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겨울 전쟁 (15)
요서의 끝에서 한왕이 태자 양광을 구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진격하며, 강이식과 온달이 만리장성을 넘을 무렵.
고구려의 요동성 전시 조정에선 막리지 연태조를 문책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막리지 탄핵을 이끄는 인물은 태왕의 장인이자 종리위두대형인 북장원과 역시 태왕의 장인인 태대사자 사선종유였다.
을지문덕이 이끄는 서부총관부의 정보력은 요동과 요서뿐만 아니라, 임유관과 만리장성 안 사정까지 속속들이 취합해 전시 조정에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이에, 북장원과 사선종유는 연태조가 대건상에게 온달과 군을 합쳐 임유관 앞에 진을 펼친 공지열과 채휘를 물리치라 명한 것을 반역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폐하! 막리지 연태조는 필경 불온한 마음을 품었사옵니다. 그렇지 않다면, 죽음으로서 임유관을 지키지 않고 어찌 대군을 빼내었겠습니까.”
사선종유의 강경한 주장에 태왕은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에 종리위두대형 북장원이 사선종유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
“연태조와 아들 개소문이는 수의 태자를 구하였고, 연태조는 기껏 함락한 임유관에서 군을 따로 빼내고는 고작 오천만 남기고 임유관을 지키니, 이것은 수나라에게 다시 임유관을 바치고자 함이 분명하옵니다.”
북장원과 사선종유는 외척이 되어 새롭게 절노부에 합류하였기에, 연태조와 더불어 절노부의 고추가를 놓고 경쟁을 벌이는 처지였다.
그렇기에, 이들은 태왕의 장인이란 신분을 이용하여 연태조를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들에게 전쟁이란, 그저 자신들의 지위를 다질 기회일 뿐이었다.
이들의 속내를 익히 간파한 태왕은 그저 담담히 고개만 끄덕이다가 을지문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총관, 그대는 막리지가 임유관에서 대군을 빼고, 자신은 고작 오천만 이끈 채 남은 것을 무엇 때문이라 생각하는가?”
이에, 을지문덕이 차분히 답하였다.
“대건상에게 명하여 대군을 이끌고 만리장성을 돌아 넘으라고 명한 것은, 소신도 의외였습니다. 하오나.”
“말하라.”
“폐하, 소신과 막리지가 논하길 임유관은 점령하는 척 공세만 펼칠 뿐 실제로 함락시키지 않기로 정하였사옵니다.”
“어찌 그리 정하였는가?”
“임유관은 외적을 막기엔 훌륭하오나, 뒤에서 공격해 오는 적은 막을 방책이 없는 곳이옵니다. 하여.”
이에, 사선종유가 호통을 치며 을지문덕의 말을 끊었다.
“닥치시오! 대장군과 위장군이 만리장성을 넘어 이미 주요 요충지를 무력화시켰는데 임유관의 배후를 공략할 수의 군대가 어디에 있단 말이오?”
을지문덕은 사선종유에게 시선도 두지 않은 채 태왕을 향하여 계속 아뢰었다.
“있사옵니다.”
이에 태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있다? 공손성과 이연을 말하는가?”
“아니옵니다. 그들은 쉽게 군을 돌릴 처지가 못 되옵니다.”
을지문덕의 답변에 태왕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임유관의 배후를 공략할 또 다른 군대가 있단 말인가?”
을지문덕이 잠시 몸을 돌려 오부 귀족과 신료들을 돌아보고는 태왕에게 아뢰었다.
“수군총관 주나후의 칠만 수군이 있사옵니다.”
을지문덕이 주나후를 언급하자, 오부 귀족들과 신료들이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을지문덕은 이들의 술렁거림이 못마땅한 듯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는 말을 이었다.
“수의 양제는 주나후를 수군총관에 임명하여 한왕의 대군 보급을 명하였으나, 칠만에 달하는 수군은 결코 보급에만 그 힘을 쓰지 않고, 바다를 건너 평양성을 노릴 것이옵니다.”
을지문덕이 평양성을 언급하자, 모두가 놀라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나 태왕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평양성이라… 하면, 그대와 막리지는 주나후가 임유관에 보급을 마친 후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 판단한 것이로군.”
“그렇사옵니다.”
“막리지는 임유관의 배후로 주나후가 칠만 대군을 이끌고 들이닥치기 전에 대건상에게 명하여 대군을 빼낸 것이고?”
“소신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사옵니다.”
을지문덕의 말에 태왕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북장원은 오히려 호통을 치며 반발하였다.
“터무니없는 소리요! 고작 오천으로 임유관을 앞뒤로 막은 수나라를 대적할 수는 없소. 막리지는 수나라에 투항하려는 것이 분명하오!”
“…….”
“폐하, 주나후가 임유관에 보급을 마친다면… 이후 그는 반드시 바다를 건너올 것입니다. 막리지는 임류관을 지키지 않고, 적을 이롭게 하고 있사옵니다.”
이에 사선종유도 북장원을 거들었다.
“종리위두대형의 말이 맞사옵니다. 폐하, 주나후가 임유관에 보급을 마치면, 전쟁은 요동과 요서뿐만 아니라 평양성에서도 벌어질 수도 있사옵니다.”
“…….”
“막리지는 전략적 요충지인 임유관을 쉽게 넘겨주기 위하여 대군을 빼낸 것이옵니다. 폐하, 막리지가 역심을 품고 있사오니, 문책하셔야 하옵니다.”
두 장인이 번갈아 막리지를 문책하라 말하니, 태왕이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문책? 막리지가 역심을 품었다면 그를 문책할 방도가 있기는 한 게요? 장인들께서 임유관에 가셔서 막리지를 엄히 꾸짖을 겁니까?”
이에, 북장원과 사선종유가 꿀 먹은 벙어리마냥 말을 못하니, 태왕이 종리대형 명림신에게 시선을 옮겼다.
“종리대형은 듣거라.”
“하명하시옵소서.”
“상장군 대건상과 막리지가 제대로 협의를 못하여 임유관을 점령하지 말아야 할 임유관을 점령하였다. 이에, 막리지가 대군을 보전하기 위해 상장군에게 군을 끌고 만리장성을 넘으라 명한 것이라면!”
“…….”
“막리지는 죽음으로 임유관을 지킬 것이니, 속히 온달과 대건상에게 임유관 앞에 진을 친 수나라 군을 물리쳐서 막리지를 구하도록 전하라.”
서부총관부에 명하지 않고 종리대형에게 태왕이 명하니, 그제야 종리위두대형 북장원과 태대사자 사선종유도 불만을 누르고 뒤로 물러났다.
잠시 뒤, 밖으로 나온 종리대형 명림신이 종리위두대형 북장원에게 바짝 다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연태조는 이제 죽은 목숨입니다.”
“수가 있는가?”
북장원의 물음에 명림신이 빙그레 웃었다.
“태왕의 명을 소신이 들은 그대로 전하면 온달이 연태조의 목을 벨 것입니다.”
“들은 그대로?”
북장원이 의아해 물으니, 명림신이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그렇사옵니다. 들은 그대로 말입니다.”
북장원은 명림신이 꾀를 내리라 생각하여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에, 명림신이 더욱 바짝 붙어 물었다.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주나후 총관은 결국 바다를 건너올 것 같습니다. 어차피 바다를 넘어 올 수밖에 없다면, 주 총관에게 사람을 보내 평양성과 고건무만 취하고 전쟁을 마무리 지으라 전하심이 좋을 듯하옵니다.”
이에, 북장원이 결심을 굳힌 듯 눈을 빛내며 답하였다.
“그래, 더는 막을 수도 막을 필요도 없겠어. 태자가 된 고건무가 태왕이 된다면 동금호 그자가 국장이 되는 것이니… 우리 고구려를 위해서라도 전쟁은 조기에 끝냄이 맞을 듯하군. 주 총관에게 평양성 군세와 수군기지 비사성의 군세를 알려 주고 공을 세우도록 돕게나.”
“즉시, 주 총관에게 사람을 보내겠나이다.”
* * *
만리장성을 넘은 온달과 강이식은 뒤를 이어 넘어온 상장군 대건상과 합류하여, 임유관과 한왕을 대적할 계책을 한창 논의 중이었다.
이때, 요동성에서 종리대형 명림신이 당도하니, 강이식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뭘… 왜 온 거야?”
혼자 구시렁거리는 강이식에게 명림신이 예를 갖춰 허리를 숙인 후 태왕의 전언을 아뢰었다.
“태왕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막리지가 수나라에 투항하지 않고 결사항전을 한다면 위장군 온달과 상장군 대건상이 이를 구해야 한다고 명하시었습니다.”
이에, 강이식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결사항전하지 않고, 투항하여 우리가 군을 몰아 임유관 앞에 진을 펼친 수나라 군을 공격할 시기를 마련하고 있다면?”
“무릇 장수가 강적에 맞서지 않고 투항하였다면, 이는 바로 우리 고구려의 적일 따름입니다. 목을 치소서.”
“태왕 폐하의 뜻인가?”
“전시 조정에선 막리지의 반역 행위를 논의 중이었고, 이에 태왕 폐하께서 소인을 보내 명을 전하시는 것이옵니다.”
태연히 답하는 명림신의 얼굴을 천천히 살핀 강이식이 다시 물었다.
“을지문덕은 뭐라 하던가?”
“소인은 태왕 폐하의 명을 따를 분, 서부총관의 뜻은 알지도 알 필요도 없사옵니다.”
“폐하의 서신은 없는가?”
강이식이 다시 물으니, 명림신이 고개를 저었다.
“전장에서 서신은 적에게 빼앗길 우려가 있기에, 폐하께선 소신으로 대신하시었습니다.”
“폐하가 그대를 믿으시는군.”
“부끄럽고,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강이식도 더는 묻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명을 받았다.
“폐하의 명은 목숨으로 지킬 터이니 그리 알고, 무사히 돌아가길 바라네. 길이 험하니 부디 조심 또 조심하시게.”
명림신이 떠나자, 대건상이 바로 입을 열었다.
“대장군, 막리지께선… 시간을 끌기 위해 투항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강이식이 단호히 답하였다.
“목을 쳐야지.”
“허나…….”
“상장군은 그만 하시게. 폐하의 명일세.”
강이식이 잘라 말하니, 대건상도 더는 연태조를 살릴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강이식은 고개를 푹 숙인 상장군 대건상과 대모달 태홍, 모달 여범 등에게 차례로 시선을 옮기며 말하였다.
“전장에서 죽고 사는 것은 뜻대로 되지 않는 법. 상장군과 위장군은 속히 군을 이끌고 임유관으로 향하시오.”
이에 온달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강이식에게 물었다.
“한왕의 대군이 곧 내려올 것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온달 아우가 곁에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임유관의 앞을 지켜 적의 보급로를 끊는 것도 여기 못지않게 중요하니, 시간을 끌 수는 없네.”
온달은 강이식을 걱정하면서도 군령에 따라 대건상과 함께 군을 이끌고 임유관으로 향해야 했다.
상장군 대건상이 이끈 사만오천의 군사들과 온달이 이끈 육천의 기병이 떠나니, 강이식은 말갈기병 삼천 기와 카사르와 호타크의 부족 전사 삼만으로 한왕이 이끈 삼십만 대군의 앞을 막아야 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카사르의 올루스가 함께 있어 보급 걱정은 덜고 있었다.
* * *
끝없이 서로 진군하여 마침내 태자 양광을 구한 한왕 양양은 보급이 끊어지고 있어 회군을 결정하였다.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영주를 수복하고, 요동으로 군을 이끌어 고구려를 벌하고 싶으나, 보급이 여의치 않아 회군해야겠습니다.”
한왕 양양이 나름 정중하게 태자 양광에게 말하였으나, 사실상 통보나 다름없었다.
결정권이 없는 태자 양광으로선 그저 동생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우님의 뜻대로 하시게.”
태자 양광이 선선히 답하였으나, 그가 반대한들 한왕은 그 뜻을 굽히진 않았을 것이다.
이때, 양소가 태자 양광을 대신하여 한왕에게 물었다.
“영주는 고구려 정벌의 전초기지입니다. 한왕 전하께선 영주를 언제 수복하실 생각이시온지요?”
이에 한왕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허, 이 사람 참… 누가 그걸 모르나? 그러니, 잘 지켰어야지! 그대는 황제 폐하의 진노나 걱정하는 게 좋을 걸세.”
태자 양광은 그저 고개 숙인 채 동생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이에 더욱 기세 오른 한왕 양양이 양소에게 말을 이어 나갔다.
“너희가 무능하여, 봄에 출병할 대군이 가을에 움직여 겨울까지 맞고 있으니, 필경 황제 폐하께선 그대의 목을 몸뚱이에 온전히 붙여 두시지 않을 걸세. 얼마 남지 않은 생, 하루하루 소중히 여기며 보내기나 하시게.”
이는 분명 태자 양광에게도 해당하는 말이 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