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겨울 전쟁 (18)
의관 오옥은 의식 잃은 연태조의 가슴에 꽂힌 관에 가죽으로 만든 가늘고 긴 대롱을 단단히 붙여 잇고는 쇳덩이를 매달아 물이 담긴 통에 넣었다.
그러자, 핏물이 대롱을 통해 물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이제 더 이상 외부에서 허파와 그 주위로 바람이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다만, 사람 몸속은 외부의 바람과 이물질이 있어선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합하의 몸속엔 많이 들이 차 있을 것입니다.”
“…….”
“이는 몸을 가르고 장기와 뼈를 깨끗이 닦은 후 봉합해야 하는 시술이 요구되오나…….”
감히 고구려의 막리지 몸을 가르고 장기와 뼈를 닦겠다고 말하니, 상장군 대건상이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쳤다.
“네가 지금 뭐라 하는 것이냐! 네 이놈! 북해 출신이라 하더니, 네가 한족, 중원인이라 감히 대고구려의 막리지를 시해하려는 것이더냐?”
이에 오옥이 예상했다는 듯 허허 웃으며 답하였다.
“의원은 환자의 출신과 신분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저 목숨을 구하고, 환우가 치유되면 족할 따름이니, 의심치 마시옵소서.”
그러나 대건상의 태도는 여전히 강경하였다.
“네가 만약 몸을 가르고 장기와 뼈를 닦을 것이라 말하였다면 합하는 결코 네게 몸을 맡기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다른 방도를 찾거라!”
이에 오옥이 잠시 눈을 감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합하의 허파는 더 이상 쪼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당장 목숨은 건졌고, 향후의 일은 합하에게 달렸으니, 소인은 그만 물러나도 될 듯하옵니다.”
“장기와 뼈를 닦지 않아도 되시겠소?”
온달이 불안해 물으니, 오옥이 빙그레 웃었다.
“있어서 안 될 것이 들어 있어 좋을 일은 없겠으나, 당장 목숨에는 이상 없으리라 생각되옵니다. 이후는 합하께서 몸을 다스리시어 스스로 쪼그라든 허파를 펴셔야 합니다.”
“스스로?”
“그렇사옵니다. 고통스럽더라도 이 통을 십오 일간 곁에 두고 힘차게 숨을 들이키기를 반복하신다면 반드시 허파는 다시 부풀어 오를 것입니다.”
“오 의관은 사람 몸속의 허파가 쪼그라들고 펴지는 것이 보이시오?”
온달이 신기해 물으니, 오옥이 미소 지었다.
“볼 수야 있겠습니까? 그저 배우고 익힌 대로 알 뿐이지요.”
“배우고 익혔다면 그대의 스승은 누구시오?”
온달은 오옥의 출신을 따져 의심하지 않았고, 오옥은 그런 온달에게 호감을 느껴 사실대로 말하였다.
“선조 대대로 내려오는 책이 있사온데, 아버지가 맏이에게, 맏이가 다시 맏이에게 대를 이어 물려주며 익혀왔나이다.”
“가전비기로세. 실로 대단하오. 대단해. 선조께서는 선인이셨나 보구려.”
온달이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오옥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래 전, 선조께서는 옥을 지키는 옥족이셨습니다. 한 명의 의관이 옥에 갇혔는데, 그 의원을 극진히 돌본 선조께 의원이 참형을 당하기 전에 한 권의 책을 남기셨지요.”
“허허, 그런 일이…….”
“선조께선 주위 의심을 피하기 위해 책 표지를 찢어 다른 책과 함께 태우고는 의원이 남긴 책은 소중히 숨겨 보관하셨다지요. 소인은 그 표지가 없어 이름도 없는 책으로 배운 의술대로 시술하였을 따름이옵니다.”
“화타네.”
오옥의 말을 가만히 듣던 막바우가 무심코 중얼거리다가 대건상을 힐끔 바라보았다.
이에 대건상이 콧방귀를 뀌자 막바우가 히죽 웃었다.
“화타야 아니겠지만, 아무튼 화타와 비슷한 이야기네. 아무튼 오 의원이 막리지의 몸을 가르고 장기와 뼈를 닦았다면, 화타처럼 경을 치렀을 수도 있었겠구려.”
막바우의 이 말에 대건상의 눈꼬리가 매섭게 올라갔으나, 온달이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 감히 큰 소리는 내지 않았다.
“헌데, 십오 일이 지나 막리지의 몸에서 이 관을 빼낼 때까지 그대가 여기 남아 있어야 하는 게요?”
막바우의 물음에 오옥이 고개를 저었다.
“바람이 다시 들어가지 않도록 상처 주위를 단단히 쥐고 관을 뽑은 후, 실로 단단히 상처를 봉합한다면 잘 아물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다른 의관들도 할 수 있으니, 제가 방도를 알려 주고 떠나면 될 듯합니다.”
오옥의 대답에 온달과 막바우가 기뻐하였다.
* * *
다음 날, 새벽부터 그해 첫눈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눈이 내리면, 말들은 풀을 찾아 뜯기 어려웠고, 이는 곧 야전 중인 기병의 움직임이 봉쇄 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한왕의 행군원수부 대군은 다음 해 봄에 출병을 목표로 했었고, 이번 출병 당시에도 가을이었기에 겨울을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사람보다 말이 먼저 굶주리니, 한왕 양양과 태자 양광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야 했고, 행군 속도는 더뎌만 갔다.
첫눈임에도 북방의 매서운 기운에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무릎 위까지 눈이 쌓이자, 수나라 군사들의 발이 부르트기 시작했다.
“고구려 놈들이 설마 이토록 겨울이 빨리 오리라 예견하여 일을 벌이진 않았을 터인데…….”
한왕 양양이 말 위에서 눈밭을 걷는 군사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눈으로 인하여 부르튼 발을 속히 말리지 않으면 이내 곧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잘라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보급 물자가 임유관을 거쳐 오지 않으면, 탁현으로 회군하기도 전에 식량이 먼저 떨어질 게 뻔하였다.
추위 속에서 굶주림은 사람을 더욱 지치게 하고, 몸의 열기마저 내려가게 할 터라 눈밭을 헤매며 동상에 걸릴지언정, 행군을 멈출 수는 없었다.
오후가 되어도 회색 하늘에선 눈송이가 휘날렸고, 사람의 체온으로 녹은 눈이 고드름으로 변하여 머리카락과 수염에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한왕 양양도 더는 행군을 강행할 수 없다 판단하여 명을 내렸다.
“채휘와 공지열이 임유관을 탈환하였다면, 주나후가 운송해 온 보급 물자를 실어올 것이다. 군량미도 있고, 의복도 있을 게야. 일단 진을 치고 이곳에서 잠시 쉬도록 하자.”
이 말 속엔 채휘와 공지열이 임유관을 탈환하지 못하였다면, 보급 물자도 없을 것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한왕은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다.
막사가 세워지고 군데군데 모닥불이 밝혀졌으나, 드넓은 광야에서 넉넉히 불을 지필 나무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산에 올라 나무를 구해와야겠습니다.”
소장황이 조심스럽게 말하니, 한왕 양양이 멀리 보이는 산들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 저곳까지 군사를 보내어 나무를 구하겠소? 그리 안달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리면 보급 물자가 올 것이니, 참아 보시오.”
이에 제갈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눈이 내리면 바로 추위가 이어지옵니다. 산이 멀다하여 나무를 구하지 않는다면 대군의 손발이 동상에 시달리게 되옵니다.”
“참으면 된다 하지 않았소!”
한왕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소리쳤으나, 이전과 달리 제갈여도 물러서지 않았다.
“전하, 동상으로 죽지는 않을지라도, 손가락과 발가락이 상한 군사는 적에 맞서기 힘든 법이옵니다. 우리가 회군한다 하여도, 내년 봄에 다시 출병해야 하온데, 그때는 동상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이 상한 군사를 끌고 전쟁을 치러야 하는 참담한 상황을 맞게 되시옵니다.”
이에 한왕 양양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소장황에게 멀리 떨어진 산으로 나무를 구해오라 명하였다.
“소 장군이 땔감을 구해오도록 하시오. 그대가 올 때까지 이곳에 진을 치고 있을 터이니, 속히 회군하고자 한다면 조속히 땔감을 구해 와야 하오.”
한왕의 지시를 묵묵히 지켜보던 태자 양광이 말없이 막사 밖으로 나오자, 밖에서 눈을 맞던 양소와 양현감이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랐다.
“드디어, 내 아우가 함정에 빠진 모양이야.”
양광이 나지막이 속삭이자, 양소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말하였다.
“태자 전하, 다행스럽게도 영주의 군사들은 탁현의 군사들과 달리 갑주와 옷이 두꺼워 당장의 추위는 버틸 수 있을 듯합니다.”
양현감이 이끈 보군 일만은 상대적으로 한왕의 군사들보다 갑주에 털이 들어 있었고, 속옷도 두터워 추위와 바람을 막아주고 있었다.
물론, 이들 역시도 겨울에 대비한 갑주는 아니었으나, 당장의 추위는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러한가?”
태자 양광이 양현감을 바라보며 물었다.
“영주에서 출병할 당시, 보급 물자 속에 월동 물자도 따로 조금 취합하였기에, 당분간은 버틸 여력은 되옵니다.”
“그래, 곧 생지옥이 펼쳐질 터이니, 미리 두터운 속옷을 껴입고 있으라 전하게.”
태자 양광의 명에 양현감이 영주에서 이끌고 온 일만 군사들에게 보급 물자를 지급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양현감이 떠나자, 태자 양광이 양소에게 나지막이 말하였다.
“우리를 쫓던 고구려 군이 아직 저 뒤에 있을 터인데, 양이가 저쪽 산으로 군사를 보내어 땔감을 구해오라 하더군.”
“전하, 소장황은 성미가 급하고 어리석은 인물입니다. 필경 땔감을 구하러 가서, 군사만 잃고 올 것입니다. 땔감을 기다리느라 행군 속도는 더욱 느려질 터이고, 추위는 하루가 다르게 매서워질 것입니다.”
양소가 마치 저주를 내리듯 말하니, 태자 양광이 만족하여 허허 웃었다.
“군사, 어찌 말을 그리 무섭게 하시오. 허허허.”
해도 가릴 만큼 회색 구름이 뒤덮인 하늘에선 함박눈이 휘날렸고, 이 눈으로 인하여 시야도 무척이나 짧고 좁았다.
만일 눈이 내리지 않았다면, 두 식경 남짓 거리에 진을 펼친 카사르와 호타크의 올루스를 발견했을 것이니, 기후는 결국 고구려 군의 편인 셈이었다.
이들과 달리 시력이 우월한 몽고와 커레이트 전사들은 이미 수나라 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소리 없이 뒤를 쫓아오던 상장군 주용과 흑비걸도 수나라 진영에서 군사 일부가 빠져나오기만을 사냥감을 쫓는 맹수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필경, 땔감을 구하러 진을 벗어난 소장황의 군사들은 눈밭을 쫓기는 사슴 떼처럼 고구려 군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태자 양광과 양소는 이미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결코, 함구하고 있었으니, 아마도 한왕에게 도움을 주기 싫었음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땔감을 기다리던 한왕 양양 앞으로 소장황이 흠뻑 젖은 채 온몸에서 연기를 뿜어내며 돌아왔다.
몸의 열기 탓에 갑주에 쌓인 눈이 녹아 속옷까지 흠뻑 젖은 소장황이 막사 안 화로 앞에 서니, 물이 끓어오르듯 그의 몸에서 더욱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래, 다녀오셨소? 고생했겠구려.”
한왕이 나름 땔감을 기대하며 말하니, 소장황이 고개를 푹 숙이며 답하였다.
“전하… 적의 매복이 있었사옵니다.”
“뭐라? 그럼, 땔감은?”
한왕이 다시 땔감의 여부를 물었으나, 소장황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대답이 없었다.
“이런 머저리 같은 작자가 다 있나! 그렇게 자신하고 군사를 끌고 가더니, 땔감은커녕! 패하고 와? 눈밭 속에서 행군마저 멈추게 하고는… 이런 작자를!”
한왕이 칼을 빼들고 당장 소장황의 목을 베려하니, 무석이 나서 만류했다.
“소장이 앞으로 나아가 땔감을 구해오겠나이다.”
“땔감? 또 구하러 간다고?”
자신의 막사는 이미 후끈 달아오른 화로 덕에 한기조차 없었으니, 군사들의 추위 따위는 알 수도 알고 싶지 않은 한왕으로선 땔감이 정녕 필요한지 의문이었다.
“전하, 이미 진을 친 이상 땔감은 필요합니다. 소장이 구해 올 터이니, 하명하여 주시옵소서.”
이에 한왕이 마지못해 명을 내렸다.
“저 뒤로는 고구려 군이 매복 중이라 하니, 그대는 앞으로 가서 구해오시구려.”
한왕이 명한 곳엔 이미 강이식이 카사르, 호타크 등과 함께 진을 치고 있었으니, 전황은 계속 수나라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