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겨울 전쟁 (13)
평강의 만류에 온달이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강이식의 막사로 들어서니, 이미 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온달 아우, 벌써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인가? 무리하지 말게나.”
강이식이 일어나 반갑게 맞으니, 온달이 부끄러워 머리를 푹 숙였다.
“송구합니다. 심려를 끼쳐드리고… 저 때문에…….”
“자네 때문에… 뭐가?”
강이식이 오히려 의아해 물으니, 온달이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전날… 작전과 달리… 제가 흥분하여… 경우님도 몸이… 상하시고…….”
“그래, 경우의 몸이 아주 크게 상했지. 자네도 상하고… 참 안 된 일이지. 그러나 전장에서야 몸 상하는 일이 어디 대수로운 일인가? 하여?”
강이식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되 물으니, 온달이 더욱 당황하였다.
“저로 인하여… 저로 인하여… 계획한 바와 다르게…….”
“다르게? 그래… 좀 달라지긴 했지만, 일단 첫 전투는 승리를 거두었고, 적도 자네와 경우 두 사람의 활약에 무척이나 놀랐을 게야. 더구나 이처럼 멀쩡히 서 있는 모습을 보면 더욱 놀랄 게고.”
“하오나… 형님.”
“온달 아우, 자네는 불패장군이라 불리지만, 다양한 전장은 겪어 보지 못했을 게야.”
강이식이 바짝 다가와 온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뜻한 대로 모두 이루어지면, 어느 누가 패하겠는가? 어제는 저들도 뜻한 대로 진행되지 않았을 터라, 지금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일 게야. 무리하지는 말게. 어찌 되었든 자네의 불패장군 신화는 계속 이어 갈 수 있어서 내가 무척이나 안심하였다네. 하하하.”
강이식의 유쾌하면서도 다정한 웃음에 온달은 그저 연거푸 고개 숙여 사죄하고 감읍하였다.
“헌데, 온달 아우…….”
강이식이 온달을 부축하여 자리에 앉히며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온동이… 잡혀 있다지?”
“그렇사옵니다.”
강이식의 물음에, 온달은 아직도 수레에 갇힌 온동을 생각하여 목이 메어왔다.
“고구려의 검신, 온달의 일가가 저리 짐승처럼 갇혀 있어야 쓰나. 반드시 구하여야 할 것인데…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던 차네. 마침 공주님께서 오셨으니, 좋은 계책이 있는지 여쭤보도록 하세.”
그러나, 평강이라 하여 마땅한 계책을 지니고 있을 리 만무하였다.
“제가 아둔하여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사옵니다. 하온데… 대장군.”
“말씀하시지요.”
“우리가 임유관을 넘어 만리장성을 따라 적의 주요 거점을 무력화한 후, 다시 만리장성 밖으로 나와 한왕의 군대와 유격전을 펼치는 계책은… 을지공이 세운 것이 확실하온지요?”
어제 전투 이후, 평강은 이 무모한 계책을 현명한 을지문덕이 세웠을 리 없다 의심하고 있었다.
“확실히, 을지문덕 그 친구가 세운 게책이 맞습니다. 어찌 그러시는지요?”
강이식이 되물으니, 평강이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아녀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공손성과 이연의 군세가 생각보다 강하여… 저들의 공세를 막고 버틸 수는 있을 듯하오나, 쉽사리 물리치고 다시 만리장성을 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여… 잠시 근심하였습니다만…….”
영리한 평강조차 온달의 부상에 근심이 늘어난 듯하였다.
평강이 말꼬리를 흐리자, 강이식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 공주 마마. 소장은 을지문덕 그 친구를 믿사옵니다. 필경, 공손성이 대군을 이끌고 올 것이라 예견했을 것이고, 이에 대한 방비도 따로 마련했을 것이라 생각하옵니다.”
“…….”
“물론, 지금의 저로선 그 방비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사오나, 반드시 을지문덕이라면 뜻한 바대로 흘러가게 만들 것이라 믿습니다.”
강이식의 호쾌한 장담에도 평강의 얼굴엔 근심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강이식은 개의치 않고, 작전 회의를 마저 이어 나갔다.
“당장 온동을 구할 방도는 없으나, 적은 여전히 온동을 앞세워 우릴 자극할 것이고, 전날 좌우 숲에서 막바우와 공별의 공격을 겪었으니, 이곳도 공격할 게야. 허니, 서둘러 막바우와 공별에게 무리하지 말라 전하고, 오늘은 황우 네가 적의 중앙 공세를 막아야겠구나.”
이에, 황우가 명을 받아 답하려는 순간.
온달이 벌떡 일어나, 우렁차게 말하였다.
“적의 중앙 공세는 제가 맡겠습니다. 반드시 적을 물리치고…….”
온달이 말을 끝맺지 못하니, 강이식이 잠시 눈을 감았다.
아마도 온달은 적을 물리치고 돌진하여 온동을 구해오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사로운 감정으로 전장을 혼란에 빠트리고 싶지 않아 말을 잇지 못한 모양이었다.
“형님, 송구합니다. 제가 사사로운 감정으로… 또 일을 그르칠 뻔하였습니다.”
온달이 자리에 앉으며 용서를 구하니, 강이식이 다시 눈을 떴다.
“전장도 사람이 치르고, 전투도 사람이 치르며, 승패는 사람으로 정해지는 법. 온달 아우가 부상만 당하지 않았다면 적진을 누비고 들어가 온동을 구해오라 명했을 것이나… 그리하면, 적은 기세가 꺾여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겠지. 허나… 지금의 온달 아우에겐 무리네.”
차분하면서도 냉정한 판단이었다.
온달은 성급한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워 그저 고개만 숙일 따름이었다.
이때, 온몸을 흰천으로 감싼 경우가 휘청휘청 들어오며 크게 소리쳐 말하였다.
“대장군! 무리라니요! 우리 온달 장군에게 무리스런 일은 그 어떠한 것도 없습니다. 소장과 위장군이 함께 적의 중앙 공격을 막아낸 후, 적진을 돌파하여 온동을 구해오겠나이다. 반드시 적은 놀라 그 기세가 꺾이고 말 것입니다.”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는 경우의 외침에 강이식이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는 큰 소리로 명하였다.
“우랑! 개마무사를 준비시켜라. 나와 위장군 온달이 말갈기병을 이끌고 적의 중앙을 돌파할 터이니, 너는 우리의 후위를 지켜라. 경우! 그대는 이곳에 남아 언제든 우리를 도와 출격할 준비를 하라.”
이렇듯 강이식이 결정을 내리니, 온동을 구할 기회가 생긴 온달과 경우, 평강은 감읍하여 연신 머리를 숙였다.
허나, 전장은 결코 뜻한 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 * *
고구려 진영에서 작전 회의가 열릴 무렵.
수나라 진영에서는 황제 양견이 보낸 서신으로 분위기가 사뭇 엄중하였다.
“황제 폐하께서… 속히 고구려 군을 만리장성 밖으로 내몰고 서안으로 회군하라 명하시었소.”
황제의 서신을 고이 접으며 공손성이 말하였다.
“어찌 폐하께서…….”
이연이 의아해 물으니, 공손성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하였다.
“무엄하게도, 황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였던 금산의 돌궐이…….”
공손성이 분노로 입술을 파르를 떨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공손성이 애써 화를 누르며 다시 말하였다.
“금산의 돌궐이 우리 수나라를 돕겠다고 대군을 일으켜 서안으로 내려온다 하오.”
동과 서로 나뉜 돌궐은 그 세력이 예전 같지 않았으나, 수나라 역시 돌궐에 맞서 변방을 지키던 공손성과 이연이 군을 돌려 고구려 군을 대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일 돌궐이 군을 이끌고 만리장성을 넘어 서안으로 들어올 경우, 자신들의 앞을 막는 군사가 없음을 깨닫고 장안성까지 밀고 들어올 수도 있었다.
“고구려의 간계이옵니다.”
배적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고구려?”
공손성의 물음에 배적이 바로 답하였다.
“그렇사옵니다. 이 전쟁은 고구려의 젊은 왕이 입조하여 황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지 않아 시작되었으나, 실상은… 황제 폐하께서 금산으로 행차하셨을 당시, 고구려 사신을 극진히 대접하던 돌궐 가간의 행태에 황제 폐하께서 노하시어 벌어진 전쟁이옵니다.”
“헌데?”
“고구려는 이미 돌궐과 우호를 다지며, 강적을 오직 우리 수나라 하나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하여, 감히 무엄하게도 고구려왕이 입조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번 돌궐의 행태도 고구려의 이간계로, 우리 수나라를 동과 서에서 압박하려는 것이옵니다.”
수의 황제 양견에게 막대한 금은보화를 하사 받은 돌궐로서는 수를 돕기 위해 대군을 일으킨다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었으나, 이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수나라였다.
사실, 돌궐의 입장에선 수의 황제로부터 막대한 금은보화를 얻고도, 손쉽게 약탈마저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으니, 지금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온 셈이었다.
흉노에서 시작하여 돌궐에 이르기까지.
중원의 국가와 만리장성 너머 이민족 사이에는 숱한 협정과 조약이 이루어졌으나,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게 깨져왔었다.
이에, 약속은 깨기 위해 있는 것이란 말이 생길 정도였다.
“내가 너무 순진하였소.”
공손성이 탄식하니, 이연이 즉시 위로하였다.
“대총관의 잘못이 아니옵니다. 충성을 맹세하고도 재물만 취히고 의를 저버린 저들 탓이지, 결단코 대총관의 잘못이 아니옵니다.”
이에, 배적이 바로 말을 이었다.
“대총관, 지금 누구의 잘못을 탓할 겨를이 없사옵니다. 돌궐은 늑대와도 같은 자들로 쉽사리 만리장성을 넘어 서안으로 들어오고도, 대총관의 기병이 없다면 양떼를 덮치듯 약탈을 강행할 것이옵니다. 장안성이 위태롭사옵니다.”
이에, 공손성이 더욱 답답해 하며 말하였다.
“아…. 나도 알고 있으나, 저들… 고구려 군을 어찌 만리장성 밖으로 내몰고 회군할 수 있단 말이오.”
이연도 생각해 보니, 산을 등지고 수레로 방벽마저 세운 고구려 군이 쉽사리 군을 돌려 만리장성 밖으로 물러날 것 같지도 않았다.
이때, 배적이 급히 지도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렇듯 대치를 하고 있는 상황에선 결코 고구려 군은 만리장성 밖으로 물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물러나고 싶어도 우리가 배후를 공격할 것이 두려워 더욱 방비를 단단히 할 것입니다.”
이에 이연이 되물었다.
“이곳은 저들의 영토도 아닌데, 언제까지 눌러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소?”
“하오나, 실상은 돌궐이 아니어도 우리가 먼저 물러날 수 밖에 없는 처지옵니다.”
“어찌 그렇소?”
“근방 성들은 저들이 모두 무력화한 탓에 우리에게 물자를 지원할 처지가 못 되고, 기병으로만 구성된 우리 군은 보군보다 물자 소비가 심하여 오래 진을 펼칠 수도 없사옵니다. 곧 겨울이기 때문이지요.”
사람도 먹어야 하고 말도 먹어야 하지만, 말이 뜯을 풀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이와 달리, 카사르의 올루스가 함께 움직이는 고구려 군은 말에게 먹일 풀이 풍족히 비축되어 있었다.
“허허, 이런 큰일이로세.”
이연이 당황하여 탄식하였으나, 이연과 배적의 대화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공손성이 중얼거렸다.
“겨울이라… 겨울이라… 돌궐은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니, 빠르게 내려오겠군.”
이에 배적이 빠르게 운을 띄웠다.
“대총관, 소인에게 수가 하나 있사옵니다.”
“무엇이오?”
공손성이 기뻐 재촉하니, 배적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하였다.
“오늘 총공세를 펼치시고, 대총관께서 패하시어 군을 물리소서. 하오면 적은 의심하지 않고 만리장성을 넘을 것입니다.”
“뭐라?”
공손성이 놀라고 기가 막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이와 달리, 융통성 있는 이연은 배적의 계책을 반겼다.
“오! 과연 나의 장량 배적이로세. 훌륭한 계책이오!”
이에 공손성이 벌컥 소리를 질렀다.
“아니, 지금 뭐하자는 소리들이오!”
그러나 이연은 부드러운 미소를 담아 공손성에게 답하였다.
“대총관, 우리 앞에 고구려 군은 그 수가 적고, 우리만 없다면 만리장성을 다시 넘을 것들입니다. 만리장성 밖에는 한왕 전하의 대군이 있으니, 저들은 한왕 전하께 맡기셔도 됩니다. 허나!”
잠시 말을 멈춘 이연이 조금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서안으로 내려올 돌궐은 다릅니다. 장안성이 코앞인데도 대총관의 기병이 맞이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흉악한 늑대로 돌변할 것입니다. 속히 회군하셔야 합니다.”
황제 양견이 애써 도울 필요 없다 명하여도, 기필코 대군을 이끌고 내려와 돕겠다고 하는 돌궐의 의도는 불을 보듯 알 수 있었다.
배적도 이연의 말을 거들었다.
“고구려는 이미 대총관과 우리가 없음을 돌궐에게 알렸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황제 폐하의 명에도 무엄하게 군을 일으킨 것이지요. 다른 방도는 없사옵니다. 대총관 패하소서.”
이에 공손성이 분을 참지 못하여 장탄식을 하였다.
“아… 도대체 이런 간교한 이간계를 고구려의 누가 세웠단 말인가…….”
전장은 강이식과 온달의 고구려 군의 뜻대로 돌아가지도 않았고, 공손성과 이연의 수나라 군의 뜻대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움직이는 이 전장은.
오직, 요동성에 자리한 을지문덕의 뜻대로만 움직일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