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180화 (180/328)

180화 겨울 전쟁 (20)

한왕의 진영과 고작 두 식경 거리인 카사르의 올루스 중앙에 세워진 게르 안에서는 공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아니, 대장군은 목숨이 두 개입니까? 혼자 나가시면 어찌합니까?”

홀로 일만 군사의 앞을 막아섰던 강이식에게 공별이 잔소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게 말이야. 놈들이 우리가 대기하던 곳으로 오지를 않으니, 내가 나서서… 그러게 잘 좀 데려오지. 하마터면 놈들이 올루스 근처까지 올 뻔했잖은가.”

“아니 그래도 그렇지. 혼자 그리 급하게 말을 몰아가면 어떡합니까? 다음부턴 주의해 주십시오!”

마치 공별이 상관이라도 되는 듯 엄히 질책하였으나, 이런 일에 익숙한지 강이식은 무덤덤했다.

“뭐, 그러도록 하겠네.”

이미 한왕의 진영을 주시하고 있던 카사르와 호타크 부족 전사들은 무석이 군사들을 이끌고 땔감을 구하러 오고 있음을 보고했었다.

이에 올루스의 위치를 들키지 않게 평강이 꾀를 내어 몰이 사냥하듯 수나라 군사들을 몰아간 후, 강이식이 말갈기병을 이끌고 앞을 막아 섬멸하려 했었다.

그러나, 거세게 내리는 눈에 잠시 시야가 흐려진 틈을 타 무석이 방향을 틀었고, 올루스가 노출될 것을 우려한 강이식이 급히 말을 몰아 홀로 앞을 막게 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으니, 고정하시지요. 모두 애쓰셨습니다.”

평강이 부드럽게 말하며 공별을 진정시키니, 강이식이 평강을 향해 짧게 머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평강도 강이식에게 머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적은, 화가 많이 났을 것입니다. 하여.”

평강이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자인 자신이 대장군 강이식을 제치고 작전 회의를 주도해도 되는지 망설이는 모양이었다.

이에, 강이식이 굵고 중후한 목소리로 위엄있게 말하였다.

“공주 마마께서 말씀하신다. 예를 갖춰 경청하거라!”

이렇듯 강이식이 회의를 주도해도 된다는 뜻을 밝히자, 평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화난 적은 반드시 대군을 이끌고 일거에 들이 닥치겠지요. 아마도 지금쯤 살아 돌아간 군사들이 매복을 알리고 있을 것입니다.”

공별이 조심스럽게 평강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허면, 역시 적을 맞아 일전을 벌여야할까요?”

“아닙니다.”

“하오면?”

“적이 공격해 오면 길을 열어 주고, 이후 다시 적의 좌우를 노려야겠지요. 그러기 위해선 올루스는 먼저 이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이식도 평강의 말에 동의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좌우를 공격한다라… 그것 좋겠습니다. 곧 날이 저물 것이니, 이곳까지 와도 더는 멀리 못 갈 터이고, 어차피 적은 또다시 눈밭에서 숙영을 해야 할 터이니…….”

강이식의 말에 평강이 덧붙여 설명하였다.

“더구나 적의 뒤는 상장군과 대모달이 착실히 갉아먹듯 괴롭히고 있어서 움직일수록 고달플 것입니다.”

“…….”

“을지문덕 공께서 사람을 보내어 알리시길… 이 눈은 앞으로 사흘 이상 계속될 것이라 하셨고, 이후엔 혹독한 추위가 예상된다 하셨으니… 적에겐 매우 가혹한 겨울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밤, 을지문덕은 경공술이 뛰어난 창주를 시켜 일기를 전해 왔었다.

평강의 말에 공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을지문덕 공께서는 어찌 날씨를 예측하신 걸까요? 천문과 지리에 통달하셨다더니, 정말인가 봅니다.”

이에, 강이식이 피식 웃었다.

“공별아, 하늘을 봐라. 빈틈없이 회색 구름이 꽉 찼으니, 비가 아니면 눈인데, 넌 뭐가 내릴 것 같으냐?”

“아니, 대장군. 그래도 그렇지. 을지문덕 공께서는 사흘이란 기간까지 명확히 예상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공별이 다시 이견을 달으니, 강이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동성에서 말이야. 성벽 위에 올라가 하늘을 보잖아? 저기 서쪽 땅 끝까지 거칠 것 하나 없어서. 끝도 없이 구름이 눈에 아주 잘 들어온단다.”

“대장군, 그게 무슨?”

“너 하늘 안 봤지? 을지문덕은 단지 눈이 밝은 것뿐이야. 서쪽 하늘 끝에 걸린 회색 구름까지 보고, 아! 저 구름까지 와서 눈을 뿌리려면 사흘 쯤 되겠다고 생각한 게야. 아무렴.”

“아무리 그래도…….”

공별이 뭔가 석연치 않은 듯 말끝을 맺지 못하니, 강이식이 껄껄 웃으며 기운차게 일어났다.

“자, 적이 올 게야. 다들 준비를 하자고!”

바삐 움직이라 명한 강이식이 평강을 돌아보며 껄껄 웃았다.

“을지문덕 그 친구, 과연 을파소의 후예답게 찬문에 능통하여 이렇듯 신묘한 예측까지 하니, 우리는 질래야 질 수가 없겠습니다. 하하하.”

* * *

동상을 막아 줄 땔감은커녕, 일만의 군사 중 고작 백여 명만이 돌아왔을 뿐더러, 행군원수부의 맹장 무석이 강이식의 일격에 머리가 뭉개졌다는 보고에 한왕 양양은 기가 막혀 한참을 웃었다.

“날도 춥고, 눈까지 오는데… 너희가 내게 농이 심하구나. 하하하.”

한왕의 기괴한 웃음이 막사 안을 휘젓듯 울리자, 모든 장수들과 행군원수부에 초청되어 함께 출병한 무예 고수들이 바짝 긴장하여 침묵을 지켰다.

“하하하, 그래. 정녕 무석도 죽고, 일만 군사도 죽고, 땔감도 없다고 치자. 그럼 이제, 추위와 동상은 무엇으로 막을 터이냐?”

한왕 양양이 살아 돌아온 무석의 부장에게 다가가 물었다.

찬 바닥에 무를 꿇은 무석의 부장은 변변한 답도 내놓지 못하고, 그저 사시나무 떨듯 겁에 질려 떨기만 하였다.

“뒤에서 우리를 공격한 놈들은 원래 태자 전하를 쫓던 놈들이라 치고, 그놈들이 계속 쫓아오며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지만! 도대체 저 앞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한왕 양양이 다시 무석의 부장에게 물었다.

“소, 소인은… 모르옵니다.”

“몰라?”

“그, 그렇사옵니다.”

“강이식이라며? 고구려의 대장군 강이식이라며?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그런데도 몰라?”

한왕 양양이 바짝 얼굴을 대고 물으니, 무석의 부장은 울상이 되어 답하였다.

“강이식은 맞사옵니다만… 그가 왜 우리 앞에 있는지는… 소인도 모르옵니다. 죽여주십시오.”

순간, 무석의 부장은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여… 죽여 줘?”

한왕 양양의 물음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무석의 부장이 벌벌 떨며 답도 못하였다.

그러자, 한왕 양양이 피식 웃고는 부드럽게 물었다.

“너, 이름이 무엇이냐?”

“무, 문술이옵니다.”

“무문술?”

“아, 아니옵니다. 그냥 문술이옵니다.”

“문술이라… 허허, 이놈 봐라? 허국공(許國公)과 이름이 같구나. 너는 그 이름 덕에 산 줄 알거라. 하하하.”

한왕 양양이 껄껄 웃으며 말한 허국공은 황제 양견이 총애하는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인 우문술(宇文述)을 의미했다.

공손성이 장안의 서북쪽을 지키는 수문장 역이라면, 우문술은 장안성을 지키는 황제의 호위무사와도 같은 존재였다.

또한 양소는 물론, 태자 양광과도 무척이나 친분이 돈독하여 한왕 양양이 극도로 싫어하고 꺼려하는 인물이었다.

한왕 양양이 문술을 일으켜 세우고는 다정히 옷에 묻은 흙까지 손수 털어주며 말하였다.

“문술아, 내 너를 살려 줄 터이니, 그놈들과 마주친 곳으로 앞장서거라. 너도 그 이름값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 이름 덕에 내가 공을 세울 기회를 준 것이다.”

“전하, 망극하옵나이다.”

이에, 한왕 양양이 장수들을 돌아보며 큰 소리로 명하였다.

“이놈 문술에게 무석의 군사를 맡기고 선봉에 세우노라! 또한 즉시 진을 거두고, 무석이 죽은 곳으로 향하여 단숨에 고구려 놈들을 박살내겠노라! 모두 서두르거라!”

한왕이 살기등등하여 명을 내리니, 그 누구도 감히 이견을 내지 못하였다.

결국 졸지에 삼호장 자리에 올라 선봉장까지 맡은 문술이 앞장서고, 그 뒤를 행군원수부 대군이 따랐다.

갑작스럽게 막사가 거두어진 태자 양광과 양소도 눈을 맞으며 따라가야 했다.

양현감이 급히 물자가 실린 수레를 비우고 양광과 양소를 태우니, 말 위에 오른 한왕 양양이 코웃음 쳤다.

“수의 태자가 군량미 나르던 수레에 실려 가다니… 쯧쯧.”

그러나, 이내 곧 한왕 양양의 말이 눈 속에 가려진 돌을 헛디뎌 발목을 다치니, 그 역시도 군량미 나르는 수레에 실려 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에, 양소가 나지막이 태자 양광에게 말하였다.

“전하, 보소서. 우리 수는 본래 북주의 뒤를 이었고, 북주는 후연의 뒤를 이었으며, 후연은 북방 기마 민족인 연의 뒤를 이은 나라이옵니다. 연은 바로 이 요서 땅을 제압한 패자로 그들의 말은 이런 눈과 추위에도 굴하지 않고 강건하였습니다. 허나.”

양소가 성한 말 하나 없어 눈밭을 행군하는 군사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만리장성에 의지해 지내는 동안, 우리 수의 지배층은 어느새 한족에 동화되었고 대부분의 장수와 군사들 모두 만리장성 안 출신일 뿐더러 남쪽에서 징집된 군사들마저 있기에, 추위에 약하옵니다.”

“…….”

“고구려와의 전쟁은 남방계와 북방계의 전쟁이오니 반드시 꽃 피는 봄에 시작하여 가을에 끝을 맺어야 하옵니다.”

마치 스승처럼 혹은 자상한 아비처럼 하나하나 가르침을 내리는 양소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며 태자 양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가슴 속 깊이 조각하리다.”

수레 곁을 지키며 눈 위를 걷던 양현감은 자신의 아비에게 진정을 담아 말하는 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대하는 태자 전하의 태도는 실로 스승을 대하는 제자와도 같이 성실하시구나. 태자 전하께서 나의 부친께 저리도 진심이시니, 나 역시도 태자 전하를 위해 충심을 다하리라.’

* * *

문술이 이끈 오만 군사들이 나름 앞장섰지만, 속도를 낼 수 없어 이내 곧 본진과 맞붙어 행군할 수밖에 없었다.

말을 달려 두 식경 거리였으나, 눈밭을 걸어 당도하니 어느새 해가 어둑어둑해져만 갔다.

황혼이 눈 위를 덮으니, 마치 눈밭에 불을 피운 듯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히이이잉.

전방에서 말 울음소리가 길게 울리자, 문술이 손을 들어 행군을 멈추게 하였다.

이어서 뒤에 바짝 붙은 본진도 멈추니, 한왕이 수레 위에 서서 흩날리는 눈 속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히이이잉.

흩날리는 눈에 가려 있었지만, 긴 말 울음소리로 고구려 군의 위치를 나름 파악할 수 있었다.

“저놈들이… 저기 있구나. 무엇하느냐! 당장 공격하여 일거에 섬멸하도록 하라!”

수적 우세를 믿고 한왕이 명하니, 무석이 오만 군사를 이끌고 돌진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본진의 장수들이 군사들을 이끌고 따르니, 하늘에서 내리는 눈 못지않게 군사들이 달리며 흩날리는 눈 또한 상당하였다.

하늘과 땅에서 흩날리는 눈으로 어느새 시야가 가려진 한왕의 귓속으로 수나라 군의 함성과 퇴각하는 고구려 군의 말발굽 소리가 요동치듯 전해졌다.

“와아아!”

멀리서 승리의 함성이 들리니, 한왕 양양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강이식은 고작 패잔병 나부랭이를 이끌고 있었을 뿐이야. 이렇듯 대군으로 몰아치면 당해낼 수 없는 법이지.”

만족스런 표정의 한왕 양양을 수레 곁에 선 제갈여가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하였다.

‘내가 줄을 잘못 선 모양이로구나. 그렇다고 한들, 이제와 줄을 바꿔 설 수도 없고… 한왕이 부디 이 전쟁을 승리하여 태자 자리에 이어 황제 자리까지 올라야 할 터인데… 사람이 저리 못났으니, 이를 어찌한다.’

제갈여의 쓰린 속도 모른 채, 한왕 양양이 수레에서 내려 급히 명하였다.

“눈이 거세고, 날이 추워진다. 속히 진영을 갖추어라!”

눈밭 위에서 해가 저물기 시작하고 있으니, 지극히 당연한 명이었다.

그러나 눈을 맞으며 막사를 세우는 군사들 마음속에는 불만만 가득 쌓여 갔다.

‘이렇듯 더 행군도 못하고 밤을 맞아 진을 펼쳐야 했다면, 이전 진영에서 머물며 눈이 그치길 기다리는 것이 옳지 않았나?’

수나라 군사들 마음속엔, 대군을 몰아 싸우면 여지없이 승리하여 고구려 군을 물리치지만, 기이하게도 지치는 것은 오직 자신들인 것만 같았다.

‘우리가 이기고 있는 것 맞긴 한가?’

‘이겨서 얻은 것은 무엇이지? 아무것도… 승리해 얻은 것은 땔감조차 없는데도… 정말 이긴 것이 맞기는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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