서 화살만 날렸고… 이에 우리의 인명 피해는 미비하여… 요격하여 적은 패주하였고…….”

답하는 소장황도 자신의 말이 옳은지 점차 의구심이 들었다.

“피해가 미비하다라… 하긴, 죽거나 상한 군사의 수는 미비했지. 막사가 불에 탄 게 피해의 대부분이라… 군량미도 원래 부족했던 게 조금 더 부족해진 것뿐이고… 그런가?”

소장황에게 묻는 한왕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전하!”

결국 소장황이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니, 제갈여가 나서 말하였다.

“조조가 원정에서 회군하고 싶으나, 군사들의 사기가 우려되어 꾀를 내기를… 배급을 담당하던 장수의 목을 베고, 그 장수가 물자를 취하여 배를 채웠다고 말하여, 군사들의 불만을 잠재웠나이다.”

제달여의 말에 장수들의 눈빛이 분노로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죽이라고?”

한왕이 물으니, 제갈여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승리를 계속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적은 이처럼 야습이나 하고, 뒤에서 급습이나 하며 우리를 지치게 할 수는 있으나, 감히 정면으로 맞서지는 못합니다. 결국 전하의 대군과 맞서 이길 수 없음을 저들도 아는 것이지요.”

“헌데?”

한왕이 짜증을 담은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나 제갈여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말하였다.

“이곳에서 만리장성까지는 걸어서 이틀거리입니다. 배급을 줄이고 만리장성을 넘으소서. 적은 결코 만리장성 안까지 쫓아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군을 보전한 후, 봄에 다시 원정을 하심이 옳습니다. 하여! 배급을 담당한 장수를 벌하시어 군사들의 불만을 잠재우소서.”

“원래 돌아가던 길이었고. 봄에 다시 원정을 할 생각이었으니… 그대의 말대로 불만만 잠재우면 되겠군.”

한왕 양양이 제갈여의 말에 동의하며, 배급을 담당하는 장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너는 조조 때문에 죽는 것이니라.”

“저, 전하!”

배급을 담당한 장수가 무릎 꿇고 애걸하였으나, 한왕 양양의 검은 매정하였다.

소장황에게 생기 잃은 머리를 건네며 한왕이 명하였다.

“소중한 물자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물었다. 그대는 당장 나가, 배급을 반으로 줄이고, 행군 속도를 높인다 말하거라!”

소장황이 머리를 받아들고 나가니, 제갈여가 다시 말하였다.

“적은 전하의 대군과 정면 승부를 벌일 용기 따위는 없습니다. 성가시게는 하고 있으나, 속히 만리장성만 넘으면 그만이니, 동요하시지 않으셔도 되시옵니다.”

한왕이 고개를 끄덕일 때, 채휘가 보내온 전령이 급히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임유관을 탈환하였나이다! 주 총관에게도 보급 운송을 급히 요청하였으니, 채휘 장군께서 물자를 싣고 올 것이옵니다.”

“뭐라?”

한왕이 반갑고도 기뻐 벌떡 일어나더니, 전령에게 다가가 부둥켜안았다.

“하하하, 그래, 그래. 잘 했구나. 고생 많았다. 여기로 와 몸부터 녹이거라!”

전령의 손까지 잡고 화로로 데려간 한왕이 장수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만리장성을 넘는 건 잠시 미루겠소! 곧 물자가 도착할 것이니, 우리를 성가시게 한 저 고구려 놈들을 혼쭐 낸 후, 회군하도록 하겠소!”

한왕 양양이 변덕을 부려 회군을 미루니, 제갈여는 암담한 마음에 눈을 감았다.

‘우리를 괴롭히는 고구려 군 따위는 탁현에 돌아가 재정비한 후, 봄에 토벌전을 벌여도 되는 것을… 어찌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 * *

한왕의 진영에서 두 식경 거리를 유지한 채 다시 세워진 올루스로 상장군 주용과, 대모달 흑비걸, 요동성주 고승이 군을 이끌고 왔다.

“길이 열렸으니, 한왕이 만리장성을 넘겠지요?”

흑비걸의 물음에 고승이 답하였다.

“그렇겠지. 군량미도 떨어져 가는데 회군함이 당연하겠지요.”

강이식도 동의하는지 지도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그렇다면, 또다시 이곳에서 그들을 정면으로 맞이하게 되겠군.”

이때, 조용히 듣던 상장군 주용이 입을 열었다.

“쉽게 돌아가게 해선 안 되지 않습니까? 허나, 우리가 이곳에서 앞을 막는다고 막아질 대군이 아닌데… 어찌하면 좋습니까?”

“상장군 말이 옳소. 적은 아직도 대군이고, 우리만으로는 쉽게 앞을 막기 어려우니… 회군하는 적의 측면과 배후를 계속 공격하여 타격을 주는 수밖에 없는 것 같구려.”

강이식의 말에 흑비걸이 고개를 저었다.

“앞을 내어줘선 안 됩니다. 적은 대군이라 군사를 보전한 채 만리장성을 넘을 시, 재정비하여 결국 봄에 침공을 강행할 것입니다. 이대로 고이 돌려보내선 안 됩니다.”

흑비걸의 강경한 태도와 달리 상장군 주용은 대군과 정면 승부를 피하길 바랐다.

“허나, 적이 지쳤다하여도 아직 대군이라 정면승부는 곤란하지 않겠소? 정면 승부는 불가하오.”

주용의 말에 흑비걸이 눈살을 찌푸리니, 강이식이 입을 열었다.

“상장군 말도 옳고 대모달 말도 옳소. 눈은 아직 이틀 더 내릴 것이니, 적의 행군 속도는 빠르지 못할 것이오. 여기서 내가 앞을 막고, 상장군과 대모달 그리고 성주가 적의 배후와 측면을 공격하며 진을 빼는 게 좋겠소.”

“…….”

“나는 적이 강하게 공격하면 길을 열어 준 후, 측면을 공격하도록 하겠소. 최대한 적을 지치게 합시다.”

강이식이 작전을 세우니, 장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평강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어제, 을지문덕 공께서 보내온 전령이 대장군께 알리기를… 임유관을 다시 수나라가 차지했다고 하더군요. 하여…….”

평강이 잠시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었다.

“적은 당장 만리장성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회군하기 위해 이곳까지 와서 회군을 하지 않을 것이란 말씀이시옵니까?”

고승이 놀라 물었다.

“수나라 군은 분명 회군하러 여기까지 온 것이 맞습니다만, 우리 고구려 군이 요서를 휘젓고 다니는 것에 무척이나 격분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차에, 임유관을 탈환했다는 소식을 저들도 접했을 터이니, 보급을 기다려 우리를 섬멸한 후, 회군을 하려들 것입니다.”

“공을 세운 후 회군한다라…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강이식이 자신의 말에 동의하자, 평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적이 물자를 보급 받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충분한 물자여서는 안 되니, 막리지가 중간에 타격을 가해야겠지요. 충분하지는 않은 물자라도 보급을 받은 적은 우리를 섬멸고자 공세를 취할 것입니다.”

“…….”

“적이 공격해 오면 우리는 네 방향으로 흩어진 후, 적이 군사를 나누어 쫓도록 만들어 조금 더 이곳에서 겨울을 보내게 해야 합니다.”

평강의 계책에 대모달 흑비걸이 고개를 갸웃하였다.

“우리가 길을 내주어도, 적이 회군하지 않고 이곳에 남는다 하시었습니까? 음… 가능한 말씀이지만, 적이 흩어진 우리를 무시하고 그냥 만리장성을 넘는다면, 우리는 적에게 피해를 주지 못한 채 길만 내어준 셈이 됩니다.”

이에 평강이 소매에서 한 장의 서신을 꺼내 보였다.

“창주라는 이가 을지문덕 공의 서신을 제게 주더이다.”

평강이 서신을 펼치니 [지위진(地衛陣)]이란 세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다.

그 아래로 지위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적혀 있었으나, 성미 급한 강이식은 읽지 않고 평강에게 대뜸 물었다.

“공주 마마 지위진이 무엇이옵니까?”

“지형을 이용하여 수적 열세를 극복하는 전술로… 유격전이옵니다. 을지문덕 공께서는 수나라 군이 회군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여 우리에게 정면으로 맞서지 말고 유격전을 펼치라 전한 것입니다.”

평강의 설명에 강이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신을 받아 읽어 보니, 지위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쓰여 있었으나, 상당히 복잡하고 난해하여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아하! 내가 이 서신을 받고도 이해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그 친구가 공주님께 서신을 전한 게로군. 공주님이 읽고서 내게 설명하도록… 하하하.”

강이식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서신을 평강에게 다시 건넸다.

“공주 마마, 전술을 설명해 주소서.”

강이식이 공손히 요청하니, 평강이 웃으며 지도를 가리켰다.

“저는 이 서신을 받고서야, 을지문덕 공이 우리에게 만리장성 안, 적의 주요 요충지를 무력화란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리장성은 산을 따라 세워진 장성으로 일대에 산맥들이 길게 늘어서 있지요.”

평강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산맥들을 손으로 쭉 이어 그으며 말하였다.

“우리는 적이 공격해 오면 뿔뿔이 흩어져 이 산들을… 즉 만리장성 안을 넘나들며 봄이 올 때까지 유격전을 펼쳐야 합니다. 적이 공격해 오면 도망치고, 쫓던 적이 쉬면 야습, 급습을 하며 지치게 하는 것이지요.”

만리장성을 고구려 군이 넘나들면 한왕으로선 길이 열렸어도, 고구려 군을 놔두고 탁현으로 군을 돌리진 못할 게 분명했다

평강이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한왕이 회군하고자 한 행군원수부가 있는 탁현이었다.

“지친 적이 행군원수부로 돌아갈 때는 이미 곧 봄이 올 쯤이고, 봄을 맞은 한왕은 지친 군사를 끌고 이 요택을 지나야 하지요.”

봄이 오면 요하 인근의 요서 일대는 얼었던 땅이 녹아 늪지대로 변하는데, 이를 요택이라 했다.

“수의 대군은 결국 이 요택에 발이 묶이게 될 것입니다.”

만리장성 안쪽부터 요택까지 전장을 넓게 사용하는 유격전이었다.

“이 지위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급을 담당하는 이 올루스가 노출되지 않는 것이니, 이점만 신경 쓴다면 필경, 적은 우리의 뒤만 쫓다가 요택에서 자멸하게 될 것입니다.”

평강의 설명이 끝나자, 강이식이 손벽을 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적이 계속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게 잘 도망 다니며, 약만 올리면 되는 아주 쉬운 계책이군. 우리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면 되는 거야. 다들 이해했는가? 아주 쉬워.”

강이식의 말처럼 아주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기동력에서 앞선 고구려 군이 펼치지 못할 전술도 아니었다.

더구나 추위에 강한 카사르와 호타크의 부족 전사들과 산악 지형에 강한 말갈기병들에겐 어렵지 않은 전술이었다.

우랑이 따로 평강의 말을 통역하여 전하니, 카사르가 히죽 웃었다.

“도망치면 된다라… 적이 강하면 올루스를 끌고 도망치는 것은 아주 익숙한 일이었지.”

호타크 역시 카사르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술 회의를 마치고 모두가 게르 밖으로 나가자, 호타크가 평강에게 다가와 말하였다.

“쇼락이 온동을 찾기 위해 이곳들을 헤매고 있으니, 우리가 다시 이 산과 성벽을 넘나들다보면 만날 수도 있을 것이오.”

쇼락의 말에 평강이 눈시울을 붉히며 감사를 표했다.

“호타크 대족장의 배려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쇼락은 최강의 전사이자, 추적자니… 필경 온동을 찾으리라 믿어도 좋소. 장담하오.”

다섯 자루의 검을 등에 맨 소년 장수가 수나라 군 속에서 온동을 구해 달아났으나, 생사여부는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늘 근심하는 평강을 위해 쇼락이 자청하여 온동을 찾아 만리장성 안을 수색 중이었다.

부디, 쇼락에게서 좋은 소식이 들려오길 갈망하며 평강은 경우가 누운 게르로 발을 옮겼다.

곧 올루스가 이동해야 하기에, 잠시라도 시간이 날 때 경우의 상처를 살피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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