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겨울 전쟁 (19)
온달과 대건상에게 배후를 급습 당해 패주하였던 채휘와 공지열은 임유관에서 서쪽으로 이십 리 떨어져 진영을 재정비하였다.
“이대로 돌아가면, 우리는 한왕 전하께 목이 날아갈 것이요.”
채휘가 한탄을 하자, 공지열도 쓴 입맛을 다셨다.
“허허, 이것 참… 온달이 우리 배후에서 나타날 줄이야. 놈들이 임유관에 미끼를 던져 놓고 우리를 농락한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군사를 많이 잃지 않았으니, 정비하여 임유관으로 다시 돌아가 일전을 벌여 봅시다.”
공지열의 말에 채휘도 주나후의 수군이 군량미와 보급 물자를 운송해 올 시기가 지났기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
이때, 정찰 나갔던 군사가 돌아와 급히 아뢰었다.
“임유관에는 고구려 군이 없습니다.”
“뭐라?”
채휘가 놀라 되물으니, 군사가 바로 답하였다.
“소인도 놀라워 안까지 몰래 숨어 들어갔습니다만, 그 어디에도 고구려 군은 없었습니다.”
이에, 채휘가 무릎을 탁 치며 벌떡 일어났다.
“이런! 우리가 속은 것이오. 놈들은 우리를 함정에 빠뜨린 것이 아니라 임유관에 갇혔던 고구려 군을 구하러 온 것이었소.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임유관에 무혈입성할 수 있소. 서두릅시다!”
채휘와 공지열이 서둘러 군사들을 이끌고 임유관으로 돌아가 보니, 정찰 나갔던 군사의 말이 맞았다.
이에, 채휘와 공지열은 급히 한왕에게 전령을 보내 임유관을 탈환하였다는 승전보를 알리게 하고, 북해로도 전령을 보내 속히 군량미를 포함한 보급 물자를 운송해 오라 전하도록 했다.
“우리가 온달이란 놈의 급습으로 잠시 물러났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임유관을 탈환하였으니 이 어찌 공이 작다하겠소. 주 총관이 보급 물자만 운송해 온다면 이를 한왕 전하께 가져가 또 한 번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오.”
채휘가 이렇듯 들떠 말하니, 공지열도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정말 알 수가 없구려. 목이 날아갈 줄 알았던 우리가 이렇듯 공을 세우다니… 하하하, 실로… 감개무량하오.”
* * *
채휘와 공지열이 임유관에서 기뻐하던 그 시점.
한왕의 진영에선 태자 양광과 그의 군사 양소가 은밀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태자 전하, 이번 전쟁은 전쟁사에 길이 남을 교본이 될 것이옵니다.”
양소의 말에 양광이 의아해 물었다.
“군사는 한왕이 이기리라 보는 것이오?”
“아니옵니다.”
“헌데, 어찌 전쟁사에 길이 남을 교본으로 삼으라 하는 것이오? 나는 내 아우 양이가 공을 세우는 것도 싫으나, 고구려의 승리도 마땅치 않으니, 이번 전쟁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도록 할 것이오.”
태자 양광은 마치 자신이 황제라도 된 듯 이 전쟁을 역사에 기록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단언하였다.
이에, 양소는 불만을 보이지 않고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태자 전하, 역사에 기록되지 않더라도 전하께선 반드시 교훈으로 삼으셔야 하옵니다.”
“…….”
“대군을 상대할 때, 전장을 넓게 사용하며, 원하는 시기와 장소에서 전투를 벌이고, 적이 강해지면 물러난 뒤 회군하는 적을 자연스럽게 포위하는 고구려의 이 전술은 향후에도 사용될 수 있사오니, 반드시 기억하셔야 하옵니다.”
양소의 말 속엔 한왕의 대군이 고구려 군에게 이미 포위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양광도 이를 알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양소가 다시 말을 이었다.
“또한 보급의 중요성도 숙지하시어, 대군과 보급이 따로 움직이지 않도록 하심이 옳습니다. 한왕 전하처럼 기동력을 중시하여 대군이 먼저 움직이고 수군이 물자를 운송하는 이 방식은 적에게 보급을 차단당할 시, 자멸할 수밖에 없사옵니다.”
“옳은 말이요.”
“또한 소국인 고구려가 혼자 감당하지 못함을 알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돌궐을 먼저 품었던 것을 기억하시어, 큰 전쟁을 앞두고는 반드시 주변 우환을 정리하셔야 합니다.”
“이 역시도 옳은 말이오. 군사의 말을 마음 깊이 조각하여, 다음 전쟁에선 황제가 된 내가 직접 친정할 것이오. 또한 이번과는 그 규모를 달리하여 정벌군 백만에 수송군 백만 그리고 대륙 전역에서 물자를 쉽게 나를 수 있도록 운하부터 재정비할 것이오.”
양광이 백만의 정벌군과 백만의 수송군을 언급하자, 양소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마도 백만의 수나라 군사가 고구려 전역을 짓밟는 광경이 그려지는 모양이었다.
“또한 수군이 수송을 담당할 것이라 고구려 군이 예상하게 한 후, 수군은 빠르게 바다를 건너 평양성 앞에 진을 펼치게 할 것이오.”
“…….”
“그리 한다면, 고구려는 백만의 장벌군을 요동에서 마주하고, 바다를 건너온 수군을 평양성에서 상대해야 하기에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고 말 것이오.”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 전략이옵니다. 여기에 하나 더 첨언 드리자면, 장안은 금산의 돌궐과 가까우니, 낙양으로 천도하시옵소서. 고구려와 가까워 정벌에 용이하며, 정벌 중 돌궐의 소요에도 여유 있게 방비가 가능합니다.”
“낙양 천도라… 참으로 좋소!”
양광과 양소는 백만의 정벌군에 압도당한 고구려가 싸우기도 전에 항복하리라 상상하며 웃음 지었다.
황제 양견이 영주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물어 태자 자리는 고사하고, 자신들의 목조차 지키기 어려울 처지임에도, 이미 황제가 된 듯 고구려 정벌을 논하던 태자 양광이 목소리를 낮춰 말하였다.
“우리의 이 행복한 상상이 현실이 되기 위해선, 황제께서 강녕하시어선 아니 되오.”
“아니옵니다. 순서는 황후 마마가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옵고, 그 다음이 황제 폐하이옵니다. 이후, 태자 전하의 형님과 아우님들이 차례를 맞아야 할 것이온데… 다만…….”
“다만, 무엇이오?”
“공손성이옵니다.”
양소가 대 돌궐 총사령관 공손성을 언급하자, 양광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공손성이라… 황제께 그자가 있었지. 내가 황제 자리에 오른들 그자가 기병을 끌고 반기를 들면 목이 떨어지는 것은 우리가 될 수도 있겠구려.”
이에, 양소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세상일에는 모두 그에 맞는 답이 있습니다.”
“답이 있다라?”
“그렇습니다.”
“무엇이오? 공손성을 상대할 그 답이…….”
“태자 전하의 외사촌 형님 되시는 이연이옵니다.”
양소의 말에 태자 양광은 태원 유수이자, 공손성과 별도로 대 돌궐 사령부를 꾸리고 있는 이연을 떠올렸다.
성품이 어질고 차분하면서도 정이 많은 인물로 어려서는 함께 사냥도 즐기며 사이가 꽤 좋은 편이었다.
“이연 형님이라… 내 편이 될 수 있겠소?”
“되도록 일을 꾸며야겠지요. 그렇기에, 황후 마마가 우선이 되어야 하옵니다. 제가 그림을 잘 그려 볼 터이니, 기대하여 주시옵소서.”
양소의 장담에 양광의 입꼬리가 웃음을 참지 못하여 실룩거렸다.
* * *
태자 양광이 양소와 밀담을 나누던 그 순간.
땔감을 구하기 위해 군사 일만을 이끌고 나갔던 무석은 눈밭을 헤매며 쫓기고 있었다.
털가죽을 두른 카사르와 호타크의 전사들이 거리를 두고 무석의 일만 군사들을 쫓으며 화살을 날리니, 검붉은 피가 하얀 눈을 붉게 물들였다.
수나라 군의 말들이 사람보다 먼저 지쳐 진영에사 발이 묶인 것과 달리, 북방 초원의 말들은 깊게 쌓인 눈밭도 거침없이 내달렸다.
본래 말은 사람보다 체력이 강하고 다리 역시 탄탄한 근육질이었으나, 발굽에서 발목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얇고 근육이 없어 무척 약한 부위였다.
그렇기에, 눈이 쌓이면 그 속에 숨은 돌을 살필 수 없어 부상을 당하기 일쑤였다.
이에 비해 북방 초원의 말들은 체격이 작은 대신 지구력이 강하고, 발목도 상대적으로 튼튼하여 부상이 적었다.
무석의 일만 수나라 군사들은 말도 없이 무릎까지 쌓인 눈밭을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는 반면 카사르와 호타크의 부족 전사들은 말에 올라 거리를 두고 천천히 화살을 날리니, 마치 사냥하는 듯 여유롭기까지 했다.
휘날리는 눈 때문에 시야가 좁고 해마저 회색 구름에 가려 동서남북조자 구분이 안 되니, 무석은 마냥 사지를 헤맬 수밖에 없었다.
이때, 그의 앞에 돌연 말울음 소리가 들리더니 중후하면서도 위엄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길이 아니다. 왔던 길로 돌아가거라!”
“누, 누구신지?”
무석이 전방을 주시하며 두렵고도 놀라 물으니, 중후한 목소리가 껄껄 웃으며 다가왔다.
“하하하. 이놈아, 누구긴 널 살려 주려는 네 조상님이다. 하하하.”
흩날리는 눈 속에서 목소리의 주인이 차츰 모습을 드러냈다.
두 개의 뿔이 달린 검은 투구와 검은 갑주를 입었는데, 갑주 위에는 호랑이 가죽을 둘러 바람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한 손에는 거대한 쇠몽둥이를 들었으니, 이가 바로 낭아봉을 사용하면서도 검귀라 자처하는 고구려의 대장군 강이식이었다.
“가, 강이식?”
무석이 놀랍고도 두려워 중얼거리니, 강이식이 껄껄 웃었다.
“내 오늘은 살생을 하고 싶지 않으니, 그만 눈밭을 헤매고 돌아가거라. 날이 춥다. 가라.”
홀로 수나라 군사 일만의 앞을 막아선 강이식의 모습은 마치 눈 구경을 나온 듯 여유로웠다.
무석이 강이식을 공격할지 망설이며 대답이 없으니, 답답한지 강이식이 말을 조금 더 앞으로 몰아 나오며 말하였다.
“인생에는 여러 결단의 순간들이 찾아온단다. 오늘 밥을 먹을지 술을 마실지와 같은 사소한 결정부터, 생과 사를 나눌 결단까지… 오늘 네가 그렇다. 돌아가 따뜻한 밥이나 먹든지, 한 발 앞으로 나와 염라대왕과 사후 세계를 논의할지 말이다.”
강이식의 조롱 섞인 말에 무석이 크게 분노하였다.
비록 눈 속을 헤매며 토끼몰이 당하는 처지였으나, 무석도 한왕 행군원수부의 맹장이란 자부심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놈! 강이식! 감히 나를 능멸하느냐?”
무석이 크게 소리치며 장창을 치켜들고 달려드니, 부장이 크게 소리쳐 명을 내렸다.
“돌격하라! 적은 고작 한 명이다! 장군을 지키고 놈을 사로잡아라!”
이에 수나라 군사 일만이 무석의 뒤를 따르며 강이식을 향해 돌격하였다.
그러나 강이식은 전혀 동요도 없이 허허 웃더니, 가장 먼저 달려든 무석을 향해 힘껏 낭아봉을 휘둘렀다.
깡!
쇠와 쇠가 부딪치는 파열음이 일고, 무석의 창날이 부러져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리고 낭아봉의 위력에 무석이 손에서 창을 놓치고는 날아드는 낭아봉을 허망하게 바라만 봐야 했다.
퍽!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무석이 머리가 뭉개져 뇌수를 뿌리며 쓰러졌다.
털썩.
눈 속에 파묻히듯 쓰러진 무석의 뒤로 맹렬히 달려들던 수나라 군사들이 놀라 일제히 발을 멈추었다.
“자, 장군!”
무석의 부장들이 부르짖고는 힘겹게 눈을 헤치며 달려오니, 강이식이 안타까운지 혀를 끌끌 찼다.
“쯧쯧, 그러게 돌아가라 했거늘. 죽을 놈은 항상 이렇듯 나쁜 선택을 하니, 가족에게 뭔 몹쓸 짓인 게냐. 너도 부모가 있고 자식도 있을 것인데… 다음 생에선 부디 좋은 선택만 하거라.”
강이식의 이 말은 무석의 부장들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
“무엇하느냐! 고작 저놈 하나다! 당장 목을 쳐라!”
이에, 잠시 주춤하였던 수나라 군사들이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강이식에게 달려들었다.
“허허, 오늘 따라 나쁜 선택만 하는 놈들이 왜 이리 많은 게냐… 인생이란 개똥밭에 굴러도 일단은 살고 봐야 하거늘…….”
강이식이 여유롭게 말하며 가볍게 낭아봉을 휘두르니, 눈 때문에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 수나하 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눈 위에 쌓여만 갔다.
홀로, 만 명의 수나라 군사들의 앞을 막고도 강이식의 몸놀림은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달려드는 수나라 군사들이 위축되어만 갔다.
점점 더 눈 위에 시체가 높이 쌓여만 가니, 부장들이 제각각 군을 이끌고 강이식의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하였다.
“결코 살려 보내지 않겠다! 에워싸고 도망치지 못하게 한 후 사로잡아라!”
“강이식의 목을 쳐라! 고구려이 대장군의 목이다. 한왕 전하께서 반드시 큰 상을 내리실 것이다!”
부장들이 제각각 외치며 독려하니, 위축되었던 수나라 군사들도 차츰 기세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때 멀리서 에워싸며 추격해 오던 호타크와 카사르의 잔사들이 맹렬한 속도로 말을 몰아오며 화살을 날리고, 강이식의 등 뒤에서도 말울음 소리가 울리며 말갈기병 삼천 기가 흩날리는 눈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공별! 황우! 이제 온 게냐? 나 죽을 뻔하였구나.”
강이식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치며 여전히 힘차게 낭아봉을 휘둘렀다.
“대장군! 어찌 무모하게 홀로 적의 앞을 막아선 것입니까? 죽고 싶은 것입니까? 사람에게는 생을 살며 다양한 선택의 순간이 찾아오는데, 오늘 장군께선 죽을 선택지를 쥔 것이옵니다. 제가 은인인 셈이지요.”
어느새 곁으로 말을 몰아온 공별이 쉴 새 없이 잔소리하며 손을 들어 명하였다.
“시원하게 짓밟아라!”
강이식과 황우가 말갈기병을 이끌고 수나라 군사들을 짓밟으며 돌파를 강행하니, 멀리 떨어져 화살을 날리던 카사르와 호타크의 전사들은 일제히 손을 멈춘 채, 요란히 함성을 질렀다.
이에, 수나라 군사들은 겁에 질려 무작정 뒤 돌아 도망치니, 강이식과 항우가 이끈 말갈기병들이 그 뒤를 쫓으며 발굽으로 짓밟고 곡도로 쉼 없이 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