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177화 (177/328)

177화 겨울 전쟁 (17)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모두 짓밟아라!”

관문 앞에 서서 막바우가 장창을 높이 치켜들고 외치니, 뒤이어 개마무사 일천 기를 이끌고 들어온 우랑이 이에 호응하였다.

“누구도 우리 고구려의 철기병을 막을 수는 없다! 적의 중앙을 돌파한다!”

이미 앞서 들어온 온달의 기세에 기가 질려 도주 중이었던 주나후의 수군은 등 뒤에서 울리는 개마무사들이 일으킨 기괴한 쇳소리에 더욱 놀라 병장기마저 버리고 도주하기 바빴다.

화살도 튕겨 내는 개마무사들의 돌진은 매우 가혹하여 뒤쳐진 수나라 군사들의 등을 짓밟고 기병창 삭으로 이들의 몸을 꿰뚫었다.

기병과 보군의 대결은 기병 한 명이 보군 여덟을 제압하였다.

보군에 비하여 방어력이 떨어지는 주나후의 수군은 개마무사들의 수가 비록 적었지만, 이미 겁에 질려 도주 중이었기에 그 결과는 매우 참담하였다.

“해안가까지 쉬지 말고 퇴각하라! 멈추지 마라! 결코 뒤를 잡히지 마라!”

앞서 도주하던 주나후가 쉴 새 없이 소리쳐 명을 내렸으나, 이미 그의 수군은 명령 없이도 살기 위해 해안가를 향해 미친 듯이 도주 중이었다.

간신히 해안가까지 내려간 주나후는 기함도 구분하지 않고 가장 가까운 군선에 올라 소리쳐 명하였다.

“서둘러 배에 올라라! 서둘러라!”

고구려 군은 더 이상 쫓고 있지 않았으나, 겁에 질린 주나후는 고구려 군이 바짝 쫓고 있다 생각하여 한 발이라도 임유관에서 멀어지고자 했다.

패주한 수군들을 태우고 바삐 바다로 나가서야 주나후는 겨우 안심하여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임유관에 고작 오천의 고구려 군만 있다고 했을 때부터 뭔가 이상했었다. 하마터면 군량미마저 모두 잃을 뻔했구나. 배도 보전하였고, 군사도 아직은 큰 피해가 없으니, 다행이다.”

주나후가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여 척에 달하는 수나라 군선들이 정처 없이 바다에 떠 있으니, 일대 장관이었다.

주나후는 군선과 군량미 그리고 자신의 수군을 그나마 보전하여 다행이라 위안하며, 목적지를 일단 북해로 정하였다.

“좋아! 이정도 피해는 전장에서 흔하다. 전쟁은 이제부터야. 북해로 회항하여 재정비한다. 서둘러라!”

* * *

온달이 누렁이에서 내려 급히 성벽 위로 오르니, 관문 위에 막리지 연태조가 성벽에 등을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기침과 함께 입에서 검붉은 피를 토하였다.

아마도 화살에 폐를 관통 당한 듯했다.

“막리지!”

온달이 급히 연태조를 향해 달려가니, 그 뒤를 대건상과 태홍, 여범도 따랐다.

어느새, 성벽 주위를 정리한 막바우도 성벽 위로 올라와 피투성이가 된 모용상을 부축하고 연태조의 곁으로 왔다.

성벽 위 오천의 고구려 군사 중, 서 있는 이는 고작 천 명 남짓이었고, 이들 역시 화살이 몸에 박혀 있었다.

막바우의 부축을 받아 연태조의 앞에 선 모용상이 전황을 아뢰었다.

“합하, 총 군사 오천에, 사상자 오천이옵니다. 허나, 적은 물러갔나이다.”

짧은 시간의 전투였지만, 매우 큰 피해였다.

더 이상, 막리지 연태조의 군대는 전투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연태조는 피 묻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으며 허허 웃었다.

“살아서 참 좋구나. 역시 설이는 정확하구나.”

단 사부가 목숨을 걸고 지켰으나, 모용설도 비처럼 내리는 화살을 모두 피하지 못하여 어깨와 가슴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모용설을 지키느라 자신의 몸은 방비하지 못한 단 사부의 몸엔 여섯 대의 화살이 박혀 있었다.

자신의 몸에 박힌 화살을 만지며 단 사부가 시큰둥하게 연내조에게 말하였다.

“합하, 다행스럽게도 수나라의 화살촉은 말갈이나 돌궐과 달리 도끼날 형태가 아니기에 뽑기 수월하니, 잠시만 참으시옵소서.”

“그래, 그러자.”

단 사부와 모용설의 부축을 받으며 연태조가 일어나 온달과 대건상에게 감사를 표하였다.

“위장군과 상장군이 제 시간에 당도하여 목숨을 구하였소이다. 고맙고도 고마운 일이오.”

“송구합니다.”

온달이 짧게 머리 숙여 답하니, 대건상이 앞으로 나와 연태조에게 물었다.

“어찌 투항하여 시간을 끌지 않으셨습니까? 반드시 적의 배후로 제가 돌아 공격할 것인데, 어찌 시간을 끌며 기다리시지 않고 이리도 상하셨나이까?”

“글쎄올시다. 투항하여 살고픈 마음도 있었으나, 왠지 결사항전을 하고 싶었소이다. 허허.”

연태조의 대답에 상장군 대건상이 뭔가 말하려고 하였으나, 대모달 태홍이 큰 소리로 말하여 이를 끊었다.

“합하! 결사항전은 옳은 판단이셨습니다. 만일 합하가 투항하여 시간을 끌었다면, 위장군과 상장군이 합하의 목을 베어야 했습니다.”

“뭐라?”

연태조가 놀라 물으며 온달과 대건상을 바라보았다.

“사실이오?”

연태조의 물음에, 온달이 바로 답하였다.

“종리대형 명림신이 태왕 폐하의 명을 전하였습니다. 막리지를 구하고… 혹여 막리지가 투항했다면 목을 치라는 명이었습니다.”

거짓을 말할 것 같지 않은 온달의 얼굴을 천천히 살핀 연태조가 상장군 대건상과 대모달 태홍, 모달 여범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 중에… 우리가 나누었던 말을… 성실히 요동성… 전시 조정에 보고하는 이가 있구려. 잘 하시었소. 전황은 빠르고 정확히 보고해야 하는 법. 참 잘하시었소.”

연태조의 이 말에 상장군 대건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태홍과 여범의 눈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물었다.

“나는 아니다! 누가 했느냐? 막리지가 투항할 수도 있다고 한 말을 누가 전한 것이냐? 누구냐?”

엄히 묻는 대건상에게 연태조가 허허 웃으며 말하였다.

“상장군 그만 하시오. 시간이 없소이다. 적은 이 임유관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니, 우린 일단 철군하여 적이 임유관을 수복하면 다시 진을 펼칩시다.”

막리지 연태조의 명에 따라 부상자는 부축하고 사망자는 수레에 실어 나르기 시작하였다.

“이 앞에 진을 쳤던 놈들은 우리가 급히 배후를 급습하자, 꽁무니를 뺐습니다. 아마도 한왕에게 갔을 것입니다.”

임유관을 나서며 대건상이 연태조에게 말하였다.

“나도 보아 잘 아오. 고생하시었소.”

연태조가 흔들리는 말 위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화살에 관통당한 폐가 계속 쪼그라들어 숨 쉬는 것조차 힘든 듯해 보였다.

이에, 말 머리를 나란히 한 의관이 연태조의 상태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사람의 몸에는 바람이 가득 든 주머니가 있는데, 이를 허파라 하옵니다. 이 허파는 구멍이 뚫릴 시 쪼그라드는 성질을 지녔는데… 이 공기 주머니가 쪼그라들면, 숨을 쉬기 어렵사옵니다. 합하의 상태가 이러하옵니다.”

“허면, 어찌하면 좋소?”

연태조가 검게 변해 가는 입술로 가쁜 숨을 내쉬며 물었다.

“합하의 몸에 박힌 화살은 모두 빼내어도 상관없으나, 이 허파에 박힌 화살은 빼내는 즉시… 더욱 심하게 쪼그라들 것이옵니다.”

“허면, 이대로 두자는 말이오?”

“아니옵니다. 박힌 화살을 빼야합니다. 다행스럽게도 허파는 쪼그라들었어도 뚫어진 구멍은 스스로 아물 것이고, 더욱 다행스럽게도 허파는 두 개이기에, 힘드셔도 숨은 쉬실 수 있사옵니다.”

“그거 참 다행이구려.”

연태조가 애써 차분히 말하였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연태조의 음색에 쇳소리가 섞여 나오고 있었다.

“당장 화살을 빼내어야 하니, 임유관에서 멀어지는 대로 시술을 준비하겠사옵니다.”

의관에 말에 연태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태조와 의관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막바우가 온달에게 소리 죽여 물었다.

“장군, 허파가 두 개인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 두 개인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가 쪼그라든 채로 온전히 살 수는 있는 겁니까?”

“음…….”

온달은 막바우의 물음에 대답 대신 신음을 내쉬며 그저 막리지 연태조를 바라만 보았다.

흔들리는 말 위에 당당히 올라 여전히 앞장서는 막리지 연태조의 등이 마치 거대한 바위처럼 느껴졌다.

피로 물든 갑주가 어느새 다가온 겨울 햇살에 검게 타오르는 듯했다.

“합하, 날이 춥습니다. 일단 숙영을 준비하시지요.”

대건상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니, 연태조가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하였다.

임유관과 꽤 거리를 두고 진을 펼치니, 연태조의 막사가 빠르게 세워졌다.

북풍 찬바람을 막는 천막이 비명을 지르듯 요동쳤고, 그 안에서 시술이 진행되었다.

온달과 막바우를 비롯하여 대건상과 태홍, 여범이 곁을 지켰다.

항상 연태조의 곁을 지켰던 모용상과 모용설, 단 사부 등도 막사를 달리하고 의원들에게 시술을 받고 있었다.

“크헉!”

화살촉을 뽑기 위해 의관이 생살을 날카로운 비수로 가르자 연태조가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았다.

피로 물든 몸을 흰 천으로 닦으며 의관이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한 번에 뽑습니다. 팔과 다리를 묶어 몸이 움직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니, 묶이는 것은 사양하겠소. 그냥 하시오.”

연태조가 고통 속에서도 허허 웃으며 말하니, 대건상이 다가와 물었다.

“소장이 합하의 팔을 잡아도 되겠나이까?”

“상장군 그 역시도 사양하오. 의관은 어서 시술을 진행하시오.”

연태조의 강경한 태도에 의관이 결심을 굳힌 듯 화살에 손을 대었다.

“이 화살을 뽑고, 구멍 난 허파에 가는 관을 꽂을 것이옵니다. 무척 아플 것이오나, 그 관으로 고인 피가 빠질 것입니다. 숨 쉴 때마다 관 때문에 무척 괴로우실 것이오며, 십오 일은 그 관을 허파에서 빼지 않아야 하옵니다.”

“말이 참 길구려. 어서 하고자 하는 일을 편히 하시구려.”

연태조가 힘겹게 말하니, 의관이 힘주어 화살대를 잡고는 연태조의 눈을 바라보았다.

연태조가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주었다.

“이얍!”

의관이 기합과 함께 화살대를 뽑으니, 피가 솟구치고 허파에서 바람이 빠져 나오는 듯한 소리마저 들렸다.

이에 의관이 찢어진 연태조의 생살을 꽉 움켜쥐고는 다른 손으로 나무로 만든 가는 관을 쥐고는 힘껏 밀어 넣었다.

“윽!”

폐까지 관이 들어가자, 연태조가 고통에 신음을 내뱉었다.

가느다란 관을 통해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보기가 흉하군…….”

연태조가 가슴에 박힌 관을 응시하며 중얼거리더니, 그만 의식을 잃었다.

연태조가 의식을 잃자, 온달이 기다렸다는 듯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의관에게 물었다.

“막리지께선 살 수 있으시오?”

“허파가 쪼그라드는 병을 기흉이라 하옵지요. 허파를 둘러싼 주위에 공기가 차서 쪼그라든 것이온데, 쪼그라드는 허파 주이에 구멍을 뚫어 이렇듯 피를 빼내고 허파를 둘러싼 외벽에 쌓인 바람도 빼내면 당장 목숨은 건질 수 있사옵니다.”

“당장이라 하였소?”

온달이 의관에게 다시 물었다.

“그렇사옵니다. 흉사는 막을 수 있으나, 이후 살고 죽고는 오직 합하께 달렸나이다. 허파가 아물고 예전처럼 부풀어 오르면 다행이지만, 재발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재발하여 허파가 급격히 쪼그라들고, 그때 소인과 같은 의관이 곁에 없다면…….”

의관이 말을 잇지 못하자 온달이 사정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이름이 어찌 되시오?”

의술이 신통한 이 의관에게 호감이 생긴 모양이었다.

온달의 물음에 의관은 미소 지으며 답하였다.

“대간하지 않은 이름이옵니다. 선조는 북해 사람으로 저는 오(吳) 씨 성을 사용하오며, 이름은 옥(獄)이라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오옥이라 밝힌 의관의 손을 잡으며 온달이 진심을 담아 사정하였다.

“실은, 큰 중상을 입은 장수가 한 명 있습니다. 그의 상태를 그대가 봐주면 좋겠습니다. 부탁드리오.”

아직 부상이 심하여 거동이 불편한 경우를 생각하여 온달이 부탁하니, 막바우도 덩달아 의관의 손을 붙잡고 사정하였다.

“그래! 오 의관 그대가 좀 봐주시오! 뭔 고집인지, 공주 마마께만 상처를 보이고 있어서, 도통 나을 기미가 없다오. 부탁하오!”

남장 여인인 경우로선 자신이 여인임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기 위해, 제 상처를 스스로 살피고 간혹 평강에게 도움을 청할 뿐이었다.

의관을 거절한 탓에, 날이 갈수록 상처가 낫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악화되어만 갔으니, 오늘 좋은 의관을 만난 김에 온달과 막바우가 사정을 하게 된 것이다.

경우의 속사정을 모르는 온달과 막바우가 손을 잡고 사정하니, 의관이 피 묻은 손을 살며시 빼내며 허허 웃었다.

“이렇듯 말씀하지 않으셔도, 환자가 있다면 살펴야함이 의관의 도리오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아직 합하의 시술이 마무리되지 않았으니, 이 손을 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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