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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검귀-181화 (181/328)

181화 겨울 전쟁 (21)

시술이 끝났으나, 막리지 연태조는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합하께서 어찌 의식이 없으신 게냐?”

상장군 대건상이 시술을 담당했던 의관 오옥에게 엄히 물었다.

만일 막리지 연태조에게 변고라도 생길 경우, 단칼에 목을 벨 듯 눈매가 사나웠다.

“시술은 잘 끝났습니다. 합하께선 고통에 혼절하신 것이온데, 깨우지 않고 쉬시도록 하심이 옳을 듯하옵니다.”

오옥이 허리 숙여 공손히 답하였다.

온달이 살며시 연태조의 코에 손가락을 대어 보니, 숨결이 느껴졌다.

“의관의 말을 믿어 봅시다.”

온달의 말에도 대건상이 의심의 눈초리를 오옥에게 보냈다.

그러나 오옥은 크게 개의치 않고 막사 밖으로 나가며 말하였다.

“소인은 이만 밖으로 나가 다른 의관에게 막리지 합하의 가슴에 박힌 대롱을 뽑는 처방을 전하도록 하겠나이다.”

“섯거라!”

대건상이 급히 오옥의 앞을 막아서며 말하였다.

“처방을 전할 의관은 여기로 불러 올 터이니, 너는 그대로 있거라. 혹여 합하에게 변고가 생길 수도 있으니, 내보낼 수 없다.”

대건상이 진심으로 막리지를 염려하는 듯해 온달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 의관, 상장군 말대로 하시구려. 잠시만 기다린 후, 여기서 처방을 전하는 게 좋겠소.”

이에 대건상이 오옥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군사를 불러 의관을 데려오라 명하였다.

잠시 뒤, 다른 이를 돌보던 의관이 피 묻은 손을 닦지도 못한 채, 눈치를 살피며 들어왔다.

“저 의관으로 괜찮겠소?”

온달이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벌벌 떠는 의관을 바라보며 오옥에게 물었다.

“의관이라면… 누구나 능히 할 수 있는 처방이옵니다.”

오옥이 담담히 말하고는 의관의 손을 잡아끌며 연태조 곁으로 가서 조곤조곤 처방을 설명하였다.

무척이나 자상하고 쉽게 설명하여 곁에서 듣던 막바우조차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도 할 것 같다.”

막바우가 중얼거리자, 그 소리에 오옥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오옥은 의관이 충분히 이해했는지 묻고 또 물은 후 여러 번 확인하였다.

‘상당히 신중하고 배려 깊은 인물이로다.’

온달은 오옥의 태도에 무척이나 호감을 느꼈으나, 대건상은 여전히 오옥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다 되었습니다. 이 의관도 다 이해한 것을 제가 확인하였습니다.”

오옥이 자신 있게 말하자, 대건상이 아직도 벌벌 떠는 의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할 수 있겠느냐?”

대건상의 물음에 의관이 기죽어 답하였다.

“하, 할 수 있… 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없어서 어찌 합하를 네게 맡길 수 있단 말이더냐!”

대건상이 버럭 호통을 치니, 의관이 놀라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이 모습에 대건상이 혀를 차며 오옥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래도 네가 남아야겠구나.”

이때, 의식을 잃었던 막리지 연태조가 살며시 입을 벌렸다.

“다 들었소. 처방… 나도 다… 들었으니, 처방은 염려… 마시구려.”

“합하!”

대건상이 기뻐 막리지 연태조의 곁으로 다가가 격하게 손을 잡았다.

“나는… 이만 좀 자고 싶으니, 그만… 쉬시구려. 위장군도 저 의관을 데리고 대장군을 도우러 가시고… 나는 상장군과 이곳에 남아… 임유관에서 나올… 수의 보급 물자를 끊겠소.”

연태조는 의식이 없는 동안에도 모든 대화를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합하!”

온달이 감격해 부르니, 연태조가 힘겹게 손을 저어 어서 가라 표했다.

이에, 막사 밖으로 나온 온달이 대건상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표하며 말하였다.

“송구하오나, 오 의관을 데려가야겠습니다.”

미안해하는 온달에게 대건상이 환한 미소로 답하였다.

“대장군이 수의 대군을 맞아 많이 힘드실 겁니다. 위장군께서 어서 가시어 힘을 실어주십시오. 오 의관이 아니라도 의관들이 더 있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이때, 그동안 조용히 있던 대모달 태홍이 온달 앞으로 다가오며 말하였다.

“위장군, 지금 가시면 안 되십니다.”

“임유관이 염려되시는지요?”

온달이 만류하는 태홍에게 물었다.

“임유관 때문이 아니옵고…….”

태홍이 말꼬리를 흐리자, 상장군 대건상이 언짢은 듯 태홍의 어깨를 잡아끌며 꾸짖었다.

“뭐하는 겐가? 지금 대장군도 위급한 상황일세! 게다가 중상 중인 장수가 있다지 않은가?”

태홍이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나자, 대건상이 온달에게 부드러운 음색으로 말하였다.

“위장군 속히 가시오. 여기는 우리만으로도 충분하오.”

“배려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온달이 재차 허리 숙여 예를 표하고는 말 위에 올랐다.

막바우도 공연히 붙잡은 태홍을 노려보고는 대건상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표했다.

“막바우, 갑시다.”

온달의 말에 막바우가 손을 들어 명하니, 육천의 기병들이 모두 일제히 말에 올랐다.

온달은 막리지 연태조가 의식을 찾아 상장군 대건상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생각하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강이식을 돕기 위해 떠날 수 있었다.

온달이 오옥과 군을 이끌고 떠나자, 아직도 뒤에서 벌벌 떠는 의관에게로 대건상의 시선이 옮겨졌다.

매우 차갑고도 살의에 찬 시선이었다.

이에, 태홍이 의관의 앞으로 나와 대건상을 잠시 노려보고는 의관에게 엄히 말하였다.

“너는 항상 내 뒤에 있거라. 내 곁에서 오 보 이상 떨어질 생각조차 말아야 한다.”

의관은 그저 대건상의 한기 어린 시선을 막아준 태홍이 고마워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대건상은 이들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 * *

북장원은 전시 조정으로 전해오는 승전보가 달갑지만은 않았다.

“우리 고구려가 작은 승리를 거둔들 결국 수의 대군을 막아내지는 못할 거야. 오히려 대국을 분노케 하여 우리 고구려 전역이 불타고 오백 년 고구려는 멸망하겠지.”

“…….”

“이제 우리 고구려를 구할 길은 더는 수나라가 노하지 않는 선에서 항복하고 태왕이 입조하여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길 뿐이야.”

북장원의 말에 명림신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종리위두대형께선 이 고구려의 충신이십니다. 소인은 결코 종리위두대형께서 고구려의 패배를 바라지 않고 있다 믿습니다.”

“그래, 나는 우리 고구려를 사랑하지. 나도 패배를 원하지는 않아. 하지만 역시 최선은 태자를 사로잡고 강화를 맺었어야 했어. 이 모든 것이 연태조가 태자를 사로자지 않고 놔주었기 때문이야.”

“…….”

“이젠, 한왕의 대군이 고구려를 짓밟기 전에 주나후 총관이 평양성에 들어오는 길뿐이야. 그렇게만 된다면… 태왕도 항복하겠지. 수와 전쟁만 없다면, 우리 고구려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어.”

북장원의 장황한 말을 명림신은 공손히 듣는 척하며 내심 비웃었다.

‘주나후를 불러들여 태자로 책봉된 고건무의 목도 베겠다는 속셈이겠지. 뭐, 건무의 목이 날아간들 우리 고구려에 평화가 찾아온다면 난 그걸로 충분하니… 그걸로 된 거야.’

명림신의 이런 속도 모른 채, 북장원이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자네, 주 총관에게 사람은 잘 보냈겠지?”

“전서구를 날렸고, 그 전서구를 받은 이가 주 총관을 찾아 뵐 것이옵니다.”

“그래, 주 총관이 우리 덕에 공을 세운다면, 고구려는 무사할 게야. 그런데… 도대체, 요서를 헤매는 상장군 주용과 대모달 흑비걸에게는 누가 군량미를 전하고 있는 겐가?”

“그것은 소인도 아직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요동성에선 군량미를 보내지 않은 것이 확실한데…….”

“기이한 일이야. 군량미가 떨어져도 한참 전에 떨어졌을 것인데… 귀환하지도 않고, 계속해 한왕의 배후를 치고 물러나기를 반복하다니…….”

한왕의 행군원수부 대군의 배후를 공격하고 물러나기를 반복하는 상장군 주용과 대모달 흑비걸에게선 군량미 요청조차 없었다.

이들은 현재 자신들의 진영 위치조차 알리지 않고, 간간이 전황만 전할 뿐이었다.

“이보게, 명림신. 필경 을지문덕의 서부총관부에서 군량미를 보내고 있을 게야. 잘 살펴보게. 어디로 가는지도 알아보고.”

이미 명림신은 서부총관부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지만, 북장원의 명을 다시 받아 공손히 답하였다.

“계속 사람을 붙여 살피도록 하겠나이다.”

* * *

카사르의 올루스에서 물자를 보급 받는 강이식이나 연태조와 달리, 상장군 주용과 대모달 흑비걸은 전혀 다른 이들에게서 물자를 보급 받고 있었다.

“이번 길은 비사성을 거쳐, 물자를 보급 받은 후 요하 넘어로 갑니다.”

안시성의 젊은 성주 양만춘이 노궁수의 수장 대식에게 존대를 하며 말하였다.

대식은 경우의 아비로, 양만춘의 선친을 모셨었다.

그리고 이제는 양만춘 휘하에서 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성도 없는 평민 출신이었으나, 선대부터 안시성의 중책을 맡아온 대식을 양만춘은 결코 하대하지 않고, 마치 일가 어른처럼 공경하였다.

“성주님, 지난번에는 신성을 거쳐 북으로 해서 빙 돌아 요하를 넘어가더니, 이번엔 비사성을 거쳐 가십니까?”

“을지 공께서 이르시길… 내부에도 적이 있다고 하시며, 믿을 수 있는 곳에서 물자를 받아 믿을 수 있는 이가 날라야 한다고 하셨소이다.”

“내부의 적이라…….”

대식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더니, 이내 곧 안색을 굳히며 뒤돌아 엄히 명하였다.

“너희는 듣거라. 지금부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부모님에게도 발설하여선 아니 된다. 우리 고구려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라.”

평소 대식을 충실히 따르던 노궁수들이었기에, 누구하나 불만이나 이견을 다는 이 하나 없었다.

대식이 만족하여 다시 몸을 돌려 양만춘에게 물었다.

“하온데, 성주. 수의 군세가 막강하다던데… 우리 고구려가 잘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출병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도 전장에 나가고 싶으나, 을지 공께서 보급이 적의 목을 베는 것보다 더 중하다 하시었습니다.”

“어찌 보급이 적의 목을 베는 것보다 더 중할 수 있습니까?”

대식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으나, 양만춘이라고 답을 지녔을 리 없었다.

“나도 그건 좀… 그러나, 을지 공은 왜인지… 믿고 싶은 사람인지라… 하하.”

공연히 웃는 양만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식이 손을 들어 절벽 위 산성을 가리켰다.

“성주, 비사성이옵니다.”

높고 높은 산, 절벽 위에 자리한 이 비사성은 그 위치와 달리, 고구려의 수군 기지였다.

대화상산 절벽 위에서 요동만을 내려다보는 비사성은 천혜의 요새이며, 고구려 내부에서조차 그 군세를 명확히 아는 이가 극히 적은 비밀 기지였다.

“저 높은 곳에 자리한 성이 어떻게 수군 기지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대식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자, 양만춘도 자세히는 모르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마지못해 아는 것을 쥐어짜 답하였다.

“듣자하니, 신라의 당항성도… 절벽 위에 있다던데… 아마도 비슷한 이치가 아닐는지요. 제 아무리 수군이라도 대군의 공격으로 성이 함락되면… 해전을 벌일 수 없으니… 그런 뜻이 아닐는지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럼 배는 어떻게 관리를 할까요?”

“그게… 아마도… 수군들이 알아서 잘… 하지 않겠습니까?”

양만춘과 대식이 서로 의문만 더해 가는 대화를 나눌 때, 한무리의 군사가 비사성 안에서 나와 이들을 맞이했다.

“안시성의 양만춘 성주님이신지요?”

머리가 온통 백발인 노인이 선두로 나와 물었다.

남루한 옷차림이었으나, 어깨가 쩍 벌어져 무척이나 당당한 체구였다.

“그렇소만. 뉘신지?”

양만춘이 답하자, 백발노인이 깊이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소인 서해라 하옵니다. 강이식 대장군을 모시고 있사오며, 지금은 이곳 비사성에서 일을 보고 있습니다. 어서 오시지요.”

서해는 강이식에게 항상 잔소리를 아끼지 않는 부장 공별의 아비로 물길을 잘 알기에, 강이식이 비사성에 따로 배치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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