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겨울 전쟁 (22)
비사성의 성벽은 높았고, 고구려 특유의 돌아 들어가는 성문 구조를 지니고 있어 능히 적의 대군을 맞아 싸울 수 있는 모습이었다.
더구나 절벽 위에 세워졌기에, 에워싸일 걱정 따위는 없었다.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 좁고 비탈진 길을 따라가면 거대한 포구가 나오는데, 이곳에 고구려의 해군 전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고구려의 해군 전력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오직 바닷길로만 접근이 가능했다.
비사성이 적에게 함락되더라도 군선들이 포구를 벗어나 자유롭게 대해로 나아갈 수 있는 구조였다.
군선들은 항상 물자를 충분히 비축하고 있었고, 언제든 출항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해를 따라 비사성 안으로 들어간 양만춘과 대식은 처음 접한 비사성의 규모와 군세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비사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군요. 비사성이 비밀 기지임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동안 고구려 내부에조차 그 규모와 군세가 상세히 알려지지 않은 비사성의 실체를 눈으로 본 양만춘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때, 서해 못지않게 백발을 휘날리는 장수가 성큼성큼 다가와 대뜸 양만춘의 손을 잡았다.
“어서 오시오. 비사성 성주 고광이오.”
바닷바람에 손이 무척이나 거칠어져 있었다.
노장의 손을 공손히 쥐며 양만춘이 예를 올렸다.
“양만춘이옵니다. 혹시… 태왕 폐하의 당숙되시는?”
조심스럽게 묻는 양만춘에게 고광이 주름진 얼굴을 더욱 주름지게 웃으며 답하였다.
“태왕 폐하의 당숙, 고광 맞소. 허허허. 이 늙은이의 이름이 세상에서 사라진 지 상당할 터인데, 젊은 성주가 기억하시니 부끄럽구려.”
고광은 선대 태왕과 사촌 지간으로 젊어서는 신라와 한수를 둘러싼 공방전을 지휘하였고, 당항성 정벌도 주도하였다.
고구려가 미추홀 일대의 지배력을 높이는데 그 공이 컸으나, 당항성 공략에선 큰 패배를 맛 본 후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은둔하였다.
세월이 흘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를 세인들은 선대 태왕과 고무, 고성, 고강 형제들처럼 세상을 떠났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밭이나 일구던 이 늙은이가 뭔 쓸모가 있다고 불렀는지… 허허허.”
고광의 호쾌한 웃음은 보는 이까지 기분 좋아지는 웃음이었다.
이때, 익숙한 목소리가 양만춘을 반기었다.
“성주께서 나이드셨다고 말씀하시지만, 이 고구려에서 해전을 가장 잘 아는 장수 아니시옵니까? 그나저나, 양만춘 성주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양만춘이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건무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태, 태자 전하!”
양만춘이 놀라 급히 예를 올렸다.
“우리 사이에, 뭘 그리 격식을… 하하하.”
평양성에 있어야 할 건무가 비사성에 있으니, 양만춘은 무척이나 의아했으나, 감히 묻지 못했다.
철컹, 철컹.
이때, 건무의 곁에서 쇳소리가 울리니, 양만춘이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건무의 곁에 무척이나 키가 작은 장수가 섰는데, 손에 긴 밧줄을 매단 갈고리를 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묘하게도 갈고리는 하나가 아닌 두 개였다.
밧줄 양 끝에 하나씩 갈고리가 매여 있었고, 키가 작은 장수는 일부러 손을 살짝 살짝 흔들어 쇳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예곤, 인사 올리게. 양만춘 성주시네.”
갈고리를 든 장수에게 고광이 예곤이라 부르며 말하였다.
“명성이 드높은 성주에게 예곤 인사 올립니다. 성은 예요, 이름은 곤이옵니다.”
예곤이 예를 올리자, 양만춘도 바로 예를 올려 답하였다.
“명성이라니요. 아무런 공도 없고, 알려진 이름도 없습니다.”
이에, 건무가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성주의 공은 알려지지 않았을 뿐, 지난 북주와 돌궐의 연합 침공에서도 성주의 공이 적지 않았지요. 하하하.”
건무가 자신의 노고를 알아주니, 양만춘은 마음 깊이 감읍할 따름이었다.
“송구하오나, 태자 전하께서 여기는 어찌?”
양만춘이 조심스럽게 물으니, 건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하였다.
“이곳도 전장이 될 터이기에 나와 보았습니다.”
“요동과 요서가 아닌 이곳이 말이옵니까?”
양만춘의 물음에 건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지요. 육로가 막힌 수는 곧 바다를 건너올 것이고, 수의 수군을 막기 위해선 바로 이 비사성이 움직여야 한답니다. 그래서 잘 대비하고 있는지 시찰 나온 것이지요. 하하하.”
유독 시찰이란 말에 힘을 주어 말하며 웃으니, 고광과 예곤도 따라 웃었다.
이에, 양만춘이 고광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건무에게 물었다.
“본래, 비사성은 목 씨 일가의 세력지였던 것으로 알고 있사온데, 언제부터 고광 성주께서 맡게 되셨는지요?”
근방에 있던 자신조차 모르게 고광이 비사성을 지휘하고 있었으니, 궁금할 만도 했다.
“이곳이 목 씨 일가 세력지라 일부러 태왕께서 당숙을 부르셔서 맡긴 것이지요. 비사성에 관한 일은 대부분이 비밀리 진행되기에, 가까운 곳에 있는 성주조차 몰랐을 겁니다. 어쨌든 지금은 당숙께서 이 비사성을 완벽히 장악하시어 수의 침공을 대비하고 계시지요.”
건무가 자상히 설명하니, 양만춘은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감격하였다.
‘나와 같은 이에게조차 이토록 자상히 설명하시다니…….’
이후에도 건무가 앞장서며 비사성 이곳저곳을 안내하니, 양만춘은 더욱 더 감격할 따름이었다.
요동만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성벽 위에 서서 건무가 물었다.
“양만춘 성주, 잘 보셨는지요?”
“비사성의 군세가 실로 대단하옵니다.”
양만춘의 대답에 건무가 빙그레 웃더니, 고광에게 물었다.
“그리 대단한가요? 당숙! 군선이 모두 몇 척이지요?”
“대소 군선은 모두 백이십 척이옵니다.”
“그럼, 수군, 보군 군사들은 모두 어떻게 되시오?”
건무가 재차 물으니, 고광이 바로 답하였다.
“수군 일만에 비사성 경계를 맡은 보군은 총 오천이옵니다.”
이에, 건무가 시선을 양만춘에게 옮겨 대뜸 물었다.
“성주 들으셨소? 어떤가요?”
“무엇을 말씀이시온지…….”
양만춘이 당황하자, 건무와 고광이 껄껄 웃었다.
“이정도 군세면, 수가 우리 비사성을 얕볼 것 같지 않은가요?”
건무의 물음에 양만춘은 어찌 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였다.
이에, 예곤이 나서 양만춘에게 말하였다.
“수가 준비한 수군은 칠만이요. 군선은 천이백여 척이나 되지요. 그에 비하면 우리 비사성은 터무니없이 대비가 부족하니, 수가 얕잡아 보고 바다를 건너올 것 같은지 물으시는 것이옵니다.”
예곤의 말에 그제야 양만춘도 이해했으나, 더욱 답하기 어려웠다.
“전쟁은 숫자로 하는 것은 아니오나… 적의 군세가 그리 강대하다면, 능히… 하오나, 이렇듯 잘 대비하고 있으니… 적이 감히…….”
“능히? 감히? 하하하.”
건무가 껄껄껄 웃으며 양만춘의 어깨를 두드렸다.
“전쟁이 길어지면, 수는 필경 신라에게 사신을 보내어 우리 고구려의 남쪽을 괴롭히라 할 것이지요. 또한 우리 내부의 적을 통하여 평양성의 군세와 이 비사성의 군세를 취합할 것입니다. 결국, 수적 우세를 믿고 바다를 건너오겠지요.”
“하오면 보강을 하셔야…….”
“보강을 하면 적은 그에 맞게 더욱 증강하지 않겠습니까?”
“하오면?”
“우리는 이 비사성의 군세가 약함을 적이 알기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야 적은 바닷길을 자유롭게 다니기 위해 평양성보다 이곳으로 먼저 올 것이고, 그때 일전을 벌일 생각이지요.”
“…….”
“평양성엔 오천의 군사밖에 없고, 신라 때문에 한수 이남을 지킬 군을 평양성으로 돌릴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건무의 말에 양만춘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남에서 신라가 움직이고, 수의 수군이 바다를 건너온다면 실로 큰일 아닌가?’
“큰일이지요.”
양만춘의 생각을 읽은 듯 건무가 말하였다.
“태자 전하, 제가 할 일이 있사옵니까?”
양만춘이 비장히 물으니, 이를 기다렸다는 듯 건무가 바로 말하였다.
“대장군과 을지문덕 공 그리고 태왕 폐하와 나는 성주가 안시성의 군사를 비밀리 이곳으로 옮겨와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우리 고구려 최강의 요새인 신성에서도 눈을 피해 군을 옮겨와 주길 바라네.”
“비밀리… 군을 옮기면 되는 것이옵니까?”
“그렇습니다. 수가 눈치 채지 못함은 물론, 우리 고구려 내부에서 조차 알지 못하게 말입니다. 성주라면 가능할 것이라 을지문덕 공이 말하셨고, 나 역시도 성주라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미 적봉진으로 비밀리 물자와 군을 이동시켰던 양만춘이었기에, 건무의 신뢰는 무척이나 컸다.
“소인 모든 방도를 찾아, 안시성과 신성의 군사들을 비밀리 이동시키겠나이다.”
양만춘의 장담에 만족한 건무가 고광에게 시선을 옮겨 말하였다.
“당숙, 양만춘 성주라면 믿어도 되십니다. 나는 그럼 평양성으로 돌아가 신라의 경거망동에 대비해야겠습니다.”
고광이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건무가 다시 양만춘에게 시선을 옮겨 말하였다.
“상장군 주용과 대모달 흑비걸에게 물자를 수송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의 보급은 이제 다른 방도로 전해지게 될 것이지요. 양만춘 성주는 이 길로 안시성에 돌아가 신성과 안시성의 군사들을 속히 이곳으로 이동시킬 방도를 마련하십시오.”
* * *
한왕의 행군원수부 군사들은 밤이 깊어서야 눈 위에 진영 구축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지친 몸을 막사 안으로 들였으나, 온기 하나 없는 막사는 겨우 바람만 막아줄 뿐, 살을 에는 추위는 여전하였다.
하루 종일 눈 위를 뛰고 걸은 탓에 얼은 발이 체온으로 녹다가 다시 어니, 발끝에 동상 기운이 돌기 시작하였다.
“땔감 하나 못 구하고… 배급도 줄어서 뱃속은 텅 비고…….”
입김으로 언 손을 녹이며 중얼거리던 수나라 군사의 눈앞이 돌연 환하게 밝아졌다.
“부, 불?”
수나라 군사가 돌연 피어오른 화기에 놀라 벌떡 일어나 눈을 부비니, 애써 세운 막사가 타고 있었다.
“불! 불이야! 일어나라! 불이야!”
불타는 막사 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급히 소리치며 밖으로 뛰어나간 수나라 군사의 눈으로 불붙은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꽁꽁 얼었던 군사의 머리카락이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불타는 막사에서 뛰어나온 군사들은 어두운 밤하늘 가득, 기름먹인 화살에 불이 붙어 날아오는 광경에 놀라 발을 멈추었다.
“급습이다! 고구려 군의 야습이다!”
동서남북 사위에서 수나라 군사들의 외침이 울렸고, 불화살들이 사위에서 날아들고 있었다.
강이식은 물론이요.
상장군 주용과 대모달 흑비걸, 요동성주 고승까지 함께한 야습이었다.
“불을 꺼라! 야습에 대비하라!”
눈 위를 뛰어다니며 장수들이 외치고, 군사들이 손으로 눈을 담아 불을 끄기 시작했다.
“난입에 대비하라! 고구려 놈들이 난입할 것이다!”
“방패를 갖추어라! 장창병은 기병 돌격에 대비해라!”
진영 곳곳에선 장수들이 고구려 군의 난입에 대비하여 바삐 외쳤다.
그러나 고구려 군은 멀리서 화살만 날릴 뿐, 진영 안으로 침입은 하지 않았다.
이에, 막사 밖으로 나온 한왕 양양이 분통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언제까지 방비만 하고 있을 것이냐? 당장 나가 놈들을 쫓아라!”
기병을 상대로 보군을 이끌고 눈 위를 달려야 하는 수나라 장수들은 안색이 굳은 채 마지못해 진영을 나가야 했다.
눈 위를 달려 고구려 군을 쫓으면, 허무하게도 고구려 군은 말 머리를 돌려 도망쳤고, 수나라 군사들이 발을 멈추면 고구려 군도 말을 세우고 다시 화살을 날렸다.
양측 모두 크게 상하는 이 없이, 이렇듯 눈 위를 쫓고 쫓기며 날이 밝아만 갔다.
결국, 야습한 고구려 군을 모두 쫓고 진영 곳곳에 타오르던 불길도 잡을 수 있었다.
수나라 군의 피해는 적었고, 고구려 군을 격퇴한 셈이니, 필경 수나라의 승리였다.
그러나 사위로 요격나간 장수들과 군사들은 머리까지 젖은 채 귀환해야 했다.
불에 탄 막사 앞에 선 수나라 군사가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우리가 분명 적을 격퇴했는데… 우리가 진 것 같은 기분이 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