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겨울 전쟁 (16)
한왕 양양의 조롱에, 양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양소는 상기된 얼굴로도 의견을 이어 나갔다.
“전하께선 대군을 이끌고 계시오니, 영주까지 수복하신 후 회군하심이 어떠하오신지요?”
“아니 될 소리네. 현재 임유관의 상황이 엄중하니, 그곳을 탈환하여 보급로를 확보한 후에나 영주 수복을 논함이 마땅하네. 자네는 그 나이가 들도록 어찌 보급의 중요성도 모르는가?”
한왕의 조롱에 양소도 더는 말을 잇지 못하였으나, 이번엔 양현감이 대신 나서 말하였다.
“한왕 전하, 영주가 우리 수나라의 고구려 정벌 전초기지이듯, 고구려에게도 영주는 무척이나 중요한 곳입니다.”
“…….”
“우리가 영주를 수복하는 순간, 요서에 들어온 고구려 군의 퇴로 뿐만 아니라 보급로가 차단되옵니다. 우리의 보급로도 중하지만, 적의 보급로도 중한 법이오니, 다시 판단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한왕은 양현감의 이 장황한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대들이 뛰어났다면 왜 영주를 빼앗겼겠는가? 그만들 하시게. 당장 대군의 보급이 끊어질 지경이라네. 더는 이견을 듣지 않을 터이니, 그만들 물러나게.”
한왕 양양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니, 태자 양광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우를 괴롭히지 말라. 그만들 가세.”
태자 양광이 양소와 양현감을 이끌고 떠나자, 제갈여가 살며시 한왕의 안색을 살피며 말하였다.
“양소, 양현감의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 영주는 이곳과 가깝고 지키는 고구려 군도 적어 수복하기 쉽습니다. 보급이 끊어지기 전에 수복하고 회군하셔도 충분한 거리입니다.”
“나도 알고는 있으나, 영주를 수복하면 형님에 대한 황제 폐하의 진노가 약해질 것 아닌가? 영주는 추후에 수복하도록 하세. 일단 우린 탁현으로 돌아가 다시 군을 재정비한 후 봄에 출병하는 것이 좋겠네.”
“소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전하의 판단이 백 번 지당하옵나이다.”
이들이 주위 눈치를 살피지 않고 시원시원 크게 말하는 통에, 마침 막사 앞에 서서 저무는 해를 바라보던 태자 양광도 잘 들을 수 있었다.
“전하…….”
양소가 침통한 기색으로 말을 잇지 못하니, 태자 양광이 성큼성큼 겅름을 옮기며 말하였다.
“남의 막사 앞에 오래 서 있으면 죄요. 군사와 할 이야기가 많으니 우리 막사로 갑시다.”
태자 양광의 머릿속엔, 자신이 살기 위해선 향후 어떤 일이 벌어져야 할지 점점 가닥이 잡혀가고 있었다.
양광이 생각에 잠겨 앞서 걸으니, 그 곁으로 양현감이 바짝 붙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를 줄기차게 쫓던 고구려 놈들이 갑작스럽게 사라졌습니다. 쉽게 물러날 놈들이 아닌데… 영주로 돌아갔을까요?”
“아니다. 놈들은 저기 있다. 결코 물러날 놈들이 아니다. 숨어서 지켜보며 함정에 빠지기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야.”
태자 양광이 마치 남의 말을 하듯 말하니, 양현감이 당황하여 걸음을 멈추었다.
이에, 양소가 아들의 등을 밀며 말하였다.
“그렇기에, 내가 누차 영주를 수복하자 제안한 것인데… 한왕이 스스로 함정에 빠지고 있구나. 보급이 끊어지는 위험을 감수하고도 영주는 수복해 놔야 고구려 놈들이 요서에서 활개를 못 칠 것인데…….”
이에, 태자 양광이 손을 내저어 양소의 말을 끊었다.
“군사는 그만하시오. 우리 이야기가 더 급하지 않소?”
양광의 뜻을 헤아린 양소가 아들에게 엄히 명하였다.
“너는 우리 군사들의 보급 물자가 부족함이 없는지 잘 살피도록 하라.”
양현감이 명을 받아 떠나자, 양소가 태자 양광을 막사로 모시고 들어갔다.
양현감도 모르게 나눌 긴밀한 대화가 두 사람에겐 있는 모양이었다.
* * *
“합하, 배후에서도 수나라 군이 나타났습니다.”
임유관 관문 위에 서서 공지열과 채휘의 수나라 진영을 바라보던 연태조에게 모용상이 다가와 말하였다.
“배후라… 주나후의 수군이더냐?”
연태조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그런 듯합니다. 해안에 배를 세우고 군사들이 내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군세는 칠만에 달하겠군.”
눈앞에 펼쳐진 수나라 진영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연태조가 담담히 말하였다.
공지열과 채휘가 이끈 수나라 군은 모두 팔만에 달하였고, 배후에서 들이닥칠 주나후의 수군은 칠만이었으니, 어디든 만만히 대적할 군세는 아니었다.
모용상이 연태조의 안색을 살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합하, 투항하시겠습니까?”
“투항하고 싶으냐?”
오히려 연태조가 되물으니, 모용상이 당황하여 바로 답하지 못하였다.
“어찌 답하지 못하는 게냐? 살고 싶지 않으냐?”
모용상이 더욱 망설이며 답하지 못하니, 연태조가 껄껄 웃었다.
“다행스럽게도 상장군이 대군을 보전해 갔고. 여기는 소수만 남았으니, 당장 죽어도 아쉬울 것은 없다. 허나, 조금이나마 전장이 우리 고구려에게 유리해지려면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느냐?”
연태조의 이 물음에 모용상이 결심을 굳혀 입을 열었다.
“주나후에게 거짓 투항을 하십시오. 충분히 시간을 끌 수 있을 것입니다.”
“허면?”
연태조의 물음에 모용상이 눈앞에 펼쳐진 수나라 진영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사이 대건상 장군이 만리장성을 돌아 넘어 저들의 배후를 친다면 우리가 이곳을 빠져나갈 길도 열릴 뿐더러 계속 임유관의 앞을 지켜 수의 보급로를 끊을 수 있습니다.”
나름 자신감 넘치는 주장이었다.
이에 연태조가 인자하게 웃으며 모용상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후퇴도 패배도 인정하지 않던 네가 거짓 투항도 생각하다니… 참으로 대견하구나.”
“허오면, 주나후에게 사람을 보내리까?”
모용상의 이 물음에 연태조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아니다. 결사항전을 하겠다.”
“합하…….”
“상아, 내가 생각해 보니, 우리가 모두 이 임유관에서 죽는다면… 이 앞에 진을 펼친 저 수나라 군은 임유관 안으로 들어올 게야. 그렇게 된다면 이후 대건상과 강이식, 온달이 이 앞에 진을 펼치며 수의 보급로를 끊을 수 있지 않을까?”
“합하…….”
“이 생각을 하고 나니, 애써 시간을 끌 필요도 없겠더구나. 결사항전을 하자. 상아, 따르겠느냐?”
함께 죽겠느냐는 이 물음에 모용상은 깊게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바로 답하였다.
“결사항전은 저와 잘 맞습니다. 아쉬운 것도 아쉬워야 할 일도 없습니다. 합하를 따르겠습니다.”
“모두 성벽에 오르라 명하고, 단 사부는 네 누이 설이를 데리고 당장 떠나라 전하라.”
연태조의 단호한 명에 모용상이 급히 몸을 돌리자, 언제 왔는지 단 사부와 모용설이 눈앞에 서 있었다.
“세상 어디에도 갈 곳이 없습니다. 이곳에서 상이와 함께 합하를 모시겠나이다.”
모용설이 청아한 음색으로 말하니, 연태조가 허허 웃었다.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음색이로다. 설이 너는 이곳을 벗어남이 옳을 듯하구나.”
이에, 모용설이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합하, 시간이 없사옵니다. 결사항전할 준비를 속히 하소서.”
연태조도 더는 떠나라 권하지 못하고 서둘러 앞뒤로 적을 맞아 싸울 채비를 하였다.
* * *
임유관 배후에 진을 펼친 수의 수군총관 주나후는 성벽 위에 꽂힌 삼족오 기를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임유관을 빼앗긴 것인지… 허허.”
척후병의 보고를 접한 부장이 주나후에게 다가와 아뢰었다.
“총관, 적의 수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 어느 정도라 하던가?”
“오천 남짓이라 합니다.”
“뭐라? 고작 오천? 어찌하여 오천에게 임유관이 넘어갔단 말인가? 그래 그 대단한 적장은 누구란 말인가?”
주나후가 더욱 기가 막혀 탄식을 하며 물으니, 부장이 괜히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고구려의 막리지 연태조라합니다.”
“고구려의 막리지 연태조? 내가 오늘 명성이 자자한 그자를 보게 되는구나.”
주나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한 번 임유관을 둘러보았다.
“고작 오천으로 배후에서 몰아칠 우리를 대적하겠다라… 대단한 기세로다. 좋은 결기야. 좋아. 아주 좋아!”
한껏 적을 칭찬한 주나후가 손을 들어올렸다.
“뭉그적거리지 말라. 좋은 적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총공격을 강행하여 단숨에 숨통을 끊어줘라!”
주나후의 명이 떨어지자, 칠만의 수군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임유관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맞서 성벽 위에서도 고구려 군이 화살을 날리며 결전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임유관의 배후가 소란스러워지자 앞에 진을 펼쳤던 공지열과 채휘도 서둘러 진 앞으로 나와 살피기 시작하였다.
“공 장군! 지원군이 온 게요. 주 총관이 보급 물자를 수송하여 온 게 분명하오!”
채휘가 반가워 소리치니, 공지열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우리도 공세를 취합시다! 단숨에 성벽을 넘고 관문을 열도록 합시다!”
공지열과 채휘가 배후에서 공격하는 주나후를 돕기 위해 공격 명령을 내리니, 사다리와 밧줄을 쥔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성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궁수들이 성벽 위로 화살을 쉴 새 없이 날리니, 임유관 성벽 위는 온통 화살비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몰아붙여라! 단숨에 성벽을 넘어라!”
기세 오른 공지열이 목이 터져라 명을 내렸다.
앞뒤로 적을 맞이한 임유관 성벽 위, 화살비 속 고구려 군은 기어오르는 수나라 군을 막기 위해 쉬지 않고 칼을 휘두르고 화살을 날렸다.
어느 누구 하나, 몸에 화살이 박히지 않은 이 없었고, 피로 물들지 않은 이 하나 없었지만, 사지가 움직이는 한 단 한 명의 수나라 군도 성벽 위로 올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비명을 삼켜라! 적이 너희의 비명에 기뻐 날 뛴다! 비명은 오직 적들의 비명으로 족할 뿐이다! 화살을 날리고, 성벽 위로 머리를 올리는 적의 목을 베라!”
어깨와 가슴팍에 화살이 박힌 모용상이 피를 뒤집어 쓴 얼굴로 군사들을 엄히 독려하였다.
단 사부도 두 자루 검을 휘둘러 모용설 곁으로 날아드는 화살을 막았고, 연태조는 이미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정도로 화살이 몸에 박혀 성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단 사부! 합하를 부축하여 떠나세요!”
모용설이 연태조를 부축하며 소리쳤으나, 연태조와 단 사부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와서 나를 부축한들 더는 일어설 힘도 없고, 갈 곳도 없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설이 너도 이젠 도망칠 수 없을 듯하구나.”
연태조가 미안해하며 말하였으나, 모용설은 여전히 목이 터져라 단 사부에게 소리쳤다.
“단 사부! 어서 합하를 모시라고요! 오늘 우리는 아무도 죽지 않아요. 도망치면 살 수 있다고요!”
점점 더 성벽 위로 올라오는 수나라 군사들의 수가 늘고 있는데도, 살 수 있다고 모용설이 말하니, 연태조가 의아해 물었다.
“허언을 할 네가 아닌데… 정녕 오늘 우리가 살 수 있다는 말이더냐?”
“합하, 오늘 우리는 여기서 죽지 않습니다.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타인의 죽음을 보는 여인, 모용설이 단호히 답하니 연태조가 껄껄 웃었다.
“그래, 듣기에 참으로 좋구나. 좋아. 하하하.”
모용설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말한다고 생각하며 웃던 연태조의 시선이 임유관 앞에 진을 펼친 수나라 군 너머, 흙먼지가 날리는 광야로 이동하였다.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검은색 기가 펄럭이며 몰려오고 있었다.
“사, 삼족오… 삼족오가… 몰려온다.”
연태조가 더듬더듬 중얼거리다가, 두 다리에 힘을 줘 벌떡 일어나더니,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삼족오가 몰려온다! 삼족오다! 죽을힘을 다해 막아라! 우리는 오늘 여기서 죽지 않을 것이다! 성벽에 오르지 못하게 막아라!”
연태조의 피 끓는 외침에 모용상이 고개를 돌리 바라보더니, 성벽 위로 머리를 올리는 수나라 군의 머리를 베고는 소리쳤다.
“우리는 이길 수 있다! 뒤를 막아라! 놈들이 올라오지 못하게만 막아라! 화살을 피하지 마라! 화살 피할 겨를 따위는 우리에게 없다!”
성벽 위 고구려 군이 강하게 버티자, 상대적으로 공성전이 익숙하지 않은 주나후의 수군이 기세가 꺾여 갔다.
이에 주나후가 분통을 터트리며 손을 들어 더욱 강공을 명하였다.
“물러나지 마라! 적은 고작 오천이다. 몰아붙여 성벽에 올라라!”
성벽 너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 알 수 없는 주나후였기에, 결코 공격을 멈출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때, 마침내 임유관의 성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떼의 기병들이 쏟아지듯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 선두엔 거대하고 시커먼 검을 휘두르는 장수가 앞장섰는데, 장수의 뒤로 삼족오 기가 펄럭였다.
그리고 관문 위, 성벽에서 고구려 군의 함성이 크게 일었다.
“관문이 열렸다!”
“온달 장군이 오셨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주나후가 의아해 벌컥 열린 관문으로 밀려들어 오는 기병들을 천천히 살피니, 하나같이 투구에 뿔이 두 개 달려 있었다.
“아뿔사! 고구려 놈들의 간계로구나! 퇴각하라!”
고구려 군에게 속아 함정에 빠졌다고 착각한 주나후가 급히 명하니, 사기 꺾인 수나라 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누런 말에 올라 거대한 검을 휘두르는 온달이 이들의 뒤를 쫓으며 사정없이 베고 후려치며 고구려 군이 더욱 밀고 들어오기 쉽게 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