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겨울 전쟁 (11)
드넓은 광야에서 돌궐을 상대하듯, 공손성은 일거에 고구려 진영을 휘몰아치고자 기병을 넓게 펼친 채 진군했다.
거침없이 진군하는 수나라 군 중앙 선두엔 한 마리 소가 끄는 수레가 자리해 유독 시선을 끌었다.
“고구려 놈들이 수레로 방비를 하였군.”
공손성이 산을 등지고 진을 펼친 고구려 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수나라 군에 맞서 넓은 들판에 수레로 방벽을 세운 고구려 군의 좌우는 나무가 우거진 숲이었다.
또한 뒤는 길게 늘어선 산맥이었으니, 삼면이 막혀 무척 답답한 형국이었다.
수에서 밀린 고구려 군이 지레 겁먹고 군을 물리면 배후를 칠 계획이었던 공손성은 고구려 군이 오히려 방비를 단단히 하고 있어 무척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이에, 이연이 불길한 낌새를 느껴 말하였다.
“저 숲이 불길합니다.”
매복을 우려한 이연의 말에 공손성이 히죽 웃었다.
“군사를 쪼개 매복을 한들… 우리에게 타격을 줄 순 없소.”
돌궐과 숱한 전투를 벌이면서 온갖 매복과 협공을 오직 기병 돌파로 무력화시켰던 공손성이었기에 자신감이 넘쳤다.
이에, 이연이 부드럽게 조언하였다.
“총관, 어쨌든 저 고구려 놈들이 일전을 벌일 모양입니다. 무리해 공격하지 마시고, 천천히 몰아붙여 만리장성 밖으로 내쫓으시지요.”
그러나 공손성은 이 말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나도 그럴 생각이었으나, 저것들이 저리 작정하고 자리를 잡으니, 한판 벌려야겠구려.”
이연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답한 공손성이 손을 들어 부장을 불렀다.
“수레를 전진시키고, 좌우 양익에서 놈들을 몰아칠 채비를 하게.”
부장이 명을 받고 물러나자, 수나라 군의 진군이 일시에 모두 멈추고는 이내 곧 소가 끄는 수레가 고구려 진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여 기의 기병이 수레의 뒤를 따르며 고구려 군이 수레를 탈취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지켰다.
그리고 언제든 고구려 진영을 향해 달려들 듯 수나라 군의 좌우 양익에 긴장감이 돌았다.
덜컹덜컹.
소가 끄는 수레가 점점 더 고구려 군과 가까워지자, 공손성이 손을 들어 수레를 멈추도록 명하였다.
고구려 군의 화살이 닿을 거리에 수레가 멈추니, 공손성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수레에 살을 날릴 것인가? 수상한 수레인데, 살펴보러 나올 것인가?”
공손성의 이런 행동이 못마땅한 이연이 살짝 고개 돌려 눈살을 찌푸렸다.
“악취미로군.”
이연이 낮게 중얼거리니, 곁을 지키던 배적이 속삭였다.
“듣겠습니다.”
“들으라지.”
이연과 배적의 대화를 들었는지, 공손성이 피식 웃었다.
“십오만의 기병을 상대로 고구려의 대장군과 위장군이 어떤 계책을 내놓을지 궁금하군.”
혼잣말을 괜히 크게 중얼거린 공손성이 이연을 힐끔 쳐다보고는 말을 몰아 수레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아니, 저자가… 대체?”
갑작스런 공손성의 행동에 이연이 놀라 중얼거렸다.
빠르게 내달린 말이 거친 숨을 내쉬며 수레 앞에 멈추자, 공손성이 긴 창을 들어 고구려 진영을 가리키며 외쳤다.
“고구려의 위장군 온달은 듣거라!”
화살이 닿을 거리에 선 공손성이 두려움 없이 외치니, 수레로 방벽을 세운 고구려 진영이 술렁였다.
“누구신가? 누가 나를 찾으시는가?”
기골이 장대한 장수가 누런 말에 올라 고구려 진영 앞으로 나오며 공손성에 맞서 소리쳤다.
장수는 등에 시커먼 철궁을 메고, 장정 키를 훌쩍 넘길 거대한 대검을 한손으로 들어 어깨에 걸친 채 공손성의 대답을 기다렸다.
고구려의 위장군, 검신 온달이었다.
공손성은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으나, 한눈에 그가 온달임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대가 온달인가? 나는 요격대총관 공손성이라 하네. 위명이 자자한 그대를 이렇듯 전장에서 만나니 무척이나 감개무량하네.”
공손성의 자신감 넘치는 답변을 뒤 따라 나온 경우가 온달에게 통역해 주었다.
이에, 온달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공손성?”
온동이 증오를 담아 언급했던 바로 그 이름이었다.
온달의 시선이 경계로 바뀌며 공손성을 위아래로 빠르게 훑었다.
‘온동의 원수다. 그 아이가 향후 살육을 펼칠 수도 있으니, 전장에서 만난 김에 내가 처리하자.’
온달의 커다란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며 살기를 내뿜자, 공손성이 의아해 바로 물었다.
‘나를 아는가? 나는 그대를 오늘 처음 보는데, 어찌 그리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것인가?“
공손성의 이 물음을 경우가 통역하기도 전에, 온달이 누렁이를 몰아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다.
천천히 거리를 좁히다가 일거에 달려들어 운철대검으로 공손성을 말과 함께 으깨 놓을 모양이었다.
이에 불길함을 느낀 공손성이 급히 창을 들어 뒤에 자리한 수레를 가리켰다.
“온달! 여기 너의 일가가 있다! 보이는가? 이 수레 속 아이가 보이는가?”
공손성의 외침에 경우가 화들짝 놀라 급히 온달을 향해 말을 몰며 소리쳤다.
“장군! 멈추소서! 장군!”
이에 온달이 누렁이를 멈추니, 경우가 바짝 붙어 온달에게 속삭였다.
“저 수레… 저 수레를 보소서.”
시력이 좋은 경우는 이미 수레 속 온동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경우가 가리킨 수레로 시선을 옮긴 온달의 두 눈이 경악해 일그러졌다.
“온동… 도, 동아! 동아!”
온달이 수레에 갇힌 온동을 알아보고 소리치니, 공손성이 껄껄 웃으며 말을 돌려 수레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긴 창을 수레 안으로 밀어 넣어 온동의 작은 몸을 꾹꾹 찌르며 비아냥거렸다.
“온달! 이 아이를 알아보는 게냐? 너의 일가인 이 아이가… 너의 아들이냐? 조카냐? 아니면 너의 할아버지인 게냐? 하하하.”
창날에 찔리는 온동의 몸이 점차 붉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어린 온동은 고개를 푹 숙여 고통을 참으며, 온달의 시선을 피하였다.
‘나 때문에 장군님이 흥분하시면 안 되는 겨. 이 악인 때문에 장군님께 해를 끼칠 수는 없는 겨. 그럴 바엔 차라리 죽어야 혀.’
혀를 깨물어 자결하지 못하게 재갈을 물린 온동의 눈빛이 매섭게 빛나더니, 공손성이 조롱하듯 찌르는 창날로 목을 획 들이밀었다.
“허… 이놈 봐라?”
공손성이 놀라 급히 창을 수레 밖으로 빼내고는 혀를 찼다.
이 광경에 온달의 눈이 분노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죽일 놈이… 이놈이…….”
쉽게 분노하지도, 쉽게 살생을 펼치지도 않던 온달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공손성을 향해 달려들 듯 운철대검을 단단히 쥐었다.
그러나, 공손성의 창날과 온동의 거리가 너무도 가까워 선뜻 내달리지 못하였다.
이에 공손성이 더욱 기세 올라 온달을 향해 조롱 섞인 말을 퍼부었다.
“온달! 이 아이도 구하고, 너도 구하고, 너의 군사들도 구할 방도가 있다. 들어보겠느냐? 하하하.”
공손성의 말을 경우가 전하니, 온달이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
“무엇이라? 건방진… 놈.”
경우가 온달을 대신해 공손성을 향해 소리쳤다.
“위장군께서 그대에게 잠시 시간을 내어주니, 할 말 있으면 속히 하거라!”
이에 공손성이 껄껄 웃으며 답하였다.
“투항하거라. 허면, 모든 일이 순리대로 잘 풀릴 것이다.”
이 말을 경우가 온달에게 통역하였다.
“장군, 저놈이 투항하라 까불고 있사옵니다.”
“뭐라?”
격분한 온달이 당장이라도 말을 몰아 나갈 듯하니, 경우가 바짝 붙어 속삭였다.
“곧 좌우 양익에서 막바우와 공별이 놈들을 급습할 것이옵니다. 일단 뒤로 물러나소서.”
온동의 목숨도 구해야 하지만, 전장의 승패가 더욱 중요해 경우가 말하니, 온달이 고개를 저었다.
“동이를 일가로 받아들인 후, 나는 줄곧 저 아이에게 도움만 받았소. 나는 고작 온 씨 성만 주었을 뿐인데… 저 아이는 숱한 전장에서 도움을 주었소.”
“…….”
“저 아이를 이대로 두고는 못 물러나오. 막바우와 공별이 공격을 가할 때, 나도 중앙으로 돌진할 것이오. 그대는 뒤로 물러나시오.”
온달의 단호한 태도에 경우도 한숨을 내쉬고는 공손성과의 거리를 재었다.
‘화살로 잡을 수 있는 거리다. 그러나… 저놈의 뒤엔 십오만 기병이 있으니… 살을 날려 저놈을 잡은들 목숨을 보전하기 어렵겠구나.’
경우가 망설이던 그 순간.
공손성이 손을 들어 올리며 크게 소리쳤다.
“온달! 어찌 내 제안에 답이 없는 게냐? 정녕 이곳에서 이 아이와 함께 뼈를 묻을 셈인 게냐?”
경우는 공손성이 치켜 올린 손이 내려가는 즉시, 수나라 군의 공세가 시작될 것이라 예측하였다.
막바우와 공별이 기습을 펼칠 겨를조차 없었다.
“장군, 일단 뒤로 물러나소서.”
그러나 온달은 고개를 저으며 공손성이 손을 내리는 즉시 말을 몰아 달려들 준비를 하였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공손성이 피식 웃었다.
“내가 경황이 없어서, 그럼 이만 대화를 끝내도록 하지.”
마침내 공손성의 손이 내려가고, 수나라 진영 좌우 양익에서 함성이 일었다.
그리고 말발굽 소리를 요란히 울리며 고구려 군의 진영을 향해 좌우에서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맞서 온달도 공손성을 향해 누렁이를 몰아 질주하며 소리쳤다.
“공손성!”
이에, 수나라 진영 중앙에서 온달을 향해 화살을 날리니, 하늘을 가린 화살비가 온달에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장군!”
경우가 온달과 말 머리를 나란히 하며 외치고는 화살을 들어 공손성을 노렸다.
그러나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화살비로 인해, 공손성을 향해 활시위를 당길 여유는 없었다.
“장군 피하소서!”
화살비 속에서 경우의 외침이 울렸다.
이와 동시에, 좌우 양옆 숲에서 요란한 함성이 일며 고구려 군이 말을 몰아 나왔다.
이들은 곧바로 수나라 군의 좌우 양익 기병들의 배후를 노리며 기사를 펼쳤다.
비록 그 수가 많지 않았지만 마상에서 화살을 날리는 재주가 무척이나 빠르고 뛰어나 짧은 순간에 꽤 큰 타격을 주었다.
고구려 군을 향해 돌전하던 수나라 군이 혼란에 빠지자, 공손성이 급히 소리쳤다.
“깃발을 들어라! 북을 올려 독려하라!”
이에 수나라 진영 좌우 양익이 정비를 하며 급습한 고구려 군을 몰아붙였다.
수에서 밀린 고구려 군은 길게 맞서지 않고 바로 말을 돌려 숲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수나라 군은 뒤를 쫓지 않고 고구려 진영을 향해 다시 좌우에서 협공을 강행했다.
그리고, 진영 중앙으로 말을 몰아 돌아가던 공손성이 수레에 갇힌 온동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잘 봐두거라. 화살비에 고슴도치가 된 온달과… 말발굽에 무너지는 고구려 진영을 말이다.”
공손성의 조롱 섞인 말에도 온동은 요지부동으로 정면만 응시할 뿐이었다.
이에, 공손성이 의아해 온동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공손성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어찌?”
허공에 파산귀검 초식을 펼쳐 화살비를 날려버린 온달이 무서운 기세로 누렁이를 몰아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총관을 구하라! 살을 날려라!”
공손성이 위급해지자 이연이 서둘러 명을 내렸다.
이에 수나라 군 진영 중앙이 소란스러워지며 공손성을 구하기 위해 군사들이 말을 몰아왔다.
그러나, 온달의 거침없는 돌진이 더욱 빨랐다.
어느새 공손성의 바로 뒤까지 내달려온 온달이 운철대검을 휘둘러 온동이 갇힌 수레를 박살내고는 크게 소리쳤다.
“동아! 어서 나오거라! 경우! 동이를 데리고 어서 가시오! 나는 저놈을 잡겠소!”
온달은 수레만 박살내면 영특한 온동이 쉽게 도망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적이 너무 많습니다. 장군! 이만 물러나야 합니다. 동이는 제가 구할 테니 어서 물러나소서!”
뒤를 바짝 쫓아온 경우가 온달에게 달려드는 수나라 군사들을 향해 화살을 날리며 외쳤다.
그러나 경우의 외침에도 분노한 온달은 결코 멈추지 않고 공손성의 뒤를 쫓았다.
“잡을 수 있소! 잡아야 하오! 잡아야 쉽게 끝낼 수 있소!”
손에 잡힐 듯한 공손성의 등이 온달을 계속 자극했다.
수레 주위를 지키던 수나라 군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온달의 앞을 막고 경우에게 달려드니, 공손성은 간신히 온달과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연이 이끈 기병이 공손성을 에워싸 호위하니, 공손성이 기세 올라 소리쳤다.
“저 정신 나간 고구려 놈을 당장 잡아오너라!”
이에 온달과 경우를 향해 기병 일천 기가 화살을 날리며 달려들었다.