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174화 (174/328)

174화 겨울 전쟁 (14)

전장에서 승리를 취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러나, 패하기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였다.

“어찌 패하면 좋겠소?”

마침내 공손성이 결심을 굳혀 물으니, 배적이 바로 답하였다.

“섣불리 행하여 의도를 간파당한다면, 고구려 군은 만리장성을 넘지 않고 더욱 기세 올라 휘젓고 다닐 것입니다. 그리 된다면 우리는 돌궐과 고구려가 동시에 동과 서에서 만리장성 안으로 난입한 형국을 맞게 되오니…….”

잠시 말을 멈춘 배적이 공손성의 안색을 살폈다.

“어서 말하시오. 각오는 되어 있소.”

공손성의 재촉에 배적이 마저 말을 이었다.

“대총관께서 직접 중군을 이끌고 공격을 강행하소서. 동시에 좌우 양익도 적을 압박하도록 하겠습니다.”

“허면?”

“적은 반드시 대총관을 노리고 강공을 펼칠 터이니, 앞장서 패하소서.”

요격대총관 공손성에게 미끼가 되란 의미였다.

“내가 고구려의 대장군과 단기 접전이라도 벌여야 하는 형편이로군.”

공손성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그제야 배적이 안심해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공손성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좋소! 의견을 따르리다. 허나! 온달의 일가인 저 잡초는 뿌리를 뽑고 가겠소. 공격을 시작하기 전! 내가 직접 참수하리다.”

이미 의식이 없는 온동의 목을 베겠다는 공손성의 말에 배적이 놀라 손을 내저었다.

“아니 되옵니다. 적을 더 자극할 필요는 없습니다. 분노한 온달이 뒤를 쫓는다면 전황만 시끄러워질 뿐입니다.”

그러나 공손성도 결심을 꺾지 않았다.

“저놈은 나의 가노였소. 도망친 노예를 잡았으니, 당연히 벌을 내림이 마땅한 법! 그대는 나의 집안일에 관여치 마시오.”

말을 마친 공손성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동안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던 여러 장수들이 따라 일어섰다.

이에, 이연과 배적도 더는 만류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성의 뒤를 따라야 했다.

* * *

일전을 준비하던 강이식의 막사로 쇼락이 급히 뛰어들어 왔다.

“온달! 온달!”

쇼락의 다급한 외침에 온달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호타크가 아직 몸이 불편한 온달을 힐끔 쳐다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쇼락에게 물었다.

“쇼락, 무엇이냐?”

“대족장, 온동이 처형당합니다!”

쇼락의 말에 호타크는 물론, 온달과 평강, 경우가 놀라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멀리 보이는 수나라 진영 앞에 세워진 거대한 수레 옆에 높이 세워진 단이 보였다.

그리고, 그 단으로 목에 쇠사슬이 채워진 온동이 군사들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온동은 아직 의식이 없는지, 차갑고 거친 땅에 몸이 쓸리며 끌려가도 움직임이 없었다.

그리고 단 위에는 피보다 붉은 천이 깔려 있었고, 공손성이 커다란 월도를 쥐고 서 있었다.

한눈에도 온동을 단 위로 끌고 올라가, 공손성이 직접 참수하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어찌… 저 어린 것에게… 오, 온동아… 온동아!”

평강이 두렵고도 놀라 황망히 온동을 부르며 털썩 주저앉으니, 경우가 급히 평강의 곁에 서서 지켰다.

“이… 이런…….”

온달도 격분해 주먹을 불끈 쥐고 중얼거리더니, 크게 소리쳐 명하였다.

“당장 운철대검을 가져오너라! 내 저놈을 때려죽이고 동이를 구해오겠다!”

이에, 강이식이 온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애써 차분히 말하였다.

“너무 멀고, 늦을 걸세. 자네를 끌어내려는 수작일지도 모르네.”

“하지만, 형님!”

온달이 분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마구 떨었다.

“온달 아우… 참으시게. 여기는 전장일세.”

강이식이 대장군으로서 부드러우면서도 엄히 말하고는, 즉시 주위를 둘러보며 명하였다.

“공격 준비를 하라! 말에 오르고, 남은 이들은 수레 방벽을 단단히 지켜라!”

비록 온동은 구하지 못할지언정, 수나라 군은 박살낼 결심을 한 강이식이 낭아봉을 쥐고 말에 오르며 온달을 내려다보았다.

“구하지는 못해도 복수는 할 수 있을 걸세.”

이에 온달도 입술을 깨물고는 누렁이에 올랐다.

이때, 눈이 밝은 쇼락이 크게 소리쳐 알렸다.

“온달! 저기!”

생명 없는 고깃덩어리처럼 질질 끌려가던 온동을 향해 누군가 달려오며 앞을 막는 수나라 군사들을 향해 검을 날리고 있었다.

체격은 크지 않아 열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등에는 다섯 자루의 검을 꼽고 양손에도 검을 들었는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수나라 군사들을 향해 손에 쥔 검을 날려 쓰러뜨리고는 수나라 군사들이 떨군 검과 도를 바로 쥐어 다시 날리기를 반복했다.

이에, 단 주위 수나라 진영이 어수선해지며 소년 장수를 향해 군사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신묘하게도 소년 장수는 모든 공격을 막고 피하며 땅에 떨어진 병장기를 닥치는 대로 주워 날리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소년 장수가 날린 검이 온동을 끌고가던 군사들을 쓰러뜨리자, 고구려 진영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이 일었다.

“와아아아!”

마치 대승이라도 올린 듯 함성이 울리니, 누렁이에 오른 온달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대장군 강이식을 바라보았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소년 장수조차 온동을 구하기 위해 홀로 십오만 대군 속으로 뛰어든 상황에서, 온달이 대장군 강이식의 결정을 말없이 기다렸다.

이에 강이식이 더는 만류하지 못하고 명하였다.

“가게! 온달 가시게!”

마침내 강이식의 명이 떨어지니, 누렁이가 주인보다 더 기쁜지 길게 말울음을 내고는 아직 열리지도 않은 수레 방벽 위를 번쩍 뛰어 넘었다.

온달이 운철대검을 쥐고 말 달리자, 또다시 고구려 진영에서 천지를 뒤흔들 함성이 일었다.

이에 강이식도 더는 끓어오르는 피를 참지 못하고는 피식 웃더니, 큰 소리로 명하였다.

“온달은 불패장군이다! 그가 반드시 승리를 이끌어 낼 것이다! 따르라!”

그리고 단단한 수레 방벽이 열리며, 강이식이 승리를 부르는 고구려의 철갑기병 개마무사 일천 기를 이끌고 온달의 뒤를 따랐다.

호타크와 카사르도 뿔 나팔을 불며 부족 전사들을 이끄니, 좌우 양옆 숲에서 기다리고 있던 막바우와 공별도 수나라 좌우 양익을 노려 돌격을 시작하였다.

“막바우! 모두 쓸어버려!”

창을 쥐고 거침없이 말 달리는 막바우의 모습을 발견한 경우가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한편, 수나라 진영 앞 단상 주위에선, 홀로 난입한 소년 장수 주위로 군사들과 장수들이 병장기를 들고 새까맣게 에워싸고 있었다.

소년 장수는 이미 온동을 단단히 지키고 서서 다가오는 모든 적을 향해 쉴 새 없이 검과 칼을 날렸다.

놀랍게도 소년 장수가 날린 도검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가오는 적의 숨통을 끊으니, 그 주위에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게다가,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고구려 군이 요란한 함성과 함께 말을 몰아 돌진해 오니, 수나라 진영에선 일대 혼란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에, 단상 위 공손성이 격분해 월도를 쥐고 뛰어 내리며 소년 장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손을 쉬지 않고 도검을 날리면서도 소년 장수는 공손성의 월도를 가볍게 피하고는 마치 춤을 추듯 보법을 펼치며 거리를 벌렸다.

소년 장수는 어느새 온동을 옆구리에 끼고도 전혀 불편한 기색 없이 매끄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전히 분을 참지 못한 공손성이 월도를 마구 휘두르며 소년 장수의 뒤를 쫓으니, 보다 못한 이연이 소리쳐 명하였다.

“당장! 말에 올라라! 저 아이는 두고 고구려 군을 막아라!”

마치,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그르치는 공손성을 꾸짖듯 이연이 외치자, 이연과 공손성의 부장들이 바삐 움직이며 북을 울리고 호각을 불었다.

사방에서 북이 울리고, 호각과 나팔소리가 길게 퍼지는 가운데, 겨우 길이 열린 소년 장수가 온동을 옆구리에 끼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공손성은 여전히 온동의 목을 베기 위해 맹렬한 기세로 소년 장수의 뒤를 쫓으며 소리쳤다.

“뒤를 쫓아라! 결코 살아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 뒤를 쫓아라!”

“소장이 잡아오겠나이다!”

공손성의 험악한 명에 장수 한 명이 기병 오백 기를 이끌고 소년 장수의 뒤를 쫓았다.

이때, 이미 수나라 진영 코앞까지 말을 몰아온 온달이 포효하듯 외치며 운철대검을 휘둘렀다.

“태산을 숫돌 삼아 이 운철대검 날을 갈겠노라! 감히 앞을 막지 마라!”

온달은 허황된 외침이 아니라고 증명하는 듯, 파산귀검을 펼쳐 앞을 막는 적들을 일거에 베어 날리고는 그대로 누렁이를 몰아 공손성을 향했다.

이에 공손성이 기겁해 등을 보이며 도망치니, 이연이 크게 소리쳐 명하였다.

“대총관을 지켜라! 온달을 막아라!”

명을 받은 수나라 장수 다섯이 일제히 말을 몰아 온달에게 달려들었다.

도끼와 긴 창이 자신을 향해 들이닥쳐도 온달은 방비대신 파산귀검을 펼쳐 오히려 공세를 더하였다.

공격으로 방어를 겸하는 파산귀검의 원리를 따른 것이다.

이에, 광풍이 검기와 함께 온달을 공격하던 수나라 장수들을 덮치니, 비명과 함께 사람과 말이 나뒹굴었다.

그리고, 온달의 뒤를 따라 거센 파도처럼 밀려든 개마무사들의 쇳소리가 수나라 군을 덮쳤다.

“퇴각하라! 퇴각하라!”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배적이 외치니, 미리 그에게 지시를 받았던 고수들이 퇴각을 알리는 북을 두드렸다.

둥둥둥.

지구력은 떨어져도 단거리에선 그 힘과 속도가 뛰어난 수나라 군의 말들이 고구려 군과 거리를 벌리기 시작하였다.

한참을 수나라 군의 뒤를 쫓으며 운철대검을 휘두르던 온달의 곁으로 강이식이 말을 몰아와 소리쳤다.

“온달 아우! 그만 가세!”

이미 온달의 온몸은 검붉게 변하여 그의 피인지, 적의 피인지 알 수조차 없었다.

“더 쫓아… 다 쓸어버려야… 합니다.”

온달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말하였다.

“아니네, 자네는 아직 몸이 성하지 않으니, 이만 물라나세. 적들은 이미 멀리 갔으니, 더 쫓기도 어렵다네.”

강이식이 부드럽게 다독거리니, 그제야 온달의 눈이 밝아지며 멀어져가는 수나라 군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 어느새 저리 멀리도…….”

아마도 온달은 반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누렁이를 타고 운철대검을 휘두른 듯하였다.

온달과 함께 진영으로 돌아온 강이식은 바로 진영을 거두고 만리장성을 넘고자 명하였다.

“다시 놈들이 뒤를 쫓기 전에 진영을 거두고 이동한다. 헌데… 동이는?”

명을 내리던 강이식이 문득 소년 장수와 온동을 떠올려 물으니, 모두가 오히려 놀라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적들을… 물리치느라… 경황이 없어서…….”

이때, 시력이 좋은 쇼락이 나서며 말하였다.

“온달과 우리가 놈들 진영으로 들이닥치기 전에, 소년 장수가 온동을 안고 도망치지 않았소?”

“허면, 우리 동이가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평강이 당장이로도 울음을 터트릴 듯 상기되어 물었다.

“공주, 너무 심려치 마시오. 내 반드시 동이를 찾을 것이오. 허나, 지금은 일단 군을 물리는 게 우선이구려.”

온달의 다짐에 평강이 그제야 피로 물든 그의 모습에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강도 온동을 찾기 위해 마냥 피해를 감수할 수 없다 판단한 듯했다.

결국, 고구려 군은 임유관에서부터 어양에 이르기까지 만리장성을 따라 수나라 주요 거점을 무력화한 채, 목적을 달성하고 만리장성을 되넘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 군에게 패한 공손성과 이연 역시, 서안으로 회군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전쟁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인 셈이었다.

온달과 강이식의 고구려 군이 만리장성을 넘고 북으로 올라가니, 날씨는 더욱 매서워지고 회색 하늘에선 눈마저 내리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겨울이 왔구나.”

날리는 눈을 손으로 받으며 강이식이 중얼거렸다.

아직 만리장성 남쪽은 가을이었으나, 북방은 성큼 겨울이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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