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겨울 전쟁 (12)
“동아! 동아! 어서 나오거라!”
경우가 박살난 수레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온동은 대답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경우는 두 대의 화살을 활에 먹여 온달에게 달려드는 수나라 군사들을 말 위에서 떨구고는 온동을 구하기 위해 말을 몰았다.
자신의 주위로도 수나라 군사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었으나, 경우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박살난 수레 앞에 말을 세웠다.
“도, 동아…….”
경우의 눈에 재갈을 문 온동의 모습이 들어왔다.
온달이 수레를 박살냈으나, 온동의 목에 매인 쇠사슬이 아직도 수레 바닥에 박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였다.
‘나는 못 가유. 어서 장군님들이나 가셔유. 어서유.’
입에 재갈을 문 온동이 고개를 저으며 경우를 바라보았다.
온동이 머리를 저을 때마다 목에 매달린 쇠사슬이 철컥철컥 쇳소리를 내어 경우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온달과 경우, 온동의 수레 주위는 점점 더 수나라 군사들로 에워싸여 갔다.
* * *
온달을 구하기 위해 말 위로 오른 강이식이 낮게 중얼거렸다.
“온달 아우님이… 무리하는군.”
이때, 평강이 급히 달려와 강이식의 앞을 막았다.
“대장군, 아직 나서시면 아니 되옵니다.”
곧 수나라 군의 좌우 양익 기병이 고구려 군의 진영으로 들이닥칠 순간이었다.
“허나, 온달 아우님이…….”
강이식은 평강의 단호한 고갯짓에 말을 잇지 못하였다.
“따르지요. 믿겠소. 온달 아우님을…….”
강이식이 혼잣말 하듯 평강에게 말을 건네고는 크게 소리쳐 명하였다.
“방비하라! 놈들이 수레를 넘지 못하도록 막아라!”
이와 동시에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온 수나라 기병들이 방벽처럼 세운 수레로 돌진해 왔다.
긴 창을 앞세우고 크고 힘센 말을 이용해 단번에 수레를 뛰어넘으려는 수나라 기병들을 향해 기 씨 사형제가 이끈 부월수들이 파천진을 펼쳐 앞을 막고, 뒤에선 몽고와 커레이트 부족 여인과 노인들이 화살을 날렸다.
화살이 날아들고 부월수들이 단단히 막고 도끼를 내리치니, 수나라 기병들은 수레 방벽을 쉽게 뛰어 넘을 수 없었다.
“북을 치고, 뿔 나팔을 불어라!”
강이식의 명에 북과 뿔 나팔이 길게 울리자, 또다시 좌우 양옆 숲에서 막바우와 공별이 기병을 이끌고 나와 공격해 왔다.
그리고는 고구려 군의 진영 뒤에서 우랑이 이끈 개마무사들이 빙 돌아 나오며 수레 방벽에 붙은 수나라 기병을 향해 돌진했다.
수에서는 위였으나, 앞이 막히고 뒤와 옆에서 공세가 펼쳐지니 수나라 군도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수레 방벽이 열리며 물러나는 수나라 군의 좌우 양익 군을 향해 카사르와 호타크가 전사들을 몰아 나오며 화살을 날렸다.
달려들면 방벽을 이용해 막고 옆과 뒤에서 공격해 오며, 물러나면 방벽이 열리고 화살을 날리며 추격해 오니, 수나라 군으로선 짧은 거리지만 퇴각조차 쉽지 않았다.
강이식도 이때를 노려 말갈 기병을 이끌고 수레 방벽을 나서며 수나라 군의 진영 중앙으로 돌격했다.
“오래 참았다! 온달 아우를 구하러 간다!”
이에, 기세 오른 고구려 진영에서 함성이 일었다.
* * *
“이 찢어 죽일 놈들이!”
끝없이 몰려드는 수나라 군사들에게 밀려 박살난 수레 곁으로 물러난 온달의 눈에도 짐승처럼 목에 쇠사슬이 매인 온동의 처참한 모습이 들어왔다.
말에서 내린 경우가 급히 온동의 입에서 재갈을 빼내고는 바닥에 박힌 쇠사슬을 뽑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커다란 쇠말뚝이 단단히 박혀 있어 쉽사리 뽑히지 않았다.
“장군!”
힘에 붙인 경우가 온달을 불렀다.
이에 온달이 경우를 돕기 위해 누렁이 위에서 뛰어 내렸으나, 이내 곧 달려드는 수나라 기병들로 인해 앞이 막혔다.
긴 창을 찔러 오는 기병들을 향해 온달이 거대한 운철대검을 일자로 뻗어 내리치니, 말과 함께 사람이 뭉개져 버렸다.
그리고 피가 뿌려진 땅이 파이며 말의 내장과 사람의 살점을 허공에 뿌리니, 달려들던 수나라 기병들이 기겁해 주춤거렸다.
이에 온달이 더욱 기세 올려 운철대검을 가로로 휘둘러 마구 말을 베고 사람을 후려쳤다.
급한 마음에 파산귀검 초식을 펼치지도 못한 채 오직 힘과 운철대검에 의지해 휘둘렀을 뿐이었으나, 운철대검이 휘젓고 지나간 자리는 말이 울부짖고, 사람의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연이 차분히 명을 내렸다.
“달려들지 말고 살을 날려라!”
이에, 이연의 기병들이 앞으로 나오며 온달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일천 기의 기병이 빠르게 기사를 펼치며 쉴 새 없이 화살을 날리니, 당황한 온달이 급히 파산귀검 초식을 펼쳐 검풍을 일으켰다.
땅이 파이고, 쓰러진 말과 사람의 살점이 휘날리며 날아드는 화살을 감싸니, 온달은 겨우 화살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온동의 쇠사슬을 힘겹게 뽑고 있던 경우는 날아드는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악!”
경우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자, 온달의 시선이 옮겨졌다.
이미 화살이 등에 박힌 온동은 쓰러져 있었고, 경우도 어깨와 가슴에 화살이 박혀 휘청대고 있었다.
“경우! 동아!”
온달이 급히 몸을 돌려 경우와 온동을 구하러 달려가는 그 순간.
바람을 가르며 날아든 화살들이 온달의 등과 어깨를 후벼 파며 박혔다.
“윽.”
짧은 신음 한번 내뱉은 온달이 멈추지 않고 달려가 경우를 안고는 온동의 목에 매인 쇠사슬을 잡았다.
“윽…….”
힘주어 쇠말뚝을 뽑으려던 온달의 다리와 팔에 또다시 화살이 박혔다.
온달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오자, 온동이 조그만 머리를 힘없이 들어올렸다.
“먼저… 가셔유. 저는 다음에 구해도 되는구먼유. 먼저… 가셔유. 저는 다음에…….”
온동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또다시 날아든 화살이 온동의 여린 목을 뚫었다.
“컥!”
온동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며 볼을 타고 흐르더니, 맥없이 무너지는 몸뚱이와 함께 바닥에 뿌려졌다.
“도, 동아!”
경우를 안은 채 절규하는 온달의 가슴팍으로 두 대의 화살이 연거푸 박혔다.
온달이 휘청대는 몸을 바로 잡기 위해 쇠사슬을 놓고, 박아 세웠던 운철대검을 쥐었다.
이 순간에도 경우를 안은 왼팔은 결코 풀지 않았다.
“내가… 경솔하고… 경솔하였소.”
의식 잃은 경우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린 온달이 시선을 온동에게로 옮겼다.
온동의 주위는 온통 검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내가 살리지 못하였구나… 구하지 못하였어.”
온달이 중얼거리는 동안에도 쉴 새 없이 날아든 화살들이 그의 어깨와 다리를 후벼 팠다.
화살촉이 뼈를 후비는 고통에 온달의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히이이잉.
그때, 어느새 다가왔는지 누렁이가 길게 울며 온달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누렁이는 마치,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살 수 있다고 애원하는 듯 계속 울며 의식이 희미해지는 온달을 불렀다.
이에, 온달이 온 힘을 쥐어짜 힘겹게 운철대검을 휘둘러 파산귀검을 펼치니, 그제야 날아들던 화살이 잠시 끊어졌다.
이 틈을 노린 온달이 경우를 안은 채 누렁이에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 누렁이가 힘차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식을 잃은 경우의 입에서 신음 소리 대신 온동을 부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도, 동아…….”
기사를 펼치며 온달의 뒤를 쫓던 수나라 기병들은 강이식이 군을 이끌고 수레 방벽을 나오자 바로 물러났다.
강이식은 피투성이가 된 온달과 경우를 급히 호위하며 수레 방벽 안으로 돌아갔고, 수나라 군도 진영을 재정비하기 시작하였다.
* * *
배적이 지도에 수나라 군과 고구려 군의 진영을 그리며 말하였다.
“첫 전투는 우리가 패한 게 맞습니다만, 고구려 최강의 무력인 온달을 제압했으니, 나름 성과는 있었습니다.”
이에 공손성이 팔짱을 낀 채 배적이 그린 양 진영을 응시하며 말하였다.
“아직도 양옆 숲에 고구려 놈들이 숨어 있을 듯한데… 이놈들이 우리에게 큰 타격을 입히진 못하겠지만 성가실 수는 있을 듯하오. 내 생각이 짧았소. 용서하시오.”
이미 이연이 우려를 표했던 일이었기에, 공손성은 정중히 용서를 구했다.
“아니옵니다. 대총관께서 말씀하시듯 매복 따위에 타격은 없었습니다. 수레 방벽이 예상보다 단단하고… 놈들의 저항이 거센 탓이지 결코 매복 따위에 피해는 없었습니다. 대총관께서는 개의치 마시옵고 소신대로 작전을 펼치소서.”
이연이 오히려 위로하니, 내심 부끄러워지는 공손성이었다.
“오늘은 일단 군을 재정비한 후, 내일 다시 몰아붙이도록 합시다. 내일은 공격에 앞서 양옆 숲부터 정리하고 고구려 진영을 빙 둘러 에워싼 후 섬멸전을 펼쳐야겠소이다.”
공손성이 지도를 가리키며 말하니, 이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총관의 말씀이 백 번 지당합니다. 헌데… 그 아이의 상태는 어떠한지요?”
이연의 물음에 공손성이 손을 들어 부장을 불렀다.
“살았느냐?”
“목에 박힌 화살을 빼고 지혈은 했습니다만… 살지 죽을지는 아직 모르옵니다.”
부장의 대답에 공손성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잠시 뒤 입을 열었다.
“더 크고 단단한 수레를 만들고… 그 안에 집어넣도록 하라.”
“하, 하오나… 아직 살지 죽을지 알 수가 없사온데…….”
당황한 부장에게 공손성이 차갑게 명하였다.
“죽든 살든 상관없다. 더 치료할 필요도 없다.”
공손성과 부장의 대화를 듣던 이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배적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 * *
온달은 십여 개의 화살이 박힌 채 간신히 귀환할 수 있었다.
몸에 박힌 화살을 뽑는 데만도 세 식경이나 걸렸지만, 온달은 내내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앉아서 화살을 뽑았다.
화살촉이 단단히 뼈에 박혀 뽑히지 않을 땐, 살을 가르고 뼈를 깎기도 했지만, 온달은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에서 화살을 뽑는 광경을 지켜만 보았다.
화살을 다 뽑은 뒤에야, 온달이 겨우 긴 숨음 내쉬며 평강에게 물었다.
“경우는……?”
“피를 많이 흘렸지만, 살 수 있을 것이옵니다.”
평강의 대답에 온달이 안심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 동이를 보셨습니까? 동이 때문에 적진 속으로 뛰어드신 것이옵니까?”
평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온달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 탓이오. 동이도 구하지 못하였고, 경우도 죽을 뻔하였소. 더불어 나로 인해 패할 뻔하였소. 모두가 내 탓이오.”
온달이 크게 자신을 책망하였다.
“아닙니다. 좌우 양쪽에서 공격해 오던 적은 물리쳤고, 장군께선 중앙 적진을 휘저으셨으니, 적들의 간담도 서늘해졌을 것이옵니다. 우리는 결코 패하지 않았을 뿐더러 나름 성과 있는 승리였으니, 자책하지 마옵소서.”
평강의 위로에도 온달의 얼굴엔 그늘이 걷히지 않았다.
이에 평강이 온달의 커다란 손을 잡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동이를 위하여 반드시 복수를 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장군께서 기운을 차리셔야 하옵니다. 다른 이에게 동이의 복수를 대신 맡기시지 마옵소서. 동이는 우리의 일가이니, 우리가… 장군님이 하셔야 하옵니다.”
평강의 말에 그제야 온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의 말대로… 동이의 복수는 내가 하겠소.”
* * *
날이 밝자, 수나라 진영 중앙에 전날보다 더욱 크고 단단한 수레가 자리했다.
그리고 이 수레 주위로 전날보다 더욱 강화된 병력이 배치되었으며, 수레 안에는 조그만 아이가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시력이 좋은 쇼락이 수레 속 아이를 알아보고는 즉시 온달에게 달려가 보고했다.
“온동이… 다시 나왔소.”
“다시? 살아 있단 말이오?”
온달이 반갑고도 놀라 물으니, 쇼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모르오. 움직임이 없소.”
이에, 온달이 급히 밖으로 나가 수레 방벽 위에 서서 바라보니, 쇼락의 말대로 커다란 수레가 수나라 진영 중앙에 자리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피투성이의 아이가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누워 있었는데, 온동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아직 상처가 낫지 않은 자신을 염려해 뒤따라 나온 평강에게 온달이 묵직하게 말하였다.
“적이 나를 분노케 하여 유인한다 해도… 내 저 수레를 반드시 끌고와야겠구려.”
평강은 자신이 말린다고 들을 온달이 아니기에,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가시더라도… 군령은 지엄한 법. 대장군께 보고는 하시고 가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